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의 시조
나주정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의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이다.
우리나라의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지만 시조라고 해서 그 이전에 조상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 후세 자손들이 그 이전 조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전혀 모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있기 시작한 것이 1476년 즉 성종(成宗) 7년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부터니까 그때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최고 300-400년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소상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주정씨도 최초의 가첩(家牒)인 월헌첩(月軒帖)이 약 1520년, 즉 중종(中宗) 12년 전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려 중기의 정윤종을 시조로 적어놓은 것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권위 있는 보학자(譜學者)들의 주장도 왕실을 제외하고, 사가성(私家姓)의 시조추적은 그 상한선을 최고(最古)로 잡더라도 고려초기를 넘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만약에 그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 잡다한 기록을 해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100%가 다 날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702년경에 어느 타관 정씨(丁氏)가 특별한 목적 하에 정씨시조의 동래설(東來說)을 날조해서, 영광(靈光) 창원(昌原) 의성(義城) 나주(羅州) 등 본관이 서로 다른 여러 정씨(丁氏)들을 근거도 없이 무리하게 합쳐서, 한 조상 아래 여러 파계로 꾸며 합보(合譜)를 만들었다. 즉 당(唐)에서 재상을 지내다가 압해도로 유배되어 왔다는 정덕성(丁德盛)이라는 가상인물을 도시조(都始祖)로 내세워 상계(上系)를 임의로 조작해 놓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한국 그 어느 나라의 정사(正史)에도 일언반구의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날조행위였다는 것을 약 200년 전에 이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ㆍ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지난날의 오족(吾族) 석학들이 너무도 분명히 변증해 놓은 바가 있다.
최근에 와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 몇몇 권위 있는 학자들이 깊이 있는 연구를 해 놓은 것이 있다. 즉 이수건(李樹健)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한국의 성씨(貫)와 족보연구’, 신천식(申千湜) 명지대학교 교수의 ‘진주 석갑산 고분군의 명문(銘文) 검토’, 김언종(金彦鍾) 고려대학교 교수의 ‘압해정씨의 가계무구(家系誣構) 변파’, 이민홍(李敏弘)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고대 나주권역의 역사와 압해도 고분군’, 안영상(安泳翔) 고려대학교 교수의 ‘다산 정약용의 조상의식’, 정범진(丁範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의 ‘당 원화(元和)10년을미 진사30인 명단의 허구성과 정덕성에 대하여’ 등이 곧 그것이다.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 온 예가 전연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역사에 기록이 있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밖에 중국에서 인물을 끌어와서 시조로 삼은 사례는 지난날 우리나라에서 조작된 흔히 볼 수 있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잔재(殘滓)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이미 토성분정(土姓分定)을 받은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시조 및 조상 날조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신빙성 있는 우리 조상들의 기록을 근거로 고려 중엽의 정윤종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