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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11강
오늘은 임제록 15쪽에 시중(示衆)을 할 차례인데 이 임제록이 앞에서는 맨 처음 서문(序文)이 있었고, 그 다음에 상당(上堂)법어가 있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시중(示衆), 감변(勘辯), 행록(行錄), 탑기(塔記) 이렇게 여섯 가지로 되어 있어요. 상당은 그동안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상당법어, 절집 안에 여러 가지 형태의 법문이 있는데 그 중에 격이 가장 높은 법문을 상당법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상당법어는 상당법어의 어떤 격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내용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어록을 공부하면서 그런 어떤 하나의 관습이라고 할까? 관습이 하나의 법도가 되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뒷사람들은 그것을 하나의 법도로 삼아서 그렇게 계승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계승되어져야 하고, 이것이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고 전통이 그렇게 만들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여러 선지식들의 어떤 일상 속에서 걸러진 일입니다. 그냥 우리가 만들어서 그렇게 전통을 세운 것이 아니 예요.
상당법어는 이렇게 한다.~ 그 다음에 무슨 소참법문은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누가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짜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불교라고 하는 그런 큰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하나의 법문의 양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잡혀지는 거죠.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게 짜여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래서 상당법어는 불교 안에서 법문을 할 때 가장 격을 높이 잡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법어는 상대가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를 크게 개의치 않아요. 당신이 있는 법을 그대로 펼쳐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 다음에 여기서부터 시중은 다른 표현으로 하면 소참법문 정도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사량분별로서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고 법문하는 사람도 약간 풀어서 이해가 되도록 그렇게 대중을 상대로 한 그런 내용이죠.
전번에도 내가 한번 이야기 했지만 근래 선지식들 중에서 그러한 것들을 가장 잘 알아 가지고 그런 전통과 어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법도를, 법문하는데 있어서의 법도를 제대로 알아서 수행하신 분은 성철스님이시라. 그래서 성철스님의 “본지풍광(本地風光)” 이라고 하는 법문집이 책으로 나와 있는데 그건 그동안 해인사 방장으로 계시면서 상당법어만 모아 놓은 거예요. 상당법어의 격이 어떤가를 우리가 알려고 하면 성철스님의 본지풍광이라고 하는 법어집을 보면 됩니다. 근래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상당법어의 모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성철스님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성철스님의 소참법문은 소위 “백일법문(百日法門)” 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소참법문 형식이고 여기서 말하는 시중과 같은 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의리로 설명할 수 있는데 까지 설명을 하고 또 청중의 수준이라든지 이런 것 들을 상당히 감안을 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고 그럽니다. 법문이 사실은 상당히 많지만 그런 것 들은 우리가 잘 분별할줄 알고 거기에 맞추어서 그렇게 할줄 아는 것이 이것이 바람직하죠. 초등학생 앉혀 놓고 너무 격이 높은 이야기해도 안 되고 하듯이 모든 법문에는 그런 격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중의 처음에 사료간(四料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임제록에는 없기도 하고 어떤 데는 있기도 하기도 해요. 내가 편찬한 이 임제록은 빠진 것 들을 전부 모아가지고 여기 저기 것을 다 모아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료간이라고 하는 것은 선지식이 사람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이러이러한 기준을 두고 사람을 제접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시중 맨 첫머리에다 이것을 올린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앞에는 상당법어이고 가장 격이 높은 법문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설명도 필요치도 않고 설명에 해당되지도 않아요. 그리고 또 사람 상대하는데 학인을 제접 하는데 있어서 기준을 세우고 근기를 따라서 상대의 입장에 맞추어서 이렇게 이렇게 제접한다. 그런 것을 시중 첫머리에다 딱 올려놓은 것은 임제록을 편찬한 사람이 상대를 상당히 고려를 많이 한 그 뜻이 보여요. 이 사료간이 그야말로 시중의 첫머리에 처음부터 이렇게 와 있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바가 없어요.
