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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맥국 관련 지명
이학주
춘천에는 맥국과 관련한 지명과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삼악산, 우두산, 샘밭(신북읍), 용화산 등에 전하는 지명과 전설을 말한다. 우두산에는 맥국시절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이 있었다고 하고, 신북읍 발산리에는 맥국의 궁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용화산에는 삼악산과 같이 산성이 있는데, 그 산성은 맥국의 마지막 왕이 전쟁을 하고자 쌓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춘천은 역사적인 사실여부를 떠나서 맥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곳이다. 설화도 많고 지명도 많은 곳이며, 계속해서 생성과 변화를 보이고 있다.
춘천의 지명을 보면, 맥국-오근내(烏斤乃)-주양(走壤)․우곡성(牛谷城)-牛首(頭)州-수약주(首若州)․수차약(首次若)-삭주(朔州)-광해주(光海州)-춘주(春州)-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춘주-춘천으로 변해 왔다. 이밖에도 수춘(壽春), 봉산(鳳山) 등의 별칭이 있다. 이런 지명의 변천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맥국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춘천도호부조에 의하면 춘천은 “본맥지(本貊地)”라 했는데, 풀면 근본 本, 북방종족 貊, 땅 地자를 써서 ‘본래 맥의 땅이다.’라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조에 의하면 “본맥국(本貊國)”이라 하여 ‘본래 맥국이다.’라고 했다. 동국여지지 춘천도호부조에는 “고맥국(古貊國)”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에 맥국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신라본기<유리이사금>조에는 “맥국의 거수(渠帥: 小國의 우두머리)가 날짐승 들짐승을 사냥하여 왕에게 바쳤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여러 문헌에서 춘천 맥국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춘천 맥국설은 역사적 사실관계에 있어 그 증거가 확실치 않아 아직 논란이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춘천의 옛 지명이 맥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건 춘천이 고대국가의 하나인 맥국의 수도였다면 이를 살려서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자료만 해도 이를 활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그동안 춘천에 전하고 있는 맥국 관련 지명과 전설을 모아서 이해를 돕도록 한다. 아래에 있는 자료는 기존 춘천 관련 자료와 필자가 2013, 2015, 2018년도에 춘천 일대를 조사하면서 얻은 지명유래 가운데 맥국과 관련을 두고 있는 자료를 발췌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여부를 떠나서 지금까지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 다음의 지명과 그 유래는 향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발산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궐터
발산1,2리 경계지역이다. 약 4년 전에 밀레장사를 지내려고 땅을 팠더니, 지경다지기를 한 자리가 나왔다. 그래서 여기가 맥국의 궐 터가 아닌가하고 추측을 했다.
궐터말
발산1리의 맥국터에 있는 마을이다.
맥국의 도읍지
맥국터(貊國터). 춘천지방에 원시부족사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 중심지는 지금의 발산리와 천전리 일대로 전해진다. 그 중 발산리는 조그마한 야산을 등지고 멀리 소양강이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맥나라 궁터(宮址)라고 전한다. 바리산 아래 발산리에는 다섯 개의 궁궐을 지은 ‘맥국의 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맥국시대에 쌓았다는 뚝(맥뚝)이 논둑으로 변해 있다. ‘맥뚝’이란 이름이 전해진 유래로 인해 맥국시대의 존재를 미루어 보게 된다.
궐터나 바리산 앞쪽이 맥국의 도읍지로 추정된다. 맥국은 얼마 유지되지 못하고 망한 나라로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특별한 전설은 없고 지명 몇 개가 있을 정도이다. 남녀왕이라는 왕이 맥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맥국의 방어선은 등선폭포가 있는 삼악산과 용화산이라 한다.
맥국청년회
발산1리 마을회관 2층에 간판이 있다. 조직한지는 약 10년 정도 되지만, 청년이 마을에 별로 없다.
맥국터
맥국터(貊國址). 왕터. 관동지에는 맥국고도(貊國古都)는 부의 북쪽 20리에 있으나 도읍지(都邑地)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국터. 맥왕고도(貊王古都)는 발산리에 있다고 하였다.
맥국터표석
1995년 12월 20일 발산1리 율문천 옆에 맥국(貊國)터라고 하는 표지석을 세웠다. 대리석 위에 자연석을 올려 세웠다. 자연석에 크게 한자로 맥국터라고 새겼다. 그리고 그 아래 대리석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석의 취지문을 새겨두었다.
