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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엄현옥
우석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1995년 『인천문단』 수필 대상(수상작 「아버지의 遺産」). 1996년 『수필과 비평』 등단(「다시 우체국에서」)․ 1999년 제물포수필문학상, 2001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표창, 2003년 인천문학상, 2004년 신곡문학상 본상 수상․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클럽 인천지역위원회, 수필과 비평 작가회의 사무국장. 제물포 수필문학회 부회장․성산효대학원대학교 부설 성산어린이집 시설장․저서 『다시 우체국에서』(1998. 문학관), 『나무』(2003. 수필과비평사),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2004. 수필과비평사), 『봄날은 간다』(공저) 외 다수
│대표 작품│
나무 외 4편
엄 현 옥
무대는 은은함이 감돈다. 부드러운 조명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바닥과 벽면을 채운 질 좋은 나뭇결이 한몫을 한다.
목재는 금속이나 플라스틱에 비해 질감이 좋다.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주변과 잘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지닌 것이다. 요란한 색상으로 시선을 모으려 하지 않는 겸손과 중후함까지 갖추었으니,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사람이라도 그만한 품격을 지닌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연갈색 나무가 주는 온화한 분위기에 잠겨 본다.
현(絃)을 고르는 미세한 음이 흐르고, 이내 연주가 시작된다. 그 곳에는 나무로서 가장 그럴듯한 위치에 오른 현악기들이 있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노연주자의 품에 안긴 더블베이스와 깔끔한 중년 단원과 포옹하는 첼로, 그들은 나무라는 재질의 악기가 아니라 이미 연주자의 분신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팔자를 누리고 있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날렵한 미모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어깨에 실려, 그녀의 턱에 몸의 일부를 맞대고 있다. 그 모양이 여인의 몸매를 닮았다는 사실을 처음 느낀다. 검은 롱 원피스를 입은 미녀 주자(奏者)의 어깨에 지그시 기댄 채 사랑을 나누다가, 새처럼 솟구치는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활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화음은 유장하고 거침없는 테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러다가 중후한 음색의 베이스나 바리톤이 깔리면 카펫처럼 낮게 드리워진 포근함으로 실내를 감싼다. 그리고는 끝나기가 무섭게 감당하기 힘든 박수세례를 받기도 한다.
저들은 물론 하루아침에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아니다. 어느 장인(匠人)의 정교한 손놀림에 자신을 단련시킨 후에야 저렇듯 우아한 자태로 서게 된 것이리라. 또한 저들은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와서도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행여 상할세라 단단한 케이스에 담겨 차를 탈 때에도 주인보다 먼저 오른다. 그리고 연주자가 무대를 떠날지라도 그의 애장품으로 사랑받게 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나무로서의 생을 마감했다고 하지 않으리라. 나무에게도 내세(來世)가 있다면, 그들은 전생에 베푼 덕(德)으로 이렇듯 귀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단지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수종(樹種)과 자란 모습을 보고 어떤 용도로 태어날 것인지 결정된다는 점이다.
인천항 8부두를 빠져 나오는 거대한 몸집의 트레일러에도 그들이 실려 있다. 열대 우림의 울창한 밀림 속에서 생을 마감했음이 분명한 아름드리 나무다. 그것들을 실은 차가 지날 때면 지축을 흔드는 듯한 거대한 굉음으로 지나는 이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물론 거기에 실린 녀석조차도 곱지 않은 눈매로 바라본다. 오랜 항해에 시달린 그의 몸에는 원산지 표시가 낙인처럼 찍혀 있다. 적도 가까운 고향에 대한 향수에 시달릴 겨를도 없이, 바닷가 야적장으로 실려 간다. 뙤약볕에 시달리거나 비가 내려도 그 큰 몸뚱이를 거두어 주는 이는 없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밤하늘에 드문드문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고향 떠나온 설움을 달래야 한다.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서러운 밤을 보내다가 해풍(海風)에 건조된다. 몸의 습기를 증발시킨 그들은 기중기에 매달린 채 옮겨져 어디론가 또 팔려 나간다. 더러는 낯선 이방인의 집에서 가구나 건축자재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들 중 모양에 상관없이 튼튼한 것은 광산의 갱도를 유지하는 버팀목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 번 들어가면 햇빛은 보는 일도 없지만 매순간 위험에 직면한 광부들의 목숨을 지키기도 한다.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뎌내기는 레일의 버팀목도 마찬가지다. 매일 누군가의 떠남과 돌아옴을 위해 천문학적인 숫자의 중력을 기꺼이 안고 있다. 마음에 가라앉은 일상의 앙금을 걷어내고 한줌 바람결에도 생활의 활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기꺼이 자신을 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몸을 딛고 달리는 열차는 서먹한 연인들 사이를 동반자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나무, 그들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잎의 광합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모든 나무들이 한 곳에 오래 뿌리내리는 것만은 아니리라. 대부분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각기 다른 용도로 쓰인다. 누군가에 실려 다른 삶을 위해 톱과 대팻날에 몸을 맡긴다. 사람도 각기 다른 삶의 몫이 있듯이 저들도 여러 형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네 사는 모습도 저들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나무인가. 바이올린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살갑게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고, 천성이 상냥하거나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으니 관상용 분재나 근사한 정원의 수목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만일 나무로 태어난다면, 시골집 울에 아담하게 서 있는 싸리나무나, 마을의 고샅을 지키는 회양목이어도 좋겠다. 아니면 양지바른 묘지 둘레에 선 도래솔이 되어, 세상의 힘든 여행을 끝낸 망자(亡者)와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어느 가난한 문사(文士)의 앉은뱅이책상이라면 더욱 좋겠다.
