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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 나이키와 값싼 해외 노동력의 활용 스포츠 업계는 1996년 8월 27일 US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 대회를 3연패한 타이거 우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즈는 스탠포드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 선수로 전향하기로 결정했다. 타이거는 나이키와 4,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하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계약서에 서명한 후 타이거는 나이키의 창업자인 필 나이트 소유의 걸프스트림을 타고 그레이터밀워티 오픈에 참가하러 갔다. 이전에는 타이거는 이동하기 위해 가장 싼 운송수단을 골라야 했고 음식 값을 아끼기 위해 애써야 했다. 타이거는 아마추어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그 해가 가기 전에 타이거는 두 번 더 우승을 했고 스포츠 잡지 <일러스트레이더>에 올해의 선수로 이름이 실렸다. 다음 해인 1997년 4월 13일 유명한 마스터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생애 최대의 상금을 받았다. 마스터즈 결승전 경기는 TV 스포츠 중계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다. 2003년 나이티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0대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와 9,0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이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액수의 계약금이었다. 나이키는 르브론 제임스가 제2의 마이클 조던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나이키는 2년 동안이나 르브론과 계약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르브론에게 아낌없이 투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브랜드의 유일성(brand uniqueness) 거의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그저 단기간에 유행하는 현상일 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 나이트는 앞으로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기업 성장의 핵심이 될 것으로 확신했으며, 예상대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영&루비콤이 1,200개의 미국 브랜드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조에서 나이키는 코카콜라, 디즈니, 홀마크와 함께 상위 10대 브랜드에 들었다. 브랜드가 성장함에 따라 나이트는 1996년 재산이 53억 달러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키는 신발 원가를 낮추기 위해 가난한 국가에 스웨트숍(sweat shop)이라고 불리는 노동력 착취 공장을 운영한다는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많은 기업들이 아웃소싱이라는 명목으로 후진국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고 있지만 나이키가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나이키는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인가? 비난세력들이 주장하듯이 나이키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는가? 비판세력들은 나이키가 가난한 슬럼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값비싼 유명 상표의 신발을 판매하려 노력한다는 점을 비난한다.
1. 필 나이트와 와플 모양 신발 밑창의 발견 필 나이트는 1마일 당 4분 13초 정도-세계 기록은 4분 미만이다-의 기록을 내는 평범한 육상 선수였다. 그는 당시 오리건 대학의 유명한 코치였던 빌 보워먼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보워먼은 장거리 경주에서 해마다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하여 오리건주의 작은 마을인 유진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였다. 경기용 신발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를 해 온 보워먼은 신발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경기에 훨씬 더 유리하다는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나이트는 스탠포드대학 MBA를 수료하는 과정에서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일본이 카메라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운동화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1960년 학위를 마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니스카 회사를 찾았다. 