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 불교신문 2577호/ 11월25일자
선진규 봉화산 정토원장
宣晉
圭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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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성원으로 ‘노무현 영가’ 극락왕생”
해방 후 김해로…盧 전 대통령 일가 한마을 살아
생전 마지막 모습 떠올리면 아직도 눈빛 ‘촉촉’
“원장님 계신가 가봐라.” “계시면 모시고 올까요?” “아니다.” “……” “참 좋은 분인데…” 지난 5월23일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서 투신 직전 동행한 경호원과 이같은 대화를 나눴다. 불과 20분 전 사저 책상머리에서 마지막 유서를 쓰고 난 뒤다. 경호원을 따돌리고 부모 위패가 모셔진 정토원 법당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하직인사를 올렸을 그의 표정과 마음은 어떠했을까.
1959년 자유당 말기 민둥산 봉화산 꼭대기에 호미 든 관음상이 봉안됐을 때, 당시 중1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학교 주최 식목행사에서 “일부러 부처님 근처에만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정토원에만 오면 이런 말을 곧잘 했다.
어린 꿈을 키웠던 부엉이바위서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땅을 바라보며 자기 손으로 심어서 자란 나무숲에 몸을 던진 대통령의 한(恨)을 씻겨주고 품어주는 듯, 봉화산 정상 관세음보살은 생사를 초월한 편안한 미소로 굽어보고 있다.
지난 18일 김해 정토원에서 만난 선진규 원장(75, 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은 “온 국민의 서원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극락왕생하실 것”이라며 촉촉하게 젖은 눈빛을 애써 감췄다.
선 원장은 1934년 4월 김해 한림면 장방마을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 사저가 있는 봉화산 남쪽 기슭이 노 전 대통령 생가터고, 선 원장 고향집은 봉화산 북쪽 기슭에 있다.
<사진> 선진규 원장은 지난 18일 봉화산 부엉이바위가 보이는 정토원 뒷산에 우두커니 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에 강제징용된 부친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일본 북해도서 살았던 선 원장은 해방이후 다시 김해로 와 정착했다. 그가 다녔던 진영읍 여래리에 있는 대창초등학교는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모교다.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도 동창이다. 작은 시골학교에서 한명의 대통령과 영부인 두 명을 배출한 셈이다. ‘대창’을 졸업하면 으레 인근 진영중학교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동창이 대부분 중학교 동문이 된다.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과는 열두살이나 터울이 져 같이 학교를 다니진 않았다. 교통사고로 숨진 큰 형이 선 원장과 또래벌이다. 나중에 노 전 대통령의 ‘고백’으로 안 사실이지만 선 원장은 당시 동네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요샛말로 ‘엄친아’였다.
해방의 기쁨과 평화도 잠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다시 피란짐을 싸야 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길을 떠나야 했던 현실 앞에서 선 원장의 조모는 대가 끊길까봐 중학생 큰 손자를 미군에 ‘입대’시켰다. 어디로 가든 죽음은 모면할 수 있으리란 기대였다. 미군 군속으로 보급부대에 투입된 선 원장은 그러나 1년간 전쟁 한복판에서 수천수만명의 참혹한 죽음과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자신 역시 수십번 죽을 위기를 넘겼다. 지금도 얼굴 왼쪽 볼엔 권총을 맞았다 귀 쪽으로 총알이 관통한 자욱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전쟁의 상흔은 선 원장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 생사를 초월하고 중생 구제를 위한 ‘해탈의 길’을 가고자 하는 계기가 됐다.
스님 되려 東大 입학…삭발 총학생회장 유명세
출가인연 아쉬움 뒤로한 채 교육포교활동 앞장
부산공고 토목과 2학년까진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3때부터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기 시작했다. 무작정 상경해서 조계사로 향했다. 우연히 만난 권상로 스님(동국대 초대 총장)에게서 ‘출가를 하려거든 우선 학문을 마치라’는 조언을 듣고 1955년 동국대 불교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박성배 뉴욕주립대 교수도 당시 불교대학 동기다. 오직 출가하기 전 과정으로 여겼던 동국대 재학시절 선 원장은 총학생회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불교대학이 교내서 대접받지 못하자 분통이 터진 나머지, 입학하자마자 열린 전국웅변대회에 출전, 특승을 거머쥐면서 학교서 일약 스타가 됐고 급기야 4학년 선배들을 누르고 3학년 총학생회장으로 발탁됐다.
