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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말
안개가 심하게 낀 밤에 조심스럽게 항해하던 선장이 앞쪽에서 이상한 불빛이 비쳐지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선장은 충돌을 예상하고 신호를 보냈다. "방향을 20도 바꾸시오 !"그러자 그쪽에서 신호가 왔다. "당신들이 바꾸시오 !" 기분이 상한 선장은 "난 이배의 선장이다 !"라고 신호를 하였다. 잠시 후 그쪽에서도 당당하게 신호가 오는 것이였다. "난 이등 항해사다 !" 이에 화가 난 선장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배는 전투함이다. 당장 항로를 바꿔라 !" 그러자 그쪽에서 바로 신호가 왔다. "여긴 등대다!"
수능 점수가 나왔습니다. 이제 논술과 면접이 남았습니다. 대학 입시에는 여러 시험을 치루는 데 그중에 면접 시험이 있습니다. 적어도 면접 시간에 그들은 주어진 질문 앞에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수험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면접 시험의 긴장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질문 앞에 선 존재입니다. 얼마나 많아요?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매 과정마다 시험이라는 문, 질문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취직 시험이라는 지독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요?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결혼이라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게 사실은 전부 일종의 시험이지요? 시험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인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질문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나? 아니면 내 인생은 실패작인가? 이론적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에 던져지는 최후의 질문이지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새로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때 바로 용기가 있는 거다. 승리란 드문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지" - 하퍼 리의《앵무새 죽이기》중에서 -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묻는 질문은 인생의 마지막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요즈음이 바로 우리가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때입니다. 면접 고사 보는 학생들이 주어지는 질문을 피할 수 없듯이, 바로 지금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비켜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올 한해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2010년 당신은 성공자입니까? 실패자입니까? 얼마 전 우리 사회는 소위 루저 열풍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모 TV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180cm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 곧 실패자다.' 라는 표현을 써서 그걸 놓고 사이버 공간이 시끌벅적 한 적이 있어요. 키가 180cm가 안되면 루저다! 이리 보면 저도 180cm가 안되니 분명히 루저인가요? 참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이걸 놓고 ‘루저의 난’이라고 까지 부르더군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소송을 걸기까지 했다고 그래요. 그냥 철없는 여대생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마는 달리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그릇된 성공 기준을 보여주는 씁쓸한 이야기지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사람의 외모로 판단한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기준입니까? 다들 혀를 끌끌 찹니다마는 그러나 사실은 이게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형 수술을 합니다.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1800명의 여성을 놓고 거리 조사 했답니다. 서울 강남구 A백화점 식품 매장, 다양한 계층이 뒤섞이는 서울 은평구 B할인 매장의 식품 매장, 그리고 20대가 몰리는 명문대 중앙도서관 입구를 골라서 조사를 했다고 그래요.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의 1명이 조사한 뒤, 또 다른 전문의들이 2인 1조로 같은 지점에서 다시 조사했습니다. 세 지점을 각각 두 차례씩 두 달 간 조사한 결과, 총 1800명 중 836명이 성형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고 그래요. 이것은 열 명 중 네 명 꼴로 성형 수술을 한 것입니다. ‘한국언론인협회’에서 발표한 「맞춤 육체 시대가 오고 있다.」란 논문이 있어요. 이 논문에 따르면 우리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성형 미인이 가장 많은 나라” “극단적인 성형 수술의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외모는 어떤 능력보다도 뛰어난 자질로 중요시 되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이해가 되어도 얼굴 못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우수개 소리가 진리가 되고 있어요. 이걸 가리켜 루키즘(lookism)이라고 부르지요?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이나 사회풍조! 이게 루키즘입니다. 외모를 중시하고 젊음과 아름다움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되고 보니 외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취향이나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어 버렸어요.
