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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본성의 상태
1장. 인간의 본성 상태의 죄악성(2강)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이전의 상태는 영광스러웠지만 타락 후에는 어둡고 암울한 상태가 되었다.
“본질의 상태”, 또는 “사람 본성의 상태”라고 부른다.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죄악이고, 둘째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처한 상태의 비참함이다.
죄악 중에,
1. 혼합 결혼(2절)
셋과 에녹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들”은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었지만 불경하고 저주받은 가인의 후손인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들의 욕망에 따라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선택했다. 하나님과의 이혼을 의미했다. 혼합 결혼의 죄는 대홍수를 가져왔지만 대홍수가 그 죄를 쓸어버리지는 않았다.
2. 큰 탄압(4절)
“당시에 네피림이 있었고” 사악했던 그들은 “온 땅을 포악함으로 가득”(창6:11) 채웠다.
그들의 기소 내용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 삶의 부패. 부패는 큰 악행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의 극악무도함을 보여 준다.
2. 본성의 부패.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악한 행실의 원천이었다. 본성적인 인간의 마음은 악한 계획의 공장이 되었고, 부적절한 감정의 온실이 되었으며, 모든 불경건의 창고가 되었다. 지각은 더럽혀져 있고, 생각은 악하며, 의지와 감정 역시 더렵혀졌다. 사람의 모든 계획과 생각의 모든 틀이 악하다. 그 공장 안에서는 성령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일을 한다”(엡2:2).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마음은 단 하나의 거룩한 생각도 내지 못한다. 분명히 부패는 우리 마음 안에 깊게 뿌리를 내렸고, 우리의 본성과 뒤섞여 있다. 아담의 타락은 모든 사람의 마음의 틀을 똑같이 만들어 버렸다.
대홍수가 사람 본성의 타락을 휩쓸어 가지는 못했어도 그 홍수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보여 줬다. 즉,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대홍수의 물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상징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벧전3:20-21, 딛3:5).
결론을 내린다면, 대홍수의 물이 지금은 말랐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거울이 된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과 따라서 중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중요한 교리를 얻게 된다. 즉, 사람의 본성은 지금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이다.
교리: 사람의 본성 안에서 슬픈 변화, 곧 믿기 힘든 전복이 발생했다.
처음에 사람의 본성 안에는 악한 것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선한 것이 전혀 없다.
Ⅰ. 본성의 타락 교리에 대한 확증
1. 성경은 타락한 아담이 그의 형상을 후손들에게 어떻게 전달했는지 특별하게 주목한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셨더라”(창5:1). 사람이 지음받을 때의 형상과 태어날 때의 형상이 상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패하고 죄악된 아담은 부패하고 죄악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죄와 사망은 모든 자에게 전달되었다.
2.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욥14:4에서 나타난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더러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죄악의 더러움이다. 할례받은 부모가 할례받지 않은 자녀를 낳는 것처럼, 가장 정결한 곡식을 심은 후에 알곡과 함께 쭉정이를 거두는 것처럼, 가장 거룩한 부모가 부정한 자녀를 낳는다. 그들은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을 자녀들에게 전달해 주지만 자신의 은혜를 전달해 줄 수는 없다.
3.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시편51:5의 다윗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했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4. 요3:6에서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확고한 주장은 모든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알려 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 의미는 모든 사람이 부패하고 죄악되다는 뜻이다. 그들이 육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생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는 분명하게 우리 본성의 부패를 입증한다.
5. 한때 사람이 누리던 상태와 비교하면 지금 사람은 분명히 매우 비천한 상태까지 내려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단지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는데, 지금 사람은 소멸되는 짐승들과 비기는 상태에 있다. 사람은 소와 당나귀보다 더 어리석다(사1:3).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잠6:6-8). 인간 안에는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 들나귀의 완고함, 개와 돼지의 더러움, 뱀의 독 등이 다 합쳐져 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마귀의 자녀들”.
6.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엡2:3). 우리는 본질상 죄악된 피조물이다.
이를 확인시켜 줄 몇 가지 제안.
1. 이 세상에 흘러넘치는 비참의 홍수를 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가난에 찌들었고, 어떤 사람은 병마와 고통으로 시련을 당하며,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고 애통한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이러저러한 십자가를 진다. 이 모든 상황들이 지나면 궁극적으로는 죄의 삯인 사망의 그림자가 다가와 모든 것을 쓸어 간다. 불평과 한숨,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타락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서 울음과 함께 첫 번째 호흡을 내쉬는 자들은 아직 실제로 죄를 짓지 않았어도 슬픔을 나눈다.