그런데 편찬한 사람이 전체를 놓고 이렇게 그 순서를 편찬할 때 이것은 사람을 제접 하는데 네 가지의 그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이니까 맨 처음에 이것을 올려놓고 앞으로 시중을 소개하는데 대해서 이러이러한 기준에 해당되는 어떤 법문이구나. 이것을 알라고 그래서 위에다 올려놓은 거예요.
10-1 사료간(四料揀)
師晩參에 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이요
사만참 시중운 유시탈인불탈경
有時奪境不奪人이요 有時人境俱奪이요
유시탈경불탈인 유시인경구탈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유시인경구불탈
임제스님이 저녁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는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時에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고
시 유승문 여하시탈인불탈경
師云, 煦日發生鋪地錦이요 孾孩垂髮白如絲로다
사운 후일발생포지금 영해수발백여사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고 師云, 王令已行天下徧이요
사운 여하시탈경불탈인 사운 왕령이행천하변
將軍塞外絶煙塵이로다
장군새외절연진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고 師云, 幷汾絶信하야
승운 여하시인경양구탈 사운 병분절신
獨處一方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고
독처일방 승운 여하시인경구불탈
師云,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사운 왕등보전 야노구가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떠오르니 땅에 비단을 편 듯 하고, 어린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희구나.”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명령이 이미 떨어지니 천하에 두루 시행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을 할 일이 없어 졌다.”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스님이 또 물었다.“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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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晩參에 示衆云
사만참 시중운
임제스님께서, 만참이라고 하면 조참의 반대말이 만참인데 조참은 아침. 그전에 정광스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 때 꼭 새벽예불 끝에 법문을 했어요. 그런 것이 이제 새벽 신(晨) 자, 신참이라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신참이라고 한 말은 잘 안 쓰고 조참, 일찍(早) 자, 한다고 해서 조참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만참은 늦게 한다는 뜻에서 주로 밤에 해!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마음이 좀 풀어진, 뭔가 느긋한 느낌을 주는 그런 시간이다. 그렇게 하루가 가운데 중요한 시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다든지, 조금 대중들에게 설명을 필요로 하는 그런 법어의 형식이다. 이런 것을 알 수가 있죠. 만참은 늦게 공부하는, 공부를 시키는 그런 시간에
示衆云
시중운
대중들에게 보여 말하기를
有時奪人不奪境이요
유시탈인불탈경
내가 사람을 제접할 때, 어떤 때에는,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이렇게 했어요. 여기에서 사람이란 주관이 되고 경계는 객관이 되는 거라. 주관은 부정해 버리고 객관은 그대로 살려둔다. 이런 뜻입니다. 그게 이제 이 스님의 법석하는 하나의 기준 이예요. 어떤 경우가 그런 것 인지? 거기에 대해서 뒤에 조금 설명이 또 나옵니다.
有時奪境不奪人이요
유시탈경불탈인
이것은 반대이죠.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경계는 부정하고, 사람은 금여 한다는 뜻이고
有時人境俱奪이요
유시인경구탈
사람과 경계, 주관과 객관을 함께 다 빼앗아 버린다. 라고 하는 것은 부정해 버린다. 이 말이야.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유시인경구불탈
사람과 경계를 함께 다 빼앗지 않는다. 말하자면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말입니다. 이 네 가지의 어떤 사람을 제접하는 기준, 이런 뜻입니다.
時에 有僧問
시 유승문
어떤 스님이 나와서 말하기를
如何是奪人不奪境고
여하시탈인불탈경
어떤 것이 그러면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그런 상태입니까? 라고 하니까,
師云, 煦日發生鋪地錦이요
사운 후일발생포지금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해가 뜰 때를 후일(煦日)이라 그래요. 후일이 딱 떠오를 때, 땅에 비단을 펼쳐 놓은 것과 같이, 아주 찬란하고 아름답다 이겁니다. 저기~ 가을날 넓은 들판에 곡식이 누렇게 익었을 때 이슬이 풀과 곡식에는 총총 맺혔고 그때 아침에 해가 쫘 악~ 뜨면 그 넓은 평야에 그야말로 그 아름답기가 영롱한 이슬방울을 비추는, 그 빛이 영롱하고 아름답기가 비단을... 아주 아름다운 비단을 온 들에다가 넓게 펼쳐놓은 것과 같은 그러한 모습이다. 포지금(鋪地錦)이란 말은
孾孩垂髮白如絲로다
영해수발백여사
어린 아이가 머리터럭을 드리웠는데 희기가 실과같이 하얗다. 그러니까 갓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하얗잖아. 노랗거나 하얗다고. 그것이 일차적으로 빠지고 새로운 머리가 나잖아요. 그와 같이 아주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그런 상태다. 이 표현만 그렇게 했을 뿐 입니다. 그런 식으로 법을 쓴다. 이 말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을 제접하고 가르친다. 이 뜻 이예요. 그 다음에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고
사운 여하시탈경불탈인
어떤 것이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 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제접하는 것입니까? 경계라고 하는 것은 객관이 되니까 저 앞에 것과 반대이죠. 앞의 것 하고는 정 반대인데 이건 상당히 생각을 많이 해야 이해가 돼요.
