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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情萬里
-小白山일대 山行己-1967. 1,10 趙必大 梨花女子大學校 獨文學 敎授
-나그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해가 짧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해가 질 때 까지 길을 가야 한다. 山과 酒幕을 따라 樂山樂水의 길을 떠나보자.-
<충주-수안보 온천>
1967년 1월 10일. 소한과 대한(6일과 21일)사이의 여행이므로 내복을 잔뜩 주워 입고 길을 나섰더니 버스 앞자리에서는 약간 더울 정도이다. 알고 보니 이차는 히타장치가 되어있다. 바깥기온은 영하 십삼도가량. 일행은 나까지 세 명. 짐은 각기 약 10킬로 정도이다. 서울에서 충주까지는 자동차 급행도 있지만 버스 편이 훨씬 빠르다. 서울운동장 옆에서 직행차가 출발한 것이 오전 10시반. 이천읍을 조금 지나니 도로 왼편에 <온천호텔>이란 간판이 보인다. 충주까지 오는 도중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이 어느 마을 다쓰러져 가는 초가집에다 <현대미술연구소>라고 써 붙인 간판이다. 광주를 지나자 희끗희끗 보이던 눈이 이천을 지나 장호원에 이르니 약 15센치 가량 쌓여있다. 작년 섣달그믐날에 내린 눈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갈수록 더욱 짙어진다는 것이다. 충주에는 오후 두시 반에 닿았다. 삼백 육십리 길인데 네 시간이 거린 셈이다. 요금은 285원.
충주는 별로 오는 일이 없는 곳이지만 과수원이 많은 곳이어서 조용하고 깨끗하여 아담한 고을이란 인상을 우선 안겨준다. 한편 충주시가 일찍이 속해 있었던 중원군이란 이름이 나에게는 무척 이국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수안보 온천까지는 50리길인데 버스도 자주 있고 택시, 마이크로버스도 수시로 운행되고 있어 편리하다. 충주에서 점심을 먹고 차 시간 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므로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거닐고 있노라니 <돌체>라는 다방이 나타난다. 쉬면서 지도를 펴들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청년 두 명이 우리더러 어디까지 가느냐, 무슨 목적으로 가느냐고 번갈아 물어본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가노라고 말했더니 학생은 아닌 것 같은 두 사람 중 한사람이 가가대소하면서 무릎을 탁 치더니 ‘기어 우리도 좀 꼭 데리고 가주십시오’ 한다. 또한 오늘은 수안보에서 쉴 것 없이 자기네들 집에서 자고 그동안에 만반 준비를 할 테니 꼭 좀 그렇게 해달라고 간청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갈 길이 멀고 스케줄이 꼭 짜여 있어서 아무래도 오늘밤은 수안보에서 보내야한다는 것을 타이르듯이 말하고 계룡산까지의 도로를 상세히 가르쳐 준 후 섭섭하게 생각하는 그들을 뒤로 한 채 다방을 나왔다. 아마도 그들은 살기가 괜찮은 청년들인 모양으로 겨울 길을 나선 우리들의 모습이 몹시 반가워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산을 좋아한다는 그들은 우리 뒤를 따라 정류소까지 전송을 나와 주었다. 수안보에 닿은 것은 오후 다섯 시 반경. 조그만 마을이다. 비용에 제한이 있으므로 오늘밤은 함흥여인숙(주인은 조경환씨)이란 데서 자기로 한다. 여관은 호텔이라고 불리는 ‘산수장’ 외에 두 군데가 있지만 어느 여관도 내탕은 없고 오직 한 곳의 관광호텔인 산수장과 거기서 경영하는 공동탕에서만 목욕을 할 수 있다. 물론 독탕은 있다. 온천물은 섭씨 53도로 뜨거운 편이다. 이전에는 물이 차서 별로 인기가 없던 이 곳 온천은 재작년에 새로 온천 탕원을 발견하여 지금은 전국 제일의 고온탕이 된 것이다. 밤중에는 파이프를 잠그므로 새벽 여섯시 경이 가장 적당한 수온이지만 우리가 들어간 초저녁 시간에는 보통사람들은 탕조에 들어가기가 곤란하여 매우 익숙한 사람만이 1분정도 몸을 담글 수 있다고 한다. 금년 가을 까지는 호텔 뒤편 산허리에 새로 수온을 조절하는 공동탕과 가족탕이 세워 진다고 한다. 이 온천도 온양과 마찬가지로 라디움 광천이어서 피부가 거친 사람들한테는 특히 효과가 있으므로 나는 이곳에 다시 오는 것을 또 하나의 낙으로 삼게 되었다. 거칠은 내손이 단 한번의 입욕으로 이튿날 아침 놀랄 정도로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식당도 한두 곳 있으나 여인숙이라는 간판이 많이 눈에 띈다. 송죽이란 조그만 다방이 한 곳 있을 뿐으로 이 마을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들 뜬 온천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이다. 