맥국터
삼국시대 이전에 이 곳 춘천에 맥국(貊國)이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이것을 검증할만한 유물이 춘천근교에는 산재하여 있다. 문헌에는 “맥국 의 서울이 지금의 춘천시가지 북쪽 13리 소양강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원도 각 고을의 삼국 이전의 연혁(沿革)에서 그곳 부족국가의 도읍지의 위치를 이정(里程)까지 밝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맥국의 서울이 유일한 기록으로 그곳이 바로 춘천시 발산리 이 비가 서 있는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 발산리 일대가 맥국과 도읍지였다는 것은 앞서의 문헌기록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이곳에 구전되어 오고 있는 “왕궁터”, “맥뚝(土堤)” 등으로도 이것을 가늠할 수 있다. 2천 년 전의 옛 도읍터를 정확히 상고하기는 쉽지 아니 하나 춘천에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읍의 옛터가 있다는 것은 이 고장 사람들에게 강원도의 수부의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높이는 역사적 맥락이라 할 것이다.
맥뚝
하도 논둑이 터지니까 매를 대서 맷뚝(맥뚝)이라는 얘기가 있다.
발산리 들판 가운데 물이 솟아나오는 구멍이 있는데, 이를 장수물이라 한다. 장수물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洑)도 저수지도 없이 물을 대기도 하고 흘러내리기도 하는 작은 하천을 맥뚝이라고 한다. 용수로 배수로를 겸한다. 지금은 하천 옆의 둑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았다. 발산1리 마을회관과 발산청년회 건물이 있는 옆을 흐르는 아주 작은 도랑이다.
바리미에 있는 논 수로 둑을 맥뚝이라 하는데, 원래는 맥뚝이 아니라 맷뚝이다. 맥국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성뚝이라 한다. 왕궁을 보호하는 성이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지금은 다 없어지고 논에 물을 대는 수로로 남았다.
춘천향토자료집에는 맥뚝을 맥국시대 토성이라 했으며, 지금은 논에 물을 대는 물고로 이용된다고 했다.
맥뚝보
장수물이 흘러 맥뚝이 용수와 배수를 겸해서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의 역할과 수로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바리미
바리산. 마을에 있는 산이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바리산으로 40m정도 올라가면 아주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는데, 사람을 묻은 무덤 같지는 않다. 무슨 무덤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추측하기를 소금 같은 것을 묻었을 것이라 한다. 또 그곳에서 동서쪽으로 약 800m정도 가면 공동묘지가 있다. 그 공동묘지에 보면 관은 모두 없어졌지만 뭔가 내밀어 만든 것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믄 봉분이 큰 고총이 있다.
우리의 소슬뫼를 찾아서에서는 발산, 바리미를 ‘도읍이나 마을의 진산’을 나타낼 때 쓴다고 했다.
발산리
발산리(鉢山里). 마을에 있는 산의 형상이 중의 밥그릇인 바리때처럼 생겼다고 해서 발산리로 불렀다고 하기도 하며, 옛날 왕뒤 쪽에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들이 밥을 얻어먹었다고 해서 바리미라 불렀다고 한다.
바리미를 일제강점기 때 발산리라 하였다.
춘천 맥국 관련유적 지표조사보고서에서는 발산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를 바리미, 발산이라고 부른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산이 바리미(鉢)처럼 생겼다고 발산리라고 하였다.
발산리는 맥국의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발산리는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려운 맥국 관계 지명을 갖고 있다. 맥국의 왕궁터로 전해오는 발산리 지역의 앞으로는 천전리(泉田里)․산천리(山泉里)․유포리(柳浦里)․율문리(栗文里)의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 바리산 밑 동네를 지금 왕뒤(왕대산)라 부른다. 왕뒤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600m 가량 떨어져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산 아래 궐터(궁궐터)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이 왕뒤로부터 궐터에 이르는 지역 즉 발산리 지역을 바리미(발의뫼)라고 부르고 있다. 궐터에서 300m 가량 앞쪽을 장시본이라 부르며, 이 장시본의 앞쪽은 맷뚝(맥뚝)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발산리 뒤편의 화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 삼한골(三韓谷)에는 맥국시대의 사지(寺址)가 있다고 전하며 바리미의 북쪽 수리봉 밑 동쪽 서덕골에도 풀도 없이 둥근 묘 같이 생긴 것이 있는데 이것이 맥국왕의 묘라고 전한다. 또한 발산리 뒷산에서 고탄에 이르는 지역에 토성이 있었다는 설, 발산리 뒷산에서 우두산에 이르는 지역에 흙과 돌로 쌓은 성이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져 오고 있다.
바리산
바리미. 바리뫼. 역사적인 증거품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지형을 보면 옛날 지형이 상당히 깊었었는데, 4m정도 흙이 쌓이게 되었다. 1965년도에 한해(旱害)가 심해서 불도저로 땅을 팠다. 그때 아름드리나무가 하얗게 닭똥처럼 된 나무가 나왔는데, 한 시간 정도 햇빛을 보니 아주 새까맣게 되었다. 토탄(土炭)도 나오고 낙엽이 잔뜩 쌓인 모습이었다.
