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blo Picasso <Still Life with Chair-Caning> 1912
oil and oilcloth on canvas, with rope frame, 27 x 35 cm
Musee Picasso, Paris, France
(펌 글) 당 기자, 3차례에 걸쳐 독자들에게 ‘뻔뻔한 그림들’을 줄줄이 사탕으로 보여드렸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는 작품은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이 되겠다. 우선 독자께 질문 하나 날리겠다. 그동안 보았던 ‘뻔뻔한 그림들’(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 최경태의 <여고생>)과 피카소의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사이의 차이가 무엇일까?
머시라? ‘뻔뻔한 그림들’은 (형태적인 측면만 본다면) 누구나 봐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있는 그림인 반면, 피카소의 ‘등나무’는 무엇을 그려놓은 것인지 헷깔리는 그림이라고요? 조타! 그럼 피카소 ‘등나무’에서 당신은 그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볼 수 없단 말인가? ‘JOU’라는 문자와 ‘등나무 문양의 의자’는 누구나 봐도 알 수 있다고요?
자, 그럼 두 번째 질문 날린다. ‘등나무 문양의 의자’는 그린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등나무 의자 이미지를 유포(油布, oilcloth)에 프린트한 것이다. 이를테면 피카소는 등나무 의자 이미지를 복사한 유포를 캔버스에 꼴라쥬(Collage)했다고 말이다. 그런 까닭인지 피카소의 ‘등나무’는 흔히 ‘최초의 꼴라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적어도 피카소의 ‘등나무’ 이전의 서양화는 ‘캔버스 위에 오일’(oil on canvas), 즉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근데 피카소는 장구한 서양화의 전통에 ‘똥침’을 놓았다. 그는 등나무 의자를 물감으로 그리지 않고 아예 복사해서 캔버스에 부착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피카소의 ‘등나무’는 현실세계(복사물)과 가상세계(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질문 던지겠다. ‘뻔뻔한 그림들’과 피카소의 ‘등나무’ 사이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면? 글타! 액자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액자는 가상세계(그림)와 현실세계(벽면) 사이에 위치한다. 그럼 피카소의 ‘등나무’ 액자는? 그것은 일명 ‘황금액자’가 아닌 마치 쟁반의 띠처럼 로프로 만든 타원형 액자이다. 그렇다면 그 액자는 기존 미술계에 당연시 되었던 ‘미술’ 액자가 아닌 ‘일상(물)’ 액자가 아닌가? 그럼 피카소의 ‘등나무’는 일상세계의 일상물(복사물)이 경계(액자)를 넘어 가상세계로 침입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자, 결론 때려보자. 현대미술은 한 마디로 ‘새로움’으로 집약될 수 있다. 피카소의 ‘등나무’는 장구한 서양화의 전통, 즉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캔버스에 일상물을 접목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물이 곧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뭬야? ‘일상물’이 곧 ‘작품’이 될 수 있다고?
꼴라쥬(Collage) '풀칠'이나 '바르기'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 용어는 캔버스(화면)에 인쇄물, 천, 쇠붙이, 나무조각, 모래, 나뭇잎 등 여러 가지를 붙여서 구성하는 회화 기법 또는 그러한 기법에 의해 제작되는 회화를 가리킨다.
입체파(cubism)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으로,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1907)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입체파’라는 용어는 마티스(Henri Matisse)가 브라크(Georges Braque)의<에스타프 풍경(Houses at L'Estaque)>(1908)이란 연작을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평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재현을 해체시켜 다시점(多視點)을 이차원으로 재구성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