타이거 신발에 대한 미국 내 배급권을 따내기 위해서였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신발 샘플 몇 개를 보워먼에게 주었다. 나이키와 보워만은 1964년 함께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각각 500달러씩 투자하여 미국 내 타이거 런닝화 독점 배급회사인 블루 리본 슈 컴퍼니를 설립했다. 이들은 나이트의 장인 집 지하실에 매장을 차려 수입 첫해에 8000달러어치를 판매했다. 나이트는 낮에 쿠퍼앤리브랜드(Cooper & Lybrand)에서 회계사로 근무하고 밤과 주말에는 신발을 팔았다. 주요 고객은 고등학교 육상부 선수들이었다. 나이트와 보워만은 1972년 자신들의 신발을 개발하여 스스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생산은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의 공장을 활용하기로 했다. 신발의 이름은 그리스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나이키라고 지었다. 현재 나이키의 로고인 스우시(swoosh) 로고도 이때 개발되었다. 나이키 신발 1972년 오리건주 유진에서 벌어진 올림픽 연습 게임에서 공식적인 첫선을 보였다. 마라톤 경기에서 나이키의 신발을 신고 출전한 선수들이 4위에서 7위를 차지하였다. 1위에서 3위를 한 선수들은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출전한 선수들이었다. 1975년 어느 일요일 아침, 보워먼은 시험적으로 아내의 워플 틀에 우레탄 고무를 부었다. 이 실험에서 우연하게 새로운 타입의 ‘와플’모양의 신발 밑창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와플 모양의 울퉁불퉁한 고무 밑창은 시중에 나와 있는 다른 신발들에 비해 탄력성이 훨씬 더 좋았다. 단순해 보이는 신발 밑창을 개발함으로써 나이키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72년 2백만 달러, 1975년 83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지만 1976년에는 무려 1천4백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게 되었다. 2. 나이키 주식 공개 나이키는 연구 개발을 통해 계속적으로 신제품을 선보임으로써 업계의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말, 나이키는 신제품 연구, 개발 인력으로만 100여명을 고용했다. 나이키는 140개 이상의 다른 모델을 출시했으며, 대부분이 시장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나이키는 1980년에 주식을 공개하였다. 나이트의 순자산이 거의 3억 달러로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유한 인물에 들어가게 되었다.2) 그러나 보워만을 70세 되던 해에 나이키 주식을 대부분 매각하여 당시 2%만을 보유하고 있어 자산은 950만 달러에 불과했다. 나이키는 1981년 전체 시장의 50%를 차지하여, 수십 년간 수위를 지켜왔던 아디다스를 앞서게 되었다. 나이키 제품의 인기는 계속 상승하여 8천여 개의 백화점, 스포츠용품 전문점, 나이키 신발 전문매장의 60%가 선주문을 받았고 물건을 받기까지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1982년 1월 4일, <포브스>는 미국 산업에 대한 연례보고서에서 나이키를 가장 수익성이 좋은 기업으로 선정하였다.3) 3. 리복의 도전
1980년대 후반 리복이 나이키를 위협하는 경쟁자로 부상하였다. 리복이 나이키의 시장 지위를 위협하게 된 것은 에어로빅용 운동화라는 기회를 나이키가 과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이키는 전국적인 에어로빅댄스 열풍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리복은 업계 최초로 여성만을 위한 운동화를 디자인했다. 1986~1987년 사이에 나이키의 매출은 18%하락했고 수익은 40% 이상 감소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몇 년 동안은 리복이 나이키의 매출을 능가하였다. 4. 나이키의 선두 탈환 선두를 차지하다가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면 다시 그 흐름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이키는 1위를 탈환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이트는 리복의 최대 약점인 판매상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나이키는 풋로커 같은 대규모 업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반면 리복은 자사의 제품을 취급하는 업자와의 관계에 무관심하며 거만한 태도까지 보였다.