벌터말
궐터 있는 곳이다. 궐터를 벌터라고도 한다. 지금은 ‘벌터모텡이’라고 부른다.
법회
바리산 서쪽의 마을이름이며, 논들이다. 옛날 스님들이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삼한골
삼한골(三韓谷). 사만골. 언덕 개 북쪽에 있는 긴 골짜기로 골의 깊이가 약 6km나 된다. 면적은 165정보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골짜기가 사만 개나 된다고 해서 사만골이라고 부른다. 약 15년 전에 군 특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가 몇 년 전 철수 하였다. 이 골을 넘어가면 화천의 간동면 유천리가 나온다. 삼한골에는 옛날에 절이 많았다. 그 때문에 효자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일설에는 옛 맥국시대의 절터가 있다고도 한다.
언덕개
궐터 바로 위를 말한다. 맥국시대 때 발산 앞개울에서 용이 소(沼)를 만들어 물이 깊고 언덕이 크다 한다.
오동초등학교에서 다리를 건너 발산2리로 오는 곳으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언덕개이다. 발산2리의 끄트머리이다. 다리 밑의 개울바닥을 갖고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그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고 있다.
‘아침못’의 다른 말로도 본다.
왕대산
왕대산(王臺山). 왕뒤. 바리미에 있는 작은 산이며 ‘왕뒤’라고도 불렀는데 발산 위에 자리 잡아 맥국시대의 성 터가 있었고 왕뒤 아래 맥국의 궁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왕뒤
왕대산. 바리산 좌측 밑에 있는 마을을 왕뒤라 한다. 길을 중심으로 위왕뒤, 아래왕뒤라고 부른다.
왕뒤보
왕뒤에 있는 수로이다.
장수물
장수정. 발산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들이며, 샘이다. 장수물에서 보(洑)도 저수지도 없이 물이 흘러내리는데, 물을 대기도 하고 배수도 하는 하천이 있는데, 이를 맥뚝이라 한다.
지석묘군
지석묘군(支石墓群). 맥국 옛 터의 전설이 있는 것으로, 지석묘와 적석총이 혼재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발굴하고 주민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2. <유포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맥국성지
강원도지에 맥국성지(貊國城址)는 신북면 유포리에 있는데, 삼한(三韓) 때에 맥국(貊國)민족이 이곳에 근거하여 궁궐을 짓고 성문을 쌓았는데 지금까지 유적이 있다고 했다.
문정리
문정리(文庭里). 유포3리이다. 천전3리와 율문3리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육군 비행장 뒤에 해당한다. 유포3리 중에서 제일 작은 동네이다. 웃문정은 유포3리이고, 아랫문정은 율문리에 속한다. 그 사이에 개울이 있는데 개울을 기점으로 나눈다.
우리의 소슬뫼를 찾아서에서는 문정을 ‘임금이 나랏일을 집행하던 곳’이라고 풀이하였다.
아침못
조연(朝淵). 아차지(阿次池). 본래의 아침못은 버들개 서쪽 지금의 저수지 구역 내에 있었는데 8·15해방직전 수리조합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수몰되었으며 지금은 그 옆 마을인 유포1리를 총칭하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옛날 어느 날 하루아침에 생긴 못이란 뜻에서 ‘아침못’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며 한자로 아침 조(朝) 못 연(淵) 마을 리(里)를 써서 조연리(朝淵里)로 표기하게 되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앗치못언막이. 조연제(朝淵堤)는 상유포리(上柳浦里)에 있다고 하였다.
<아침못전설>신북읍 유포리에 있었던 일이다. 이곳에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커다란 못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못을 아침못이라 하였다. 아침못이 생긴 유래는 다른 곳의 <장자못전설(長者淵傳說)>과 같다. 이때 장자(長者)는 큰 부자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유포리에 아주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자는 너무나 인색(吝嗇, 아낌)하고 완고(頑固, 고집이 셈)하여, 남에게 인정을 베풀거나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느 날 장자와 며느리가 집을 보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고승(高僧)이 바리때를 메고 장자의 집에 와서 시주(施主, 주인의 베풂)를 구하였다. 마당에서 염불을 하며 시주를 구하는 고승에게 장자는 시주를 하기가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갑자기 마구간에 가서 거름대로 쇠똥을 퍼서
“이거나 가져가라.”
하면서 고승의 바리때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스님은 바리때를 들고
“고맙습니다. 시주님.”