2. 본성의 타락은 아이들이 매우 어릴 때도 나타난다.
“비록 아이라도 그의 행동으로 그를 알 수 있다”(잠20:11),
3. 이 세상에 발생하는 수많은 끔찍한 죄를 보라.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4:2). 세상은 더러움으로 가득하며 온갖 종류의 음탕과 부정과 불경으로 넘친다. 이 땅에 넘치는 죄의 홍수는 인간의 마음 저 깊은 샘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불경하고 비열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당신을 거울로 보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 거울 속에서 당신 자신의 부패를 깨달아야 한다.
4. 인간의 정욕 때문에 이 세상이 처해 있는 끔찍한 난리를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라! 사자는 사자를 먹이로 삼지 않으며 늑대 역시 늑대를 먹이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사자와 늑대로 변해 서로 물고 삼킨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로부터 이 땅은 도살장으로 변했다. 강자가 계속 약자를 삼킨다. 그 싸움의 불길은 분명히 내부의 요인,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약4:1)으로부터 발생한다.
5. 공포를 막고 또한 악인을 형벌하기 위해 인간의 법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라.
1)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만의 완전한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법을 만들고 자기 멋대로 행하기를 원한다. 몇몇 사람들은 권력을 쥐게 되면서 그들의 본성에 따라 모든 법 위에 자신들을 절대화할 것이다. 처음에 이런 기괴망측한 인간의 의도는 신이 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창3:5)
2) 하지만 무법 사회에서 살려고 하는 무모한 자는 아무도 없다. 해적들과 강도들조차 그들 사이에 법을 만든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오직 법에 의한 보장을 받으려고 한다.
3) 울타리를 뚫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정욕의 세력에 무너져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한다. 잠시 누릴 쾌락을 위해 그들의 신뢰와 양심을 희생시킨다.
4) 법은 종종 인간의 정욕에 굴복당한다. 법이 대단한 권력과 담대함을 지닌 몇몇 사람 앞에서 그들의 맹렬한 정욕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경우는 항상 있어 왔다. 정욕이 법보다 너무 강해지면, 법은 죽어 가는 사람의 맥박처럼 해이해진다(합1:2-4)
5) 인간의 본성이 매우 강해져서 많은 열매를 내어 새로운 범죄들이 발생하게 되면, 오래된 법을 개정하여 새 법을 만들 필요가 종종 생겨난다. 사사기 18장에서 21장을 통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 그들 가운데 얼마나 끔찍한 혼동이 생겨났는지 볼 수 있다. 필자는 구약의 거룩한 역사를 통한 위대한 계획은 인간 본성의 타락 및 메시아와 그분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6.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 본성의 부패를 고려하라. 은혜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라 할지라도 부패가 제거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오랜 본성의 부패가 많이 남아 있다. 그들 안에서는 리브가의 태에 있던 쌍둥이처럼 본성의 부패와 은혜가 서로 다툰다. 그 본성은 그림자가 몸을 따라가듯이 그를 따라간다. 그의 부패한 본성은 그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 위에 얼룩을 칠한다. 그 본성의 뿌리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쇠와 놋을 섞어 만든 띠처럼 그 본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
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성도는 성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게 하는 은혜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이 새로운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옛 본성이 남아 있다.
2) 성도는 부패한 본성 아래서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신음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육신의 사람은 그가 죽어 있기 때문에 부패의 짓누르는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성도는 아픈 사람처럼 그의 안에 강한 갈등이 있다.
3) 경건한 신자는 부패한 옛 본성을 대항한다. 정원을 제대로 가꾸려면 부지런한 정원사가 날마다 썩은 것을 잘라 내고 잡초를 뽑는 등 항상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의 정원은 반드시 “가시떨기로 가득한” 정원이 될 수밖에 없다.
7. 모든 사람 안에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이 본성적으로 나타난다.
1) 우리에게 죄악된 호기심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우리가 오래된 딱딱한 교리들을 싫어하고 참신한 것들을 열렬히 찾는 것은 옛날 아담과 얼마나 비슷한가? 우리는 거룩함보다는 지식을 추구하며, 가장 건설적이지 않은 것들을 가장 알고 싶어하며 배운다. 선하고 순수한 감정은 소생되고 자극되어야 하는 반면 거칠게 방랑하는 우리의 욕망은 억제시킬 둘레가 필요하다.
