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에 얽힌 이야기
농촌은 도시의 외로움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원형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농촌의 이미지는 전통 사회의 미덕이 살아 있는 평화롭고 안락한 공동체의 이상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특정한 시공간에 얽힌 삶의 장소성이 탈색된 채 소비되는 전원적인 농촌의 이미지는 왜곡된 시선으로 동양(東洋)을 바라보는 서양(西洋)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시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농촌은 도시(인)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유기 농작물의 공급지로, 정신적 풍요를 위한 힐링 체험의 장으로 소비되면서 도시의 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농촌 역시 도시의 타자적 시선을 받아들임으로써 각종 특성화 사업을 통해 지역 정체성 구성을 위한 노력에 매진한다. '청양고추', '충주사과', '상주곶감' 따위의 소비재의 특성화는 농촌의 정체성을 도시적 욕망의 '원거리' 소비지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농촌의 장소적 독립성을 근원적으로 저해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도시의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농촌의 장소성을 계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교회로 시선을 돌려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농촌 교회가 도시 교회의 선교비에 의존하거나, 여름·겨울 수련회 등에 공간을 대여해 주는 방식으로 도시 교회의 소비에 의존하는 한 농촌 교회의 장소적 독립은 요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장소 상실placelessness'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욕망을 불어넣음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농촌 교회'라는 이름에 적합한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도시에 있으나 도시적 욕망을 거부하는 교회가 있듯, 도시보다 더 도시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농촌 교회도 있다. 그들에게 농촌은 도시를 향한 과정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땅, 언젠가 벗어나야 할 장소이지, 뿌리내리고 살아야 할 터전은 아니다.
▲ <단비교회 이야기> / 정훈영 지음 / 꽃자리 펴냄 / 236면 / 1만 3000원
그래서다. <단비교회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유는 정훈영 목사가 십 년에 걸쳐 완성한 예배당의 아름다움에 감탄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욕망을 불어넣는 이 시대에 작은 농촌 교회와 더불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장소'로 거듭나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신념을 여읜 고백
<단비교회 이야기>는 천안의 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20년을 함께 살며 지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훈영 목사는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신념이라기보다는 고백이라 여겨 주시면 좋겠다(7쪽)"고 말한다. 신념은 확신에 관한 당위적 언급에 머문 채 삶에 이르지 못한다. 신념으로 가득 찬 말은 그래서 종종 그 말의 주인을 배반하곤 한다. 반면, 고백은 말의 대화적 지평에 이르지 못한 채 독백적 담화에 머문다. 반복적인 고백은 의식의 자기동일성을 강화시킴으로써 합리화하기 위한 변명에 머물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신념과 고백, 그 어떤 말도 삶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면 공허할 뿐이다.
진실한 말은 신념과 고백 사이에서 '신념을 여읜 고백'의 형식으로 발화된다. '신념을 여읜 고백'은 확실성으로 가득한 신념이 사라진 자리, 자기합리화의 불순한 의도로 가득한 고백이 사라진 장소에서 피어오르는 '말 이후의 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무게감 있는 추천의 글을 실은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역시 정훈영 목사의 말을 일컬어 "일체의 허례를 여읜 참말 그 자체"라고 평한다. 김기석 목사는 정훈영 목사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노동으로 단련된 거친 손, 허름한 작업복, 그리고 젠체하지 않는 느릿느릿한 말투는 그가 영락없는 예수의 제자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낮은 숨결로 발화되는 그의 말들은 일체의 허례를 여읜 참말 그 자체였습니다(14쪽)." 꽉 찬 '신념'과 텅 빈 '고백' 사이를 교민(巧敏)하게 오가는 발화(설교)의 기술 연마에 여념 없는 이들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나머지 두 편의 추천의 글 역시 이 책을 읽는 감동과 보람을 더한다. 디아코니아자매회의 이영숙 언님은 故 안병무 선생이 꿈꿨던 디아코니아가족공동체가 단비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며 단비교회가 "가족이기주의와 사유재산 제도의 한계 그리고 교권에 사로잡혀 사회를 변혁할 힘을 잃은 교회에 대한 대안으로(26쪽)" 자리매김해 가기를 바란다. 한편 이계준 목사(연세대 명예교수) 역시 단비교회가 "유기농 선교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창조적 신앙과 성육신적 사랑(32쪽)"을 몸소 실천해 왔다고 평가하면서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선교의 한 모델로 자리매김해 가기를 바란다. 세 편의 진심 어린 추천의 글이 주는 울림만으로도 단비교회가 지나온 지난 20년의 세월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얼굴은 왜 저분들처럼 검게 타지 않는 것일까?