질주(疾走)
잠에서 깬다. 새벽 2시가 지났다. 실내는 어둠과 정적뿐이다. 다시 잠들기를 마다하고 거실로 나간다. 주방 쪽의 창문이 밝다. 밖을 내다보니 한낮처럼 분주하다. 찻집 ‘가을꽃 겨울나무’의 네온도 환하다.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들을 본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신호에 대기하기도 조급한 모양이다. 심야에 속도를 늦추지 않는 자동차가 많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멈추어 있었던 것은 나뿐이었을까. 자정이 지났음에도 잠들지 않은 사람들, 저들의 질주는 언제 멈출 것인가.
사람들은 달린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는, 왼편 한켠을 속도를 지향하는 자들에게 내어 준 지 오래다. 그러나 러시아워일 때면 너도나도 걷는다. 아니 달린다고 함이 적절하다. 빨리 갔다고 해서 전철을 먼저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열차가 홈에 들어와야만 타는 것이다. 여유를 잃은 도회인의 조급증은 이처럼 매순간 타인의 속도에서 이탈하는 것이 불안한 것일까.
전철 1호선에 급행 구간이 있다. 많은 역에서 멈추지 않고 통과하는 이 노선이 생긴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급행만을 선호한다. 모든 역을 정차하는 열차는 언제부턴가 완행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행이 아니다. 정규 노선일 뿐이다. 그런데 역마다 멈추어 타인들이 승하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듯하다. 두 개의 열차가 동시에 홈의 양쪽에 멈추어 있기라도 하면 재빠르게 바꾸어 탄다. 이는 경인전철 1호선의 급행구간을 이용하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시간으로 따지면 길어야 10여 분인 것을……. 자신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더디지만 당연한 과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자본주의와 느림은 상극”이라는 밀란 쿤델라의 말을 떠올리면 저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빠름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속도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과연 나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퇴근길, 약속 장소가 1호선에서 가까운 경우는 그것을 타는 것이 그날의 최대 목표인 양 서두르지 않았던가.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자신을 끊임없는 속도전의 최전방에 배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속도 위주의 삶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리라. 우린 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 사실은 조금 느리게 몇 걸음 뒤처진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그러나 속도를 잃은 멈춤의 순간이 두려운 것이리라. 이는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기 위해 쉴새없이 움직이는 메트로놈(metronome)과 무엇이 다르랴.
‘무위(無爲)’라는 말이 생각난다. 오래 전 서예에 열중했을 때 그 어휘를 조롱박 표면에 굵은 예서체로 써 놓고 매듭을 만들어 벽에 걸어 두었다. 그것을 보며 인위적인 지혜나 힘을 더하지 아니한, 평화로움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현상을 초월하여 상주(常住) 불변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체와 마주한 듯한 텅 빈 충만에 잠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이들처럼, 늘 자신을 옥죄이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질주에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리할 수 없다. 직통 전철의 속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노라면 맹인용 지팡이를 조심스레 두드리며 동전바구니를 내미는 거친 손이 있다. 간혹 만나는 그들의 남루함을 외면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과도한 속도 경쟁의 사회 분위기는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모든 일에 남들보다 한 발 앞서기만을 강요한다.
느림의 미학을 읊은 한시(漢詩)가 떠오른다.
山行忘坐坐忘行 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廳水聲 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居 후아기인선아거
各歸基止又何爭 각귀기지우하쟁
산길 가다 보면 쉬는 걸 잊고 쉬다 보면 갈 줄을 모르는데
소나무 그늘에 말 쉬게 하고 강물 소리를 듣네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따라 앞섰으나
제각기 제 길 가니 그 무슨 상관이랴.
―송익필(宋翼弼)의 ‘산행(山行)’
산길을 가면서 느낀 정취를 즐기는 옛 선비의 유한(幽閑)함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다 보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가게 마련이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련만 어쩌자고 모두들 초조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일까. 물론 잠시 쉬는 사이 뒤에 오던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갈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문명으로 치닫는 과도 경쟁의 시대도 아니었던 1500년대를 살았던 선비의 여유로움이 참 멋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좀더 단순해지고 싶다. 지금 당장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로 여겼던 일들은 사실 착각인 경우가 많다. 당면한 일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단순함을 즐겨 볼 만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단순함이, 복잡함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도적인 단순함은 도리어 부담일 수 있다.
나의 속도를 찾아야겠다. 질주하는 세상에 편승하여 망각하고 있었던 나만의 속도를 꼭 찾고 싶다. 시간은 항상 거기에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근래 번지고 있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유행처럼 사라질 어휘는 아닌 듯하다. 천천히 깊은 생각에 잠겨 산보하듯 모든 걸 제쳐 두고 싶다. 느림 속에 자신을 방치하고 속도에서 이탈되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미 질주에 익숙하여 나만의 속도를 찾는 것이 힘든 일일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걷고 달려 나를 앞지르겠지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른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다소 늦었다고 해서 항상 뒤처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므로.
오늘도 1호선을 탈 것이다. 그러나 굳이 급행열차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레일을 구르는 느릿느릿한 마찰음으로 미끄러지는 완행열차에 앉아 얼마간이라도 시계를 쳐다보지 말아야겠다. 느림 속에 나를 방치하며 선인의 시처럼 말을 멈추고 소나무 그늘에서 물소리도 들을 것이다. 앞질러 가는 이들의 뒷모습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릴없이 바라볼 것이다. 잡상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여 봐야겠다. 물론 내가 조금 늦는다고 하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나브로 날이 밝아 온다.