師云, 王令已行天下徧이요
사운 왕령이행천하변
왕의 명령이 이미 행해지면 천하에 가득해지고, 두루 해 지고, 경계가 없다는 뜻이지. 탈경, 경계는 빼앗아 버렸으니까 없다 이거야. 주관만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왕의 명령만 있는 거야. 온 천하에... 그 반대로 백성은 온 천하에 그 경계가 되겠지. 주인은 옛날의 상식으로는 왕은 주인이니까 백성은 경계가 된다고. 그렇게 이해하면 그런대로 이해가 좀 될 거예요.
저 앞에는 사람(주관)은 빼앗아 버리고 객관만 살려 놨으니까, 그야말로 어떤 객관을 가지고 아름답게 그대로, 자연 현상 그대로, 또 사람이 생겼으면 생긴 대로 긍정해 주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후일발생포지금(煦日發生鋪地錦), 영해수발백여사(孾孩垂髮白如絲)라고 하는 말은 그대로 그게 좋다, 나쁘다 그런 어떤 감정개입을 하지 않고 현상을 그대로 긍정해주는 그런 이야기지. 이것은 그 다음에 여기는 그 반대로 백성은 어디 가버렸어! 객은 어디가 버렸다고! 완전히 왕의 천하야! 왕의 천하다. 이거지
王令已行天下徧이요.
왕령이행천하변
천하에 두루 했다. 오로지 임금의 명령만 있을 뿐이다.
將軍塞外絶煙塵이로다
장군새외절연진
이것은 주관만 살아있고 객관은 없는 것이니까, 왕이 명령을 하고 천하에 두루 하니까, 국경을 지키는 새외라고 하는 것은, 국경을 지키는 군대를 말하는 거라. 거기에 연진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전쟁을 할 때 말이 달린다든지 군사가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막 들판을 막 달리고 싸움이 붙었을 때, 거기에 먼지라든지,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잖아. 그런 것이 전부 다 끊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천하태평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오직 왕의 일방통행! 왕의 명령 하나로 천하가 편안해졌다. 이런 식이지. 그러니까 저 앞의 구절하고는 정반대의 표현입니다. 이런 것을 조금 이해해야 선구(禪句)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선구는 대개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거든, 선시라는 것이 거의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좀 이해가 돼야 해요. 금강경오가해에 보면 야보스님의 게송 같은 것이 대개 이런 형식인데, 그것을 잘 사유하지 아니하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깊이 사유해 봐야 된다고... 그 다음에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고
승운 여하시인경양구탈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인가? 다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제
師云, 幷汾絶信하야 獨處一方이로다
사운 병분절신 독처일방
병주, 분주, 이것은 저기 변두리, 중국의 중앙이 아니고 변두리에 있는 지명이라. 거기에 소식이 끊어졌다. 독처일방(獨處一方)이라! 홀로 한 곳에 처해있다. 그러니까 사람도 경계도 부정을 당했으니까, 주관과 객관이 다 끊어진 그 자리! 끊어진 그 자리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 조금은 짐작이 되지요? 저기~ 변두리에 있는 병주, 분주하는데 소식이 뚝 끊어져 가지고 중앙하고 도대체 거래가 없다 이거야. 그게 주관과 객관이 뚝 끊어진 거라. 그러니까 중앙에 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지방에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런 거래가 도대체 없다 이거야. 독처일방이라! 그것이 이제 사람을 제접하는 방법을 이런 식으로도 쓴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고
승운 여하시인경양구탈
인과 경계를 함께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다 살려 놓은 것 입니까?이 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師云,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사운 왕등보전 야노구가
왕은 정치를 잘 한다 이 뜻이라. 왕은 왕대로 정치를 잘하고, 왕이 보전에 올랐다 하는 말은, 근정전에 올라 가지고 열심히 아주 정치를 잘하고 왕이 정치를 여법하게 잘하니까 어떻게? 시골 늙은이는 풍년가를 부르는 거지. 그것이 이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 그러니까 여기서도 어떤 사람을 제접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사람과 경계, 주관과 객관, 나와 너를 다 긍정하면서 사람을 제접하는 그런 입장은 마치 왕등보전(王登寶殿), 야노구가(野老謳歌)와 같은 거라. 그러니까 왕은 정치를 잘하고, 보전에 올랐다는 소리는 정치를 잘 한다는 소리야.
