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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내용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부상에 대한 학부모님들의 관심도 크실 것으로 생각되어 이렇게 인터뷰 기사를 올립니다.
참고하세여~ ^-^....
▦ 최주영 KFA 의무팀장-1
■ 대표팀 승리 뒤에 숨은 또 한 명의 주역
최근 들어 축구에서는 선수들의 빈번한 부상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치료해 선수의 컨디션을 정상으로 회복시켜 놓느냐가 선수의 기량 발전, 전술과 팀 플레이의 개발 못지 않게 팀 경기력 향상의 관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만큼 현대축구가 더욱 빠르고 거칠어져 가고 있고, 그런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돌발적인 부상에 대해 어떻게 대비하고 있느냐가 팀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유럽과 남미와 같은 축구선진국은 물론 우리 옆 나라의 일본까지도 이러한 선수의 부상 예방과 치료, 재활에 대한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발전시켜 다른 의료 분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다다른 상태다.
그에 비해 한국의 스포츠 의료 분야는 체계적 교육의 부재, 스포츠 의학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세계의 추세를 따라가기엔 아직은 벅찬 상황.
하지만 적어도 우리 축구대표팀만은 그런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따라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대한축구협회 의무 팀의 정점에 서 있는 최주영 의무팀장 때문이다. 94년 대표팀과 첫 인연을 맺은 그는 어떤 선수나 코치들보다도 긴 세월인 10년이 넘는 시간의 대부분을 대표팀에서 보내며 선수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축구화를 신은 채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 선수가 그라운드에 쓰러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뛰어가는 그의 모습은 이제 축구 팬이라면 어느 누구의 머릿속에나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
2004년 9월 16일, 축구대표팀의 소집장소로 오랫동안 이용되었던 타워호텔에서 최주영 의무팀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인터뷰 시간이 모자랐을 정도로 그가 풀어내는 대표팀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들은 대표팀에 몸담은 10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무궁무진했다. 이제부터 선수와 감독이 아닌, 대표팀의 승리를 책임지는 또 한 명의 주역이 말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고자 한다.
⇒ 베트남 원정을 마치고 귀국한지 약 6일이 지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현재 부산 인제대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내 일정이 대표팀 일정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니 강의가 정기적으로 이뤄지기 힘들다. 그래서 어제(2004년 9월 15일) 하루는 2주 치 강의가 밀렸던 것을 해결하느라 8시간동안 강의를 했었다. 강의 준비도 하고, 그 동안 아시안컵이다, 올림픽이다, 월드컵 예선이다 해서 갖지 못했던 개인 시간을 가졌다.
⇒ 프로필을 살펴보다가 52년(생)이라고 해서 매우 놀랐다.
그래서 주변에선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웃음) 체력적으로 힘든 직업이고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선수들과 지내다 보니 평소에 몸 관리를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또 대표팀에 있으면 아무래도 젊은 선수들, 특히 (이)천수, (박)지성이, (김)두현이, (조)재진이 같은 20대 초반의 선수들과 생활하게 된다. 그러면 그 선수들이 평소에 하는 말과 표현, 행동들이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된다. 평범한 사회생활을 한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맞춰지겠지만, 젊은 사람들 속에서 살다 보니 마음이나 행동이 젊어지고 자연스레 겉모습도 따라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이 그런 원동력이 된다.
⇒ 1년에 대표팀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1년에 3, 4개월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표팀과 관련해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해외에도 자주 나가고 하루 24시간을 꼬박 대표팀에 메여있다 보니 어떤 직업보다도 힘들다. 그래서 성인대표팀의 소집이 없거나 각급 대표팀 중 한 팀이라도 파주 NFC에서 훈련을 하고 있으면 각 대표팀에 의무 팀 직원이 머물고 있기 때문에 파주로 따로 출근하지는 않는다. 대신 어느 팀도 머물지 않는다면 파주 NFC 내에서 발생할 의료사고를 대비해 의무 팀 직원들이 당직 형태로 번갈아 가며 상주한다.
⇒ 현재 협회 의무 팀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의무팀장인 나를 포함해 모두 7명이다. 6명의 직원은 남자 4명과 여자 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황인우 닥터(청소년대표팀 재활 트레이너)와 나를 제외하면 엄밀히 말해선 스포츠 마사지(사)들이다. 내가 성인대표팀과 올림픽, 아시안게임 대표팀까지 맡고 나머지 직원들이 이하의 각급 대표팀과 여자대표팀을 커버한다.
⇒ 이 분야로 어떻게 입문하게 됐는지?
