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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측이 문부과학성에 검정을 신청한 역사교과서의 대부분이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했다고 기술한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 교과서 왜곡을 통하여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여 자라나는 세대에게 `일본의 자부심'을 일깨우려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미국, 유럽 등 해외 대학 등에서도 일본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수용한 한국사 교재들을 채택, 사용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음 글은 필자가 중학교 국사 교사로서 평소 韓日 古代史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오던 중 마침「문화저널」에서 지난 .1997년 7월 20일부터 7월 24일까지 4발 5일간 일본의 오사카, 교토 등지에 산재해 있는 고대 삼국문화의 흔적을 찾는 답사를 주최한 바 있는데 거기에 참여한 바 있어 이때 정리한 글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파동과 관련지어 음미해 볼 대목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
오사카성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안내자는 일본의 3無가 있는데 그것은 자동차 경적소리가 없는 것,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거리에서 경찰관을 보기 힘들다는 것 등을 들었다. 자동차 경적소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조급하지 않고 양보 운전이 이루어진다는 반증이며, 또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일본 전역에 산재해 있는 신사(神社: 일본식 사당) 때문인데 이는 일본인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들의 토속신앙 때문에 기독교가 발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의 토속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여 말살시킨 그들이 자신들의 고유의 민간신앙은 그토록 잘 지켜나간다 생각하니 심사가 꼬였다. 그리고 거리에서 경찰관을 보기 힘들다하나 문제가 생기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는 몰라도 신속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마음놓고 밤거리를 거닐 수 있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단다. 치안질서도 하나의 관광상품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는 대목이었다.
오사카성(大板城)
오사카는 도쿄에 이은 일본 제2의 도시로서 15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운하의 도시라고도 알려져 있다. 오사카는 4세기부터 ‘나니와’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일본의 수도가 되었으며 특히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상업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일본 성들은 우리나라 성과는 달리 해자를 둘렀다. 또 곡선으로 성을 쌓았는데 이는 지진 때문이라 한다. 오사카성도 예외는 아니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천수각 건물 안에는 임진왜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갑옷을 보니 잠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柳成龍)은 전쟁이 끝난 후 1602년경에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는데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이러한 징비록이 남긴 교훈을 잊고 조선 말기에 또다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사카성은 공원화되어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의 기능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내 한쪽에서 아버지뻘 되는 노인과 함께 맞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즐기는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다소 이채로웠다. 고풍스러운 맛은 없고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四天王寺로 향했다.
사천왕사(四天王寺)
사천왕사는 서기 593년 고구려 승려 혜자의 제자로 알려진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세웠다는 절이다. 절 안에는 여러 개의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마다 청거북들이 가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흠명천황(欽明天皇)때 백제에서 들어온 불교를 놓고 숭불파인 소아(蘇我馬子)씨와 성덕, 그리고 반대파인 물부(物部)씨와 중신(中臣)씨와의 불교전쟁에서 소아씨-성덕의 승리로 끝나게되면서 소아씨정권은 정덕태자의 섭정을 통해 훌륭한 백제문화의 결정체인 아스카문화를 만들어낸다.
일본고대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도록 한 소아 씨가 바로 백제에서 도래한 가문이라 한다. 古書記나 日本書記에 나오는 소아씨의 가계보를 보면 소아석천숙니(蘇我石川宿禰) - 만지(滿智) - 한자(韓子) - 고려(高麗) - 도목(稻目) - 마자(馬子) - 하이(蝦夷) - 입록(入鹿)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의 인물이 되는 것은 만지(滿智)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백제 개로왕조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協滿致)와 동일인물로 인정된다.
木씨는 백제귀족 8대 성씨 중 하나로서 만치는 개로와 21년(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의 3만대군의 침공에 수도 한성이 함락될 직전 왕명에 의하여 태자 문주(文周)를 수행하여 南行, 신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그 후 그는 백제로 돌아가지 않고 남쪽으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致와 智는 모두 ‘치’로 발음 나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목협만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마치(蘇我滿智)가 되었다고 일본학자들도 인정한다. 그래서 소아마자는 백제로부터의 불교를 생명을 걸고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현재 오사카의 약 3분의1은 백제야(百濟野)라고 불려졌다 한다. 그 중심에 바로 이 사천왕사가 있는데 그 바람배치가 백제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나 정림사지와 흡사하다. 성덕태자는 승리에 보답할 사천왕사를 세웠으며, 소아마자는 비조사(法興寺)를 창건하였고 이때 선진국은 백제로부터 학자, 예술인, 건축기술자들이 대거 들어와 일본 고대문호의 황금기인 아스카(飛鳥)문화를 형성시킨다.
오사카에 있는 미야꼬호텔에서 짐을 풀고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마에다겐지(前田憲二))씨의 “일본열도 속의 백제문화”란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는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열과 멋을 지닌 분이었다. 내가 만난 최초의 일본인이기도 한 그는 처음부터 끝나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움직이면서 강연과 안내에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 처음에 가졌던 일본인이라는 선입견을 쉬 가시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주장하였던 동근동조론(뿌리와 혈통이 같다)에 대해 역설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에게도 백제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되었다.