왕이 근정전에 안 오르면 어디 사냥하러 갔거나, 아니면 어디 놀러 다니거나, 아파서 못나오거나 그런 경우죠. 그러면 정치가 안돌아 간다는 뜻이야. 왕등보전이라는 이런 표현도 아무것도 아니지? 왕이 보전에 올랐다는 소리가 무슨 뜻이야? 근정전에 올라가서 신하들하고 국가대사에 대해서 아주 열심히 의논하고, 상의하고, 처리할 것 처리하고 한다는 그런 뜻을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야노구가(野老謳歌)라고 하는 것도 시골 늙은이가 태평가를 부른다. 이 뜻인데 그만치 정치가 잘 돌아가고 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일에 충실 하는 것. 이런 식으로 사료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조금 어렵다면 어렵죠. 그 다음에
10-2 생사에 젖지 않는다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且要求眞正見解니
사내운 금시학불법자 차요구진정견해
若得眞正見解하면 生死不染하야
약득진정견해 생사불염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이나 殊勝自至니라
거주자유 불요구수승 수승자지
임제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요즘 불교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만 얻는다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道流야 祇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도류 지여자고선덕 개유출인저로
如山僧指示人處는 祇要儞不受人惑이니
여산승지시인처 지요이불수인혹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요용편용 갱막지의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여금학자부득 병재심처
病在不自信處니 儞若自信不及하면 卽便忙忙地하야
병재불자신처 이약자신불급 즉편망망지
徇一切境轉하야 被他萬境回換하야 不得自由니라
순일체경전 피타만경회환 부득자유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부터 선지식들은 모두가 그들만의 특별한 교화의 방법[路]이 있었다. 예컨대 산승(山僧)이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할 뿐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병이 어디에 있는가? 병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믿지 못하면 곧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일체 경계에 끌려 다닌다. 수만 가지 에 자신을 빼앗겨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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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생사에 젖지 않는다"는 들어보면 그런대로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는 그런 내용들이 지금부터 쭉~아주~ 거의 2/3 이상을 시중(示衆)이 차지하고 있어요. 정말 임제스님의 법문의 진수라고 하는 것은 이 시중에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것도 10-2부터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사내운 금시학불법자
임제스님이 이에 말하기를 요즈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且要求眞正見解니
차요구진정견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것 이런 뜻 이예요. 그런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정견해를 구하는 것이다.” “참되고 바른 소견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즈음 학불법자(學佛法者)가 아니라 옛날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 미래의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 항상 그대로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진정견해입니다.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살림에는 눈이 보배다. 그런 말이 있듯이 불교에 있어서는 의식주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않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인간으로서 가장 의미 있고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사느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종교라는 것이 대두가 되었다고 우리가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그런 큰 의미를 가지고 종교에 우리가 임하고 있다면 거기서 소견이 발라야 된다. 견해가 발라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라. 불교에 들어와서까지 소견이 온전치 못하고 견해가 온전치 못해가지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거라. 임제스님께서 견해가 바르냐. 안 바르냐를 두고라도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소견이 발라야 된다! 진정견해! 진정견해를 구해야 된다. 이 말이야.