원래 대학 시절 물리치료를 전공하고 국내의 병원에서 2년간 근무를 하던 도중 우연한 기회로 카타르 배구 국가대표팀의 팀 닥터로 계약하게 되었다. 당시가 82년이었는데, 중동 지역에 자격증을 갖춘 의료인으로서는 내가 처음 나간 경우였다. 그곳에서 10여 년 간 근무하게 된 것이 이 분야에 진입하게 된 계기다.
⇒ 처음 카타르로 진출하면서 많이 불안했을 것 같은데?
말도 못한다. 당시 한국의 스포츠 의학에 대한 교육은 전무했다. 나 역시 물리 치료가 전공이었지 스포츠 의학 전공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치료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컸다.
급한 대로 한국에서 침술과 테이핑을 배워갔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해 선수들을 관리하면서 본격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근무하는 도중 틈틈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실시하는 단기 프로그램 코스를 밟았다. 선수의 관리와 재활, 영양, 심리적 부분의 치료까지. 스포츠 의학이 요구하는 전반적인 부분을 정상적으로 배운 것이다. 거기에 나의 노하우가 더해지면서 불안감들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 침술을 배워갔다고 했는데 실질적인 효용이 있었나?
처음엔 침술을 사용해 봤다. 하지만 내가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 '내가 침술을 쓸 자격이 있냐, 실력이 있냐?'라고. 대답은 '아니다'였다. 침을 놓으려면 정식으로 한의학을 배우고, 한의사가 되어야지 한국에서 고작 3, 4개월을 배우고 침을 쓴다는 것은 인술을 다루는 입장에서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침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흉내를 낼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물리치료, 스포츠 의학 분야에 대해 최선을 다해, 배우고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고 정통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의 카타르 생활은 어땠는지? 한국과는 문화가 많이 달라 어려웠을 것 같은데?
아니 그 반대다. 너무 편했다. 대우가 너무 좋았다. 82년에 카타르로 갔을 때 연봉이 당시 한국의 10배 수준이었다. 그리고 카타르는 체육 협회를 정부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고급 공무원으로서 대우해줬다. 일반적으로 아랍권은 생활하는데 규제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모든 편의를 정부에서 봐 주었고, 내가 원하는 것은 거의 누릴 수 있게 허락됐었다.
또한 이슬람 문화의 특수성으로 인해 1년에 내가 실질적으로 일하는 기간은 전지훈련을 포함해도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내 시간이 많아졌고, 스포츠 의학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2개월을 통째로 휴가로 쓸 수 있었는데, 그 기간을 이용해 미국에 건너가 공부했었다.
날씨 역시 바깥에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실내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당시에 워낙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다 보니 지금은 가끔씩 카타르에서의 생활이 그립기도 하다.(웃음)
⇒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사실 그곳에서 사직서를 낼 때는 협회에서도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10여년 간 카타르에 살았으니 반 카타르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한국에 벌여놓은 사업이 있어 정리도 했어야 했고, 사실은 한국이 그리웠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 대한축구협회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건지?
91년 말에 귀국하고서는 2년 간 스포츠 의학 쪽은 손을 떼고 사업에 열중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스포츠 의학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현장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게 됐다.
그러던 중 94년에 지인을 통해 당시 축구협회 전무이사로 재직 중이던 김정남 감독님(현 울산 감독)과 연결이 되었고 협회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의뢰를 보내왔다. 사실 그때 나는 축구협회 뿐만이 아니라 창단을 준비 중이던 현대 유니콘스 야구팀과도 연결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축구를 선택하게 됐는데, 축구협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 94년 8월의 일이었다.
⇒ 협회에 들어와서 처음 맡게 된 일은 무엇이었나?
당시 청소년 대표팀이 카타르로 훈련을 떠나게 됐는데, 그 팀을 맡은 것이 나의 첫 번째 일이었다. 그리고 9월에 돌아와 당시 비쇼베츠 감독이 취임하면서 출범하게 된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 경기 중에는 경기를 보지 않고 선수 부상 여부만 볼 것 같다.
경기 중에는 다양한 상황들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마치 머리에서 여러 개의 더듬이가 솟아나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 더듬이 하나 하나가 각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상에서 회복된 선수가 시합에서 제대로 뛰는지, 시합이 계속되는데 어느 선수가 특정 부위가 문제가 있는지 자꾸 만지작거리며 스트레칭을 한다든지, 선수들이 몸싸움 도중의 충돌로 부상을 당하지 않는지. 그러다 누가 쓰러졌다 하면 심판의 신호만 기다리며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 그 부상선수에게 달려갈 때 정말 사력을 다해 뛰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하면, 축구 팀 닥터를 맡고 처음엔 광활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 앞에서 달려간다는 사실이 너무 어색했었다.(웃음) 그래서 당시엔 고개를 숙이고 그냥 막 달려갔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빨리 들어가서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 우리 팀에 플러스 요인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더 열심히 달린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싶으면 구태여 급하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선수들은 시간을 끌면 주의나 경고를 받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으니까. 요즘에는 그 정도까지 조절이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경기 종료는 다가오는데 무승부다, 그러면 죽어라하고 달리는 거다. 대부분은 빨리 달리는 상황이 많다. 선수의 부상 부위와 정도를 파악하고 빨리 벤치에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 중요하니까.