1) 풋로커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 1995년 풋로커는 미국 내 전체 운동화 매출 65억 달러 중에서 15억 달러를 차지하였다. 1993년 풋로커 매장에서 나이키의 매출액은 3억 달러였으며 리복의 매출액은 2억2천8백만 달러였다. 2년 후 풋워크 매장 내의 나이키 매출액은 7억5천만 달러로 증가했지만 리복의 매출액은 1억2천2백만 달러로 하락하였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은 리복이 풋워크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복의 CEO인 폴 파이어맨은 풋워크가 요구하는 조건을 처음부터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 예로 1980년대 리복의 에어로빅 운동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때 풋로커는 자신들의 매장에서 독점 판매할 수 있는 모델을 납품해 달라고 요구했다. 풋로커는 할인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운동화 생산자들은 이러한 요구조건을 이미 승낙한 상태였다. 그러나 리복은 풋로커 매장을 포함하여 근처에 있는 할인점들에도 자사 제품을 판매할 것이라며 풋로커의 요구를 거절했다. 반면에 나이키는 몇 년 동안 풋로커와 적극적으로 협조해왔으며 1995년에는 풋로커 매장에서만 판매되는 제품을 12종이나 제공하였다. 리복은 풋로커의 구매 담당자에게 샘플을 보내주지 않을 정도로 풋로커와의 관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풋로커는 규모가 큰 체인이어서 시즌이 되기 전 미리 구매결정을 내려야 했다. 제품 샘플이 늦게 도착하거나 오지 않은 경우는 풋로커가 그 제품을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1993년 나이키는 리복으로부터 선두자리를 탈환했지만 아직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2월에는 주가가 폭락을 했다. 한때 인기주였던 나이키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매출액이 겨우 15% 상승하였고 수입은 11% 상승에 그쳤다. 그러자 월 스트리트에서는 과연 전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운동화가 몇 켤레나 될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이키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 “나이키의 경영 비법은 샌들에서 하이킹 부츠에 이르는 야외용 신발 제품들과 유명한 대학교 미식 축구팀과 야구팀의 유니폼 바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나이키가 생산하는 제품을 일반 소비자들이 무척 좋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업계 최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코치이고 공동창업자인 보워만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규칙은 따르데 무자비하게 싸워라.”4) 2) 이미지 창조 나이트는 신발이 곧 쉽게 쓰고 버리는 소비재가 될 것이며, 신발의 품질과 스타일 면에서 제조업체 간의 격차가 거의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주 모델을 바꾸는 방법을 사용하고 나이키가 그저 단순한 운동화가 아니라 신분의 상징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만약 운동화 제품에 ‘멋지다’라는 패션 이미지에 오락적인 분위기를 결합할 수 있다면 감수성이 예민한 30세 이하의 소비자들에 강력히 어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이트의 사업전략이었다. 나이키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제품을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나이키는 평균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새로운 스타일의 제품을 선보였다. 나이키는 제품을 홍보하는 방법으로 스포츠 스타를 후원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나이트는 사람들이 유명한 팀이나 운동선수를 응원하는 것을 보고 신발뿐만이 아니라 그 신발을 신고있는 스포츠 스타의 보이지 않는 결단력, 개성, 헌신, 승리의 이미지를 판매하기로 했다.5) 나이키는 1973년에 이러한 제도를 처음 시작해, 당시 유명한 육상선수이던 스티브 프리폰테인에게 나이키 신발을 신도록 했다. 프리폰테인은 영리하고 무서울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으며, 쓸데없는 관습에 도전하는 선수였다. 그는 나이트가 찾고 있던 이상적인 운동선수였다. 그러나 프리폰테인은 불행하게도 1975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나이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시카고 불스의 스타였던 마이클 조던은 역사상 최고의 농구선수이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가 되었다. 나이키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나이트는 다른 최고의 운동선수들을 영입했는데, 테니스의 존 메켄로와 안드레 아가시, 야구의 놀란 라이언, 미식축구의 디온 샌더스, 육상의 칼 루이스와 알베르토 살라자르, 축구·야구 스타인 보 잭슨, 농구 스타인 찰스 바클리와 스코티 피펜 등이다. 이후 타이거 우즈와 르브론 제임스 그리고 여성 테니스 선수인 세레나 윌리엄스가 추가되었다. 오리건주 비버턴의 나이키 본사는 수백 개의 청동 명패가 보관되어 있고 곳곳에 거대한 현수막이 휘날리는 운동선수들의 성지가 되었다. 서로 다른 스포츠 분야의 운동선수들을 이용하는 홍보 전략으로 나이키는 시장에서 단일한 엄브렐러 브랜드(Umbrella Brand)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는 전략을 펼 수 있었다. 