또한 사방이 산이어서 단번에 맘에 들었다. 숙박료도 싸서 1박1식에 3인분이 불과 350원이다. 이름이 여인숙이지 이불도 깨끗하여 여관과 조금도 다름없다. 서울의 2류 정도는 충분하다. 조용한 산골이어서 초저녁부터 죽은 듯이 온 누리가 잠자고 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숙박객도 우리들 외에는 두 서너명 뿐이다. 목욕을 하고 거리로 나와 우리식당이라는 데서 백반을 주문했더니 반찬이 괜찮다. 주인이 방에 들어와서 인사를 청할 정도로 이곳은 아직도 순박한 인심이 가시지 않고 머물러 있어 아득한 그 옛날에 역체소(驛遞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웃고 떠드는 소리에 안주인도 들어왔다. 덕택으로 부근 산과 지리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
나그네의 敵 짧은 저녁 해
<漱玉亭-새재(鳥嶺)-聞慶>
1967년 1월 11일. 오늘부터는 법주사까지 내쳐 도보길이다. 차를 타는 것은 수안보에서 수옥정까지 20리와 문경서 이화령까지 15리 뿐이다. 아침 9시경 여관을 나섰다. 우리의 여행 기간은 대략 10여일인데 매식을 할 수 있는 곳에서는 밥을 사먹는다고 치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식량만으로도 이번 벽지 여행은 충분한 안도감을 갖고 다닐 수 있는 셈이다. 절약해서 먹으면 열흘쯤은 견딜 수 있는 분량이 짐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홉시 반 점촌 행 버스를 탔다.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벗어나자 벌써 높은 산줄기들이 좌우편에 절박해 들어온다. 소백산맥의 심장부도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차가 서행하는 품이 이미 소조령에 접에 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안간힘을 쓰고 차가 겨우 재를 넘어서자 곧 왼쪽으로 수려한 계곡이 나타난다. 이곳이 수옥정이라고 불리는 명소인데 차에서 내려 몇집있는 마을에서 물어보니 수옥정 계곡이 바로 윗 편에 있는 수옥폭포에서 직접 새재로 오를 수가 있다고 한다. 오만분지일 지도에는 수옥정 못미쳐서 1킬로 지점 왼쪽 산길이 새재로 통하는 오솔길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시간적으로 여간 이익이 아니다. 짧은 겨울 해는 우리들 도보 여행자에게는 무엇보다도 무서운 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지방은 강원도를 제외한 어는 산간 지방보다도 인구가 희박하고 인촌이 드문 벽지이기 때문이다.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차도라고는 여기에서는 오직 이화령을 넘는 길 하나뿐이다. 또한 이 지방은 900미터-1000미터이상의 산들이 20여개 이상 삑 둘러싸고 있는 산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게다가 삼림까지 울창하여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어젯밤 식당주인에게 들은 일이 있다. 적설도 산간에는 30센치 이상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떠날 때부터 알고 있었거니와 유일한 도로인 전기 소조령을 넘어 수옥정에부터는 험준한 수많은 재와 산을 넘어야 하며 복잡하기 짝이없는 소백산맥 한복판 산협과 계곡을 유일한 통로로 거의 본능적으로 이용하는 장꾼이나 나무꾼들이 다니는 발자국만이 오직 도표가 된다는 점에서 이번 코스는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다소의 모험심과 긴장감을 나그네인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수옥정은 산수가 아름다운 계곡으로 많은 탐승객이 운집하는 곳이지만 엄동인 지금은 아무도 없고 폭포도 폭이 넓고 높이도 20미터나 되는 물기둥이 꽁꽁 얼어 아래 있는 넓적한 운동장처럼 보이는 못과 더불어 아무런 위압감도 주지 못하여 폭포는 마치 손발이 묶인 거인처럼 보인다. 못 위를 걸어보기도 하고 물기둥을 나는 한번 어루만져 보았다. 폭포 윗 편 산허리까지 도로가 놓여있어서 관광버스가 들어올 수 있고 폭포 윗 편 바위돌과 물이 떨어지는 못 위 경사진 낭떠러지에는 사람이 못가도록 쇠사슬이 둘러져 있을뿐더러 크고 깨끗한 휴식소와 위생설비도 되어있는 폼이 아마도 충주지방 사람들에게는 탄금대(彈琴薹 충주에서 10리 신립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배수진을 친 한강 상류)와 더불어 이곳이 유일한 소풍지가 아닌가하고 생각되었다. 옛날은 정자가 있었던 모양으로 지금도 주춧돌이 폭포 옆 언덕위에 남아 있었다. 새재로 통하는 산골 오솔길을 5리쯤 걸었더니 집이 몇 채 있고 비로소 왼편으로 산허리에 옛날 새재 길이 나타난다. 