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허진호
출연: 한석규(정원),심은하(다림), 이용녀(발레 아줌마 역), 류광철(공익근무요원2 역), 장혜윤(주차 단속원 1 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
서울의 변두리, 나이든 아버지(신구 분)로부터 물려받게 된 정원(한석규 분)의 작은 사진관에는 중학생 꼬마 녀석들이 여학교
단체 사진을 가져와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을 확대해 달라며 아우성을 치는 소란스러움이, 머리 큰 여자의 에피소드가
주는 정겨움이, 젊은 시절 사진을 가지고 와 복원해가는 아주머니의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혼자
찾아와 영정 사진을 찍는 눈물나는 사연들이 있다.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정원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동안 정원은 많은 감정의 변화를 겪었고 이제 겨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정원의 곁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역까지 맡아 반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이따금 집에 들리는
결혼한 여동생 정숙(오지혜 분)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림(심은하 분)이라는 아가씨가 나타나는데, 그녀는 정원의 사진관
근처 도로에서 주차 단속을 하는 아가씨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사진관 앞을 지나고, 단속한 차량의 사진을 맡기는 다림은
차츰 정원의 일상이 되어가는데.
[스포일러] 스무살 초반의 다림은 당돌하고 생기가 넘친다. 다림은 잘못 찍어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놓고 정원의 잘못이라
우기기도 하고, 한낮의 땡볕을 피해 사진관으로 피해 들어와 여름이 싫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정원은 죽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다림에게서 초여름 과일의 풋풋함을 느낀다. 그녀가 정원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다. 필름을 넣어달라며 당돌하게 요구해도 군소리 없이 빙그레 웃으며 넣어주고, 주차 단속 중에 있었던 불쾌한 일들을
불평해도 군소리 없이 다 들어준다. 그녀는 정원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정원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다림이 사진관에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정원.
어느날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실려가고, 이제는 살고 싶어지는게 어떤 것인지 알기에 다림을 보는게 두렵다.
정원의 상태를 모르는 다림은 문닫힌 사진관 앞을 몇번이고 서성인다. 기다리다 못한 다림은 편지를 써서 사진관의 닫힌
문 틈에 억지로 우겨 넣지만 사진관은 쉽게 문을 열지 않는다. 어느덧 다림도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 더 이상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는다. 정원은 다림을 만나러 근무지로 가지만 까페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다림의 동선을 안타까운 듯
손가락으로 그리며 지켜보기만 하다 돌아온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정원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 다림이 사진관을
찾아온다. 사진관은 출장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문이 닫혀있다. 사진관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다림의 시선이 한곳에 머무는데,
그의 죽음을 모르는 듯 얼굴에 함박 웃음이 가득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떠나는 다림의 뒤로 사진관의 진열장엔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흑백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삶을 사는 사진사와 주차 단속원 아가씨와의 순수하고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수작 멜러물. 한석규에겐
6번째 영화로, 데뷔작으로 뛰어난 연출 솜씨를 보여준 신예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심은하는 드라마 <백야 3.98>의 촬영과 겹쳐 최초 캐스팅에선 난항이 있었다. 결국 드라마 촬영 일정이
한달 이상 연기되어 이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내 개봉에선 서울에서 44만 명의 관객이 들었으며, 99년 여름,
일본에도 소개되어 큰 호응을 얻으며 심은하에겐 수많은 일본 팬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가사키 슌이치 감독에
의해 2005년 리메이크 되었다.
영화는 일관된 '절제의 미학'으로 정서를 고조시켜 큰 찬사를 받았다. 촬영은 잔재주 없이 거의 롱테이크와 카메라 고정
쇼트로 일관하며, 남자 주인공의 병명도 알려주지 않는 등 설명적 표현은 극도로 자제하였다. 단 한마디 대사도 없이
영상과 음향, 음악만 이어지는 마지막 17분은 긴 여운을 주기 충분하다. 우리나라 영화 촬영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 유영길 촬영감독에게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좋은 구도는 없다. 다만 나쁜 구도는 작위적인
것이다'라는 자신만의 영상 세계를 펼쳤던 그는 이 작품 이후 <가족 시네마>의 촬영 준비 중에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한국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
아스라이 멀어져간 젊은 날을 기억하게 해 주기도 하고
더 어린 날의 눈부신 꿈들을 떠올리게도 해 주는 힐링 영화 ^^
여주의 상큼한 미모도 멋지지만
촬영 감독님이 심혈을 기울여 보여주신 영상이 참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