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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스님 금강경 인터넷 강의
妙行無住分 第四 (묘행무주분 제사)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
菩薩(보살)이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行於布施(행어보시)니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須菩提(수보리)야 !
菩薩(보살)이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야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東方虛空(동방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
須菩提(수보리)야 !
南西北方(남서북방)과 四維上下虛空(사유상하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
須菩提(수보리)야 !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하는 福德(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반갑습니다.
오늘 5월 24일 수요일 염화실 인터넷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불교의 교재, 또 이 우리들의 교재는 불교인들의 교과서로
지정되어 있고 이 교과서는 그 많은 경전중에서 교과서라고 지정할 만한 그런 의미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종헌(宗憲) 종법(宗法)으로 지정을 한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물론 우리가 수행을 하고 인생을
깨달아 가는데에는 팔만 사천 방편문(方便門)이 있습니다마는
또 특히 종헌종법으로 이렇게 교과서라고 지정을 했을 때는 그만큼
중요한 경전이라고 하는 것 많은 방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경전이라고 하는 것, 이러한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시고 좀 독송(讀誦)을 좀 많이 하시고 또 사경(寫經)을 좀 많이 하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1주일에 4번 강의를 들으니까 이것 뭐 그 하루 배운 것, 한분 또 두분 또 반분 하루배운 그 한 단락을 가지고 사경을 하기로 해도 최소한도 열번 이상은 하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루에 그렇게 못하더라도 3일이 또 여유가 있고 하니까요.
아무래도 공부하는 날 사경을 하시기가 쉽지요.
그래서 사경을 하시고 또 읽고요 그리고 새기고 또 금강경은 해석된 책이 워낙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손쉽게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석된 책들을 구입해서 참고로 뜻을 읽고 또 그래서 이해를 하고 그 설명이 설사 좀 부족하더라도 또 참고 하실 만 하니까 또 경전이 갖고 있는 깊고 오묘한 뜻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또 우리가 수행을 해 가면서 온갖 그런 그 인생을 겪는 그런 과정에서 또 문득 금강경의 한 구절이 깨달아지기도 하고 부처님의 법문이 깨달아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에요.
금강경은 좋다고 하니까 덮어놓고 그냥 뜻도 모르고 외우는 경우도
있고 뜻도 모르고 또 경전을 쓰고하는 그런 예들이 있는데 제발 좀 뜻을 알고 외울 필요가 있습니다.
뜻을 알고 외워야지 부처님이 뭐 뜻 모를 소리를 했겠습니까?
부처님은 뜻모를 소리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이게 우리는 한문으로 되어서 약간 우리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해석을 해놓고 또 저도 이렇게 강의를 하는 이유가 뜻을 우리가 알자고 하는 것이지 뜻 모르고 덮어놓고 읽기만
하고 외우기만 하면 그것도 물론 노는 유에 염불한다고 안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마는 그렇지만 이렇게 밝은 세상에 그렇게 수행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의식이 못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초롱 초롱하는 의식과 많은 지식과 보고 듣고 한 그런 경험, 이런 것들은 또 좀 많습니까?
그런 좋은 그릇을 가지고 부처님의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을 뜻을 이해하면서 잘 담는다면 그 이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제발 좀 뜻도 모르고 외우고 뜻도 모르고 숫자만 채우는 그런 그 독경이나 사경은 좀 차원을 달리해서 이제는 뜻을 알고 읽고 뜻을 알고 사경하고 이렇게 함으로 해서 그것이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공덕도 되고 지혜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인생에 대해서 또는
세상에 대해서 지혜의 눈이 열리리라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독경과 사경을 좀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妙行無住分
묘행무주분 이라
이랬어요.
부처님께 수보리가 두가지를 물었지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주(住) 어떻게 머물러야하는가? 하는 문제
그다음에 어떻게 항복받는가 하는 문제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물었는데 그 다음에 어제 대승정종분에는 항복받는 그런 방법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이제 상기해 본다면 그 항복을 어떻게 받는가?
우리 마음을 항복을 어떻게 받는가?
應如是降伏其心(응여시항복기심)
대개 우리들 마음은 현상을 잘못알고 있기 때문에 '상을 낸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내용을 알고 보면 상을 낼게 아무것도 없다.