그 당시 선 원장은 출가를 위해 합천 해인사로 입산, 삭발염의하고 예비스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총학생회장이 학교에 없자, 고향집에 찾아간 학교 관계자는 물어물어 해인사까지 찾아왔다. 우선 학교 가서 사정을 말하고 주변정리를 하고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해인사를 떠난 선 원장은 학교서 초대 내무장관을 지낸 백성욱 총장을 만나면서 세간에 머물게 됐다. 삭발한 총학생회장은 서울시내 대학가에서 유명인이 됐고 ‘남산도사’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남산도사 선 원장은 총장 눈에 들어 매일 1시간씩 총장실에서 6개월간 <금강경>을 공부했다. 총장이 총학생회장과 머리를 맞대고 경전을 공부하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불연(佛緣)은 항상 그의 뒤를 따랐지만 출가인연이 쉬 맺어지지 않았던 선 원장은 평생도반을 만나면서 한평생 불제자로서 오직 수행정진하는 걸림없는 삶을 살게 됐다.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대학총학생회장 모임에서 만난 부인 김기업 여사는 평생 선 원장 곁에서 내조했고, 보건사회부 가정복지국장, 서울시 부녀아동과장 등 요직에서 목동청소년수련관 등 불교계 시설위탁에 큰 몫을 했다. 5년 전 저세상으로 떠난 부인을 두고, 선 원장은 “아무도 모르게 보살행을 실천하고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난 진정한 보살”이라고 말했다.
<사진> 지난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온 노 전 대통령과 선 원장 모습.
봉화산 정토원은 1920년대 자암사라 불리는 작은 암자였다. 선 원장의 조모가 자주 찾아 불공을 올렸고 그 때마다 어린 선 원장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왔었다. 6.25 전쟁 이후 화일사란 이름으로 단장한 정토원은 1958년 선 원장이 백성욱 총장에게 농촌계몽운동을 도와달라는 말에 토지 11만5703㎡(35000평)에 35만원을 지원받아 봉화사로 다시 태어났다.
1959년, 부정과 독재가 난무하는 자유당 말기 동국대 불교학도 31명은 봉화산 정상에 개발을 상징하는 호미 든 관음상을 봉안했다. 이때부터 선 원장은 식목과 개간에 앞장서면서 본격적인 농촌운동에 돌입했다. 1967년엔 사명대사와 만해스님 상(像)을 세웠고 1972년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됐다.
이후 1983년 화재로 전소한 정토원에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정토신행에 근거한 포교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봉화산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해 청소년 교육포교 공로로 2006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상임포교사 시절엔 대한불교청년회장을 맡으면서 만해전국백일장, 만해사상 강연회 및 세미나 등을 통해 만해스님 선양사업을 본격화했다. 200여 회의 설법회를 열고 16개 지회를 가진 청년회를 3년만에 무려 240개로 늘렸고 첫 찬불가 LP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10.27법난을 세상에 알리는데 적극 나섰고 한일불교청년회 교류협정 체결 등 한국불교 국제화에도 앞장섰다.
할머니 치맛자락 붙들고 정토원을 오갔던 꼬마는 이제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70대 중반 노인이다. 180㎝ 훤칠한 키와 쩌렁쩌렁한 우렁찬 목소리에는 여전히 ‘청년 기상’이 농후하다. 선 원장이 지향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삶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김해=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방대한 불교교리, 60여 페이지에 담아
봉화산 정토원에 들어서면 선진규 원장이 발행한 책 <부처님 삼대선언>이 법당 앞 평상에 수북하게 쌓여있다. 교과서 크기로 60여 페이지의 작고 얇은 이 책자는 3만권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퇴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 원장의 권유로 이 책을 읽고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책은 유명세를 탔다.
‘호미 든 관음성상’ 봉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책은 선 원장의 50년 포교행장의 결실이자, 원력으로 만들어졌다.
선 원장은 불교 교리의 방대함과 어려움 때문에 일반 시민의 불교에 접근이 쉽지 않았던 아쉬움에 “초고속 축소문화 시대에 불교도 짧은 시간안에 ‘이것이 불교다’라고 할 수 있는 미니 설명서가 절실함을 느끼고 글을 엮게 됐다”고 말했다.