그의 독백
몇년을 벼르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도배를 했다. 이사에 버금가는 번거로움이 예상되었기에 무척 망설였던 일이다. 그러나 외출해 현관문을 열 때마다 누렇게 바랜 벽(壁)이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만 같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창틀과 모든 문을 칠하고 도배지와 장판을 바꾸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묵은 책들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이리 옮기고 저리 치우고 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노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간의 노고가 보상될 만큼 말끔해졌다.
집 정리에 지쳐 일찍 잠이 든 때문일까. 깊은 밤, 무심코 깨어 거실의 스탠드를 켰다. 누렇게 바랜 벽은 간데없고 실내가 넓어 보였다. 도배지가 마르지 않았으니 못박는 일은 다음날 하라던 인부의 말에 아무것도 걸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빈 벽을 바라보며 무심히 소파에 앉았다. 은은한 조명 속에서 나는 그의 독백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답답하다고 한다. 앞뒤가 대책 없이 꽉 막힌 융통성 없는 사람을 칭할 때면 벽창호라며 나를 빗댄다. 또한 바람을 막고 풍경을 차단하는 주범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상대방과의 인간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나의 이미지와 결부시키곤 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은 상황이면 차라리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며 또 나를 들먹인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부적절한 상황에서 회자되곤 하는 나의 불명예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어서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나를 허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넘어야 할 그 무엇이라 한다. 오래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운동 경기의 주제를 ‘벽을 넘어서’로 정한 적도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한 기세로 몰아세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몇 겹의 벽을 쌓아 놓고 산다. 그들 대부분은 나를 허물자고 할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은 점점 두꺼운 벽을 세우기를 일삼으면서 우리들만을 탓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만 보는 어리석은 이들이 바로 사람이다.
그뿐 아니다.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할 때 나를 방패삼아 온갖 공작을 일삼는다. 패거리를 드러내지 않는 밀실정치에 나를 악용한다. 그들이 만드는 맥(脈)이야말로 정서를 단절시키는 벽이 아니던가. 그들이 알게 모르게 설치한 벽들은 주로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럴 때면 나는 그들의 희생양이다.
나는 그들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 다만 누설하지 않을 뿐이다. 나를 떠나간 집주인일지라도 나를 벽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그들의 비리를 발설하지는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무죄다.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소설 「제 8요일」을 보라. 2차 대전 직후 폐허의 바르샤바, 그 곳의 가난한 연인들에겐 벽이 없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단 하룻밤만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벽이 있는 공간’이었다. 4면이 아닌, 3면이라도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꿈꾸었다. 두 남녀가 그토록 찾아 다니던 벽이 있는 세 평의 방은 자유와 행복에 대한 최후의 희망이었다. 이처럼 자신들만의 공간을 위해 나를 원하는 연인들이 그들뿐이랴.
나는 직립을 지향한다. 누워 쉬거나 앉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서 있을 때만이 존재가치가 있다. 무너지면 폐기해야 할 건축자재로 전락해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합리적인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직립의 고행을 평생 감내하며 그들의 막이가 되어 견딘다. 내가 있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안락감과 보호 받아야 할 사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이기를 원할 때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한 무언가를 걸어 놓기 위해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은 예사다. 치장을 선호하는 산만한 취향의 주인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내 몸에 무언가를 걸고 붙이는 바람에 숨쉬기도 어렵게 된다. 나의 수난이 아니고서야 그들이 눈높이에 걸린 벽시계나 달력을 이용할 수 있으랴. 빈 벽으로 두면 좋으련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채우고 싶은 이들은 극성스럽게 나를 괴롭힌다.
견디기 힘든 것은 내 몸이 세워진 채 완공된 아파트의 실내에서 나를 부수는 일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픈 이기심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때면 심한 현기증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게 된다.
내가 서 있는 이 집도 마찬가지다. 낡은 나를 수년간 본체만체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처럼 내 몸을 단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 밤이야 새로운 벽지가 잘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날이 밝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 어디엔가 그림을 걸기 위해 법석을 떨 것이다.
나는 그들의 칭송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있는 존재 그대로의 나로 보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허물어야 할 상징으로 여기거나, 무언가를 걸고 붙이기 위한 면(面)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들 중 힘들고 지친 자가 있거든 단단한 내 품에 기대어 보라고 속삭이고 싶다. 혹여 나와 같은 부당한 이미지로 각인된 것들이 있거들랑 그들에 대한 고정된 편견을 버리라고 외칠 것이다.
커피 믹스
식사 후의 포만감에 나른하다. 커피를 마시려는데 우연히 커피 믹스 끝부분에 적힌 숫자가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는 5 이상의 숫자부터 단맛이 강하다고 했고, 다른 이는 1, 2번은 정말 쓴맛이라며 맞장구 쳤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는 상쾌한 아침이면 2, 3번이, 피곤이 밀려드는 오후에는 9번이 좋았다. 어쩌다 7번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때면 네 잎 클로버를 찾아낸 것만큼 기뻤다.
기호에 맞는 한잔의 커피가 주는 행복감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바쁠 때면 평준화된 맛에 입맛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간편함 때문이다.
그런데 꼼꼼한 성향의 A 선생만이 수긍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탕 조절 부분이 별도로 있는데 굳이 숫자로 당도 조절을 중복 표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다수의 위력에 분쟁은 쉽사리 평정되는 듯했다.
마침 차를 마시기 직전이어서 각기 다른 번호를 털어 넣고 더운물을 부었다. 서로 남의 커피까지 시음한 결과 1번은 씁쓸했고 10번은 아주 달다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떨떠름한 표정의 A 선생이 분연히 일어나 포장에 적힌 소비자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상냥한 여직원의 명쾌한 응답을 재연했다.
“고객님, 생산 라인의 번호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생산시에 스틱이 10열로 된 기계 장치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에 하자 발생 시 위치 파악을 쉽게 확인하기 위한 단순한 품질 관리 번호였던 것이다.