또 이 세상에 공덕을 말할 때 어떤 공덕이 가장 크겠는가?
중생 제도한 공덕이 제일 크다 이거지요.
부처님이 그 일을 하셨는데 부처님이 그런 이 세상에서 제일 공덕이 많은 위대한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공덕이 없다 그랬어요.
또 중생을 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제도 한 바가 없다고 이랬습니다.
實無衆生得滅度者(실무중생득멸도자)
왜냐?
사실은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사람 사람이 그대로 화내면 화내는 대로 울고 웃고 온갖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 상태 그대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 이 사실을 환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신 일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상낼 까닭이 없는거죠. 내용을 알고 보면 상낼 까닭이 없는 거죠. 그래서 상을 안내는 거죠.
그러니 무상(無相)이 위종(爲宗)이죠.
그래서 그 상내려고 하는 마음을 그렇게 항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이고 참아야지, 참아야지, 참아야지... 그렇게 억누르는 것도 물론 우리 중생들로서의 한계이겠지요.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아이구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는 그런 식으로
그렇게 참는게 아니고 상내지 말아야지, 상내지 말아야지 이렇게 해서 상내지 않는 것, 물론 참 고마운 일이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경전의 이치에 맞고 좀 더 차원높은 그런 인욕과 차원높은 '상냄이 없는' 그런 '무상(無相)'을 실천하려면 '상낼것이 없다'는 이치를 알아버려야 되어요.
상낼 것이 없다는 이치.
부처님은 그렇게
'상낼 이치를 앎으로 해서 상내고 싶은 마음을 항복을 받아라.'
이것이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항복을 받았고
오늘은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은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묘행(妙行)! 미묘할 묘(妙)자, 아름다울 묘(妙)자, 행할 행(行)자.
우리의 행동입니다.
아름다운 행동은 머물지 않는다.
참 내가 이걸 이제 이 제목을 이렇게 번역을 해놓고 보니까 내가 번역을 한 지가 상당히 여러 해 되었는데 이렇게 멋진 번역이 잘 눈에 잘 안띄어요.
묘행무주 (妙行無住)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이런 해석을 들었을 때 아마 마음에 많이 떠오르는 게 있을 것입니다.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잊을 때 잊을 줄 알고 체념할 때 체념할 줄 알고 손 뗄 때 손 뗄 줄 아는 것. 이거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뭡니까?
무주(無住)죠.
잊을 때 잊을 줄 알고 체념할 때 체념할 줄 알고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그런 것을 잘 감지해서 일어설 때 일어설 줄 아는 것, 이게 아름다운 행위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런 어떤 지혜가 없으면 참 추해보이고 뭐 끈적끈적하고 서로 부담되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무슨 정의 관계도 그렇고 또 무슨 어떤 친구 사이 관계도 그렇고 어떤 모든 관계들이 다 그렇습니다. 주고 받는 관계도 그렇고.
그래서 묘행무주라고 하는 이 말은 참 근사한 말이에요.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휙휙 그냥 떠나버린다는 것이 꼭 장한 일이 아니라 떠날 때 떠날 줄 아는 것.
앉아있을 때 앉아있을 줄 아는 것.
이게 이제 말하자면 묘행(妙行) - 아름다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야 !
또 수보리야 !
앞에서 수보리를 불러서 우리 마음 항복받는 것을 이야기를 했고
여기서는 무주에 대한 '어떻게 머물겠습니까?' 라고 하는 그런 수보리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는 부처님의 입장이니까 그래서
菩薩(보살)이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行於布施(행어보시)니
그랬습니다.
菩薩(보살)이 법에 대해서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 그랬어요.
법이라고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일, 모든 것, 일체 상황에 대해서
- 이런 뜻이 법입니다.
그 법은 여기서 뒤에서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 육진(六塵) 이에요.
於法(어법)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하는 이 법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인 모든 상황들 , 모든 일, 모든 사건, 모든 경계, 이걸 통틀어서 '법'이라고 하고
뒤에서 또 육경(六境)으로서의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할때 그 '법'은 또 조금 다릅니다. 사실 이런 것은 기초교리에서 공부하는 것이고 종지를 잘 알면 한문을 좀 몰라도 괜찮고 교리 좀 몰라도 괜찮고 그래요.