미국의 10대들은 1년 평균 10개의 운동화를 구입하는데 6개는 스포츠용으로, 나머지 4개는 패션용으로 구입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6백만 명의 십대들이 연간 10억 달러 이상의 나이키 신발을 구입한다.6) 1996년 아틀란틱 하계 올림픽 기간 동안 나이키는 ‘당신은 은메달을 딴 것이 아니라 금메달을 놓친 것이라는 광고를 TV, 게시판 등을 통하여 보여 주었다. 스폰서 기업이 되기 위해서 나이키는 올림픽위원회에 4천만 달러를 내는 대신에 수백 명의 운동선수와 소속 팀에게 스우시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과 운동화를 제공함으로써 나이키의 로고가 일반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횟수를 늘리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나이키의 1996년 매출액 65억 달러를 20세기 말까지 120억 달러로 늘리기 위해 나이트는 새로운 목표 3가지를 설정하였다. 여성 스포츠, 해외시장, 나이키타운 매장이다. 최고 여성 운동선수 수십 명과 계약을 하고 판촉 지원을 하였으며 어린 소녀들이 부모에게 인형대신 공을 사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광고에 그리기도 하였다. 나이키는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그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들이 나이키 제품을 구입하는 비용이 연평균 12달러 정도지만 독일에서는 2달러에 불과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나이키는 각국의 최고 선수들과 계약을 했는데 일본에서는 야구선수 노모 히데오, 아르헨티나 축구팀의 보카 주니어스, 독일의 포물러 경주용 자동차 챔피언인 마이틀 슈마허이다. 나이키는 1993년 시카고에 나이키 타운 슈퍼스토어(Nike Town superstore)를 개장했다. 이 매장은 네이비 피어(the Navy pier), 링컨 동물원과 함께 이 지역의 관광명소 중 한 곳이 되었다. 1996년 11월에는 뉴욕 57번 스트리트에 9만 평방피트 규모의 7번째 나이키 타운을 개설했다. 이 건물은 도널드 트럼프로 임대료가 연간 약 천만 달러였다.7) 이 거대한 스포츠 용품 전문점에는 수백 가지 종류의 나이키 신발을 비롯하여 인라인 스케이트, 수영복, 하키장비, 스포츠 선글라스 등 다양한 종류의 나이키 제품을 판매했다. 매장에는 각각의 스포츠를 위한 방도 마련하였으며 제품을 직접 착용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농구 코트에서는 소비자들이 다양한 신발을 직접 신어 볼 수 있게 하였다. 나이키가 후원하는 스포츠 스타들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그들이 직접 사인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멀티스크린을 통해서는 소비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광고가 방영되었고 몇몇 고객은 서너 켤레의 운동화와 다른 여러 가지 스포츠 용품들을 한꺼번에 구매하기도 하였다.
5.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혐의 미국 기업들이 후진국에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공장, 일명 스웨트숍을 운영하고 있다는 보도가 1996년 여름 흘러나왔다. 최근 몇 년 동안 다국적 기업들은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해외로부터 아웃소싱을 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업계가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특히 신발과 의류업계가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나이키는 해외로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자는 취지로 활동하는 단체인 메이드 인 US 화운데이션(Made in the U.S.A. Foundation)의 표적이 되었다. 이 단체는 나이키의 상징인 마이클 조던에게서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제품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해외의 노동자들이 만들고 있는 줄 몰랐다는 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필 나이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잡지에 아시아 아동들의 노동 실태에 관한 기사가 실리자 비난 여론이 더욱 거세졌다. 노동부 장관인 로버트 라이히가 이끄는 ‘파울 볼’ 캠페인까지 시작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 캠페인은 파키스탄의 소년, 소녀들이 만드는 축구공을 구입하지 말자는 취지의 운동이었으며 물론 나이키 제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 의회의원들은 아동의 노동력으로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 대해 수입을 금지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컬럼니스트인 아니라 버코우는 이 문제를 전혀 몰랐다는 마이클 조던의 발언을 비난하였다.8) 1997년 10월 17일에는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진 댄 래더의 프로그램과 48시간에서 나이키를 비난하기도 했다. 나이키에 대한 공격은 1997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시민단체에서는 베트남의 나이키 공장의 노동자들은 심각한 저임금에 시달리며 화장실에 가는 것도 쉽지 않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일을 하는 도중에 마시는 물을 두 잔으로 제한하는 일도 있었으며 언어폭력, 성희롱, 뜨거운 태양아래 여러 시간 서있게 하는 벌을 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이키 임원은 해외공장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우리에게 정보를 달라. 