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무신.
1179년 집권무신이던 정중부(鄭仲夫)를 죽이고,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진(珍)이다. 힘이 남보다 뛰어나게 세었고, 일찍부터 큰 뜻이 있어 가산을 돌보지 않았다. 아버지 진이 탐욕스러워 남의 전지(田地)를 많이 빼앗았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전지 문서를 모두 선군(選軍)에 바치자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고 한다. 15세에 음서(蔭敍)로 교위(校尉)에 임명되었으며, 그뒤 지위가 올라 장군에 이르렀다. 1178년(명종 8) 3월 청주에서 토착 청주인들이 서울 출신자들을 죽이자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보복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 청주에 와서 청주사람 100여 명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사심관(事審官)으로 파견되었으나,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1179년 9월 허승(許升)과 모의하여 집권무신
정중부를 제거하기로 결심, 장경회(藏慶會)가 끝나던 날 밤 무사 30여 명과 함께 정중부와 아들 균(筠),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종전 최고 권력기구의 기능을 행사해왔던 중방(重房)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적 병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두어 정권유지의 기반을 마련했다
(→ 도방). 정권탈취 후 복고(復古)에 뜻을 두어 문관들을 존중, 문·무신을 고루 등용하여 여러 무신들의 반감을 샀으며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1180년 정중부를 제거하는 데 공이 있었던 태자부지유별장(太子府指諭別將) 허승과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 김광립(金光立)을 반역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죽이고, 1181년 3월 전 대정(隊正) 한신충(韓信忠)·채인정(蔡仁靖)·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꾀하자 귀양을 보내는 등 실권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183년 30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첫댓글 김사미, 이의민, 경대승은 동 시대의 인물입니다
경대승[1154(의종 8)~1183(명종 13)]
김사미(金沙彌) ? ~ 1194(명종24)
이의민(李義旼) ? ~ 1197(명종27)
이의민이 핍박을 받으며 경주에서 은둔을 하면서 김사미 등과 공모하여, 청도 운문산으로 부터 밀양 등지에 이르는 산속에 은거하여, 신라부흥운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효심 휘하 7,000여 민중군(농민군 등)은 해체되었을 것으로 상상해 봅니다, 효심은 야전군사령관 역할을 햇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의민 등은 정치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조정은 신라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사미 휘하 7,000여 민중군을 한낱 초적의 무리로 격하하여 역사에 기록을 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농민군(초적) 7,000여명이 웅거한 주된 지역이 밀양으로 추정되며, 억울하게 초적으로 몰린 백성으로서 농민군인 고려백성을, 오늘의 밀양시민과 청도군민은 억울한 조상들의 지위를 복권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