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노르시 입구에 있는 나착도르지 시비(미니 노탁이라는 시의 앞부분이 쓰여져 있다)
우리는 바그노르로 향했다.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소떼들이 저녁이 되어 집으로 가는 모양인지 차가 지나가는 길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앞을 보니 도시입구를 표시하는 조형물이 있었다. 바그노르허트였다. 옆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몽골의 김소월이라고 하는 나착도르지의 시비였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투문바야르를 만나 외운 몽골시 “미니 노탁” 의 첫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내가 좋아해 외운 시가 몽골의 한 도시에서는 이렇게 기념되고 있다니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다.
나착도르지
1906년 태어나 1937년 겨우 32살의 나이로 죽은 나착도르지는 몽골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나착도르지는 이미 몰락한 칭기스칸의 후예였던 타이지 집안에서 태어나 8살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6살에 몽골의 독립영웅 수흐바트르 사령관의 서기로 있다가 18살에 몽골 인민혁명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몽골 혁명청년동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되었고 기관지 "인민군"의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21살에 아내 파그마돌람과 함께 독일 유학을 떠나게 되는 기회를 얻었고,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동방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하였다. 당시 아내는 의과대학 실험실에서 공부를 하였다.
1929년 다른 유럽 유학생들과 함께 소환이 되었고 1930년 출당되었다. 그리고 아편중독에 걸린 아내와 이혼을 하였고1932년 말에 러시아인 아내 니나 치스짜코바와 결혼을 하였다. 국립중앙극장 전속작가로 있었고 아카데미 연구원으로 있었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는 회수가 늘어났다. 진짜 이유는 나착도르지의 출신이 타이지가문이며, 해외 유학을 하여 전형적인 부르조아라는 것이었다.
1936년 구금상태에서 석방이 되었지만 그의 아내 니나 치스짜코바와 그의 딸 아난다시리가 러시아로 추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병중에 있었고 신병치료를 위해 아내가 있는 러시아로 가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하였고 천신만고 끝에 청원이 승인되었지만 이내 승인이 취소되었고 1937년 7월 13일 길을 가다가 죽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을 가다가 갑자기 죽었던 것이다. 그는 죽어서 몽골인의 가슴속에 가장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미니 노탁 (나의 고향)
헨티 항가이 서여니 운드루 새이항 노르노드 (헨티, 항가이, 서연 같은 높고 아름다운 산맥들)
호잇 주긴 치멕 벌승 어이 훕칭 오올노드 (북방을 꾸며주는 숲, 산줄기, 산들)
메넹 사르가 노미니 우르궁 이흐 고위오드 (메넹, 사르가, 노밍 같은 광막한 사막들)
우믄 주긴 망래 벌승 엘셈 망한 달라이노드 (남방을 빛내주는 모래 언덕의 바다들)
인벌 미니 투르승 노탁 몽골링 새이항 얼릉 (여기는 내가 태어난 고향, 몽골의 아름다운 나라)
노을이 저물어 가는 길을 소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그노르 허트의 조형물 앞에서
마이드르가 조형물에 올라가 있다.
사진을 찍으로 하니 마이드르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착도르지 시비앞에서 기쁜 마음으로 한장
바그노르는 인구 약 3만의 작은 주거도시였다. 도시 입구 광장에는 나착도르지가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었다. 전에 군사도시여서 소련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민주화 이후에는 거의 물러갔다고 한다. 최근에는 노천탄광이 개발되어 탄광도시로 알려져 있다. 투문바야르가 사는 아파트는 5층 건물이었는데 투문바야르 아파트는 1층이었다. 아파트에 짐을 풀고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은 채소볶음과 양고기였는데 그동안 몽골음식만 먹어서 그랬는지 조금 기름기가 느껴져 준비해 간 고추장을 꺼내 발라먹었다. 마이드르는 중국에서 먹어본 적이 있다며 고추장을 꽤 많이 발라먹었지만 투문바야르는 먹지 않았다. 아이륵 한통을 마신 후 몽골보드카 “하라”를 마셨다. 하라는 징기스보드카에 비하여 가격은 싸지만 맛은 비슷해서 투문바야르가 즐긴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사람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껴 있었는데 그래도 도시는 선명하게 보였다. 중심지를 조금 벗어나니 단층 나무집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구도시로 보였다. 아파트 주변으로 돌아와 투문바야르의 아파트를 기념으로 찍고 있는데 건너편 아파트 창가에서 한 아이가 쳐다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자 곧 사라졌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나착도르지가 탄생한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웅장한 3층 건물 (몽골의 건강,행복원?)
바그노르시 전경1 (도심지의 뒤쪽)
바그노르시 전경2
구도심으로 추정되는 가옥들
투문바야르의 아파트 (1층에는 후스니 델구르가 있다)
투문바야르가 정성껏 가꾸는 정원 (초목이 울창하게 자라기는 힘드나 투문바야르의 초록에 대한 의지는 대단)
창가의 아이는 내가 손을 흔들자 이내 들어가 버렸다.
차로 4,50분 정도 이동하자 “누룬테 언덕”에 대해 투문바야르가 설명을 했다. 미니노탁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시에는 누룬테 언덕이 여러번 언급되는데 나착도르지는 고향을 많이 그리워 했다는 것이다. 투문바야르 역시 고향에 많은 애착을 느껴 아파트를 사놓고 한달에 두 번은 와서 자고 간다는 것이었다. 가는 도중에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10일 넘는 긴장이 계속되는 여행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남은 여행을 잘 마치려면 관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평지의 초원에서 약간 올라가는 언덕이 나왔다. 언덕을 오르니 왼쪽에는 군사시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어워가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또 다시 초원이 펼쳐졌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나착도르지가 탄생한 그리고 또 그가 항상 그리워했다는 누룬테 언덕이었다. 또한 투문바야르의 탄생지이기도 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어워에 돌을 하나 보태고 두 바퀴를 돌았다. 나는 합장을 하고 여행이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오른쪽의 멀리는 노천탄광이 있었는데 경제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지는 모르지만 초원의 드넓음을 가로막는 보기 좋지 않은 흉물이었다. 군 초소에서 여자군인이 나와 몇마디를 물었다. 나는 마이드르에게 몽골에서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냐고 물었더니 직업군인이라는 것이었다. 누룬테 언덕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징기스칸 군대의 겨울 야영지였다는 “바잉울랑”산의 남쪽 야영지, 그리고 헤를릉강 주변을 돌아보기로 하고 출발했다.
누룬테 언덕의 왼쪽은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누룬테 언덕 오른쪽에 있는 어워에서 투문바야르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한장
누룬테 언덕 중앙쪽
누룬테 언덕 좌측
누룬테 언덕 오른쪽 (노천 탄광으로 인조 언덕이 새로 생겨나 흉물스럽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