그러면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9) 1997년 초 나이키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국의 문(the Heaven's Gate)이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신자 37명이 캘리포니아의 한 주택에서 집단자살을 했다. 문제는 이들 모두가 나이키의 검정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TV와 사진 보도에 나이키를 상징하는 스우시 로고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이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나이키의 슬로건 때문이라고 험담을 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나이키의 슬로건을 ‘저스트 디드 잇(Just Did It)'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1) 결과 처음에는 이러한 비난이 매출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비자들은 멀리 떨어진 아시아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추악한 자살사건에 나이키가 관여되었다는 것은 브랜드 충성도가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나이키의 로고와 슬로건이 사람들에게 깊숙하게 침투되었음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1997년 4월 초, 대통령 직속 태스크포스 팀에서는 전 세계 의류업계의 노동력 착취공장을 근절하기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8개월간 운영 될 이 팀은 노조와 인권단체, 그리고 나이키, 리복, 리즈클레이븐 같은 의류와 신발을 주로 제조하는 업체,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종용받은 여러 미국기업체들로 구성되었다. 이 와중에서 나이키가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타이거 우즈였다. 그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마스터즈 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이 경기를 치르면서 우즈는 최연소 챔피언이며 골프대회 가운데 가장 유서 깊은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소수민족이라는 타이틀을 포함해서 9개 분야에서 기록을 경신하거나 타이를 기록하였다. 경기 내내 우즈는 스우시 로고가 새겨진 나이키 옷을 입고 있어서 나이키 제품을 홍보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마스터즈 다음 날, ABC 뉴스에서 타이거 우즈와 계약을 맺은 후 나이키 골프 의류 매출이 100%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2) 걷히지 않는 먹구름 나이키를 싸고 있는 문제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시아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도 그치지 않은데다 아시아의 심각한 경기 침체로 매출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국내경제 침체로 일본에서만 운동화 재고 물량이 약 2백만 켤레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10) 이러한 상황이 몇 달간 지속될지 아니면 몇 년간 계속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운동선수들에 대한 시민들의 물만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98년 가을, 야구 스타인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도 자신들의 능력만큼 큰 광고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기업들은 운동선수를 활용하는 제품홍보 비용과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프로 선수들에게 열광하던 팬들이 점차 감소하고 있었으며, 나이키가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운동선수들이 이기적이고 거만하며 퇴폐적이라는데 대해 시민들이 대단히 분노하였다. 1998년 가을과 겨울에 NBA와 수백만 달러를 버는 선수들 사이의 분쟁으로 발생한 노조파업으로 몇 주간 경기가 취소되자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나이키는 스타 홍보 예산을 거의 1억 달러 가량 줄였으며 타이거 우즈와의 계약도 끝냈다. 타이거 우즈의 신발과 의류 제품은 1998년 초 출시되었지만 너무 고가이어서 시장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이 밖에도 몇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스포츠 용품 전문점 시장은 합병 결과 수백 개의 매장이 문을 닫았고 나이키 아울렛 매장 수도 줄어들었다. 운동화 업계는 단순하게 육상용, 야구, 에어로빅 운동화에서 팀버랜드(Timberland)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로 확대되었고 곧이어 갈색 신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팀버랜드 위협 외에 나이키의 주력 부문에서도 경쟁이 점점 치열해졌다. 유럽의 선두주자인 아디다스는 미국시장에서 수십년 전 나이키에 패했지만 1998년 1분기에 북미 시장 매출이 92% 성장하면서 재도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리복과 뉴밸런스도 운동화 시장에서 나이키를 적극적으로 추격하고 있었다. 