폭포에서부터 내쳐 급한 오르막길이어서 영하15도인 기온인데도 땀이 마구 흐른다. 쉐타를 벗어 망태줄에 걸어 매고 모자도 걷었다. 머리에서 목간통처럼 무럭무럭 김이 난다. 장갑도 벗었다. 여기서 문경입구 삼거리(진안리)까지는 삼십 리이다. 울창한 삼림이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보라 속에 그지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소조령과 이화령(서울-점촌버스 도로)을 넘는 국도가 생기기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이전에는 동쪽 영남사람은 이 길을 지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서울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수백 년을 두고 유일한 교통로인 이 새재에는 많은 애화와 비화가 얽혀져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문경새재는 왼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는 눈물이 난다’ 이것은 남도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길은 옛날 국도인 셈인데 지금은 모두가 찻길로 다니고 이 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솔길이기는 해도 오랜 세월을 두고 인마의 왕래가 끊기지 않았던 새재 길은 형적이 뚜렷한 산길이다. 옛사람들의 밟은 발자국이 걸어가는 우리들이 신바닥에서 다시금 메아리치듯 땅바닥이 유달리 굳어져 있다. 지도상의 산길은 같은 십리라도 굴곡이 많아서 평지 길의 두배로 보아야 하며 시간은 3배로 쳐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조령 제 3관문>까지는 폭포에서 4킬로 정도이지만 대략 두 시간은 걸렸다. 깊은 계곡위로 어디까지나 계속하는 이 오솔길은 침엽수 외에도 활엽수가 많아서 하절에는 하늘이 안보이리라고 생각되었다. 다만 도중에 한군데 대규모로 벌채를 하는 구역이 있어서 산더미처럼 원목이 쌓여 있는 것을 봤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이때 마침 부인네 두 사람이 각각 조그만 이불을 둘러쓰고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것과 마주쳤다. 인사를 하고나서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더니 문경에서 온다고 한다. 새벽에 출발하여 오후 한시가 다된 지금에야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무엇을 팔러 다니냐고 물어본다. 없는 것이 없노라고 웃으면서 대답하니 좀 구경할 수 없느냐고 말한다. 추우니 오늘은 작별하고 다시 기후가 좋을 때 찾아오겠노라고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들은 수옥정 윗마을 잔치 집에 간다는 것으로 매우 경쾌한 걸음걸이였다. 관문은 당당한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석문인데 누각은 물론 없이 두꺼운 안팎의 돌문 사이가 허물어져 비어 있었으나 양쪽으로 높이 3미터 정도의 튼튼한 성벽이 험준한 산정으로 잇달아 치닫고 있다. 여기가 조령의 분수령되어 있으므로 고개의 꼭대기가 되는 셈이다. 북쪽은 한강, 남쪽은 낙동강수계에 속한다. 또한 경북과 충북의 도계이기도 하다. 가는 방향에서 바른편 산정이 기봉(旗峯)824미터, 옛날 기로 신호하던 곳이고 왼쪽이 신선봉(966미터)이지만 신선봉은 눈보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성벽은 왼편이 약간 허물어졌을 뿐 우측은 거의 원상을 유지하고 있어서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에 전개되는 뚜렷한 관문과 더불어 처음 보는 자로 하여금 회구지정과 기이한 느낌을 불금케 한다. 고개마루턱 우측에 300미터 지점에 화전민 집이 한 채 서있는 모습이며 능선의 널찍한 공간에 관문과 성벽을 사이에 두고 남북 양쪽에 나무도 드문드문 서 있을 뿐 툭 트여져 있어서 일층 더 황량한 기분을 일게 하여 준다. 풀들이 자랐다가 지금은 시들어 눈속에서 대가리만 치켜들고 서있는 모습이 마치 옛날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신분을 권세도 당당히 조사하던 수문관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이 자리를 떠나기가 몹시 섭섭하였다. 어지러진 조그만 산신당이 두 개 성벽 안쪽에 남측, 가는 방향으로는 우측 성벽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모습도 인생의 허무를 말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이곳 기온은 영하 17도로써 오래 지체할 수가 없었다. 걸으면 땀이 흐르고 서있으면 온 전신이 얼어온다.