근본취지만 잘 알면 나머지 지엽적인 것은 몰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 또 풀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럴 때 한번 씩 우리가 정확하게 한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할때 이 법은 색(色)은 말할 것도 없이 물질이고 육신이고 내 육신을 위시한 현상의 모든 물질이고 성(聲)은 소리이고 향(香)은 향기고 미(味)는 혀의 대상인 맛이고 촉(觸)은 우리 몸의 대상인 촉감이고 감촉하는 것이고 법(法)은 그러면 뭐냐?
이 속에,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안들어가는 것 없지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와 닿는 향기, 혀가 느끼는 맛, 또 몸이 느끼는 감촉.
그런데 어떻습니까?
봄이 오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세월이 바뀌고
또 바람이 불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해당이 안되어요 사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하는 이것은 색도 아니고 성도 아니고 향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촉도 아닙니다. 이럴 때.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경계가 있거든요. 그걸 법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 것들을.
그러나 무엇이 감지하는고 하니 예를 들어서 색(色)은 눈이 보지요? 성(聲)은 귀가 듣지요?
향(香)은 코가 냄새 맡는 것이고 맛(味)은 혀가 보는 것이고 촉(觸)은 몸이 감촉을 느끼는 것인데 법(法)은 우리 의식만이 예를 들어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바람이 분다, 눈이 온다, 비가 온다,
세월이 흘러간다 하는 이런 사실들은 우리 의식(意識)만이 그걸 감지할 수가 있는거에요.
의식(意識)만이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意)'의 상대 육근(六根)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할 때의 제 6근 '의(意)'근이 법을 감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상대가 되는 거지요.그래서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거기서 두 관계속에서, 경(境)과 근(根) 두 관계속에서 여섯가지 의식이 있게 되는거지요.
그래서 세상을 형성하고 우리의 삶이 거기서 굴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육근(六根)이 있고 또 육근(六根)의 대상인 육진(六塵)-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 있고 또 그 관계속에서 그것을 낱낱이 따로 따로 의식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알고 인식할 줄 아는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있다, 이렇게 해서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 또는 육진(六塵) 이렇게 하죠.
그래서 18界라 이렇게 하는데 이런 것들은 반야심경이나 또 기초교리 같은데에서도 많이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菩薩(보살)이 於法(어법)에 할때의 법은 그 육경(六境)을 다 아우르는 소리다.-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다 아우르는 그런 의미이다. 어쨌거나 그런 모든 것에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行於布施(행어보시)니
보시를 행해야된다
그랬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종교는 선행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그런데 어떻게 선행하는가? 그것은 말하자면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선행하는 것.이게 불교의 장점이에요.
뭐 우리가 수행하고 깨닫고 도를 이루고 기도를 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돈벌이 하는 거에요.
돈을 벌어놓고 쓰는 거죠. 말하자면 수행을 하고 내가 이치를 알고 깨달음이 있으면 그 다음에 남에게 그것을 가지고 선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절하고 기도하고 내가 혼자 갖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려면 하지 말라고 했어요. 자기만 가질려고, 자기가 예를 들어서 1원어치 했으면 1원 어치를 그대로 남에게 선행을 하고 10원 어치했으면 10원 어치 그대로 선행을 하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교가 마음에 들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불교는 좌우간 그렇습니다.
그게 종교의 목적인데 그 중에서도 불교가 가장 참 뛰어나다고 하다는 것이 제일 가치있는 것, 진리로써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보시를 하라 선행을 하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行於布施(행어보시)라고 했는데 물론 다른 보시도 이 속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되 무소주(無所住), 주(住)하는 바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애착함이 없이, 집착함이 없이, 상내지 않고 이게 무소주(無所住)거든요. 주(住)하는 바없는 건데 그게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요.
보시는 뭡니까?
실천이에요.
지혜의 무소주(無所住)는 알았는데, 지혜로운 주(住)할 바 없는 도리는 알았는데 보시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또 참, 새의 한쪽 날개만 갖추는 격이 되어버리고 그런데 무소주(無所住)도 없이,
머무는 바 없이 상을 잔뜩 내면서 보시만 잘한다 이거죠.