연기선언과 전도선언, 귀의선언 등 부처님 삼대선언을 통해 불법을 꿰뚫었고 불교신행 기반이 되는 수행법과 상징물에 대한 이해를 친절하게 담아냈다. 동국대 권기종, 서윤길, 이봉춘 교수 등이 자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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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재의봉하일기-봉하는지금? > 봉화산 정토원의 선진규 법사님
주말 아침에 선법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법사님과는 경로당, 노인대학 등 노인복지 문제, 불교 관련 일들, 대통령님 관련 일들 해서 여러 번 만났지만 봉화산 정토원에 계시는 선법사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이런저런 말씀을 들어보려고 찾았습니다.
먼저 봉화산에 대해서 여쭸습니다.
그러자 펜과 종이를 찾으시더니 한자까지 쓰시면서 봉화산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십니다.
“옛날 가락 때(가야국) 왕족의 번영을 위해 지은 암자가 세 곳이 있는데 그 중에 김해 무촉산에 있는 모은암(母恩菴)과 양산쪽에 있는 부은암(父恩菴)이 왕비와 왕을 위한 곳이고 아들을 위한 태자암(太子菴)이 있던 곳이 바로 봉화산이었어요.”
“그런데 예전엔 봉화산이라고 안 부르고 태자암이 있다고 해서 자암산이라고 했습니다."
“주변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봉오산, 봉오산 이라 불러서 1962년 전국적으로 측량 조사를 할 때 내가 직접 건의를 해서 봉화산이라고 이름하게 됐지요.”
그러시면서 다시 바짝 다가서시더니 “내가 봉화산이라고 건의한 것은 다 이유가 있지”하시면서 “잘 들어보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 심은 후 8년 뒤의 봉화산 모습]
“내가 봉화산이라고 한 것은 사자바위 뒤쪽으로 예전에 봉수대가 있었어요.”
“봉화불을 올렸으니 그런 이유도 있지만 내가 동국대학교를 다닐 때 6. 25를 겪은 직후라 그 당시에 너무 가난하고 못 먹었던 보릿고개 시기이고 정치적으로 자유당 정부가 독재를 하면서 썩을 대로 썩었어”
“그런 와중에 동국대학교 기숙사에 있던 불교학도들이 중심이 돼 우리 한번 뜻 있는 일을 해보자. 정치 사회 참여도 그 당시 중요했지만 우리는 불교도이니까 뭔가 큰 원을 하나 세워보자 이래서 봉화산에 호미든관음상을 한번 모셔보자. 이렇게 하여 31명의 불교학도가 뜻을 모으게 됐어요.”
[호미든 관음성상을 모신 후 기념사진]
“호미든 관음상이 뭘 뜻하느냐 하면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불러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했는데 하물며 중생구제의 원을 세운 부처님이 호미를 들고 민둥산 정상에서 개발을 위해 서 계신다면 그 원이 이룩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관음보살상에다 호미를 들게 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이 뜻하는 것은 호미는 생존의 도구거든요, 이 관음성상을 모시면서 우리가 중생구제의 원력도 세우고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의 원력을 세운것입니다. ”
“이 젊은 불교학도들의 새로운 불교 운동은 정치적인 저항이면서 동시에 사회개척 내지 사회 선도 역할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는 거지. 그래서 사람의 심신을 개발하고 도덕사회를 가꾸어 보자는 미래지향적인 목표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서울 한남동에서 호미든관음성상 조성 장면]
“우리가 59년도에 나무 없는 민둥산이었던 봉화산 정상에 호미든 관음상을 모셨던 때가 묘하게도 자유당 말기였고 그 이듬해 4. 19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또 우연이라고 보기엔 참 묘한 일은 그 관음성상을 모시던 날이 4월 5일 식목일이였는데 당시 근처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와서 식목기념식을 한 후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 중에 미래의 대통령이 될 노무현 1학년 중학생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 내려와서 ‘제가 그 때 중학교 다닐 땐 데 호미든 부처님 모실때 주변에 나무도 많이 심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참 기막힌 인연이구나. 아마도 그 때 나무를 심으면서 큰 원을 하나 심었던 것이 아니였던가, 자연스럽게 정신적 봉화가 점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묘한 것은 관음성상 모시고 이듬해 4. 19가 일어났지만 꼭 10년 후에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지요.”