이라고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장자의 며느리는 스님이 몹시 안쓰러워 보이고 미안했다. 그래서 시아버지 몰래 얼른 바가지에 쌀을 떠서 들고 나가면서 스님을 불렀다.
“스님, 이 쌀은 저희 시아버지 몰래 가지고 온 쌀입니다. 제 시아버지가 부자이긴 하지만 천성이 인색해서 남에게 베풀 줄 모릅니다. 스님께서는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스님이 며느리를 보니, 마음씨가 몹시 고왔다. 그래서 스님은 장자의 며느리에게 말을 일렀다.
“시주님은 아무 소리 마시고 저를 따라 오십시오. 지금 하늘이 시주님의 시아버지에게 벌을 내리고자 합니다. 저를 따라 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뒤를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 보니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며느리는 두고 온 시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그만 스님의 당부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자기가 살던 집만 번개를 맞아 움푹 들어가고, 물이 차서 이미 물속에 묻히고 말았다. 며느리는
“아이고 어쩌나.”
라는 비명과 함께 선 채로 돌이 되어 굳었다.
그때 장자의 집이 묻히고 생긴 것이 ‘아침 못’이다. 그래서 아침못은 하루아침에 호수 즉 못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침못이란 이름은 상당히 고상하여 정감이 가지만, 얽힌 이야기는 인색한 장자를 벌한 하늘의 응징을 담고 있다.
<아침못 전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고성군 거진읍의 화진포에도 이와 같은 전설이 있다. 화진포는 마음씨 고약한 이화진이 스님에게 소똥을 주었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으며 그곳에 호수가 생겨 죽었다. 그때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고 시아버지가 죽은 것을 안타까워 자살을 한 후 고청서낭의 서낭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장자못전설>은 나중에 서낭 또는 산신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침못전설’은 돌이 되고 만다.
아침 못 전설의 등장인물은 부자인 장자, 고승, 며느리이다. 장자는 인색한 지배계층 내지는 부자, 며느리는 피지배계층, 스님은 신과 인간의 매개자, 하늘은 절대자로 죄와 벌을 심판하게 된다. 이때 지배계층 또는 부자는 자신의 배만 불리고자 하여 하늘의 심판을 받고, 며느리는 뒤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지키지 않아서 돌이 되어 버린다. 돌이 된 것은 지배계층이 죽었지만, 과거 피지배계층의 시절을 뒤돌아봐서 상하의 계급사회를 다시 동경했기에 주어진 운명이다. 문제는 과거의 상황을 과감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며느리가 돌이 되어 개혁은 실패한 것이다. 시대 상황을 잘 담은 전설로 볼 수 있다. 백성들은 언젠가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자신들의 소망을 전설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춘천 맥국의 전설에서는 <버들개의 아침못, 작은 천지라고 해서 규원사화의 이야기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태백산과 조천지와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대궐은 버들개와 아침못에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버들개(柳浦里)와 아침못(朝天池) 그리고 바리산(鉢山)은 곧 버들궁전 태백산 천지가 춘천지방으로 옮겨와 춘천지방의 이름이 된 것이다. 발산은 작은 태백산이고, 아침못은 작은 천지이며 버들개는 궁전의 장소이다.”라고 했다.
3. <지내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삼회사
삼회사(三檜寺). 회삼사지(檜三寺址). 지내2리 젤봉 중턱에 있는 옛 절터이다. 지내2리에서 한 시간정도 산으로 오르면 만날 수 있다. 이 절은 옛날 삼한시대에 지어졌다고 전하는데, 어떤 이는 돌부처가 있었으나 지금은 누가 가져가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그 절의 흔적으로 기와와 초석으로 썼던 돌 등이 남아 있으며,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삼회사를 구전으로 들어 기억하고 있다. 이곳을 휴양림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어 보전이 필요하다. 젤봉 삼회사터에서 춘천시를 내려다보면 정말 아름답다. 구봉산에서 보는 춘천의 전경과는 전혀 다르다. 절이 없어진 이유는 절에 하도 빈대가 많아서 빈대 잡다가 불이 나서 없어졌다고 한다. 절 이름으로 삼회사(三檜寺)라는 명칭을 쓴 것은 옛날 삼한시대의 어느 나라 이름이라 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라고 옛날 어른들이 말했다.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옛 지내상리 북쪽 산허리에 삼한시대에 지어진 삼회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와조각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마모가 심한 보살입상과 사리탑이 절터를 지키고 있다.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서는 보살입상(높이 97cm, 폭 30cm)이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사리탑(높이 63cm, 폭 22cm)이 있다고 했다.
성문길
지내리를 가로지르는 길이다.