다시 말해서 보시는 잘하는데 보시하는 방법을 모른다,
머무는 바 없는 그런 보시는 할 줄 모른다.
이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참 이걸 받아들여야할 지, 받아들이지 말아야할 지.
그래서 지(智)와 행(行)을 구비(具備)해라,
그래서 우리 스님들이 공부하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도
行智具備(행지구비)는 如車二輪(여거이륜)이라
행동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수레가 바퀴 하나 이면 못 굴러가지요.
이 금강경에 이러한 가르침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법으로 교과서로 삼은 것입니다. 교과서로 지정한 거에요. 온 국민의 교과서가 되어야 되는데 어쨌든 우리 불교의 교과서로 이렇게 지정한 것만도 다행이고 그러니 모든 불자들은 이 금강경 하나만은 휑하게 알아야됩니다.
설사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뜻은 환히 이것 내용 얼마안되거든요,
사실. 기껏해야 글자 5천 몇 자 밖에 안되고 글 내용이 뭐 얼마됩니까? 아주 짧은 내용이거든요.
이거 하나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만사 다 제쳐놓고 이것부터 사실 꿰뚫고 있어야되어요.
그래서 무소주(無所住)는 지혜를 뜻하는 것이고 보시(布施)는 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행과 지혜가 제대로 구비되어야된다.
부처님을 표현할 때 문수 보현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좌우보처가 문수, 보현입니다.
문수는 뭡니까? 지혜지요.
보현은 행입니다. 지혜와 행이 구비되어야 부처가 출현한다 이겁니다.
부처가 부처로써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지혜와 실천이 구비되어야 된다. 그래서 문수, 보현을 좌우보처로 내세워 놓고 가장 부처다운 부처님 비로자나불을 화엄경에서 등장시켜서 가르치고 있지요. 그래서 금상첨화(錦上添花) 이런 말이 있지요.
비단은 뭐겠습니까? 비단은 지혜에요. 그런데 비단에 꽃이 수놓아 지지 않으면 비단으로서 좀 맛이 없지요. 그게 행(行)입니다. 아름다운 비단에 꽃을 수놓았다.
그래서 지혜가 있고 거기서 아름다운 보시의 실천, 선행이 따른다. 그 선행을 따르는데 말하자면
무소주(無所住) - 지혜로운 보시를 행한다!
꽃을 수놓는데 나일론 천이나 광목 천이나 이런 싸구려 천에다가 아주 멋진 꽃을 수놓으면 그게 격에 맞겠습니까? 안 맞지요. 금상첨화(錦上添花)라야 그게 맞는거죠.
비단위에다 꽃을 수놓아야 그게 아름답고 제 값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과 지혜는 지혜와 그 실천은 이렇게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이다.
무소주(無所住)와 보시(布施) !
이것은 머무는 바 없는 그런 지혜로운 바탕위에 보시를 행한다.
그렇지요. 지혜가 바탕이죠. 그래서 행을 보시라 했습니다.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없는 마음자세가 갖춰진 뒤에 보시를 행하라.
이것 참 우리가 의미깊게 생각해야됩니다. 이건 뭐 천번 만번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그래서 주(住)한 바 없이 보시를 행했을 때 뭐라고? 묘행(妙行)이다.
'무주(無住)는 묘행(妙行)이다.' 보시를 했을 때에도 아름답고 다른 사람 관계에서도 아름답고 무소주(無所住)가 되었을 때 말이죠,
지혜로웠을 때, 모든 관계가 지혜로울 때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묘행무주(妙行無住)라고 참 멋진 제목을 붙여서 넉자로써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보살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그 다음은 설명이죠.
所謂不住色布施(소위부주색보시)하며
어떤 사물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부주성향미촉법보시)니라
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할 지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하야
보살이 응당히 이와같이 보시해서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히, 꼭 '응(應)'자가 참 많이 나오지요?
부처님은 정말 가슴속에 맺히고 맺힌, 이건 꼭 너희들에게 심어주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의 발로로써 '응(應)'자가 자주 나옵니다.