<울고넘는 박달재>
15분 정도 머무른 후에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새잿골은 3관문이 서있는 고개 마루턱 북쪽보다 남쪽이 더 넓은 계곡이어서 관문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은 동양화의 경치 그것이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가마봉(釜峯 914미터)과 주흘산(主屹山 1054미터)이 왼편 앞쪽에 천공 높이 솟아있는 것이 아련히 보인다. 나무도 많거니와 위걸한 바위가 눈을 받아 일층 아름답게 보였다. 이일대의 산들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으로 되어 잇거나와 조령산(鳥嶺山1017미터)을 위시하여 백운대(서울)보다 높은 900미터 이상의 산이 대략 10eduro가 솟아 있다. 그러므로 해발 700미터인 제 3관문을 거점으로 하여 능선을 타고 소백산맥을 동쪽으로 쫒아가다가 남쪽으로 돌아서 문경의 문경면과 산북면 사이에 있는 마전령(700미터)을 넘어 운달산(雲達山1099미터)을 둘러 문경(옛날 군청소재지. 지금은 점촌이 읍내)으로 오거나 또는 관문에서 남쪽 능선을 타고 조령산과 백화산(1063미터) 그리고 뇌진산(991미터)을 밟을 수 있다. 이 능선은 충북(괴산, 중원, 제천의 세 군)과 경북(문경군)의 도경인데 인가가 전연 없는 곳이므로 식량과 어느 정도의 장비(천막, 우장)가 꼭 필요한 지역이다. 그 것도 해가 긴 여름에 한해서만 가능하며 동계 적설기에는 전문가라도 등반이 거의 불가능한 코스임을 부언해 둔다. 맹렬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피해 대속력으로 뛰다시피 제2관문을 지나는 동안 인가가 몇 가호 있었다. 지붕과 천정이 트여있는 움집인데 가운데가 썪은 통나무를 두 쪼각 마주 연결시켜서 만든 연통에서 연방 연기가 나오고 있다. 나무가 풍부한 곳이라 방안은 따뜻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돼지고기를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가는 청년이 한명 있기에 고기를 살 수 없느냐고 했더니 다 팔리고 없다고 한다. 이런 산중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셈인데 그들은 모두 벌채 관계자들로서 술집도 한 채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는 것을 사양하고 길가 바위틈에서 담배를 한대씩 피우는 동안 청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많은 인부들이 산속에서 작업하다가 밤에는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한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와 작별하고 얼마를 내려오니 제2관문이 나타나고 울창한 삼림 속에서 집이 한 채 보인다. 이 관문도 누각은 없고 성벽만은 좌우에 달려있어서 험준한 능선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문도 성벽도 제3관문보다는 규모가 작다. 인가로 들어갔더니 대환영이다. 우태수라는 분이 주인인데 산판 인부를 상대로 밥장수를 하는 사람이다. 집은 전부 세 채가 각기 외톨이로 따로따로 서있으나 모두 일기집이라는 것으로 젊은 색시까지 합쳐서 너댓 명이나 방안에서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방을 비워준 셈인데 여기서 가솔린과 메타놀 바나를 총동원하여 대지급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또 한패의 남자손님들이 들어와서 방안은 대만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벌채 관계자들로서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 삼림은 전부가 구왕실 관리소에 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옛날에는 아름드리 박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 서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도중에 본 것은 불과 몇 그루로서 대부분이 전나무와 소나무 기타 잡목들이었다. 옛날 이곳의 박달나무는 큰 것은 사람 6명이 둥치 벤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한다. 다듬이 돌도 되고(수채에 담가두면 결이 죽는다고 한다) 방망이도 많이 생산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팔려 나갔던 것인데 지금은 옛날보다 그 수가 아주 적어 졌다는 것이다. 주인이 소개해 준 남도 잡가가 재미있어 몇 마디 여기에 적어본다. -문경서재야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박달나무는 팔자가 좋아서 큰 애기 손길로 논단다. -가락은 이밖에도 울고 넘는 박달재와 주막 없는 박달재란 유행가가 있다고 술이 얼근해진 손님들이 우리가 청하는 대로 노래를 한 불러준다. 그러나 새재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옛날 수목이 울창한 이곳에는 많은 새가 살고 있었으리라.