이만한 플라시보 효과를 찾기가 쉬운 일이랴. 그 동안 1, 2번이기에 씁쓸했고 10번이기에 달다고 생각했던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두 남자 이야기
그의 웃음이 좋다. 웃을 때마다 햇살처럼 눈가에 퍼지는 주름살이 좋다. 선남선녀 스타들로 채워지는 충무로에서 나이가 들어 가면서 쓸쓸히 퇴장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라지만, 20년 넘게 주인공을 맡아도 손색이 없는 남자가 있다.
국민배우 안성기, 그의 웃음은 그 어떤 표정보다 더 아름답다. 변방으로 밀려 디지털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아날로그형 남자들의 이야기 「라디오 스타」에서 그 웃음을 다시 만난 것은 긴 연휴 기간 중의 작은 기쁨이었다.
“형, 담배.”
최곤(박중훈 扮)이 매니저인 박민수(안성기 扮)에게 가장 많이 건넨 대사다. 최곤은 가수왕 경력을 20년 간 울거 먹으며 왕년의 화려함만을 되새김질하며 미사리 카페의 가수로 전락했다. 그는 대중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직도 스타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매니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주변인들과 불화를 일으킨다.
속 깊은 박민수의 물밑 작업으로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 DJ로 컴백한 최곤, 그러나 통폐합을 앞둔 영월중계소 역시 그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다.
소박한 스케일에 걸맞은 잔잔한 감동을 위한 설정도 적절했다. 한물간 로크스타와 주류에서 밀려난 매체인 라디오, 지방 방송국의 먼지 덮인 기자재, 낡은 LP판, 그뿐 아니다. 배경음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던 버글스(Buggles)의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기억의 저편에서 그 노래를 즐겨 들었던 시절로 되돌려 주는 행운을 주었다. 25년 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던 그 노래를 들으며 라디오의 장례를 예감했다. 해일처럼 범람하는 첨단 매체들은 라디오를 몰아내고 그것과 함께했던 나의 추억마저 순장(殉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출퇴근길의 라디오는 지금도 그날처럼 속삭이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다시 그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억지 춘향 격으로 데스크에 앉은 최곤은 거침없는 폭언과 자유분방한 진행으로 주변을 당황케 한다. 그러나 그의 진솔함 때문이었을까. 이를 계기로 지역 주민의 정서에 잔잔히 파고들어 큰 반향을 일으킨다. 급기야 인기몰이에 힘입어 그 프로그램은 전국으로 송출되고 DJ로 부활한 최곤에게 유능한 기획사가 손을 내민다. 박민수는 고민 끝에 최곤의 재기를 위해 그의 곁을 떠난다.
두 남자에게 서로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시내버스에 앉아 김밥을 우적우적 넘기며 그의 방송을 듣는 박민수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결국 재회한 그들은 평상시처럼 가방을 주고 던지며 한바탕 웃음으로 그 순간을 채운다,
영화가 그들의 실화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배역에 녹아든 두 남자들의 절제된 연기는 드러나지 않은 많은 것들까지도 짐작케 한다. 둘이 함께 있을 때 더욱 빛나는 두 스타, 그들이 함께한 어떤 영화보다 더 잘 어울렸다. 작은 이야기지만 큰 울림으로 남는다.
잔잔한 인간미가 담긴 그들의 웃음은 때론 눈물을 대신했다. 적당히 늙은 그들의 주름은 살갗이 느즈러져서 생긴 노화현상으로의 잔금이 아니었다. 두 남자가 함께한 추억의 등고선이며 연륜의 골이자 우정으로 써 내려간 일기장이었다. 영화는 끝났으나 긴 여운에 취한 나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이상한 현상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별마로 천문대, 산과 강을 끼고 자리잡은 아름다운 방송국은 비록 잃어버린 것도 많았으나 아직도 간직할 것이 많은 두 남자의 관계처럼 아름다웠다. 퇴물 가수에 무능한 매니저, 그들에게 활화산 같은 관중들의 갈채는 사라졌지만 서로에게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행복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대중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 두 사람은 최상의 파트너였다.
스타들에게만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것일까. 지금껏 지내 오면서 누군가의 매니지먼트를 당연한 것인 양 덤덤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던가.
혼자서 빛나는 별이 없다는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의 매니저였던 적이 있는가. 가까운 사람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놓치지 말자. 누군가의 삶에 매니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엄현옥 작품론│
엄현옥의 변용(變容)을 통한
인습에의 탈출, 그 모반(謀反)의 행적
한상렬 (문학평론가)
1. 모반(謀反)의 시작
환경론자들은 인간과 환경을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상정한다. 작가 엄현옥의 경우도 그런 경향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그가 생애의 뿌리를 내린 곳은 전남 장흥이다. 주목할 것은 그 어느 지역보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 곳 천관산에는 출신 작가들의 시비가 조성되어 있다. 수필작가 엄현옥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 수필 「나무」의 한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내가 만일 나무로 태어난다면, 시골집 울에 아담하게 서 있는 싸리나무나, 마을의 고샅을 지키는 회양목이어도 좋겠다. 아니면 양지바른 묘지 둘레에 선 도래솔이 되어, 세상의 힘든 여행을 끝낸 망자(亡者)와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어느 가난한 문사(文士)의 앉은뱅이책상이라면 더욱 좋겠다.”(「나무」의 결미) 죽어 나무가 되고 싶은 작가. 마을을 지키는 회양목이면 좋고, 도래솔이 되어 세상 여행을 마친 망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작가. 하지만 그게 만일 욕심이라면, 어느 가난한 문사(文士)의 앉은뱅이책상이어도 좋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지닌 작가. 세상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대로 천명을 따라 살고 싶은 작가가 엄현옥이다. 이는 삶의 진정성이자, 작가 정신일 게다.