응당히, 꼭, 틀림없이...
응당히 이와같이 보시해서
不住於相(부주어상)이니
상에 머물지 말지니
何以故(하이고)오
왜 그러냐?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그 복덕을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뭐 그 수확이 아주 대단하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가 중생이다 보니까 - 우리가 중생상을 낼 땐 꼭 변명할 때 중생상을 낸다 그런 말을 앞에서 몇 번 했습니다마는 저도 마찬가지에요.-
중생이다 보니까 상내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심지어 목수 뒷바라지하는 대패를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아주 초보자이거든요. 어느 절을 짓는데 대패를 가는 목수 뒷바라지로 따라와서 절 짓는데 일을 하고는 나중에 몇 년 뒤에야 자기 친구들 데려와서 '아 이 절 내가 지었다.' 고 그런 예가 아주 많습니다. 뭐 그런 일이 많습니다. 법당하나 세우는데 기둥하나 했거나 서까래하나 했거나 기와 몇 장 해놓고는 '아 이 절 우리가 다 지었다.'고. '내가 했다.'고 하는 것 보다 그래도 조금 낫네요. '우리가 다 이거 지었다.'고. 그러다 조금 신이 나면 내가 다 지었노라고 이렇게 까지 우리 중생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상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해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이런 금강경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가고 어느 날 상이 확 벗어지면 참 지혜롭고 그 사람의 행위는 참 아름답고 그러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그렇게 잘 했어도 꾹 참고 자랑을 안하고 생색을 안내더라도 그래도 일단은 칭송을 받지요. 예를 들어서 어느 절에 상당한 대시주가 되어 큰일을 많이 하는 줄 뻔히 아는 데도 지주 스님께 대접 받고저하는 그런 자세도 없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 하고 똑같이 다른 사람들 하고 식당에 가서 줄을 서서 밥을 타서 먹고 남의 후원에 그릇 씻고 하는 그런 궂은 일도 가서 다른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궂은 일을 하고 그랬을 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어떻겠습니까?
'아 저 신도님은 절에 시주도 크게하고 이 절에 대시주로 알고 있는데 저렇게 상내지 않고 보통 우리들하고 보통 우리들과 똑 같이 저렇게 행동한다.'고 얼마나 칭송하겠습니까?
두고 두고 칭찬하고 두고 두고 존경하지요.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그 복을 받느냐 안받느냐 그건 그 다음 문제이고 바로 거기서 복을 받는 일 아니겠습니까?
가고 오고 하면서 얼마나 그 사람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며 얼마나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디서 예를 들어서 다른 곳에서 어떤 다른 일로 만났을 때 예를 들어서 무슨 접촉사고라도 났다든지 아니면 나쁜 사람들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든지 그런 상황이 누구든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그건 뭐 굳이 설명 안해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지요.
훤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 福德(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지요.
若菩薩(약보살)이 不住相布施(부주상보시)하면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면
其福德(기복덕)을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그 복덕을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참 좋은 말입니다.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어떻게 생각하는가?
東方虛空(동방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동방허공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요즘 학인들 군대물이 덜 빠져서 내가 뭐라고 지시를 하면 '예! 알겠습니다 스님!' 이런다구요. 우리는 어릴 때 '예!'하고 끝났는데 요즘 어떻게 아이들이 꼭 '예! 알겠습니다 스님!'꼭 이렇게 붙여요. 그게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여기서 왔는가 알 수는 없겠는데 어쨌든 이렇게 어른의 존칭을 한 번 대답하고
'예! 그렇게하겠습니다. 어머님!','예! 그렇게하겠습니다. 아버님!', '예! 그렇게하겠습니다. 할아버님!' 이렇게 하면 훨씬 대답이 확실하고 근사하고 완전한 대답이 되겠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須菩提(수보리)야!
南西北方(남서북방)과 四維上下虛空(사유상하허공)을 可思量不(가사량부)아
남서북방과 사유상하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그 허공의 끝을 얼마나 되는가 그걸 우리가 생각할 수 없지요. 계속 우리가 동쪽 하나만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동쪽으로 동쪽으로 생각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그 동쪽은 그 허공이 끝이 있어야말이죠.