“만약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우리가 부처님 손에 호미릉 들려 경제개발, 사회개발의 원력을 세운 호미든관음성상을 모셨다면 이건 어용이지요.” 정신운동은 언제나 앞서야 하며 시련을 감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임명을 받아서 새마을 운동을 지휘한 김준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때 임명받았다고 하면서 이 곳 봉화산에 왔습니다.”
“김준원장은 키가 큰 분이었는데 비서들 다 보내고 여기 봉화산에서 일주일 동안 정신적 충전을 하겠다고 하기에 오두막 골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 그런것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곳에서 개발의 기운을 채득하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곳 봉화산은 역사의 큰 무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호미든 관음성상 모신지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서울에서 학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4월 5일에는 조계종 총무원장님을 비롯한 각 종단 원장님들이 오셔서 정토원에서 기념대법회를 한 것입니다.”
“그때 총무원장님들이 고생하는 대통령님 찾아 뵙고 위로를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긴 말씀이 끝나고 봉화산 정토원에 대한 인연을 여쭤 봤다.
법사님 고향은 봉화산 인근 장방리라는 곳인데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이 곳 절에 자주 다니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웅변대회 1등 수상 후 기념촬영 - 앞줄 오른쪽]
대통령님 어머니께서도 이 절에 열심히 다니셨다고 한다.
“장방리가 이 주변에서 제일 오래된 곳이며 그리고 그 다음이 본산리인데 봉하마을은 당시 열 댓 가구 됐나? 마을이 생긴지 한 60년 됐습니다.”
정토원은 최초 자암사라고 불린 이후에 화일사로 불렸는데 이것은 땅 주인의 호를 따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후 법사님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절을 인수해서 봉화사라고 했다가 봉화사라고 하니까 자꾸 불이 나서 1983년 정토원이라고 다시 개칭했다.
[대학 1학년 때 전국순회포교 기념사진 - 중앙 군복차림이 숭산스님]
“내가 대학졸업하고 호미든 관음성상을 세울 때 참 고생했습니다. 트럭으로 산 밑에까지 운반해 오긴 했지만 제막식이 내일이라 오늘 낮에 도착하고 밤에 이걸 산 정상으로 옮겨야 하는데 비가 많이 온 뒤라 푹푹 빠지는 비탈길을 학생들이 밤 새 옮겼습니다."
"당시엔 전기가 없잖아.”
“그래서 집집마다 솜 뭉치를 얻어다 기름을 붓고 횃불을 만들었어요. 밤에 산에서 횃불을 환하게 밝히고
으쌰! 으쌰! 했으니 당시 어린 아이들에겐 신기한 일일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이후에 정토원에 머물면서 인근 마을 발전을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했는데 노 대통령이 고등학교 때 이 세미나장에 와서 구경도 했다고 했으니 아마 정신적으로 큰 메시지가 전달 됐다고 생각해 봅니다.”
왜 정토원이라고 했습니까?
"마음과 육체가 깨끗하고 주위 환경이 깨끗하며 생사가 없는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을 정토라고 합니다. 불교의 최고 이상세계를 극락정토라고 합니다."
불교의 이상 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해보자. 그리고 원(苑)이라고 한 이유는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설법을 많이 했는데 불법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이를 인용했으며 또 어감상 좋기도 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법사님은 이곳이 모든 중생이 정토로 가는 길잡이이자 안내장소가 되고 싶은 염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성년이 된 대통령님과의 인연에 대해서 어땠는지 여쭤 봤다.
<사진> 지난 2003년 2월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 고향 봉하마을을 찾아온 노 전 대통령과 선 원장 모습.
“변호사 됐다는 얘기 듣고 그 후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한다는 말을 듣고 자랑스러운 후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이 관계를 가진 것은 국회의원 나왔을 때 선거운동에 앞장 서 주었습니다.”