그는 등단한 지 수년 만에 인천광역시 문예진흥기금을 수혜하여 첫 수필집 『다시 우체국에서』를 상재하여 제물포수필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어서 『나무』를 발표하여 인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곧 이어 세 번째 수필집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을 상재하여 신곡문학상을 수상하였으니, 10여 년 문력의 작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겠다. 주목할 것은 그의 작가로서의 전력치고는 창작에 바치는 열정이 상당히 왕성하고 화려하다는 점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창조해 내는 작품세계의 남다름이다.
고기를 낚는 이를 ‘어부’라고 한다. 그네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낚아 올린다. 그런데 낚는 방법과 기교에 따라 그가 낚아 올리는 고기의 종류나 수량이 다르다. 어떤 이는 세찬 파도와 싸우며 어렵사리 고기를 낚는다. 그런 사람은 뜻하지 않은 대어(大魚)를 낚기도 하고 만선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다지 수고하지 않고 나태에 안주하여 고기를 낚는 이에겐 그 결과가 신통치 않게 마련이다. 언제나 깨어 있어 현상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통찰하며 길고도 긴 사색과 발효할 날을 기다리는 그 길고 긴 시간과 싸워 이긴 자에게는, 언제고 자신이 바라는 대어가 낚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세상엔 너무 조급한 이들이 있어 수고로움도 없이 대가를 바라는 이들도 많다. 수필작가는 많아도 정작 수필다운 수필을 창작해 내는 작가는 드물다는 우려는 무엇을 말하는가.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현실은 수고로움보다는 현실에 안주하여 나태와 오만에 빠진 작가가 많다는 것의 증좌는 아니겠는가.
그에게 수필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아토피가 그렇듯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이렇듯 날이 갈수록 진정되지 않는 내 마음의 아토피를 진정시키는 묘약을 나는 알고 있다. / 그를 만나는 것이다. 그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그가 내민 적절한 처방전을 따라 생각의 줄기를 정리하고 일렁이는 마음의 결을 안정시킨다.”(「문학적 자전-저녁 연기」에서) 식물성을 상실해 가는 회색빛 도시의 삶. 원인을 알지 못하는 아토피의 만연. “일상의 자잘한 마찰에도 가려움을 느끼고 허탈함이 맴도는” 그런 일상에서 그는 수필이란 이파리 하나를 줍는다. 그리하여 그에겐 수필이 있어 고향의 저녁 연기가 주는 평안함이 함께 머물고, 아토피의 재발과 진정이 반복되는 것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한다. 그만이 갖는 소유의 즐거움, 아마도 그게 엄현옥의 수필세계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인습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려는 모험에 철저한 작가이다. 그의 실험정신은 언제나 절망 속에서의 꿈꾸기라 해도 좋다. 그의 작가 정신의 철저한 무장은 완벽 지향의 문장 쓰기와 함께 주제의식의 발현을 명제처럼 가슴에 안고 주제 의미의 생명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여 그의 어느 작품을 임의로 취택하여도 정밀한 문장과 만나게 되며, 정서의 지성화를 통한 주제 상상화의 언어미학적 세계에 몰입하게 한다. 이는 운문과 달리 산문적 문장인 수필의 주제 의미화의 생명일 것이 분명하다. 밀도 있는 담론 전개와 단아한 미학적 구성이 그의 수필의 멋과 맛이라면, 그가 전개하는 세계의 영역은 현상의 변용을 통한 인습에서의 탈출을 위한 모반의 기도(企圖)일 것이다.
2. 변용과 모반의 진행
현(絃)을 고르는 미세한 음이 흐르고, 이내 연주가 시작된다. 그 곳에는 나무로서 가장 그럴듯한 위치에 오른 현악기들이 있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노연주자의 품에 안긴 더블베이스와 깔끔한 중년 단원과 포옹하는 첼로, 그들은 나무라는 재질의 악기가 아니라 이미 연주자의 분신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팔자를 누리고 있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날렵한 미모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어깨에 실려, 그녀의 턱에 몸의 일부를 맞대고 있다. 그 모양이 여인의 몸매를 닮았다는 사실을 처음 느낀다. 검은 롱 원피스를 입은 미녀 주자(奏者)의 어깨에 지그시 기댄 채 사랑을 나누다가, 새처럼 솟구치는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활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화음은 유장하고 거침없는 테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러다가 중후한 음색의 베이스나 바리톤이 깔리면 카펫처럼 낮게 드리워진 포근함으로 실내를 감싼다. 그리고는 끝나기가 무섭게 감당하기 힘든 박수세례를 받기도 한다.
저들은 물론 하루아침에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아니다. 어느 장인(匠人)의 정교한 손놀림에 자신을 단련시킨 후에야 저렇듯 우아한 자태로 서게 된 것이리라. 또한 저들은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와서도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행여 상할세라 단단한 케이스에 담겨 차를 탈 때에도 주인보다 먼저 오른다. 그리고 연주자가 무대를 떠날지라도 그의 애장품으로 사랑받게 될 것이다.