若得眞正見解하면
약득진정견해
만약에 진정견해를 얻을 것 같으면, 참되고 바른 소견을 얻을 것 같으면
生死不染하야
생사불염
삶과 죽음의 문제에 물들지 않는다. 젖지 않는다. 이것이 나하고 관계없어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사에 휘둘리고 살잖습니까? 생사에 휘둘리고 산다는 말은 생사에 젖어가지고 오염되어있다. 이 말인데 생사문제에 오염되어 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의 말씀은“불교는 생사해탈의 목적이 아니냐?”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바른 견해만 가질 것 같으면 생사해탈이 간단하다.” 이거지.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이나 殊勝自至니라
거주자유 불요구수승 수승자지
가고 머무르는 것이 자유롭다. 수승한 것을 구하기를 요하지 않아도 수승한 것이 저절로 이르러 온다. 이 말이야. 수승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제일 가치 있는 인생! 최고의 삶! 최상의 보람! 인생으로서의 최상의 보람이 뭐냐? 그것을 따로 특별히 구하지 아니해도 그것이 저절로 나에게 이르러온다. 제일 좋은 것,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제일 좋은 것을 따로 구하지 아니해도 소견만 바르다면 제일 좋은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 저절로 온다. 그랬습니다.
道流야 祇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도류 지여자고선덕 개유출인저로
다만 옛부터 선덕은, 다 벗어나는, 사람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로부터 뛰어나는 길이 있다.
如山僧指示人處는
여산승지시인처
그 나름대로 자기 나름의 뛰어난 길이 있는데 선지식들마다 전부 남다른 가르침이 있거든, 깨달음의 경지는 똑 같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모두가 남다른 그런 소견을 사실은 가지고 있어요. 사람마다 그러니까 어록을 읽어봐도 그렇고 우리가 경전을 읽어봐도 그렇고 그 경전마다 모두다 장점이 있고 어록마다 다 장점이 있는 거야. 초기 경전이든 후기 경전이든 그 경전을 결집한 사람이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결집한 경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저기 아함부, 잡아함경 같은 것은 물론 몇몇 사람이 다량의 경전을 결집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경전도 짧고 내용도 비슷비슷해요. 그런데 대승경전은 거의 다른 사람들이 결집을 했어. 결집한 사람들이 다 달라. 그 특색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어록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거야. 어록도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보면 다 달라.
그 나름대로 특장이 있다. 특장이! 아주 뛰어난 그런 부분들이 있어.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자고선덕(自古先德)은 개유출인저(皆有出人底路)로 라고 하는 말은 남 다른 데가 있다. 이 말이야 여기서는. 그러면 나는 뭐냐? 임제스님은 뭐냐? 예컨대 산승지인처(山僧指示人處), 내가 사람을 지시하는 것은 나의 특징 나의 장점은 뭐냐?
祇要儞不受人惑이니
지요이불수인혹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수인혹이야! 사람들로부터 미혹을 받지 않게 하는 것, 남에게 속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내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임제스님의 말씀이 그 말이야. 여기에 인혹이라고 하는 말과 함께, 물혹(사물物, 미혹惑)이라는 말도 써요. 우리는 대개 속된, 세속적인 그런 생각은 거의 물혹 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것, 재산이라든지 어떤 물질적인 것, 거기에 휘둘리고 있어요. 혹이라고 하는 것이 속는다는 뜻이 포함되고 있지만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 끄달리고 있다. 끄달리고 있다는 것은 속고 있다 이거지.