<山有花 茶房에서 茶 한잔>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모여든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고 세시 경 다시 제1관문을 향해 걸음을 빨리하였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그러나 산마루와는 달리 이제는 고도가 낮아져서 바람도 멎어 안온한 산길이다. 먼지가 많은 서울의 광능 숲길은 문제도 안된다. 계곡의 량도 풍부하여 여름에는 캠핑의 호적지가 됨직하다. 제1관문 조금 못와서 상초리라는 부락이 있고 손바닥만한 논도 있다. 그러나 왼쪽에는 1000미터급 주흘산 연봉에다가 오른 쪽으로는 비봉이 특색있고 원추형으로 높이 솟아 있고 그에 호응하는 많은 봉우리들이 몇 개고 연달아 나타나 때마침 내린 눈으로 길손의 눈을 황홀케 한다. 관문에는 嶺南第一關이라고 쓴 큰 현판이 곱게 단청한 누각에 달려 있다. 물론 후에 수축한 것이지만 초석이나 성벽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역시 좌우편 산위로 성이 계속 되어 있고 누각은 올라갈 수 있도록 돌층계가 달려 있다. 여기까지 오기 전 길가 좌측으로 석문이 달리고 입구자(口)로 된 돌벽이 둘러진 약 200평가량의 고적이 있었는데 물어보니 옛날 원(지방장관)의 저택 터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이 새재 길은 옛날의 역사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오늘날도 역력히 우리들 눈앞에 전개시켜주는 곳이다. 또한 이 새재골은 한 때 도적이 출몰한 일도 있지만 대체로 안전한 산길이어서 어딘지 훈훈한 기운이 풍기는 골짜기라고 한다. 호랑이도 행인을 해친 일이 고금으로 전무하다는 이야기를 아까 지나온 초부의 집에서 들었다. 제1관문 입구에 서있는 안내판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가 쓰여져 있다. -영남제일관문-누각은 이조 숙종 35년(1709)창건. 영조22년(1746)과 42년(1766) 및 현종66년(1840)과 1966년에 중수. 축성한 사람은 고려시대 관산(문경)현감 흥달이라 한다. 임진왜란때 한 도승이 나타나서 조령에서 일군을 막도록 진을 치고 여기서 반격하라고 진언했으나 신립장군은 그와 연고있는 처녀 혼귀의 말을 꿈속에서 듣고 달래강(忠州 達川)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전.(필자주.小西行長, 加藤淸正등 日將이 모두 이 고개를 넘었다.) 상초리에서 문경입구인 진안리(국도와 합치는 삼거리. 충주 45킬로. 상주 48킬로)까지는 차도 다닐 수 있는 탄탄대로이다. 우편으로 멀리 이화령이 마치 성문처럼 산중턱 허리에 빠끔히 보인다. 여기서부터 국도이다. 진안리에서 오리쯤 걸어가니 문경이다. 이곳은 옛날 군청소재지(지금은 점촌)에서 중학교도 있는 제법 큰 고을이다. 산유화라는 조그만 다방이 한군데 있어서 숙소를 정할 때 까지 잠시 쉬기로 하였다. 지도를 펴보니 남쪽 교통로를 제외한 3면이 높은 산이어서 마치 스위스의 체르마트나 샤모니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다. 이곳은 등산 기지로서 크게 각광을 받음직 하다. 마침 측량대 일행들이 들어왔기에 부근 산길을 물어봤더니 역시 잘 알지를 못한다. 수년래의 대설이므로 지금부터 우리가 가기로 되어있는 산길이 매우 곤란하리라는 말을 한다. 숙소인 한일여관에서도 밤에 안주인(민씨)이 나타났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청년 박정희씨가 바로 이곳 문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여기서 일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수년전에 대통령이된 옛날 박훈도가 나타나서 인근 주민 3만명과 350대의 자동차가 모인 가운데 교편을 잡던 옛날학교에 800만원을 들여 강당을 지어주고 또 200만원으로 피아노며 취주악기며 영사기 등 일체 교구를 갖추어 주고 옛날 하숙집주인에게 10만원을 주었으며 옛 제자들을 일일이 이름까지 기억하여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은 죄다 만나보더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또한 이미 점촌에서 문경까지 철길도 둑을 닦고 있으며 명년에는 박대통령 덕분으로 기차를 타고 자기집까지 올 수 있다는 자랑도 하였다. 세상사에 어두운 나에게는 이러한 꿈같은 이야기가 모두 금시초문이었다. 방도 따뜻하고 친절한 여관이다. 숙박료는 2식1박에 150원 다음에도 꼭 들려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한다. 서울-새재 코스는 교통이 좋아서 진안리에서 늦은 버스를 이용하여 수안보에서 1박하면 2일 코스로서 알맞다.