성문바위
성문안으로 들어오는 바위이다. 지름물 옆으로 지내3리에서 지내2리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이곳 바위 아래에는 철구조물로 울타리를 쳐놓았고, 바위에는 얇은 대리석을 붙이고 그 위에 한자로 글을 써놓았다. 글을 쓴 사람은 지내2리에 살던 김현종이라는 사람인데 1980년도 경에 쓴 것이다. 글은 다음과 같다.
陶山日光追憶傳(도산일광추억전)
城門月影古今同(성문월영고금동)
柳柳靑靑法谷聲(유유청청법곡성)
錦錦色色香華村(금금색색향화촌)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도산에 햇빛은 추억처럼 전하고
성문의 달그림자 언제나 같구나
버들잎 푸르고 뻐꾹새소리 들리니
비단처럼 색색이 향기롭고 빛나는 마을
성문산
성문안이 있는 산이다.
성문안
지내리 지름물 안쪽을 일컫는 마을이름이다. 맥국의 안마을이라 하였다. 춘천의 지명유래에는 맥국시대 성문이 있던 곳의 안쪽이 되는 마을이라고 했다. 그러나 혹자는 산이 성문처럼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성문안고개
성문안 있는 곳이다.
성문안못
성문 안에 있는 못이었는데, 1965년도 장마 때 없어졌다. 이 연못은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것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옆에 조그만 것이 남아 있어 연꽃을 심었다.
성문안산
셩문안산. 성문내산(城門內山). 지내상리에 있다고 조선지지자료에 전한다.
4. <천전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고인돌
천전리 지석묘군. 정성바위. 정승바위. 춘천향토자료집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윗샘밭 동북편에서 흘러내리는 소양강변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支石)이 남아 있다. 고인돌의 집단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으로 이 고인돌을 깨어서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고 마을이 들어서면서 집을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고인돌 유적지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 고인돌에는 혈(穴)이 남아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들여 제사를 올리던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정성을 들이는 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자녀가 잘되어 정승(政丞)처럼 되리라고 빌었다고 정승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샘밭의 고인돌, 정승바위, 정성바위는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의 역사와 조상과 민속과 신앙이 깃든 것이다.
오수물
옻우물. 칠정(漆井). 샘밭 서북쪽에 있는 마을과 우물 자체를 가리키다. 천전1리 전체를 오수물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옻 우물’이 있었다하며 옻이 오른 사람이 이 물로 씻으면 잘 낫는다는 우물이 있던 곳이다. 땀띠가 난 사람들도 이 물로 씻으면 낫는다고 한다.
또한 오수물은 옛날 어떤 임금님이 말을 타고 가다가 보니 말의 발굽이 붙어서 서게 되었다. 그래서 임금님이 이상하다고 여겨 그곳을 파니 우물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임금님 오수물’이라고도 불렀다. 물맛이 무척 좋았다. 지금은 그 물을 묻고 길을 내었다.
지금도 우물이 나오기는 하나 도로 옆 밑으로 흐른다. 따로 정비를 해 놓지는 않았다. 2013년 8월 16일 당시 오수물 앞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 놓은 막걸리 두 병이 놓여 있었다. 지금도 물이 솟아 나와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양수기로 물을 퍼 농사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천전리 지석묘군
지석묘군(支石墓群). 천전리 앞을 흐르는 소양강변 사질(沙質) 퇴적층에 5개의 지석묘가 강변을 따라 동서 80m 거리에 분포되어 있다. 이 지석묘는 북방식 지석묘의 대표적 유형으로 학계에서 주요자료로 삼고 있다. 지석묘는 지방기념물 제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적석총 3기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적석총은 ‘여담우리’라 불리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부녀자들이 강돌을 날라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1기는 6·25한국전쟁을 전후해 없어지고 남은 2기는 1966년 8월 3~17일, 1967년 4월 7~13일 양차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바 있으나 지금은 그것마저 없어졌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가한 한병삼(韓炳三)박사는 천전리 지석묘와 적석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천전리 적석총 : 소양강변에 동서 2열로 약 5~6m의 간격으로 3기의 적석총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 중 1기는 하부구조가 파괴되어 있으나 나머지 2기는 아주 잘 보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적석총들의 구조는 1호의 경우 지표에 직경 약 2m, 높이 0.5m의 적석(돌무지)이 있고 이 적석을 제거하니 지하 약 10㎝ 깊이에 다시 직경 약 5m의 적석이 한 겹 깔려 있고 이 적석의 중심부에 약 1.02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석관이 있었는데 크기는 긴 벽이 약 45㎝, 짧은 벽이 25㎝ 정도의 4매 판석으로 네 벽을 이루고 깊이는 20㎝ 내외였다. 바닥에는 자갈을 고르게 깔았으며 개석(蓋石)은 석관보다 두껍고 큰 판석을 덮었기 때문에 석관 자체만 보면 지석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또 하나인 2호기로 적석의 상태는 1호기와 유사하나 중심부에는 강돌을 쌓아서 만든 석곽(石槨)이 둘 있었다. 출토유물은 1호에서 관옥(管玉), 마제석촉(磨製石鏃), 무문토기(無文土器)가 출토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적석총이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하여 천전리 적석총들은 분명히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것으로서 특히 몇 개의 석관을 하나의 적석으로 덮는 것은 몇 개의 석관을 돌담(石籬)으로 돌리는 바이칼지방의 청동기시대의 무덤들과 통하는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처럼 천전리 적석총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선사(先史)유적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시기의 묘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자료였다. 그러나 지금은 3기 모두 없어지고 적석총과 혼재하던 지석묘 5기만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춘천의 지명유래)
5. <삼악산>과 의암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삼악산성과 대궐터- 맥국의 패망
현 춘천시 신북읍 발산리에 옛날 부족국가인 맥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맥국은 오랫동안 평화로운 국토를 지켜오다가 적(敵)의 침공을 받아 천애요새인 삼악산(三岳山)으로 궁궐을 옮기고 성을 쌓고 적과 대치하였다.