2) 규제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욕구를 돋우지 않는가? 매일 관찰하는 본성의 법칙이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9:17). 주신 선한 나무의 열매를 거두는 대신에 금단의 열매는 먹는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3)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 미혹의 소리에 본성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 자가 있는가?
4) 종종 당신의 얼굴에 있는 눈이 지각의 눈을 어둡게 하지 않는가?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의 눈이 금단의 열매를 향해 열린 이후로 인간의 눈은 그들의 영혼을 멸망시키는 문이 되어 버렸다.
5) 영혼을 희생시켜서라도 몸을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우리 몸에 쏟는 수고의 반만이라도 우리 영혼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될까! 사람들은 행동하기 전에 육신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양심의 동의를 기다리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 양심이 저항할 때도 몸은 종종 섬김을 받는다. “그들은 육신이요”(요3:6)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롬8:5), “육신대로 산다.”(롬8:13)
6) 본성적으로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자신의 현재의 처지에 대해 완전하게 만족하지는 못한다. 부족한 것에 대해 은근히 불평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7) 우리는 선한 자문과 사례들 보다는 악한 자문과 사례들에 의해 더 쉽게 감명을 받고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양의 특성보다는 여우의 특성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사람들은 최선의 것을 행하기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이다.
8) 아담의 모든 후손들 가운데 누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걸리는 죄악들을 가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최선을 다해 멋진 색깔들을 칠하는지!
9) 아담의 자녀들은 본성적으로 아담의 발자취를 따른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만 앞에 있어도 부끄러워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어둠 속에서는 마치 전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마음껏 행한다.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한 가지다. 즉, 우리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교리를 믿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보혈을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시고, 또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시기 위해 성령의 효력을 적용하시는 둘째 아담이신 복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Ⅱ. 본성의 부패를 여러 부분에서 제시함
1. 이해의 부패에 대하여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그 부패의 지독함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만큼 중생의 절대적인 필요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본성상 전부 부패했다. 영혼에 있어서 본성의 타락은 모든 기능 전반, 곧 이해 의지 감정 양심 기억에 다 퍼졌다.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이해(깨달음, 총명)의 기능은 원래의 영광을 잃고 혼동으로 덮였다. 삼손이 블레셋의 손에 떨어져 두 눈을 뽑힌 것처럼 우리는 원수의 손에 떨어져 우리의 눈을 빼앗겼다. 아무도 깨닫는 자가 없다(롬3:11).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신령한 것들을 깨달을 수 없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50:12).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사람의 생각과 이성은 판단과 더불어 늘 악할 뿐이다.
인간의 지각은 영적인 것들과 관련해서 본성적으로 약하다. 맹인이라 보지 못한다(벧후1:9). 사람들에게 우리의 거룩한 종교의 공통 원리들을 가르쳐 그들이 그 진리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해야 한다(사28:10). 그들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매우 미련하여 배우지 못하지만,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자신의 탐욕을 채울 수 있는지 알려 주면 신속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 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실수를 하는지! 다른 면에서는 가장 지혜롭지만 영혼의 유익과 관련해서는 지독히 어리석은 자들을 보지 않는가? 잠시 있다 사라지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는 독수리처럼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어도, 영원한 실체들의 빛에 대해서는 마치 올빼미와 박쥐 같다. 참으로 모든 인간의 삶은 단지 꿈과 망상의 연속일 뿐이며, 오직 하늘로부터 쏘아진 새로운 빛이 그의 영혼에 들어와서 정신을 차리게 되거나(눅15:17), 지옥에서 고뇌 가운데 그의 눈을 위로 치켜들 때까지(눅16:23) 그는 절대 깨어나지 못한다.