"특별한 의지를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촌이라는 상황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뚜렷한 그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홀몸 빈손으로 이곳에 던져졌습니다(43쪽)." 정훈영 목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 말이다. 그는 농촌을 변화시키겠다는 계몽주의적 열정이나, 그 흔한 비전vision도 없이 홀몸 빈손으로 땅에 뿌려진 씨앗이었다. 전도를 명분으로 교회를 앞세우지 않았고, 목사직을 내세우지도 않은 채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이 되어 부족한 일손을 돕고 밥을 나눠 먹는 일로 일상의 여백을 채워 나갔다.
정훈영 목사는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이전에 없던 마음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색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농사짓는 일을 시작하고 농민들에 대하여 마음에 갖는 부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얼굴은 왜 저분들처럼 검게 타지 않는 것일까'였습니다. 그분들의 얼굴색과 똑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모자를 벗고 다녀도 제 얼굴은 그분들처럼 검게 타지 않았습니다(51쪽)."
자신의 '흰 얼굴'이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시골로 '내려온' 사람의 자의식의 표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는 이미 마을 주민과 일상을 함께하는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모자를 벗고 다녀도 그분들처럼 검게 타지 않는 자신의 '흰 얼굴'을 부끄러워하며 '검은 얼굴'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가 마을 사람들의 검게 탄 얼굴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대목에 이르러 책을 덮고 생각에 빠졌다. 아니, 생각에 빠졌다기보다는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책을 계속 읽어 나가기 어려웠다고 말해야 옳다. 서울, 곧 "'21세기적'으로 지구화하고 있는 세계의 '주변부 메트로폴리탄'"(김진호 2013, 236)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흰 얼굴'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대의 욕망을 내면화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에 비춰 본 내 '흰 얼굴'이 부끄러웠다.
식민화가 내면의 질서로 자리매김한 현실, 식민적 모방 의식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 자체가 삭제된 현실 속에서 '흰 얼굴'은 중심부에 이르려는 욕망, 상승의 욕구를 대변한다. 반면, '검게 탄 얼굴'은 주변부 메트로폴리탄의 질서에 속한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존재론적 표상이다. 그것은 추락하는 삶에 대한 불안, 뿌리가 뽑힌 채 던져진 일상의 허무 끝자락에 이르러 드러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그렇기에 나는 '검게 탄 얼굴'을 닮기 바라는 그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기 바라는 신앙인의 진실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교회는 생명이 자라는 토양
검게 탄 얼굴을 닮기 바라는 정훈영 목사의 마음은 교회에 관한 그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단비교회 옆에 아파트가 세워져 교회가 부흥하면 좋겠다고 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꿈에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56쪽)."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재개발 사업 소식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천박한 상업주의에 물든 도시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재개발 사업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덜 가난한' 이들이 아닌가. 교회는 '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람만 모인다고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서 모여야 교회이다. 더 많이 모인다고 더 좋은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신광은 목사가 지적했듯, 크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훈영 목사는 "교회도 유기 농사 하듯이 세워져 가야 한다(65쪽)"고 말한다. 그는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는 데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교회는 "이야기가 되어야(57쪽)"하고 "사람들을 공동체적인 삶으로 초대하고 새로운 마을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드는 것(57)"이 교회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화폐의 원리가 아니라 상호부조가 살아 있는 살림살이"의 터전 위에서, "능동적인 자립정신에 자발적인 증여와 협동의 생활 방식이 결합하여 인간다운 생존 조건을 만드는(57쪽)" 공동체적인 삶에 다름 아니다.