헤아릴 수가 없지요. 그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쪽, 북서쪽, 북쪽 이 모두가 다 그렇고 사유간방이죠.
사유(四維)라고 하는 것은 불교용어인데 사유(四維), 서북간 동남간 등 간방을 그래서 팔방이지요. 그리고 상하(上下) 즉 윗쪽 아랫쪽. 그래서 시방(十方)이죠.
불교에선 시방(十方)이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사방(四方)하고 상하(上下)를 쳐서 육위(六位), 여섯으로 표현한 그런 습관도 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사방(四方) 내지 팔방(八方), 시방(十方)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느 방향으로든
可思量不(가사량부)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不也(불야)니이다 世尊(세존)이시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느 쪽을 우리가 달린다 하더라도 그 끝이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須菩提(수보리)야 !
菩薩(보살)의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하는 福德(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다시 이와같아서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 福德(복덕)!
지혜로운 보시! 이 말입니다.
지혜로운 실천! 실천을 하되 지혜롭게 하자!
行智具備(행지구비)! 행과 지혜가 갖추어져야 된다.
우리가 예불할 때 보면 사대 보살을 일컫는데
문수, 보현 이렇게 일컫지요.
그다음 관음보살, 지장보살 이렇게 일컫지 않습니까?
사실 중요한 두 보살은 바로 이상적인 삶.
이상적인 삶을 산 사람은 바로 부처님!
이래서 부처님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문수, 보현이거든요.
문수, 보현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지혜와 행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없이 행만 가지고 하면 그냥 우리 나름의 계산이고,
우리 나름의 베푼다하더라도 정이지요. 정으로 베푸는 것이지요.
사람 분별하면서 베풀어야 되고 마음에 들면 베풀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베풀고 그러쟎습니까?
그건 지혜없는 행이고 또 지혜만 가지고 행이 없으면 그 아무 쓸모없는 겁니다. 그 이 두가지를 구비를 해야된다. 알고 보면 사실은 상을 낼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서 인도에 가면 거지들이 관광객에게 시주를 받고도 하나도 감사하다고 생각을 안합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다고 생각을 해야하는 사람은 시주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시주 받는 사람이야 빚졌으니까.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내가 받을 것을 받았지 뭐 못 받을 것을 받았느냐?
이래서 하나도 감사하다는 생각도 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을 안해요.
우리 상식하고는 전혀 다르죠. 인도에서는 불교가 그동안 상당히 장기간 없어졌다하더라도 힌두교라고 하는 것이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지요. 인도의 본래 있던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힌두교란 말이 인도교란 뜻이지요. 힌두교의 정신에 의한 것인지 그렇습니다.
뭐 당연히 줄 걸 줬고 나는 받을 걸 받았다 설사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감사해야할 사람은 준 사람이 감사해야지 받는 사람이 왜 감사하냐? , 주는 사람은 복을 주었으니까 정말 감사해야하고 받는 사람은 빚을 졌으니까 기분 나쁘다 이거에요.
받기는 받지만 기분 나쁘다. 그런 입장입니다.상당히 일리가 있지요?
그런 입장도 있으니 우리가 생각해보면 하등의 상낼 일이 아니다란
거죠.
부처님은 이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 가장 값진 일,
중생제도하는 일, 해 놓고 알고 보니까 중생제도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내가 중생제도 했다고 상낼 일 아니다 이거야.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호대
이와같이 한량없고 수가 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멸도했으되
實無衆生得滅度者(실무중생득멸도자)니라]
실은 중생들이 멸도한 사람들이 없느니라
참 중생을 제도,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 놓고도 상을 안내는데
우리는 조그마한 것 하나 해놓고 '아 내가 했다'고, '내가 했다'고.
예를 들어서 길에 있는 돌이 하나 있는데 그 돌 하나 치워놓고도 아 그거 내가 치웠다고 이러는 정도 아니겠습니까?
참 우리들의 마음 씀씀이라 든지 이런 것들을 환히 깨놓고 보면 우습지도 않은 점이 많아요.
성인의 가르침,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대화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하나 이런 것을 교정잡아 나가는거죠.