그것이 최고의 가치인양 속고 있다. 여기에 인혹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차원하고 달리 출가해서, 예를 들어서 수행한다고 하면 이미 그런 차원은 벗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디에 또 관문이 있는고 하면 부처님이라든지 과거 조사스님들의 훌륭한 가르침! 이것이 또 하나의 관문이야. 오욕의 관문은 물질을 위시한 오욕의 관문은 벗어났다고 칩시다. 일단은 벗어나서 어떤 출세간의 삶을 펼쳐 가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관문이 있어. 그것은 뭔고 하니 부처님이나 과거의 선지식들의 가르침이라. 여기에 판판히 속는다. 이 말이야. 그게 인혹 인거라. 사람들의 미혹! 그런데 임제스님은 거기에도 속지 않도록 한다. 부처이고 조사이고 간에 거기에도 미혹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특징이다.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요용변용 갱막지의
사용하게 되거든 곧 사용하라. 작용하게 되거든 곧 작용하라. 보게 되면 보고 듣게 되면 듣고 이 말입니다. 무슨 부처님의 말씀이 이러이러하니까, 조사스님의 말씀이 이러이러하니까, 또는 임제스님의 말씀이 이러이러하니까, 거기에 기준을 두거나 속지마라. 거기에 끄달리지 마라. 그대 자신이 보게 되면 바로 봐. 보게 되면 보고 있어 사실은, 듣게 되면 바로 들어. 듣고 있다면 사실은 듣고 있다고. 그게 요용변용이라. 작용을 필요로 하면 곧 작용한다. 볼일 없으면 본다. 들을 일 있으면 듣는다 이거야. 꼬집으면 아픈 걸 그냥 알아버려. 요용변용이!
작용을 필요로 하면 곧 작용한다. 그 이상 다른 것이 있느냐? 내가 그전에 법화경 강의하고 법화경을 번역하고 이것이 불교다. 그렇게 했는데 사실 임제록 강의 할 때는 “이것이 진짜 불교다” 내 나름대로 정리하기를 임제록이야 말로 불교의 지름길이라. 요즈음 남방불교 공부해가지고 온 사람들 보면 중국의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불교라고 한다. 이렇게 내용을 모르고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해요. 조사라고도 말 안 해.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은...
여기서는 자기 자신의 가르침까지도 인혹에 같이 싸잡아서 표현을 했기 때문에 각자가 보게 되면 곧 본다. 바로 “이것이 진짜 불교이다”. 이것을 깨닫는 거야. 여기에 불교의 진수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뜻이 거기에 있어요. 그리고 갱막지의(更莫遲疑),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참으로 불교의 정곡을 찌른 거야. 불교는 이것 외 달리 다른 것이 없어요. 여기에서 자꾸자꾸 발전하고 또 거기에다 명상을 붙이고 이론을 붙이고 구사니 유식이니 그래가지고 아주 복잡한 교리가 펼쳐지지. 그런데 본래 그런 것이 있었냐하면 없었지. 없었는데
그 어떤 불교의 정곡을 찔러서 제대로 깨우쳐 주지는 못하고 그렇게 장황하게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하게 된 거예요. 불교학이 발달 하다보니까 그런 것이지. 그것이 불교의 정곡은 아니지. 결국 그렇게 되면은, 장황한 이론을 통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그런 근기도 물론 있어요. 기신론에 보면 불교를 이해하는 근기들을 몇 가지를 이렇게 소개를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간단명료한 데서부터 불교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장황한 이론으로 인해서 불교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기신론을 짓게 된 그런 이유를 만용스님이 거기에 간단하게 피력을 했다구요. 대개 보면 불교를 깨닫는 사람들은 한마디에 탁 깨달았지, 뭐 장황한 이론가지고 깨달은 적은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전편 다 읽고 때달았다. 이것이 아니고 한 구절에서 깨달았다. 육조스님만 하더라도 금강경 다 읽고 깨달은 것이 아니고 한 구절에서 깨달았거든. 보면 거의 그렇다구요. 그러니까 지엽적으로 불교학이 발달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또 좋은 점이 있는데 그런 근기들을 위하는 것으로서는 참으로 좋은 점이 있는데, 그러다보니까 배가 산으로 가듯이 또 엉뚱한 길로 불교를 오도하는 예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은,
조사스님들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엽적이고 다른 데로 휘둘리고 하는 것을 다 잘라 버리고 바로 정곡을 찔러서 불교의 진수를 일깨워 주는 것. 이것이 조사스님들의 특징이라. 그 중에서도 특히 임제스님의 장점은 거기에 있습니다. 불교TV에서 보면 작년부터인가? 재작년부터인가? 외국스님들이 영어 법문을 해가지고 그것을 일요일 날 방영하는 프로가 있는데, 저기 청화스님이라고 연세대 물리학과 나와서 미국 가서 물리학박사로 학위를 받아가지고 대전 학하리의 무슨 절? 거기에서 영어에 능하니까, 외국인 스님들을 거기에다 모셔가지고 영어로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법회를 청화스님이 주관을 합니다. 청화스님이 주관을 하는데 그것을 불교TV에서 촬영을 해서 매주 방영을 하는데 어제 어떤 스님이 법문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자막을 일일이 쫓아가면서 이렇게 보니 참 법문 잘 하더구먼! 어제 법문한 스님이 누구인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아주 바로 조사스님들의 그런... 요즈음 아주 머리 좋고 총명한 사람들 이 불교를 정말 마음깊이 얼마나 깨달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알 길은 없으니까.