적군은 삼악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워낙 산새가 험준하고 요소요소에 공고한 방어진을 구축해 놓고 지형지물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면서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응전(應戰)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 시킬 수 없었다. 공격할 때 마다 오히려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왔다. 힘 만으로서의 공격이 허사임을 간파한 적군은 다음과 같은 위장 전술을 강구하였다.
삼악산 남쪽 강 건너 산등성이와 계곡에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수없이 세우고 안장이 없는 빈 말들을 한 곳에 모아 산 위에서 맥군이 내려다 볼 때 병력의 공격 의사가 없는 것처럼 위장 시켜 놓았다.
또한 지금의 강촌역 뒤편에 있는 칼봉에서는 늙고 쇠약한 군사들로 하여금 군사조련을 가장한 칼싸움을 하도록 해서 맥군을 안심시키게 하여 놓았다. 그리고 밤을 틈 타 정병으로 편성된 공격군을 삼악산에 자리한 맥국대궐의 서쪽 골짜기 서문 앞에 매복시켜놓고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한편 지금의 의암리에는 군사들의 빨래를 많이 널어놓아 맥국의 파수병들이 보기에는 병력의 이동도 공격의 의사도 없는 것처럼 안심 시켜 놓았다.
그러면서 이를 틈타 공격군을 덕두원리로 해서 대궐북문 어구로 이동시키고 야음을 이용하여 구름다리를 놓아 북문 입구까지 접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미리 정한 공격시간에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감해 북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흥국사 골짜기의 맥국방어군을 무찔렀다.
또한 서문 앞에 매복하고 있던 복병들도 북문과 때를 같이하여 황애장수(박물장수) 할멈을 앞세워 맥국왕비가 전부터 은밀히 부탁했던 패물을 구해 가지고 왔노라고 하면서 패물 꾸러미를 보이며 문 지키는 군사를 속여 문을 열게 한 후 일제히 쳐 들어갔다.
앞산의 허수아비 병력과 무장하지 않은 말의 무리 칼쓰기 조련을 받는 군사와 의암리 빨래만을 내려다 보고 안심하고 있던 맥국 군사는 큰 저항도 해볼 겨를도 없이 칼과 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대패하고 말았다.
삼악산에다 거대한 성을 쌓고 기와를 구워 궁궐을 짓고 흥국사(興國寺)라는 절까지 세워 나라의 재건을 염원했던 맥국은 적의 위장전술에 넘어가 하루아침에 패망해 버리고 말았다.(춘천문화대관)
대궐터
당시 산성의 중심에 궁궐이 있던 곳을 지금도 대궐터라 부르며, 왜대기와 흥국사 주변에는 고색이 창연한 주춧돌과 기왓장이 지금도 산재해 있다.
왜(와)대기
당시 궁궐을 짓기 위해서 기와를 구웠던 곳을 일컫는다. 기와 와(瓦)의 와가 왜로 바뀜.
흥국사
옛날에 불렀던 대로 흥국사라 하고 속칭 ‘큰절’이라고도 한다.
말골
당시 허수아비와 말들이 있었던 곳을 말한다.
칼봉
당시 칼싸움을 했던 곳을 말한다.
옷바위
군사들이 옷을 널었던 곳을 말한다. 착한 농부가 옷을 벗어 놓았던 곳이라 해서 불리기도 한다.