몸 말
`리저널 이코노미스트' 2005년 4월호에 <외모와 임금간의 상관 관계>에 관한 보고서가 실렸습니다. 그걸 보니까 외모가 떨어지는 사람은 평범한 얼굴을 가진 사람에 비해 임금이 9% 적었고, 반대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 5% 많은 봉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비만으로 분류된 여성은 평균 체중의 여성보다 17%나 임금이 적은 것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채용전문기업 '코리아 리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구직자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70.1%가 ‘외모도 직무에 따라 탄력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답했고, ‘외모도 지원자 평가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83.6%였습니다. 반면에 ‘반드시 능력으로만 평가해야 한다.’는 답변은 6.3%에 불과했습니다. 자, 사회 분위기가 이러니 성형수술 안 받는 게 이상하지요. 성형수술을 영어로는 플래스틱 서저리(plastic surgery) 또는 ’플래스틱 앤드 리컨스트럭티브 서저리‘(plastic and reconstructive surgery)라고 합니다. 여기서 쓰이는 `plastic`은 희랍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음대로 모양을 바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렇습니다. 마음대로 얼굴과 몸을 뜯어 고치고 싶어 해요.
저는 성형을 무조건 나쁘다고 보진 않습니다. 선천적으로 기형의 얼굴이나 몸을 가지고 태어낫다든지 뭔가 얼굴과 몸의 조화가 안 맞아서 사회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멀쩡하게 잘생긴 외모를 두고 유명 영화 배우 사진들이 밀면서 이대로 고쳐 달라. 견적이 안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한 원판을 뒤집어엎자는 것은 이해가 안갑니다. 공사 자체도 리비아 대수로 공사 이상으로 어렵지만 자신의 가치를 겉모습에서 찾으려는 외모지상주의는 자아 존중감을 상실하게 합니다, 개인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옵니다, 나아가서는 성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갖게 합니다. 여성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성형 수술합니다. 아침마다 화장합니다, 자기 전에 피부 마사지하고 잡니다. ‘아이고 거 뭘 모르는 젊은 것들이 하는 짓 이제, 돈이 썩어 나가제, 먹고 죽을래도 양잿물 살돈도 없는데 뭐하는 짓들이여.’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이런 질책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요. 정도가 지나칩니다. 많은 분들이 성형수술이나 외모지상주의를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묻고 싶어요! 그렇게 꾸짖는 분들은 정확한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가지고 있나요?
옛날 인도에서 수행자 한 분이 대갓집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성대한 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집안에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가 이 수행자의 옷차림이 남루한 것을 보고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수행자는 하는 수 없이 좋은 옷 한 벌을 빌려 입고 다시 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그 수행자를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집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잔치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상 위의 음식들을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의 옷에 음식을 계속 문질러댔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음식을 옷에다 문지르십니까?" "그거요? 하하하, 내가 누더기 옷을 입고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나서야 이곳에 들어 올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이 옷이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많은 분들이 성형을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보는 것을 비판합니다만 가만 보면 그분들 역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위에서 든 수행자 예화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보면 대동소이합니다. 목표한 것을 달성했으면 성공이고 달성하지 못했으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합격이면 성공 낙방이면 실패, 돈을 벌었으면 성공, 벌지 못했으면 실패, 앞으로 나갔으면 성공 뒤로 물러났으면 실패, 보편적인 기준이지요? 만일 이 기준을 놓고 여러분의 올 한해를 판단한다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공자입니까 실패자입니까? 윈너입니까? 루저입니까?
우리 기준의 공통점은 대부분 자기중심이라는 것이지요. ‘인생의 성공’이라 하면 그 어떤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실패라고 하면 그 어떤 다른 인생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인생입니다. 성공이란 말 그대로 이루는 것 잘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겁니다. 내가 꾼 꿈을 이루는 겁니다. 실패란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안 되는 겁니다. 대부분 인생을 저울질하는 성공과 실패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요. 내가 잘되느냐 내가 못되느냐, 이 기준을 놓고 보면 여러분은 윈너입니까? 루저입니까? 또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대부분 세상적인 가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투자했으면 돈을 벌어야 그게 성공입니다. 시험 봤으면 반드시 붙어야 그게 성공입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반드시 승진해야 그게 성공입니다. 이 대열에서 낙오하면 실패입니다. 실패자는 이 세상의 법칙에서는 설 땅이 없어요. 한번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서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이것이 세상이라는 정글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으로 놓고 보면 여러분은 윈너입니까? 루저입니까? 여러분의 2010년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우리 역시 바로 이 정글 속에서 살다보니 세속적인 승리와 패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역시 정당한 방법으로 세속적인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우리가 패배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이것과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아나니야, 사울, 유다 이렇게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세 인물을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보다는 또 다른 인물로 기억합니다. 동명이인인 다른 인물들 말입니다. 아나니야 그러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삽비라 남편이 떠오르지요? 초대 교회가 자기 가진 것을 다 팔아 사도 앞에 가져오면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 쓰는 유무상통의 전통을 만들어 가지 않습니까? 아니 그 돈 벌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돈이란 게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생명과도 같은 건데 그것을 다 팔아 교회로 가져온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 가치의 공동묘지라는 의미이지요. 교회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야는 자기가 땅을 판 돈 중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이건 그냥 돈을 감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순수성을 부인한 겁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을 그는 못 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최대의 스캔들입니다. 아마 요즘 같았으면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을 겁니다.
