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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를 떠날 무렵, 틴데일은 리틀 소드버리 장원에서 존 월쉬(John Walsh) 경의 자녀들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어, 약 2년가량 이 가정에 머물렀다. 월쉬는 유명한 용사로서, 헨리 8세의 대관식에서 그 국왕의 군사로서 기사작위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틴데일이 소드버리 장원에 올 때가 약 36세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거기 있는 동안, 그는 근처 여러 마을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공개모임들에서도 설교하였고, 또한 그 지역 카톨릭 사제들과도 토론을 벌였다. 이러한 토론들 중 하나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그의 기념할 만한 문장들이 발화되었다.
일례로, 그는 농사짓는 소년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제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하였다.
리틀 소드버리 장원에 머무는 동안, 한편으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작품 중 하나인, the Christian Soldier's Manual(그리스도인 군사의 매뉴얼-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를 번역하였다(“틴데일은 그의 작품들을 존경하였으나, 그의 성격상의 단점들을 간파하였다.”-Anderson, p.38).
월쉬 부인은 카톨릭 학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부(富)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폭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어느 날 그녀는 외쳤다.
“여기에 일백 파운드를 탕감해줄 수 있는 박사가 한 명, 그리고 이백 파운드를 탕감해줄 수 있는 박사 한 명, 그리고 삼백 파운드를 탕감해줄 수 있는 박사가 한 명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들보다 당신을 믿는 것이 합당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틴데일은 지나치게 맹목적이지는 않았다.
월쉬 일가는 틴데일을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그가 떠날 때가 이르자, 런던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 월쉬 경과 그의 훌륭한 아내가 부지 중에 대접하였던, 그 유명한 번역가에 의해 풀어졌던 복음을 그들이 어떻게 받았는가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성경의 독점적인 권위에 대한 틴데일의 믿음과 로마의 오류들에 대한 그의 대담한 폭로는 곧 카톨릭 당국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틴데일은 후에 다음과 같이 당시의 경험을 증거하였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나오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들과 교리들에 반대하는 일천권의 책들이 나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억압하는 한은, 자기들의 궤변의 안개로 그 옳은 길을 너무나 어둡게 하고, 철학적 논쟁으로, 그리고 세속적인 비교로, 그리고 당위의 표피적인 논거들로, 그리고 그 본문의 진행, 순서 그리고 의미에 정반대되도록, 그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성경을 왜곡시킴으로써, 그리고 비유들(알레고리)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망상에 빠트림으로써, 그것을 너무나 혼란스럽게 하여서 ... 비록 그들이 말하는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당신이 심령으로 깨닫고, 확신할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간교한 수수께기들을 풀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그것이 신약성경을 번역하도록 나를 감동시켰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하게 평신도들의 모국어로 그들의 시야에 펼쳐지지 않으면, 그래서 그들이 그 본문의 진행, 순서 그리고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어째서 평신도들이월쉬 부인과 틴데일 진리 위에 서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경험을 통해서 내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달리, 어떠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해도, 모든 진리의 이 대적들이 다시 그것을 소멸시킨다. ... 즉 궤변의 분명한 논리들로,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만든 유전들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 본분을 왜곡함으로써, 그 본문의 본의를 헤아릴 수 없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버림으로써.”(Tyndale, Introduction to Five Books of Moses).
틴데일은 자국어로 된 성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신약 성경 초판 서문에 들어있는 그의 문장들을 숙고해보라.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이유들을 열거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발부리에 채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발부리에 채이는 곳을 향해, 어둠 속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왜 빛이 비추어져야 하는가 하고 묻는 너무도 어리석은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위험이 있다.
그토록 필수적인 것에 대해 누군가(나는 그의 형제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를 시기할 정도로 악의에 찬 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지되던 견해에 분명히 어긋났다. 틴데일은 이 주제에 관하여 자신이 맞닥뜨렸던 다양한 의견들에 관해 기술하였다.
“어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평민들이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고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로 인해 그들 모두가 이교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William Tyndale, Preface, Pentateuch, cited from Schaff, VI, p.726).