<人生은 放浪이다.라는 말>-梨花嶺-白樺山 능선-안말-고사리밭등-鳳巖寺
1967년.1월 12일. 8시에 여관을 나섰다. 문경은 대산에 둘러싸인 산골이긴 하지만 남쪽으로 넓고 낮은 산협지대가 전개하고 있어서 벽지란 감을 그다지 느끼지 않게 하는 곳이다. 시멘트 공장이며 석공의 은성광업소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고 점촌과 같은 철도가 놓인 읍내가 불과 50리 밖에 안되는 곳이므로 소백산맥의 입구인데도 산악촌이라는 인상은 비교적 희박하다. 납에 본 문경은 어젯밤 지도를 보며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거리에 나서니 북쪽으로 주흘산(1165미터)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역시 산악촌에는 틀림없다. 거대한 바위를 이고 있는 장엄한 이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길이 있으나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제1관문 부근 혜국사를 거쳐 오르는 것이 제일 용이하다. 이것은 이곳의 주민들도 시인하는 코스이다. 산모가 웅대하여 동남쪽 가까이 솟아있는 운달산(1099미터)과 더불어 서울에서 2박3일 예정으로 한번 와 볼만한 코스이다. 여름철이면 새재골과 백화산도 같은 시간에 밟을 수 있으리라. 충북과 도계인 이화령(568미터)까지는 문경서15리 길이다. 옛날 새재를 넘던 사람도 지금은 누구나 다 자동차를 타고 이 국도를 달리는 것이다. 산을 깎아서 닦은 도로아래는 천인의 깊은 골짜기다. 재작년 이재에서 차가 굴러 떨어져 스물두명이 사망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 옛날 외야꽃이 과연 있었는지 어떤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재에서 차를 내려 남북 양쪽 골짜기를 살펴 본 후 사진을 찍고 꼭대기 남쪽 바로 아래 길 녘에 있는 주막집 앞에서 서쪽 산길로 들어섰다. 이 세상에는 돈을 무척 아끼거나 엄청나게 돈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로서 아까 고개 꼭대기에서 북쪽 낭떨어지 길을 웬 사나이가 한명 혹한을 무릅쓰고 도보로 오는 것을 멀리 서 바라본 일이 있다. 적어도 그 사나이는 30리를 걸어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셈이다. 그의 발길은 결코 가볍지 못하리라. 그러나 지금부터 200리를 걸어야 하는 우리의 발길이 과연 무슨 이유로 이렇게도 가볍게 움직이는 것인지 나는 또다시 산길을 밟으면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人生은 放浪이다.’라는 말을 그 사나이보다도 내가 좀더 진리로 생각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리라. 조금 전 도로에서 산으로 오를 때 길 옆 낭떠러지에 호랑이 발자국이 산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직선으로만 걷는 호랑이 발자국은 한 번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판별할 수 있는 특징 있는 발자국이다. 45도 각도로 약 20분을 걸어 올라가니 집이 한 채 있다. 이 밖에도 화전민을 보이는 주민들의 집이 여기저기 두 서너 집이 보인다. 여기서 내복을 한 벌 벗었다. 급한 경사여서 그래도 땀방울이 쉴새없이 흘러 떨어진다. 다시 20분 걸어서 백화산 능선에 도달했다. 북쪽으로 조령산(1017미터)과 시루봉(914미터)이 이화령 좌우편으로 쌍안경을 통해서처럼 잘 바라다 보인다. 나는 이들 산과 다시 만날 날을 맘속으로 약속했다.