유다를 생각하면 당장 가룟인 유다가 떠오르지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사람입니다. 가장 똑똑해서 예수 제자단의 살림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를 지게 됨을 알자 그는 예수를 은 삼십 냥에 팔아버립니다. 그토록 인생을 포기하고 따랐던 예수가 십자가를 진다니요? 십자가는 저주중의 저주요 실패중의 실패거든요. 자기가 바랐던 이상은 이게 아니거든요, 찬란한 성공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는 순간 그는 예수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 죽었습니다. 사울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생각나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더니 스스로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업신여기고 안하무인이 되어 스스로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최후 역시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목숨을 끊는 자살이었습니다. 아나니야, 유다 사울 하나같이 세상적인 성공을 쫓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은 하나같이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나니야는 성령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가치가 더 좋아서 성령을 속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알았지만 세상적인 성공이 더 큰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좌절되었을 때 그는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성공에 취한 나머지 작은 자에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같이 성공을 바라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실패로 끝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의 아나니야나 유다나 사울은 역사 속에서 실패했던 그 사람들은 아닙니다. 동명이인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가치를 쫓다가 실패한 사람들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단순히 우연일까요?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또 다른 기대가 있다고 봅니다. 이들 세 사람 중 사울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그는 앞에 등장했던 세 사람 이상으로 성공에 목말랐던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당대 최고의 석학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정치 기구인 산헤드린의 최연소 회원입니다. 정치가라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유대교 교리에 해박한 랍비입니다. 그는 율법과 할례 대신 예수의 십자가를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초대 교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최선봉에 섰습니다. 대제사장의 신임장을 얻어 자기 돈을 들여가며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다메섹까지 갈만큼 종교적 열심히 대단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그는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를 눈앞에 둔 사람입니다. 산헤드린 최연소 회원임을 보면 최고의 정치가에 대한 야망이 꿈틀거렸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울에 대해 우리는 나름대로 잘 압니다. 가장 빠르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총명하고, 가장 부유한 사람에게 큰 승리는 오지 않는다. 큰 승리는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 헨리에트 앤 클라우저의《종이 위의 기적, 쓰면 이루어진다》중에서 -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이 사울을 꺾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은 지금 사울의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그의 눈을 멀게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동경해 왔던 세속적인 욕망과 성공에 대해 소경을 만들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종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예수가 누굽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입니다. 당시의 관념으로 보면 저주받은 자입니다. 실패자 중의 실패자입니다. 그래서 사울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대교의 최고 이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의 이름을 이방에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직접 부르신 겁니다. 사울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벗겨내고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새로이 부여하신 겁니다. 다메섹의 체험이 의미 있는 것은 바울의 인생 전체가 바뀌었기 때문 아닌가요? 성공이 뭐냐? 지금까지는 산헤드린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최고의 랍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말리엘 학파의 최고 석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아닙니다. 더 이상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것들이요? 성공이요? 그것들은 이제 분토, 똥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바울이 가장 원하는 성공이 뭔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세요! 예수를 위해 죽는 겁니다. 복음을 위해 엄청난 해를 받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과 목숨을 내 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영원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위해 삽니다. 남을 위해 살더란 말입니다. 성공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나 밖의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진 겁니다. 고치기 어려운 습관과 씨름하고 있는가? 은밀한 죄와 싸우고 있는가? 영적 요새를 치고 있는가? 승리의 열쇠는 당신이 이 싸움에 얼마나 전념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내어맡기느냐에 있다. -낸시 레이 드모스의 ‘내어맡김’ 중에서-
