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진주삼일교회나눔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 송(곽무홍)
◇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창설자 H. G. 아펜젤러(1858-1902) 1세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6-04 (107 호), 2005-04-19 (146 호)
아펜셀러 선교사님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지난 시간에는 우리 민족에게 최초로 오신 ,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러 선교사 가족의 삶과 사역을 통해 우리 민족을 사랑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도착하는 날 ,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 주여 !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 "
아펜셀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
그날도 , 아펜셀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항해 도중 ,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됩니다.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셀러 선교사는 즉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줍니다. 그가 소녀를 건지고 , 힘이 빠져 , 지친 상태로 , 겨우 배에 메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 파도에 휩쓸리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40세의 짧은 생 ....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 바치고 가셨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이고 , 그가 세운 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배제 중 고등학교입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아펜셀러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하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에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대 최초 한국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페셀러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하는 가슴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게 됩니다. 그는 6. 25 전쟁 때 ... 우리 민족을 위해 ,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게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해 주면서, 춥고 배고픈 이 민족에게 수 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었습니다.
헨리 다지 아펜셀러 선교사는 아버지가 못 다한 그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미국으로 치료차 가면서 " 내가 죽으면 절대로 미국에 묻지 말고 조선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간절히 조선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좋은 일하러 가신 우리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지낸 사춘기 시절을 있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하면서, 죤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된 땅,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 선교사님들이 묻힐 때 마다 오게 되면서,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 아펜셀러 선교사를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도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꼭 한국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유언 중에 이런 유언이 있습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 " 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펜셀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의 맞은 편에는, 1950년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 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습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님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은 ,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선교사님들의 희생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