사람의 이해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 본성적으로 지독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사람은 마귀의 선동에 따라 자신의 지각에 새로운 빛을 더해 보려 했다(창3:5). 하지만 그의 지각은 새로운 빛은커녕 무저갱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연기에 의해 어둠에 쌓이게 되었다. 죄가 영혼의 창문들을 닫자 어둠이 영혼 전체를 덮는다. 이제 영혼은 어둠의 땅이며 죽음의 그림자다. 우리는 영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나며 은혜의 기적 없이는 회복될 수 없다. 예수님 오셨을 때, 그들은 미신과 우상에 잠겼고 셀 수 없이 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널리 퍼뜨림으로서 유럽에만 3만개 이상의 우상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울타리를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신음하는 몇 사람 외에는 그 세대 전체에 지독한 어둠이 덮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져” 있었더라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자기의 교리에 있어서 대부분 부패해 있었다. 그들의 전통들은 많아졌지만 종교의 생명을 담은 지식들은 상실되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중생의 속성과 필요성에 대해 알지 못했다(요3:10). 그들은 거짓된 광택으로 율법을 치장한 후 겉으로는 율법을 거의 다 지키는 것처럼 행세했다(마5장).
참 빛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둠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주님이 샛별로 그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는 모든 영혼 위에 어둠이 덮여 있었다. 샛별은 어둠에 대한 증거다. 결론은 우리 지각의 본성적인 어둠은 아무런 치료제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안약만이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계3:18)
인간의 마음과 삶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멋지더라도 어둠과 무질서와 혼동의 덩어리다. 인류 가운데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마치 수많은 맹인처럼 온 세상을 걸어 다니며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 탐욕을 쫓다가 수많은 슬픔으로 인해 찢겨진다. 호색의 늪에 빠져 빠져나오지 못한다. 교만과 자만의 바위 위에 자신을 던져 산산조각이 난다. 펄펄 살아 있는 정욕과 감각이 이끄는 대로 열심히 다니면서 공의의 칼날 위에 자신들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거듭나지 못한 마음을 들여다보라.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늘은 아래에 놓여 있고 땅은 위에 있다. 당신은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를 무시하고 허상을 따라 열심히 날아다닌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빛 없이 남겨진 일꾼처럼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든지 또는 망치는 일을 한다.
본성적인 인간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애굽의 바로처럼 “여호와가 누구인가”(출5:2)라고 말하며 주께서 갈라서라고 말씀하시는 명령에 절대로 순복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각 안에는 악으로 기우는 본성적인 성향이 있다. 인간의 지각은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울기 때문에 기회만 닿으면 물 만난 고기처럼 매우 쉽게 악을 행한다(렘4:22).
부패한 지각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여러 국가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우상들과 형상들이 교회로부터 추방된 사실에 대해 주님께 찬양을 드린다. 하지만 마음의 개혁만이 정신적인 우상을 무너뜨릴 수 있고, 더욱 교묘하고 세련된 형상 예배와 신성의 표시들을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정신적인 우상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늘의 영광 및 모든 영적인 것들에 대한 끔찍하고 괴팍한 기형적인 사고들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주께로부터 오는 은혜는 마음을 고정시킬 수 있다(시108:1).
육신의 지각을 좋은 생각에 가두기는 어려워도, 그것은 악하고 부패한 것에는 풀처럼 달라붙는다.
솔로몬은 꿈이나 상상으로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최고의 치료법을 처방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법”(잠6:20-21)이다. “네가 잘 때에” 그것이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한다(잠6:22). 즉,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이 나타내는 즉각적인 효과는 사람이 고난 당하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서 범죄하지 않도록 막아 준다(시119:11). 그러므로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알려 준다. 명령과 법과 훈계의 책망은 평강의 길로 인도하지는 않지만 의무의 길로 인도하며, 어려움에서 나오게 하지는 않지만 죄로부터 지켜 준다.
육신의 지각은 영적인 진리를 대적하면서 받아들이기를 싫어한다. 육신의 지각은 거룩과 친하지 않기 때문에 신령한 진리들을 싫어한다. 그리스도의 영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 내적인 조명의 복을 받아 신령한 진리와 하늘의 영광을 아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유혹과 시련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파선시키던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2).
사람의 지각 안에는 그의 정욕이 좋아하는 거짓과 허위에 치우치는 본성이 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 마귀의 신조 첫 번째 조항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이다. 참된 경건은 “경건에 따른 교훈”(딤전6:3)이며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딛1:1)다. 오류는 불경건에 따르는 교훈이다. 즉, 인간 지각의 오류와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비진리와 종교에서의 거짓은 마음의 부패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생각이 교만해져 있다. 이에 복음이 능력 가운데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고후10:5). 겸손한 생각은 본성의 뜰에서 자라나는 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심겨진 새로운 마음에서 자라나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