허궁다리
적군이 구름다리와 줄사다리를 놓았던 험한 골짜기를 말한다.
북문새
당시 성곽의 북문이었던 곳을 일컫는 말이다.
할미문
황아장수(박물장수)가 문을 열게 했던 서문을 말한다.
삼악산성터
맥국의 남한산성이라 하며 성곽외곽 밑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비늘이 달린 화살촉을 주운자가 있다고 한다.
망국대(亡國臺)
등선폭포 위편에 망경대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맥국 최후의 격전지로 이곳 싸움에서 패망하였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배일골
맥국의 군사들이 적의 위장전술에 말려들어 패(敗)한 곳이라 하여 삼악산성 아래 마을을 일컫는 말이다. 패한골이 변해서 배일골로 되었다.
깃대봉
당시의 통신수단으로 깃대(旗)를 꽂던 봉우리를 지금도 ‘깃대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도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망덕봉
망(군사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초소)을 보던 봉우리라고 하여 망덕봉이라고 하였다.(춘천문화대관)
6. <우두산>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우두산의 제천단
천제단(天祭壇)이 봉정(峰頂)에 있으니 이것은 옛 풍속에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남녀가 좋은 옷을 입고 높이 올라 제천(祭天)하고 제단조(祭檀祖)[원문대로라면 ‘높은 곳에 올라 제천행사를 가지는 데 단군조상을 제사하고’라 해야 맞다.-필자주]한 후(後)에 각 소(所)의 농사(農事)와 잠견(蠶絹)을 품평(品評)하며, 시상(施賞) 논공(論功)하며 하루 종일 놀다 돌아가던 곳이라 지금은 사시에 놀고 즐기는 곳이다.
“天祭壇在峰頂此古俗每年十月三日開天聖節男女必盛服而登高祭天祭檀祖而後品評乎各所作農蠶之物而施賞論功盡日優遊而歸今則爲四時遊賞之所”(춘주지)
이를 바탕으로 춘천매국의 전설에서는 이렇게 풀었다.
우수산, 우두산에 제천단(祭天壇)이 있었다. 이 제천단은 곧 단군문화(檀君文化)의 원형을 간직화고 있었던 역사적 유적이다. 우수산 봉우리 정상에 제천단이 있었고, 매년 10월에 남녀가 좋은 옷을 입고 우수산에 ㄴ뫂이 올라 하늘에 제사하고 또 조상에 제사했다. 단군시대에 하늘에 제사하고 조상에 제사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좋은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정결하게 했다는 것이며 후세적인 관습이다. 제사를 모두 끝내고 농사와 양잠과 명주 짜기의 품평회를 하면서 시상하고 공을 찬양하면서 하루 종일 놀았다고 했는데 이는 국중대회(國中大會)의 유속이며, 무천제(舞天祭)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은 사계절 항상 놀고 즐기는 곳이 된 것은 제천의식이 제거된 이후의 상황을 나타낸다.
7. 강촌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유래
귕소
칼봉에 있는 소구유 모양으로 움푹 패인 소(沼)이다. 소라기 보다는 움푹 패인 웅덩이이다. 칼봉 위 두멍 위쪽으로 구 강촌역 바로 뒤이다. 귕소는 폭이 3m, 깊이가 7~8m, 길이가 15~20m정도 되는 크기이다. 마을사람들은 도토리를 줍거나 할 때 이곳에 많이 간다. 오르는 길이 꽤 가파르다. 도토리가 떨어져서 귕소 안으로 굴러 모이기 때문에 쉽게 긁어모을 수 있다.
옛 사람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어서 군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옛날 맥국 때에 의암(衣岩, 옷바위) 앞에서 장병들이 옷을 널어 말리고, 말골에서 말을 타고, 이곳 귕소에 와서 말에게 여물(말먹이)을 먹이고, 서면 안보리 방면으로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곳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옛 사람들에 의하면 귕소에서 두멍까지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명주실을 풀어 넣으면 한 타래가 다 들어가고도 남는다고 한다.
귕소에 오르면 그 유래를 적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귕소의 유래>
소와 말의 먹이를 담는 여물통인 귕을 빼닮은 연못(소沼)과 같다고 해서 「귕소」라고 부른다. 한 힘센 장수가 「말골」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가다가 이곳 「귕소에 들러 말에게 여물을 먹였다는 설화가 있다.
왜정 때는 독립군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서 몰래 화폐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귕소」에서 구 강촌역 아래 북한강 깊은 곳인 「두멍」까지 굴이 연결 돼 있어 명주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간다고 한다.