― 「나무」에서
그녀의 발상은 탁월하다. 아니 참신하다고 해야 할까. “인천항 8부두를 빠져 나오는” 나무에 대한 그의 놀랄 만한 상상력은 나무를 나무로 보지 아니한다. 그 나무에게 내세가 있음을 … 그리하여 어떤 나무는 ‘더블베이스’로, 어떤 것은 ‘첼로’로, 또 어떤 나무는 ‘바이올린’으로 변화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모반이 따라야 한다. 나무가 나무 자체로 종속된다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 어떤 이의 손이 닿느냐에 따라 나무의 변용은 전혀 이질 적인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작가의 상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버팀목’으로 전이(轉移)된다. 그리하여 나는 어떤 나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해석을 통한 주제 구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존재의 의미를 추적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현상의 언어적 비틀기를 통해 “어느 가난한 문사(文士)의 앉은뱅이책상이라면 더욱 좋겠다.”는 고도로 순치(馴致)된 자기 성화(聖化), 진정성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엄현옥의 수필은 쉽게 씌어진 듯하면서도 쉽지만은 않다. 이런 현상의 변용(變容)은 인습에의 탈출을 기도하는 모반일 것이다. 이런 모반은 그의 창작노트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아침 여덟 시, 인파에 밀려 개찰구를 빠져 나온다. 웬 미녀가 큰 가방을 메고 서서 매력적인 웃음을 날린다. 그녀가 주는 것은 미소뿐만 아니다. 무언가를 나누어 준다. 모두 주춤거리며 받아 가는데 남자들이 특히 더하다. 저녁이라면 흔한 일이겠지만 이른 아침이라 의외다.(수필 「나무」의 창작노트에서)
평범한 이들의 예상을 뒤엎는 발상의 대전환. 이른 아침 출근길에 스티커와 초코파이를 나누어 주는 아가씨의 삶의 모습에서 그는 “발칙한 발상과 창의성에 내심 혀를 내두른다.”는, 바로 여기에 그의 수필이 존재한다. 도전적인 모반, 여기 그의 수필이 자리하고 있다.
수필 「질주(疾走)」의 경우도 이와 흡사하다.
사람들은 달린다.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는, 왼편 한켠을 속도를 지향하는 자들에게 내어 준 지 오래다. 그러나 러시아워일 때면 너도나도 걷는다. 아니 달린다고 함이 적절하다. 빨리 갔다고 해서 전철을 먼저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열차가 홈에 들어와야만이 타는 것이다. 여유를 잃은 도회인의 조급증은 이처럼 매순간 타인의 속도에서 이탈하는 것이 불안한 것일까.
도시인의 조급함을 작가는 아침 출근시간 군중들의 모습에서 유추해 내고 있다. 전철 1호선의 급행과 완행은 좋은 에피소드다. 시간으로 따지면 불과 몇 분 상관이지만 승객들은 급행열차를 만나면 후딱 전철을 옮겨 타기 위해 대부분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을 치르는 모습 같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바삐 서둘게 하는가? 질주하는 현대인의 삶. 이에 대한 작가의 관조적 성찰이 이 수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두 가지의 에피소드를 제시하여 이를 일반화하면서 의미화의 단계로 들어간다. 첫 번째로 전철 직통 구간의 예를 통해 달리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그리고는 “자본주의와 느림은 상극”이라는 밀란 쿤델라의 말을 인용하여 속도 위주의 삶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하였음과, 이런 속도 위주의 삶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로 무위(無爲)의 삶이다. 이 또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인의 불안의식의 반증이다. 이런 질주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자리할 수 없음을 선비의 여유로움을 예시로 보여 준다.
이렇게 이 수필에서의 두 갈래의 축을 예시로 한 우리네 삶의 질주에 대한 성찰은, 타자로부터 자신으로 귀환하는 수필문학의 정석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예시를 통해 일반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기화의 과정일 것이다.
나의 속도를 찾아야겠다. 질주하는 세상에 편승하여 망각하고 있었던 나만의 속도를 꼭 찾고 싶다. 시간은 항상 거기에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근래 번지고 있는 ‘느림의 미학’과 함께 유행처럼 사라질 어휘는 아닌 듯하다. 천천히 깊은 생각에 잠겨 산보하듯 모든 걸 제쳐 두고 싶다. 느림 속에 자신을 방치하고 속도에서 이탈되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미 질주에 익숙하여 나만의 속도를 찾는 것이 힘든 일일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걷고 달려 나를 앞지르겠지만 언젠가 목적지에 이른다는 것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기화는 곧장 결미에서의 통합으로 의미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나의 속도를 찾아야겠다.”가 그것이다. 반성적 질주에서 자신으로의 돌아옴은 삶의 진정성이자, 존재 해명이기도 하다. 밀란 쿤델라가 그의 소설 「느림」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여 주었듯, “나는 마차 쪽으로 천천히 가는 나의 기사를 좀더 바라보고 싶다. 그의 걸음걸이의 리듬을 음미해 보고 싶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걸음걸이들은 느려진다. 저 느림 안에서, 나는 행복의 어떤 징표를 알아보는 듯하다.”라고 했던 자아각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의 삶의 예지일 것이다. 이 또한 수필의 행로에서의 모반일 게 분명하다.
엄현옥 수필에서의 이런 모반은 그의 수필이 서정보다는 다분히 지성 쪽에 경도되어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수필 「그의 고백」은 도배를 하면서 빈 벽을 바라보며 무심히 떠올리는 삶의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수필 역시 평범한 화소이지만 통상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벽의 독백’을 주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발상은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고 현상을 파헤치며 사물을 새롭게 보는 작가의 예민한 ‘눈’을 보게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상을 현상 그 자체로 보지 아니하고 굴절시켜 변용하는 인습에의 탈출이자, 고정관념에 쐐기를 박는 모반(謀反)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 답답하다고 한다. 앞뒤가 대책 없이 꽉 막힌 융통성 없는 사람을 칭할 때면 벽창호라며 나를 빗댄다. 또한 바람을 막고 풍경을 차단하는 주범으로 몰고 간다.