이 점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교회는 자본주의적 사회의 가치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급진적인 면을 지닌다. 정훈영 목사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닌, 복음적 가치에 대한 삶의 충실성에 기반하여 "교회는 '소유를 버리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으로서의 공동체적 지향을 가져야만 한다(75쪽)"고 주장한다. 공동체는 소유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공동체라면 소유의 문제를 숙제로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소유의 방식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이 "교회가 공동체로 세워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77쪽)"라고 본다.
"소유는 사람이 진리에 눈뜨고 믿음의 길로 나가는데 그 길을 막는 제일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상급을 가로막고 인생을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소유입니다. 소유가 이끄는 힘을 이겨 낼 장사는 세상에 없어 보입니다(77쪽)."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크기 마련이다. 잃을 것이 별로 없거나, '있음'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언제든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예수를 따라 나서는 이들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소유를 버리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시간을 정하지 말자, 돈을 구하지 말자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의 능동성으로부터 '이끌리는' 수동적 삶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많은 젊은 날의 계획도 제 원본대로 이루어진 것이 거의 없고, 오히려 제가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불청객처럼 찾아와 제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뜻밖의 사건과 뜻밖의 선물, 뜻밖의 방문과 뜻밖의 기회들, 그 어떤 것에도 '뜻밖에'라는 말을 빼고는 이야기가 구성되지 않는 상황인 것입니다(84쪽)."
'뜻밖에' 일어난 일들에 이끌리는 동안 정훈영 목사는 하나님께 맡기는 두 가지 원칙이 생겼다. "시간을 정하지 말자, 돈을 구하지 말자(97쪽)"는 원칙이 그것이다. 조그만 한옥 예배당 한 채를 짓는 일에 꼬박 십 년의 세월이 걸린 까닭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목적은 일 자체를 빨리 완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는 데 있다(99쪽)"는 생각으로 돌 하나, 나무 하나를 쌓아 올린 결과 지금의 아름다운 단비교회가 완성되었다.
'시간'과 '돈'은 현대인의 생활 중심에 놓인 주제이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효율성의 추구는 결국 돈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한 욕망의 체계와 만난다. 그렇기에 정훈영 목사는 시간과 씨름한다.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인위적으로 시간을 앞당기려는 일체의 노력은 "시간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100쪽)"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시간에 대한 조급증을 덜어 내는 연습이 "자신을 수련시키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102쪽)"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신앙의 순례는 "시간을 정하지 않고, 돈도 구하지 않는" 집을 지어 가는 행위와 같다. 구원은 함께 집을 지어 나가듯 이웃과 더불어 "지어 가는 것(88쪽)"이다. 교리적인 차원에 머무는 구원에 관한 '이해'는 '말'에 함몰된 존재론적 신학의 그림자일 뿐이다. 집 짓기의 오랜 경험을 통해 "실천해 보고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정훈영 목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시 구원 행위에 동참할 때만 드러나게 되는 '몸'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구원은 개념적인 동의에 머물지 않고, 집을 지어 가듯 이웃과 더불어 함께 지어 나가는 것이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곁에 머무는 삶
시간을 정하지 않고 돈을 구하지 않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의 원칙은 '뜻밖에' 일어난 일들을 선물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곁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마련한다. 시간과 돈을 구하지 않는 자기주도성의 포기는 고통당하는 삶에 대한 의도적 외면을 통해 지속되는 문명(모리오카 마사히로)에 대한 수동적 저항이다. 쓸모를 잃어버린 이들이 발붙이고 살 수 없는 땅, 쓰레기로 전락한 이들을 위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지그문트 바우만) 불모의 땅에서 '뜻밖에' 만난 고통당하는 이들의 삶에 응답하며 그 곁에 오래 머무는 체험은 그 자체로 초월적 구원의 체험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대는 고통을 회피하는 시대입니다. 저마다 고통을 멀리하려고 부단히 애씁니다.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면 한두 번 잠시 들여다보기는 해도 그 고통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고통받는 이의 침상 옆에 한 시간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95쪽)."