<黃昏이 깃드는 저녁길>
백화산으로 기는 능선은 좌우에 숲이 우거지고 조망이 좋은 산길이다. 낙엽 진 오솔길에서 겨울산을 보는 것은 하나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여름산과 달리 알몸으로 나타나는 묏부리는 계곡의 굴곡이나 산의 능선을 좀더 자세히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능선 서쪽에 V형으로 된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한줄기 산휘(山彙)가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다. 이 산등성이를 넘어서야 비로소 봉암사로 가는 계곡에 들어선다. 마을에서 제일 큰 집으로 들어가서 잠시 쉬기를 청하니 쾌락한다. 김씨라는 영감이다.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나 신발 벗기가 곤란하다 했더니 그는 화로에 불을 잔뜩 담아온다. 또한 그는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길을 매우 염려하여 안내인을 내세우겠다고 조언한다. 호의를 받아들여 제일 무거운 짐 한 개를 안내인에게 지우고 곧 길을 떠났다. 지금부터 우리가 넘는 산등은 정60도 각이다. 눈이 30센치 가량 쌓여 미끄럽기가 한이 없고 전신에서는 땀이 흐르고 숨 가쁘기 짝이 없는 가파른 오름길이다. 눈 때문에 길도 없고 그저 직선으로 나무 가지를 붙잡아 가면서 이 산등을 오르는 데에 대략 두 시간이 걸렸다. 안 말에서 불과 2킬로이지만 높이로는 600미터의 차이가 있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나무가 많은 산이다. 이만봉(1051미터)과 백화산을 연결하는 능선의 산등성이에 도달한 것은 오후 한시 경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고사리 밭등(913미터)이라는 험준한 재이다. 여기도 능선을 타고 지나간 호랑이의 발자국이 뚜렷이 연면히 연속되어 있었다. 여름철에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고 나무꾼들도 여기까지는 오는 일이 없다고 한다. 5만분지1지도에는 옛날의 오솔길(소로)이 그냥 나와 있어도 교통로가 보급된 오늘날에는 점차 폐지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물물교환 등 옛날의 경제적 인 이해관계가 재를 경계선으로 입지적인 조건이 지금은 달라져 벽지 주민들도 일일이 험준한 재를 넘지 않고 길이 좋은 차 길로 돌아서 다니기 마련이다. 고사리 밭등은 그 좋은 예이리라. 산등 기온은 영하20도. 잠시 서있었더니 금시 땀이 기시고 손발이 얼어 들어온다. 짐꾼의 삯으로 받은 백원이 퍽이나 고마운 듯 좋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오던 길을 미끌어지면서 뛰어 내려간다. 그래도 10분쯤은 지체하여 사진도 찍고 웅대장엄한 사방을 둘러본 다음, 서쪽의 봉암사를 향해 대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서쪽 경사면 일대에는 고사리가 많이 자라는 고개 동쪽과는 반대로 나무가 없는 초원이다. 게다가 따뜻한 볕을 받아 눈이 약간 희박하므로 산등에서 2킬로 쯤 되는 곳에 있는 외톨이 집까지 내려오는데 40분 정도 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이런 벽지 심산 속에도 화전민들이 지은 이름이 있어 ‘한밤이’, ‘아침밤이’란 지명이 지도에 실려 있는 것이 흥미롭다. 외톨이집 땅이름이 ‘한밤이’였다. 순박하기 비할 데 없는 화전민 집에서(용자라고 불리는 어린 딸이 있다)점심을 끓여 먹고 백일해를 앓고 있는 아기에게 감기약이며 클로로마이신, 페니실린 등을 나눠준 다음 다시 6킬로쯤 되는 봉암사에 이른 것은 황혼이 짙게 깃든 여섯시 경이었다. 도중은 거의 무인지경이었으나 절 입구에는 민가 몇 채와 주막집도 한집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절에서 방을 빌려 저녁은 토스트로 지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침구는 지참한 슬리핑 백. 이곳은 문경군 가은읍 완북리라는 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