그들은 상대방과의 인간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나의 이미지와 결부시키곤 한다. 대화가 통하지 않은 상황이면 차라리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며 또 나를 들먹인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부적절한 상황에서 회자되곤 하는 나의 불명예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어서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나를 허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넘어야 할 그 무엇이라 한다. 오래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운동 경기의 주제를 ‘벽을 넘어서’로 정한 적도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듯한 기세로 몰아세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몇 겹의 벽을 쌓아 놓고 산다. 그들 대부분은 나를 허물자고 할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은 점점 두꺼운 벽을 세우기를 일삼으면서 우리들만을 탓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만 보는 어리석은 이들이 바로 사람이다.
― 「그의 독백」에서
이 수필의 ‘나’는 바로 ‘벽’이다. 그러나 실상 ‘벽’은 어쩌면 작가 자신일 것이다. 그래 대리자인 ‘벽’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는 이 수필은 자기관조, 자기성찰이라는 지극히 수필적인 패턴을 차용하면서도, 독자를 ‘낯설게 함’으로써 상상력의 증폭과 참신성을 보태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수필 「그의 독백」은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는 1인칭의 시점에서 그 화자를 ‘벽’이라는 대상에 주어 내포 작가인 ‘벽’을 통해 인유하는 수법을 차용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화자의 직접적 대화보다도 더욱 문학적 상상력이 발휘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변용과 모반이 그의 수필을 값지게 하지 않는가 싶다.
물론 작가는 이런 의도를 사전에 포석처럼 깔고 집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 수필들이 이런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를 한다.
수필 「커피 믹스」는 역전적 사고의 묘미를 보여 준다.
식사 후의 포만감에 나른하다. 커피를 마시려는데 우연히 커피 믹스 끝부분에 적힌 숫자가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는 5 이상의 숫자부터 단맛이 강하다고 했고, 다른 이는 1, 2번은 정말 쓴맛이라며 맞장구 쳤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는 상쾌한 아침이면 2, 3번이, 피곤이 밀려드는 오후에는 9번이 좋았다. 어쩌다 7번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때면 네 잎 클로버를 찾아낸 것만큼 기뻤다.
― 「커피 믹스」에서
화제는 커피 믹스 끝부분에 적힌 숫자에 대한 해석상의 통념으로, 이를 뒤집어 보는 전도(顚倒)된 의식의 문제를 아주 속도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5 이상의 숫자는 단맛이 강하고, 1, 2는 쓴맛이라는 단맛과 쓴맛의 정도를 표시하는 숫자라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실제는 생산 라인의 번호일 뿐이라는 해석은, 역전적 사고를 보이는 발상의 탁월함이다. 만일 이를 현상 그 자체로만 보았다면 이 수필은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엄현옥수필의 장점은 바로 이런 발상의 탁월함, 소재를 보는 시선의 예민함에 있으며, 창작상의 실험정신이라는 작가정신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겠다. 그의 수필이 미래 수필을 위한 한국수필의 발전의 새로운 토양이 되리라 여겨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끝으로 변용과 모반, 그 남은 문제
수필은 자잘하고 평범한 사물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해석함으로써 인생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어부가 어떻게 고기를 낚느냐는 문제와 결부된다. 그래, 현명한 어부는 고기를 낚지만 더 크고, 더 희소한 고기를 낚게 된다. 이렇게 같은 소재라도 그 소재를 응용하는 작가의 능력에 따라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작가 엄현옥은 같은 소재라도 그 소재를 재단하고 해석하는 발상의 탁월함이 보인다. 이 점이 그의 수필 읽기의 기쁨이 아닐지 싶다.
그러나 한 작가의 작품에서 모든 경향이 이를 붙따를 수는 없다. 아무리 현명한 작가라도 소재에 따라서는 이런 실험정신이 개입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별마로 천문대, 산과 강을 끼고 자리잡은 아름다운 방송국은 비록 잃어버린 것도 많았으나 아직도 간직할 것이 많은 두 남자의 관계처럼 아름다웠다. 퇴물 가수에 무능한 매니저, 그들에게 활화산 같은 관중들의 갈채는 사라졌지만 서로에게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행복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대중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 두 사람은 최상의 파트너였다.
스타들에게만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것일까. 지금껏 지내 오면서 누군가의 매니지먼트를 당연한 것인 양 덤덤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던가.
혼자서 빛나는 별이 없다는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의 매니저였던 적이 있는가. 가까운 사람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놓치지 말자. 누군가의 삶에 매니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 「두 남자 이야기」에서
이 수필의 화제는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이다. 영화감상문과 같은 이 수필은 주인공인 두 남자의 이야기에서 유추되는 인간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민배우 안성기, 그의 웃음은 그 어떤 표정보다 더 아름답다.”는 선언적 언술이 그렇듯, 추억처럼 흘러간 시간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영화가 주는 짙은 감수성은, 시간의 추이를 딛고 회귀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담론 속에서 발상의 대전환이나 실험적 방법을 찾기란 모호하다. 이는 작품의 소재가 주는 벽일 것이다. 결국, 모든 작품에서 실험적 방법의 쓰기는 한계가 있음을 그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수필에서의 변용과 모반은 작품에 따라, 소재를 부리는 작가의 능력이나 담론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이 엄현옥의 수필을 통한 수필 창작의 남은 문제가 아닐지 싶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는 요소의 변화가 아니라, 오직 해석의 변화를 본다.”고 하였다. 엄현옥의 수필은 이런 해석의 변화를 통해 현상을 변용하고 모반을 도모하는 데에서 수필 창작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마치 아방가르드의 마티스의 그림과 같이, 그림의 내용이나 선, 색채 등의 표현 방식의 일대 전환이다. 이런 내용과 기법적 혁신이 미래 수필로서의 수필문학이 나아갈 방향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수필쓰기의 시선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하겠다. 남은 문제는 이런 시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있을 것이다.