불교를 이해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아! 그 서양 사람들이 한국에 와가지고 불교공부해서 그 법문을 하는데 아주 제대로 하더라고. 어떤 조사들도 지금 우리나라의 어떤 선사스님들도 그렇게 못할 것 같더라고. 아주 제대로 해!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게 하고 총명한 사람들은 금방 불교를 그렇게 아나봐! 그런 걸 봤는데 참 우리불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한국에서 우리의 종교이고, 우리의 문화이고, 우리의 살림살이고, 우리의 재산이 되었는데 서양 사람들이 순수 한국불교 공부를 해가지고 한국 불교인들, 한국사람 이상으로 그렇게 표현을 할 줄 안다는 것.
이것은 아주 참 놀라운 일이고 한 쪽으로는 박수를 보내야할 일이지만, 한쪽으로는 우리 한국 스님들이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아주 기가 막히게 하더라구요. 하는데 거침이 없어! 우리나라 스님들은 법문을 하면 뭔가 자기 자신이 어떤 확신이 안서니까, 옳은 말을 해도 그렇게 뭔가 자신감이 없거든. 들어보면 음성에 자신감이 없는 것을 알잖아. 그런데 이 서양스님은 어떻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기가 막히더라구요.
기가 막히게 하고, 말도 정확하게 하고, 이론도 정확하게 하지만 자신감이 넘쳐! 주저주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쩌구 저쩌구... 했다. 그런 식으로 안 해! 완전히 자기 법문을 해버려 그냥. 서양 사람이 그렇게 한국불교를 배워서 그 정도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더라구요. 내가 그래서 놀랍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제는 그 사람 이야기도 그거야. 불수인혹, 요용변용, 갱막지의, 이것인데 자기 나름대로 깨달아가지고 자기 식으로 표현하더라구요.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여금학자부득 병재심처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요용변용, 불수인혹이 되지 못하는 것은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病在不自信處니
병재불자신처
병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곳에 있다. 그것이 병통이야. 자기 자신이 보고 듣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어! 그렇게 정말 불교라고 하는 믿음이 없다고. 꼭 책에나 있고 논리적인 이론 속에나 있는 줄로 그렇게 알아!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이것을 아무리 쥐어 줘도 거기에 대한 믿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지.
儞若自信不及하면
이약자신불급
그대가 만약에 스스로 믿지를 못한다면
卽便忙忙地하야
즉편망망지
아주 부산하게 바쁘게 돌아쳐서
徇一切境轉하야
순일체경전
일체 경계를 쫓아다니면서 굴러간다. 이것입니다. 일체경계라고 하는 것은, 조사스님이나 부처님 말씀으로부터 그 외 어떤 물질적인 경계, 또 눈에 보이는 것, 그 나름대로 자기가 판단하고 있는 그런 어떤 가치관, 이런 것에 쫓아가는 거야. 진짜 자기 보물은 그냥 놔두고, 그것도 아주 바쁘게, 그래서
被他萬境回換하야
피타만경회환
저 만 가지 경계, 온갖 경계에 나하고 바꿔버려 그냥... 보고 듣고 하는 이 주인공하고 바꿔버린다 이거야. 만 가지 경계하고 내가 바뀜을 입어 가지고서
不得自由니라
부득자유
내가 종이 되어 버린 거야. 내가 주인이 돼야 할 텐데 내가 경계하고 뒤 바뀌어 가지고서는, 내가 오히려 종이 되고 경계가 주인이 되어서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정말 진정한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지 못하면 늘 끌려 다니는 거야. 조사스님한테 끌려 다니고, 부처님한테 끌려 다니고, 뭐 그것까지는 차라리 괜찮다고 하지. 우리 불자가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의 말씀에 끌려 다니는 것은 그런대로 봐 줄 수가 있어.