⇒ 부상 정도는 어떻게 파악하고, 신호는 어떻게 보내게 되는가?
선수의 반응이나 외상만 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장 내에서는 부상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이 선수는 뛸 수 있을 것도 같은데?’하는 확연하지 않은 경우 말이다.
일단은 선수의 의식을 살핀다. 최근엔 충돌에 의한 뇌진탕도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각 통이 얼마나 있는지. 보통 선수들은 크게 다치지 않은 경우라면 자신의 부상 정도를 어느 정도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다친 경우는 자신의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파한다. 그러면 벤치에 안 된다는 신호로 손으로 X자를 그어 보인다. 그러면 벤치에서는 1차적으로 교체 선수에게 워밍업을 지시한다. 그리고 나는 부상당한 선수를 라인 밖으로 데려 나가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 신호를 보낸다.
⇒ 부상을 당했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들은 감독과 어떤 상의 과정을 거쳐 출전을 결정하게 되는가?
일단 팀이 처음 소집되면 전체적인 컨디션을 검사나 훈련을 통해 코칭스태프가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의무(진)들이 수시로 선수들을 체크한다. 가령 아침에 선수들이 잠에서 깨어 로비에 나오면 부상을 당한 선수들에게는 부상 부위나 전체적인 컨디션을, 일반 선수들에게는 수면과 배탈 같은 내과적인 부분을 주로 물어본다.
그래서 이상이 있는 선수들은 개인마다 구별된 처방을 정리해 감독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최종적인 결정의 권한은 감독에게 있다. 나의 보고나 의견은 감독이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고 사항인 것이다. 대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감독이 지게 되는 것이다.
⇒ 부상 중이라도 출전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물론 부상으로 인해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지만 감독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선수라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출전시켜야 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메디컬(적)인 부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데서 발생한다. 부상 중인 선수가 몸 상태를 90% 정도까지 올린다면 그것은 훈련을 하는 데 무리가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한 여파는 남아 있다. 그 상황에서 얼마나 지혜롭게 선수의 출전을 결정짓느냐 인데,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 우리 선수들을 보면 유럽이나 남미와는 달리 다리에 살색 테이핑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식 명칭은 키네지오(Kinegio) 테이핑, 흔히 키네 테이핑이라 부른다. 일본에서 개발 된 것인데 손상된 부위에 대한 서포터 역할이나 프로텍터 역할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발목 인대가 끊어졌을 경우 발목은 상당히 불안정하게 논다.
그렇다면 그 다친 인대를 제외한 근육들을 통해 인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테이핑으로 처치를 해둠으로써 보강운동을 통해 인대가 회복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보조해주는 것이다. 또한 다친 부위에 이완성을 더해줌으로써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련한 전문가가 하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처음에 히딩크 감독이 그 테이핑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마 유럽 쪽에선 이런 테이핑 방법이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일본과 한국에서만 주로 사용하고 있다. 히딩크 감독이 처음 부임하고는 저게 뭐냐고 물으며, 상대편에게 이 선수가 부상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며 의구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었다. 결국 나중에는 히딩크 감독도 키네 테이핑에 대한 효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나중에 히딩크 감독이 피스컵 참가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파주에서 훈련한 적이 있는데, 당시 따라온 아인트호벤 팀의 물리치료사를 보내 간단한 테이핑 법을 배워가기도 했다.
⇒ 부상 선수에게 냉각 스프레이를 뿌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우선은 순간적인 통증 완화의 효과가 있다. 또한 부딪친 부분은 주위의 연부조직이 상하게 되고 혈관이 파열된다. 그러면 피가 나오고 체내에 그것이 고여 멍이 들거나 붓게 되는 것이다. 일단 약하게 부딪치든 강하게 부딪치든 냉각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찬 것의 성질이란 게 혈관을 순간적으로 수축하게 만들기 때문에 피가 나오는 상태를 멈추게 한다. 물론 부상 정도가 약할 때에 그 효과가 있는 것이지, 큰 부상인데 그냥 스프레이만 뿌려 준다고 선수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응급 처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