말골[마곡(馬谷)]
말골은 강촌 물깨말에서 강을 따라 난 작은 길을 따라 옛 철길을 옆으로 하고 가다가 보면, 작은 개울을 따라난 오른쪽 계곡 아주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계곡은 상당히 길게 이어져 있는데 좁은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꽤나 넓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논밭이 고루 갖춰져 있고 산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말골이라 한글로 표시하고, 마곡리(馬谷里)라 한자표기를 하였다.
말골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옛 고대부족국가시절 맥국의 왕이 삼악산성으로 들어가면서 이곳에서 말을 매두었다고 또는 이곳에서 말을 길렀다, 또는 맥국의 마지막 왕이 피란을 가면서 이곳에 말을 매고 산성이 있던 삼악산 쪽으로 바라보고 갔다고 해서, 또는 맥국의 적군이 허수아비를 세우고 안장 없는 말을 매 두었다고 해서 불러진 것이고, 둘째는 마을의 형상이 말처럼 생겼다고 해서, 셋째는 마을의 공동산 앞에 있는 쑥골이라는 곳이 말이 다리를 길게 뻗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이다.
칼봉산[칼봉, 검봉(劍峯)]
강촌 물깨말에 북한강 쪽으로 우뚝 솟은 돌산을 일컫는다. 구강촌역 뒤에 있다.
춘천맥국의 전설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산의 모양이 옛날 청동검처럼 날카롭게 휘어져 있다고 한다. 칼봉산 앞에서 옛날 맥국 때에 맥국의 적군이 위장술을 쓰기 위해서 늙은 병사들로 하여금 칼싸움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춘천향토자료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칼봉(劍峯)>
춘천군 남면 강촌리와 백양리 경계에 있는 높이 530m의 산, 칼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칼봉이라 부르고 검봉이라고도 한다.
경춘4차선 도로로 북한강을 끼고 춘천으로 들어올 때 산세는 날카로우나 수려한 모습이 신비로운 경관을 만들어 준다. 강촌의 절경은 이 칼봉의 돋보이는 풍치로 더해 더욱 빛을 발한다.
삼악산을 마주 보고 북한강을 굽어본다. 강촌유원지의 주봉이다. 삼악산 맥국전설에는 적이 칼봉에서 늙은 병사가 칼싸움을 하는 훈련을 보여주고, 젊은 병사들로 하여금 삼악산성 북쪽을 치게 했다고 전해 온다. 칼봉은 적군이 칼싸움 훈련장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기도 하다.(춘천향토자료집)
8. 동면 지내리에 전하는 맥국관련 지명유래
정승고개[서낭고개]
지내2리 경노당에서 소양강 콧구멍다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 어떤 정승이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정승고개라고 한다고 했다. 정승고갯마루에는 큰 소나무 당산목이 있어서 오고가는 길손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고갯마루는 자동차가 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나 현재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나 있다. 그곳으로 걸으면 한적한 산길을 걷는 기분이다. 고갯마루 옆에는 지내리 공동묘지가 있다. 지금 마을 앞으로 찻길이 닦이기 전에는 월곡리와 지내리 사람들이 이 길을 통해서 샘밭으로 지나다니는 큰 길이었다. 그곳에 사는 노인의 말에 의하면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소나무는 춘천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돌로 단을 쌓았던 흔적이 있으며, 단 위에는 누군가 최근에 작은 돌탑을 몇 개 쌓아 놓았다.
강원의 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지내리 정승고개>
지내리 한 개리로 되어 있어요. 거기서 지금 여기가 양지마을이라고 하는 데에요. 여기 나가면 정승고개라는 고개가 있어요. 정승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 옛날에 샘밭은 맥국이라는 나라였었거든요. 그 맥국에 정승이 여기서 넘어서 출퇴근을 했다 해서 정승고개라. 그래고 지금 거기를 정승고개라 그러고.(다음 <정승고개 소나무>로 넘어가는데, 중략)
소나무는 그냥 그게 서낭이 됐거든요. 서낭고개고도 하고 이제 정승고개라고도 하는데 그 정승고개 넘어가는데 거기 서낭이 생긴 거지. 그래 그 서낭에 그 낭구가 그게 큰 게 있는데 그 무슨 사람들이 정성을 들이러 가면 거기다 먹을 거 해다 놓고 이렇게 해서 어떤 사람들은 떡도 갖다 놓고 그걸 또 먹는 것도 있어요.(강원의 설화)
9. 월곡리에 전하는 맥국 관련 지명
능산
고대국가 맥국의 왕릉이 있던 곳이라 하여 능산(陵山)이라 했다. 발산리 맥국의 왕궁에 살던 사람들이 죽으면 월곡리에 무덤을 썼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