또한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같은 패션 브랜드들도 운동화 시장에 진출하였다. 예상치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서 나이키는 사태를 면밀히 분석 후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나이키는 골프, 축구, 여성 부분을 별도 사업부로 독립시켜 조직을 축소했다. 새로운 광고 캠페인에서는 표현을 좀더 부드럽게 한 ‘아이 캔(I can)'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했다. 또한 스우시 로고도 점차 줄여, 화사의 레터헤드와 대부분 광고에서 스우시 로고를 빼고 대신 소문자로 ’nike'라고 표기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35억 달러의 재산가인 나이트와 광고비로 나이키애서 수백만 달러를 받는 마이클 조던을 해외 노동자들의 수입과 비교하여 악의적인 비난을 하였다. 1998년 5월 31일에 끝난 회계연도 실적에서 나이키의 순수입은 49.8% 하락하여 4년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이것은 1995년 이래 순수입으로는 가장 낮은 수치였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아웃소싱에 나서면서 비난의 목소리도 차츰 줄어들고 있다. 아시아의 경제상황도 개선되었으며 스타급 운동선수들이 관련된 추문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을 이용한 홍보에 대한 소비자들이 비난도 줄고 있다. 6. 평가
나이키가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한 1970년대는 조깅 붐 등으로 나이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깅 붐 등 유리한 환경만이 나이키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키는 당시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아디다스를 비롯하여 모든 국내외의 경쟁업체를 물리쳤다. 당시는 아디다스, 푸마, 타이거 같은 해외업체의 브랜드들이 스타일이나 품질 그리고 신뢰성면에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나이키는 스타일 다양화 전략을 처음 실행했던 아디다스보다도 더 광범위한 제품 라인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지나치게 다양화된 제품라인은 효율성을 떨어지게 할 수 있고, 소비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며 원가도 높게 된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가능한 제품 라인을 줄이고 잘 나가는 제품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도록 상대적으로 쳐지는 제품을 정리한다. 이러한 일반적 원칙을 깨는 사례가 나이키였다. 나이키는 스타일, 가격, 용도 면에서 매우 다양한 제품을 출시하여 거의 모든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이키는 가장 많은 종류의 운동화를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모든 종류의 신발이 다 있다는 점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시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제품군을 가지고 있어 진출할 수 있는 시장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나이키는 백화점과 신발 매장과 같은 전통적인 소매업체에도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고 운동화 전문매장과도 지속적인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나이키는 충분한 스타일의 제품을 가지고 있어서 할인점에 몇 가지 독점적인 모델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소매 아울렛에는 또 다른 종류의 모델을 공급할 수 있어 소비자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제품라인의 운영기간이 짧고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는 생산비가 많이 든다. 그러나 나이키에게 이 문제가 되지 못했다. 제품의 대부분을 하청 생산하였기 때문에 제품라인의 짧은 운영기간이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이키는 초창기부터 연구와 기술적인 혁신을 강조하여 운동선수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기존 제품보다 속력을 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회사의 연구 개발 분야의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생물 기계학, 운동 생리학, 공학, 산업디자인, 화학 그리고 그 밖의 관련분야의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연구위원회와 코치, 운동선수, 트레이너, 장비 관리자, 족병 전문의, 정형외과 의사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두어 개선된 운동화의 디자인, 재료, 개념 등을 검토하였다. 신발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고속사진으로 찍어 분석하였으며 운동선수에게 직접 착용시켜 러닝머신에서 뛰어 보도록 하였다. 1981년 나이키의 연구 개발비 예산이 4백만 달러였는데 이는 신발이라는 단일 품목에 대한 연구 개발비로는 큰 편이었다. 처음에는 나이키는 아디다스가 수십 년 동안 확립해온 업계의 기존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 좋은 운동화를 개발하여 테스트하고 고객들에게 어필하도록 제품을 다양화하였다. 자사의 제품에 눈에 잘 띄는 트레이드 마크와 로고를 부착하고, 유명한 운동선수를 활용하여 제품을 홍보하였다. 생산비가 저렴한 해외에 제품생산을 아웃소싱한 것도 나이키만 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이키가 다른 경쟁업체보다 이러한 활동들을 한 결 더 잘 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나이키가 자신만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나이키와 함께 ‘저스트 두 잇’이라는 스포츠 정신을 떠올리고 유명한 스포츠 스타와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러한 나이키의 제품은 특히 젊은 소비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스포츠 영역은 유지하면서 여러 제품 분야로 확대해 더 큰 성공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 7. 윤리공방