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동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쓸모를 잃어버린 채 "설 땅을 잃어버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김기석)인 동시에, "'구멍난 빤스'도 걸레로 재활용하는 할머니의 마음"(구미정)으로 타인의 고통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의 실천에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언제나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책임"(레비나스)을 요구한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일상에 거주하려는 삶의 노력 없이,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경험을 통해 고난받는 이의 옆에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리신 기회이자 행운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와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영원에 속한 것, 다시 말하면 은총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시간입니다. 저는 고통스럽게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통해서 순간순간 영원을 보고 있습니다(95쪽)." 나를 짓누르던 타인의 무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겨질 때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저를 힘들게 하는 분으로 여겨 왔던 어머니가 오히려 저를 도와주고 계시다(95쪽)"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되는 것, 내가 고통당하는 이웃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웃이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타자 중심적 삶의 수동성이 몸에 새겨진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기독교인이 아닐까. 제도로서의 기독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닌, '신념을 여읜 고백'의 말로 고통당하는 이웃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황토로 그린 할머니의 얼굴, 바로 당신이셨군요!
단비교회가 정훈영 목사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일궈진 공동체가 아니듯, <단비교회 이야기>에는 단비 가족 공동체에 속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애경 사모는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온 마을 할머니들의 얼굴을 한 분씩 떠올리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 물감 대신 황토를 개어 할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바로 당신이셨군요(125쪽)"하고 말하는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 속에서 20년 전 그녀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한다(146쪽). 단비교회 청년 이만복 씨는 농사일을 앞두고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애를 태우던 때를 회상하며 "먼저 우리 논에 우렁이를 넣어 주시고, 여름철 가뭄에 메말라 갈 때 논에 물을 대어 주시고, 한여름 무더위에 논둑에 길게 자란 풀을 땀 흘리며 잘라 주시는" 정훈영 목사가 있어 "헌신과 조건 없는 사랑과 베풂이 무엇인지를 깨닫게(160쪽)" 되었다고 말한다. 언거번거한 위로의 말로 함께하며 목회적인 책임을 외면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단비교회는 2003년 디아코니아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서원하면서 드린 단비 가족의 기도문에는 "빚지고 살아오면서 갚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이 담겨 있다.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가난이 풍요가 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셨으며, 편견과 고집과 이기주의를 넘어 더 높은 사랑을 갈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흘리는 땀을 통해 참된 안식을 맛보게 하셨으며, 오히려 대접을 하는 것이 대접을 받는 길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176쪽)." 공동체적인 삶은 이웃과의 연대를 다짐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연약함을 체감한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의 약함과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연대가 필요한 것이라 여깁니다. 쓰러지고 공허해질 때 붙들어 주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서로에게 붙들어 주는 손길이 되어 주고 또한 붙들림 받음이 필요하기에 우리에게 주님의 교회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177)."
<단비교회 이야기>는 우리 시대 기독교인들의 일상을 비추는 작은 불빛이다. 단비교회의 이야기는 피폐한 도시의 삶에 길들여진 채 온통 '나'에게만 집중된 관심의 시선을 '이웃'을 향하여 옮기도록 만든다. 이웃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이다. '뜻밖에' 내 삶에 침입하여 애써 일궈 온 안락한 삶의 동일성을 뒤흔드는 사건적 존재로서의 이웃의 타자성은 언제나 마주대하기 껄끄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고서 예수의 가르침의 알짬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웃과 함께한 이들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의 주체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단비교회 이야기>가 참됨을 지향하는 교회들의 연대의 표지로서, 뜻 있는 이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홍 정 호 / 분당 신반포감리교회 목사
출처: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5609
첫댓글 이곳 단비의 소소한 행적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귀한 말씀 너무도 고맙습니다. 더욱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