성지 순례하면서 볼 수 있는 것이 바울의 성공입니다. 그 드넓은 땅 구석, 구석에 바울의 성공이 아로새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 엄청난 땅을 걸어 다닐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니 그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 그래요 밥 안 나옵니다. 돈 안 나옵니다. 대신 욕만 얻어먹습니다. 박해와 매질과 고생만 바가지로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걸 바울은 성공으로 알았던 겁니다. 바로 이 역사 깊은 대전환의 현장인 다메섹에 유다가 등장합니다. 아나니야가 등장합니다. 유다는 눈이 먼 바울을 사흘간 자신의 집에서 묶게 하는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아나니야는 눈이 먼 바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눈을 뜨게 했던 초대 교회의 제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금 바울의 회심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세상적 성공과는 전혀 무관한 일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쫓던 사울이 세속적인 성공과 단절하는 현장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세상의 모든 기득권을 다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인생의 실패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영에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의 진정한 성공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최고의 성공이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이 일에 아나니아 유다 사울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공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아닌가요? ‘역시 목사님의 한계는 분명해, 결국 전도하라는 이야기 아냐?’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예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남긴 마지막 부탁이니까 이걸로 성공자인지 실패자인지 가늠해도 하등 문제될게 없어요. 올 한해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번도 뻥끗하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루저, 실패자입니다. 올 한해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윈너,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기준은 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입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목적이 여전히 나에게만 꽁꽁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지 않느냐? 예수가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너라는 타인을 위해 죽은 거 아니냐? 그 예수를 구주라고 고백한다면 그래서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도 어느 정도는 예수처럼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가 산 것처럼 내 삶의 일정 부분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으로 채워져야 하지 않느냐?
꼬리 글
금광 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분이 1885년 구한말에 출생한 사업가인데 이 사람이 손을 대면 대는 족족 망했습니다. 농업, 광업, 어업, 임업, 손대는 일마다 처참하게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될까 싶으면 어김없이 딴죽을 거는 천재지변과 전쟁은, 그러나 이 사내의 도전 의식마저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세상에 나온 지 30년 세월, 때맞춰 조선에 불어 닥친 ‘황금광 열풍’에 힘입어 그는 마침내 거부로 성공합니다. 1937년 5월12일, 경성 남산정(남산동) 천진루 여관에서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의 창립을 알리는 기자 회견이 열렸습니다. 이 회사의 사장이 바로 이종만입니다. 영평금광 판돈 155만원 중에서 50만원(현재가치 500억 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대동(大同)농촌사’를 설립합니다. 이것은 금광을 매도해 번 돈의 3분의 1을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작농을 위해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집단 농지를 구입하여 경작자를 선발해 골고루 분배한 후 영구히 경작하게 한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지주들은 소작료를 50%이상을 받았지만 이종만은 30%만 받고 30년이 지나면 아예 그 땅을 경작자에게 무상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집단 농지 안에 마을 주민의 자치 조직을 결성하여 교육, 위생, 문화 등 제반 문제를 경작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종만은 부를 누리기 위해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집요하게 돈을 좇았던 사람입니다. 93년을 사는 동안 이분은 벌어들인 엄청난 돈들을 남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착잡합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도 인간에 대한 자각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도 저리 베풀며 사는데 남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뭔가? 복음이 인간애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데 왜 결코 강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 하는 걸까? 하나님의 성공 기준이 인간의 성공기준보다 훨씬 고상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을 실천하면서 사는데 반해 그걸 너무도 잘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감동을 전해주는 이가 왜 이다지도 드문가? 착잡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타인을 위해 자기를 버리기 위해 오시는 예수를 맞는 게 대림절 아닌가요? 그래서 다른 어느 때 보다 이 질문 앞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그 예수를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당신의 올 해는 성공이었습니까? 실패였습니까? 성공자입니까? 실패자입니까?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진 가장 시급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연극의 최종 리허설을 보았고 결론이 어떻게 나는지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면 그 어떤 일도 미래를 결정짓는 운명적인 사건일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 길수록 우리는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좀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헨리 클라우드의 ‘크리스챤을 위한 시크릿’ 중에서-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비결은 성경적인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을 적당히 섞지 않고 오직 말씀대로 사는 데 있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살게 하소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