나이키가 아동을 노동 인력으로 이용하는 해외업체에 생산하청을 준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인가? 나이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나이키가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형편없는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시킨 것은 기업 윤리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이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발이나 의류공장의 상황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나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나이키를 옹호했다. 나이트는 나이키가 아시아에서 아주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믿고 있다.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기업이란 이들 나라를 가난에서 구제해주는 기업이다. 우리가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 곳 공장 노동자들은 기껏 하루에 4달러를 벌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현재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받는 금액으로 사람들이 강력히 비난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가난한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만이나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을 지켜보았고 이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11) 나이키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12만 인도네시아인들 중 대부분은 가난한 시골 출신들이다. 이들은 나이키 공장에서 번 돈으로 저축을 하고 남는 돈은 가족에게 보낸다. 공장 노동자들은 시골 농부, 마을의 학교 선생님, 가게 점원의 딸들이다. 이들은 공장이 위치한 마을에 함께 살면서 12명이 한 방에서 기거하고 2단 침대에서 잠을 잔다. 이들에게 이러한 일자리가 없다면 더 잘살 수 있는가? 공장이 폐쇄되면 이들 중 일부는 노숙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똑같은 생각의 잣대를 다른 사회에 들이대는 것은 올은 일인가? 8. 토론
1) 나이키는 너무 많은 수익을 챙긴다고 비난받는다. 원가는 얼마 되지 않는 신발과 옷에 무척 비싼 가격을 매긴다. 나이키가 현재의 정책을 계속한다면 나이키의 인기는 하락할 것으로 보는가? 2) 스타급 선수를 이용한 광고가 지나친 상황인가? 만약 제품을 광고하기 위해서 어떤 선수에게 수백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면 그만큼 광고가 효과가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3) 미국이나 한국의 가치 기준을 제3세계 국가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각주)----------------- 각주)----------------- 커트 베이뎀하우저, “슬램 덩크,” 포브스(2004년 2월 16일), p. 68.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포브스 선정 400,” 포브스(1983년 가을), p. 104. 포브스(1982년 1월 4일), p. 246. 플레밍 믹스, “무자비하게 싸워라,” 포브스(1993년 8월 2일), p. 41; "입고 있는 옷으로 당신의 수준이 결정된다,“ p. 44. 위의 자료, p. 45. 위의 자료, p. 46. 마크 오키프와 제프 매닝, “기업들이 죄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메고 있다,”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1996년 7월 28일), pp. 1-I, 3-I. “시민단체의 말에 의하면 베트남 나이키 공장 노동자들이 학대로 고통받고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1997년 3월 28일), B15. 웬디 바운즈와 힐러리 스타우트, “노동착취공장 계약: 적절한가? 아니면 엉망인가?” 월 스트리트 저널(1997년 4월 10일), A2. “나이키 인도네시아 공장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고 이에 대한 비난도 계속되고 있다,”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1996년 8월 27일), p. 10-C. 윌리암 맥콜, “나이키라 옛날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서 악평에 저항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1998년 10월 11일), p. 1-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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