無住相布施(무주상보시)하는 福德(복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다시 이와같아서
不可思量(불가사량)이니라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어제는 상(相)을 내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 마음을 그렇게 항복받아야된다 했고 여기는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但應如所敎住(단응여소교주)니라
보살이 다만 응당히 가르치는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여소교주(如所敎住)!
가르치는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머문다고 표현은 했습니다만 머무는 게 아니죠. 그렇다고 언제든지 지나가버리는 것만이 아니고 머물되 머물지 않는 것. 머물 때와 갈 때를 잘 아는 것.
그러니까 말로써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니
여소교주(如所敎住) -가르치는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그랬습니다.
'머물지니라' 하는 것은 '머무는 바 없이 머물라!' 이뜻이죠.
수보리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됩니까? 깨달음에 대한 마음, 보리심을 발한 사람으로서 아니면 인생을 좀 더 의미있게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아니면 불교공부에 관심있는 사람으로서, 발보리심자(發菩提心者)로서, 이제 좀 철이 들었으면 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되겠습니까? 하고 부처님께 질문을 하니까 항복은 우리가 제일 중생의 약점인 '상내는 것', 이치를 알고 보면 상낼 것이 없다.
그래서 이치를 알고 상을 내지 않는 그런 자세로 마음을 항복받고 그 다음에 선행을 하는데 반드시 지혜롭게 선행을 하라!
지혜롭게 라고 하는 말은 '머무는 바 없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르친 대로 머물라는 것이
'머무는 바 없이 머물라'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은 아무래도 좀 부족하죠.
오늘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여기까지 공부하겠습니다.
- 참고 -
1.육근(六根)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라는 여섯 가지 감관. 안은 색깔과 형체를 보는 눈, 이는 소리를 듣는 귀, 비는 냄새를 맡는 코, 설은 맛을 느끼는 혀, 신은 닿음을 느끼는 피부, 의는 생각하는 마음. 또는 이 감관의 기능이나 능력으로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인식하여 생각함. 이것들은 *6경(境)이라는 객관을 감지하는 주관이며, 한편으로는 *6식(識)의 대상이 된다. 육입처(六入處).
2.육식(六識)
여섯 가지 인식 작용.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라는 *6근(根)에 의존하여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는 *6경(境)을 지각하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감관인 *근(根)과 대상인 *경(境)과 인식 주체인 *식(識)이 동시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비달마에서는 6식이 마음 작용의 활동이고 그 본체가 유일한 마음이므로 6식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편 유식학에서는 6식 이외에 근본적인 정신 작용으로서 2식을 추가하여, 이것들이 모두 작용함을 인정한다.
3.육경(六境)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 색은 색깔과 형체, 성은 소리, 향은 향기, 미는 맛, 촉은 접촉되는 것, 법 생각되는 것. 이것들은 객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각각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마음(意)이라는 * 6근(根)의 대상이다.
육근(六根)으로 이 육진(六塵)을 받아들여 깨끗한 마음을 더럽게 하므로 진(塵)이라 하니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4.12處 - 육근(六根) , 육경(六境)
5.18界 -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
6.사유(四維): 1.건(乾)·곤(坤)·간(艮)·손(巽)의 네 방위, 곧 서북·서남·동북·동남.
7.시방(十方): 불교에서, 동·서·남·북의 사방과 건(乾)·곤(坤)·간(艮)·손(巽)의 사우(四隅) 및
상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십방.
8.팔방(八方): 1.사방(四方)과 사우(四隅). 곧, 동·서·남·북과 북동·북서·남동·남서의 여덟 방위.
2.건(乾)·감(坎)·간(艮)·진(震)·손(巽)·이(離)·곤(坤)·태(兌)의 여덟 방위.
9.육위(六位): 사방(四方)과 상하(上下)를 함께 이르는 말.
참조 : 여천 무비(如天 無比) 큰스님 법문 중
참조 : 고려 대장경 연구소 http://211.46.71.249/webterm/searchterm.exe?find=%C0%B0%C1%F8
참조 : daum 백과사전
(법문녹취:明星華)
妙行無住 지혜로웠을 때, 모든 관계가 지혜로울 때 아주 아름답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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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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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금강반야바라밀경 _()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