오욕락에 끌려 다니는 거야.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물질에 아니면 명예에, 명예 아니면 물질, 여기에 끌려 다니고 거기에 종노릇을 하게 된다 이거지. 여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어. 이것은 아예 말할 그런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임제스님이 말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뭐냐? 조사스님이나 부처님께 끌려 다니고 부처나 조사의 말에 휘둘리고 사는 그것을 경계하거든, 그 정도는 그래도 말할 가치가 있다 이거야. 그 외 오욕락에 끌려 다니고 물질이나 명예에 끌려 다니는 것은 말 할 가치가 없는 거야. 아예
임제스님의 견해는 그래. 우리가 결국 사람으로 이렇게 살면서 피지장부아역(彼之丈夫我亦)이야! 부처님이니 조사스님이니 그래봤자 그들도 장부이고 나 또한 장부인데 사실은, 자기 확신을 갖게 되면 꿀릴 일이 없어요. 하등에 그들만의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밀쳐두고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이것이. 그런 어떤 자기의 자신감, 자기 소신을 가지고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면 이것이 임제스님의 경계지... 라고 밀어 버릴 일이 아니라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씩 조금 씩 이러한 것이 우리 각자의 살림살이가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되겠어요.
첫댓글 법우님들께서는제11강은 유난히 긴 법문이라고 느끼실수도 있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이것이 진짜 불교다" " 나 나름대로 정리하기를 임제록이야말로 불교의 지름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감사드립니다_()()()_
참되고 바른 소견(眞正見解)......감사 합니다._()()()_
대해월님~~~_()()()_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혹하게 하고 헷갈리게 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말라 [不受人惑]....一輪月님 수고하셨습니다.._()()()_
든든하게 버팀목이 돼주셔서 감사합니다._()()()_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제왕은 궁전에 오르고 시골 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오늘날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眞正見解 바른안목을 갓도록 해야 함니다,,,,一輪月님,,,,수고하셧스요,,,_()()()_,,,
尋牛行法師님....존경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인데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지 못하면 늘 끌려 다니면서 참 주인공의 삶을 살지 못한다… 不受人惑이니 ... 一輪月님! 감사드립니다... _()()()_
온 가족이 부처님 품안에 계시는 無影樹님댁이 부럽습니다_()()()_
眞正見解...소견만 바르다면 제일 좋은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 저절로 온다! 一輪月님! 고맙습니다._()()()_
불퇴지님~ 김장용 배추 무 싹 났습니까? 더운날 파종하신다더니 그 모습 상상을 했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_()()()_
불교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一輪月님! 감사합니다. _()()()_
초연화님~~~감사드립니다_()()()_
제일 좋은 것을 따로 구하지 아니해도 소견만 바르다면 제일 좋은 삶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 저절로 온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혹하게 하고 헷갈리게 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말라..一輪月님! 수고하셨습니다_()()()_
남해보리암, 새벽길... 무상행님하면~ 그 생각이 머리에 그려집니다....감사드립니다._()()()_
眞(正見)解_()()()_
여연행님, 반갑습니다.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글로서 다 표현하지못하는감사함을 마음으로 대신합니다._()()()_
큰스님께감사 드립니다. 일륜월님 감사 합니다. 모든님 감사 드립니다.
眞正見解...소견이 바르면 제일 좋은 삶. 가장 바람직한 삶이 저절로 온다._()()()_고맙습니다.
묘하님, 무량화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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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의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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