“그 이후 대통령 경선할 때 100일 기도를 했으며 대선을 남겨 두고도 또 100일 기도를 하고 대통령 되고 나서 5년 동안 매일 아침 저녁 예불 드릴때 국정수행 원만성취, 경제안정, 동서화합, 남북화합의 대원을 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불교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이중에는 내가 쓴 부처님 삼대선언이라는 책이 아마 제일 마지막에 읽은 불교서적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선물하고 나서 삼일 뒤에 갔더니 서재에서 이 책을 가지고 나오면서 '형님 책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봉화산과 정토원은 대통령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이곳이 과거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주말이라 방문객이 많아 말씀 나누는 동안 법사님이 자리에서 여러 번 일어나셨다. 좋은 얘기 다음에 또 청하기로 하고 햇살 좋은 곳에서 사진 몇 장을 부탁했다.
2009년 불교학과 자랑스러운 동문상
선진규 법사
동문께서는 평생을 불법홍포의 대원력으로 한국불교중흥을 위해 교계 각 분야에서 보살행의 모범을 보이셨으며, 대한불교 청년회장,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재가불교단체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고, 50년전 김해 봉화산에 호미든 관음상을 봉안하고 불교와 생활이 둘이 아님을 천명하였으니 시대를 앞서가는 불교 포교로 전 국민들에게 불교의 인지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학과 동문회 고문 으로서 동문들의 재결속과 친목 도모에 이바지한 업적이 모든 동문의 귀감이 되므로 2000여 불교학과 동문들의 존경과 정성으로 이 상을 드립니다.
불기 2553년(2009) 12월 7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문회
공동회장 홍 파 - 홍 영 춘
한겨레 5월 22일 기사
정토원 선진규 법사의 노 전 대통령 회고
사자 바위에서 한참을 머문 뒤 정토원을 찾았다. 몇 걸음만 걸으니 금세 도착했다. 정토원은 봉화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자주 들렀던 사찰이다. 49재를 치를 때까지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한달여 간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때문에 정토원은 형형색색의 연등이 아름답게 수 놓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오가는 불자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마침 정토원 원장 선진규 법사가 기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 전 찾았던 마지막 사람이다. 23일 추모법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경호원한테 나를 두고 ‘참 좋은 분인데’ 했다더라고. 마지막으로 날 찾았으니까 나도 마지막까지 돌봐줘야지.”
선 법사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지만 말을 아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대신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뒤 어떤 말을 했는지 물었다.
“‘한다고 했는데 모두 실패작인 것 같다’고 하더라. 본인은 정말 잘하고 싶었나 보더라. 그런데 보수 세력이 너무 강하게 발목을 잡은 것 같았어. 그게 한스러웠던 것 같더라고. 하지만, 여기 와서 정치적 이야기는 거의 안 했어.”
선 법사는 노 전 대통령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다. 그의 청년기, 정치인으로서 부침을 겪던 시절, 대통령 시절, 퇴임 이후까지 그의 평생을 지켜보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했다.
“늘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었어. 어떤 원대한 이상이 있으면 그것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것도 어쩌면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그랬을 거야. ‘아, 이번 세계 말고 다음 세계에서 뭔가 해보자.’ 그런 거 아니었을까 싶어.”
‘호미든 관음상’에도 노 대통령 숨결
선 법사는 정토원 근처에 있는 ‘호미든 관음상’을 꼭 살펴보고 가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곳에 들러 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호미든 관음상은 정토원에서 5분여 걸어가면 나온다. 부처가 호미를 들고 있어 ‘호미든 관음상’이라고 부른다. 1959년 불교학도 31명이 농촌 발전에 대한 기원을 담아 봉안한 불상이다.
관음상에 도착하니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씨 탓에 주변 나무들의 잎이 바싹 말라 있었다. 산들산들 불어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강찬규(44.부산시) 씨가 부인과 함께 관음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씨는 부인에게 “젊은 사람들이 투표 좀 하게 해달라고 빌자”고 말했다. 강씨는 ‘젊은층이 투표를 안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슬퍼 만 하고 있으면 뭐합니까. 투표를 해야지요.” 강씨는 항변하듯 기자에게 말했다.
강씨는 부산에 살면서 몇 번 노 전 대통령과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욕도 많이 하고 실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너무 미안해요.” 결국, 강씨는 눈물 한방울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자꾸 코끝을 매만졌다. 봉화산을 오르는 이의 태반이 강씨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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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려주신 글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