│문학적 자전│
저녁 연기
엄 현 옥
어느새 해넘이가 빨라졌다. 성큼 다가선 어둠이 길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린다. 퇴근길의 어둠과 몇 발자국 동행하노라면 고기 굽는 냄새가 후각을 어지럽힌다. 일명 ‘먹자골목’의 점령군인 그 냄새는 찬바람이 옷깃을 넘보는 이때부터 더욱 강력하게 행인들을 붙잡는다. 냄새를 따라 주춤하던 연기(煙氣)는 고층 건물로 인해 조각난 군청색 하늘을 배회한다. 하늘로 올라간 그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을 젖혀 바라본다. 낯설지 않다.
고향의 저녁 연기가 떠오른다. 해지는 것도 잊은 채 땅따먹기나 공기놀이에 취해 있을 때면 놀이의 흥을 깨는, 그러나 정겨운 언니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막둥아, 밥 무욱자아-”
땅거미가 내려앉았으나 내 몫으로 금을 그어 놓은 땅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뜻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내가 일어나야만이 멈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을 안은 채 손을 털곤 했다. 땅쯤이야 내일 또 따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상큼하고 매콤한 저녁 연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가족들의 저녁을 짓는 연기가 저마다의 굴뚝에서 싸목싸목 골목으로 나오곤 했다. 저녁 연기는 일터에 나간 가장들에게 휴식을 주었으며 해 저문 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하던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내 몫의 땅과 하루도 안 보면 못 배기는 친구들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식물성 연기가 안겨 주는 포근함이 온몸을 감쌌다. 순하디순한 그 연기는 가족 공동체를 확인하며 서로 등을 기댈 수 있게 만드는 신비한 기체였다.
퇴근길의 통과의례인 ‘먹자골목’의 연기는 자극적이다. 허기를 부추긴다. 일을 마친 사람들은 지친 몸으로 귀가를 지체하며 저마다의 외식 약속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밀집한 음식점에서 토해 내는 동물성의 연기에 금방 질리고 만다. 연기는 승천하며 흩어졌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광란의 밤이 남긴 흔적은 요란했다. ‘여대생 마사지’, ‘대리운전 만 원’ 등의 전단지는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것들만 밟고도 보행이 가능할 정도의 징검다리로 뿌려져 있었다.
식물성 연기가 그립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후각이 기억하고 있는 그 냄새는 고향의 저녁 연기다. 저잣거리에서 맡는 고기 굽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고향의 저녁 연기를 그리워할 때면 환절기다. 내 마음의 면역 체계가 교란을 일으키는 것도 이맘때쯤이다. 보내고 맞는 계절이 낯설고, 대상에 대한 인식도 혼돈을 일삼는다. 일상의 자잘한 마찰에도 가려움을 느끼고 허탈함이 맴돈다.
대부분의 아토피가 그렇듯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이렇듯 날이 갈수록 진정되지 않는 내 마음의 아토피를 진정시키는 묘약을 나는 알고 있다.
그를 만나는 것이다. 그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그가 내민 적절한 처방전을 따라 생각의 줄기를 정리하고 일렁이는 마음의 결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 어설픈 내 사랑을……. 그는 아직도 내 맘을 모를 것이다. 많은 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토로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치열함에 질려 뒷전으로 슬며시 물러나곤 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덜해서가 아니다. 한시도 마음이 그의 곁을 떠나 본 적은 없다.
그의 앞에선 늘 한없이 작아진다. 내 사랑을 발설하면 그의 자취가 사라질 것만 같았기에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다.
그가 ‘수필’이라는 중년 신사의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온 것은 10여 년 전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면 면목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와 보낸 시간도 보잘것없다. 내 시간에 맞춤하여 그와의 만남을 갖고 있으니, 제 편리한 시간에만 간신히 만나 주는 연인이 늘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주변에는 ‘온리 유(only you)’를 외치며 그만 바라보는 멋진 이들이 진을 치고 있음에랴.
이처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그와의 만남 장소도 변변치 않다. 사이버에서 교류하던 동호인들이 별다른 예고 없이 불시에 만남을 갖는 일명 ‘번개’처럼 기습적이다. 그런데 그는 나의 이 대책 없는 ‘기습’을 기꺼워하는 눈치다. 다행이다. 그렇게 믿기에 호시탐탐 그에게 다가간다.
때로는 움직이는 전철도 짧은 데이트로는 적격이다. 지하철의 흔들림을 빙자하여 그에게 살며시 기대고 모서리가 닳은 종이를 들여다보며 퇴고(推敲)를 반복한다. 짧은 만큼 집중도는 높다. 내가 달리 마음을 빼앗길 일이 전철 안에는 없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기계음에 몸과 마음은 도리어 안정을 찾는다. 잡초처럼 거슬리는 문장들을 솎아내고 흔들리는 펜으로 행간을 긋는다. 업무 중에도 그와의 접선을 불사한다.
번개를 끝낸 그의 뒷모습은 경쾌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인파 속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실내악이 흐르는 우아한 실내에서 와인 잔을 부딪치는 은밀한 만남을 꿈꾸기에 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나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도 그가 먼저 이별을 말하지 않으리라는 맹목적인 확신이 있다. 이처럼 마음의 아토피를 진정시키려고 그를 찾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생각의 실마리를 풀지 못할 때에도 그는 나를 안정시키며 산만한 생각들을 잠재운다.
늘 그래 왔듯이 기약 없는 약속이 있으므로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그를 만나고 난 며칠간은 내 마음의 아토피는 진정된다. 고향의 저녁 연기가 주는 평안함이 함께 머문다. 아토피의 재발과 진정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어느덧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