1522년에 틴데일은 자신의 “이교적” 견해들에 대해 반론하도록 그 당국자들 앞으로 끌려갔다.
“내가 교황청 상서원장 앞에 서자 그는 무섭게 나를 위협하였고 나를 매도하였으며, 마치 한 마리 개를 대하듯 나를 꾸짖었다. 그리고 내 책임으로 돌리며 그것에 대한 어떤 고발자도 세우지 못하였다. 그 고발자를 제시하지 않는 그들의 수법에 따른 것이다. 한편 그 나라의 모든 사제들이 같은 날 그곳에 있었다.”
로마는 그 긴 팔을 뻗어서, 영어 성경을 번역하기를 갈망하던 그 사람에게 직접 손을 대었다. 이 상서원장을 임명하였던 추기경은 다름 아닌 토마스 울시(Thomas Wolsey)였고, 그는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임명받은 자로서 일생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울시 스스로 교황 자리를 열망하였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하였다. 후에 울시는 교황에게 인쇄기 때문에, “평민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통탄했다.
틴데일을 향한 이 초기 박해시기의 교황은 아드리안 6세(1522-1523)였는데, 그는 비로소 최근에 울시를 영국의 교황대사 또는 개인 대리인으로 삼았다. 워세스터(Worcester)의 주교(그 지역에서 최초로 틴데일이 박해받았다)는 훌리오 디 메디치(Julio di Medici)였는데, 그는 후에 교황 클레멘트 7세(1523-1534)가 되었다.
1522년에 38살의 틴데일을 꾸짖던 그 상서원장은 토마스 파커였는데, 그는 후에 윌리암 트레이시(William Tracy)의 뼈들을 파내어 그것들을 재로 불태우는 것으로 그 진리에 대한 자신의 불합리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이는 1531년에 행해졌으며, 그 박해기간에 잉글랜드 전역에서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가 쏟아졌다. 트레이시는 사후에 정죄 당하였는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그가 자신의 죽어가는 영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후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내놓으며 마지막 유언으로 그 신부들에게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Anderson, Annals of the English Bible, I, pp.296,97).
당시에 로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고귀한 번역가에 반대하는 박해들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일반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성경이 펼쳐진다는 생각보다 그 오래된 종교적 음녀에게 더 무서운 겁을 준 것은 없었다. 마귀는 영국과 그 땅의 언어의 중요성을 분명히 파악하였고, 그의 거짓 교회(로마 카톨릭)를 사용하여, 역본들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될 이 성경을 상대로 잔인한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그 당국자들과 대면한 이후에도, 틴데일은 영어로 된 자기의 역본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런던으로 가서, 그 도시의 주교, 커스버트 턴스톨(Cuthbert Tunstall-그 이름을 기억하라)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개진하였는데, 그는 틴데일을 쫓아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서 자신의 계획을 영국에서 실현시키기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틴데일은 재빨리 알아차렸다.
“내 왕의 런던 궁전에는 신약성경을 번역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과, 아울러 온 영국에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어느 영국인 인쇄업자도 감히 금지된 자국어 성경을 인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교황은 영국의 국왕 헨리 8세가 자신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헨리왕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주어, 로마 카톨릭 교리를 열심히 수호하게 하였다.
틴데일은 몇 개월 동안 런던의 험프리 문머스(Humphrie Munmouth)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는 영국을 떠나는 틴데일의 여행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었고, 때때로 유럽대륙에서의 그의 번역 작업들을 지원하였다. 문머스는 틴데일에게 베푼 이 호의로 인해 후에 박해받았다.
영국 밖에서 자신의 번역 작업을 완료하기로 결심한 틴데일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역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1524년 1월에 유럽으로 떠났다.
비록 그가 조금 의구심을 품었을 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그 때 그는 알지 못하였다. 그는 12년 동안 추방당하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자신의 위대한 작품을 위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계속~
[출처] 영어로 성경번역을 시도한 틴데일 (킹스 메신저) |작성자 주님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