나라(奈良)
일본인들은 신라를 ‘시라기’ 고구려를 ‘고구리’ 또는 ‘고마’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다. 신라를 ‘시라기’ 고구려를 고구리라 부르는 것은 한자음인 우리말을 일본인들이 따라 부르다 보면 그처럼 되겠다는 생각이 드나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일본인 중에는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백제는 구다라이므로 일본어 구다랑 즉쓸모 없는 나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단다.
그러나 구다라는 구다라나이에 준말로서 구다라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뜻대로라면 백제를 나타내는 구다라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 라는 풀이가 되어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은 백제 계통의 문물을 높이 섬겼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또, 그들은 백제의 향기가 가득한 아스카 문화의 고장 일본의 처음으로 왕조가 수립된 이것을 나라라 부른다. 그렇다면 일본말에 구다라는 큰 나라라는 뜻이 되지 않을까?
일본 최초의 수도 나라(奈良)! 백제가 멸망하자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 정착하여 살면서 빼앗긴 나라(國)를 그리워한 나머지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기분으로 살자고 하여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 나라시의 유래이며, 현재 ‘奈良’이라고 쓰는 것은 단지 취음하기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일본인이라면 그 누구나 ‘日本人의 마음의 고향은 飛鳥(아스카)다’라고 말하는 곳! 우리 일행은 비조 제일의 전망대라고 하는 해발 148미터의 낮은 언덕인 감강의 언덕(아마가시오카)에 서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본 비조시의 전경은 이국적 풍경이라기 보다는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시공마을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에다 감독이나 이노우에 교수의 말은 백제의 古都 공주와 똑같다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오히려 부여와 흡사한 것 같았다.
행정상으로는 나라현 高市군 明日香촌. 이곳에서는 飛鳥(도부도리)라 쓰고 도부도리라 읽지 않고 ‘아스카’라고 읽는다. 왜일까? 일본 고문헌에는 ‘아스카’를 ‘飛鳥’ ‘安宿’ ‘阿須加’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있어서 ‘아스카’의 유래는 우리말의 ‘안숙’에서 나온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시 되고 있다.
그 근거로는 한반도로부터의 선진 고대문화를 지닌 도래인이 거친 파도를 헤쳐서 北九州에 도착하고 또 거기에서부터 瀨戶(세토나이카이)를 횡단하여 難波津(오사카만)에 이른 다음 육로로 해서 겨우 이곳에 안심하고 머무를 수(安宿)있었다.
이는 마치 철새가 멀리서부터 날아와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은 것과 같으니 날아온 새라는 ‘飛鳥’지명에 安宿의 ‘아스카’란 뜻 음(音)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역사를 더듬는 마음의 눈을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연결시켜본다. 앞에서 서술했던 바처럼 일본의 백제불교를 도입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단 소아氏는 호족세력인 중신겸족(中臣鎌足)과 중대형(中大兄) 황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소아입록을 제거한 이른바 대화개신(大化改新.645년)이 있었다. 이어 황위에 오른 효덕(孝德)천황은 섭정 중대형 황자의 뜻을 따라 도읍을 나니와(오사카)로 옮기게 되었다.
654년 효덕이 죽자 655년에 제명(齊明․女)천황이 등극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명은 서명(舒明)천황과 결혼하였으며 서명이 죽은 후 황극(皇極)이란 이름으로 천황자리에 올랐다가 동생 효덕에게 양위한 후 효덕이 죽자 다시 황제가 된 여인이었으며 중대형의 어머니였다.
한반도에서 660년의 백제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불타고 의자왕이 당으로 끌려가게 되자 제명은 백제를 구원하려고 한다. 제명은 飛鳥의 도성을 떠나 九州로 나온다. 그러나 제명은 병이 들어 661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 아들 중대형(후일 천지천황)은 상복을 입은채 어머니 제명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구주 博多(하카타)연안의 군사 기지를 구축한다.
그는 구주에 도착하여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 왕자에게 5000의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토록 한다. 한편, 백제에서는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던 의자왕의 조카 귀실복신(鬼室福信)이 부여풍을 백제왕으로 추대하여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한다. 아울러 중대형은 663년 다시 27000여명의 증원병을 백제로 파견한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나․당 연합군과 백촌강(白村江)에서 대접전이 벌어져 크게 패하고 최후의 거점인 주류성(州柔城)이 함락되어 멸망하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일본 서기 천지 2년(663)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제 주류성을 잃었구나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를 어찌 찾아갈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일본에서는 백제의 멸망에 이토록 애통해했는가?
도읍을 구주로 옮기면서까지 백제를 구원하려했던 제명과 중대형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망국의 한을 머금은 핏빛노을을 뒤로하고 수많은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게된다. 이들은 도래와 함께 일본은 신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구주에 水城을 쌓는다.
백제 구원에 실패한 천지(天智)가 죽자 천지의 동생(?) 대해인(大海人)과 천지의 아들大友가 황권계승을 둘러싸고 벌인 임신의 난(壬申亂)이 일어나 대해인이 승리하고 천무(天武)천황이 된다. 이때 왜(倭)란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이라는 새 이름이 등장한다. 천무는 도읍을 다시 비주로 옮긴다. 천무가 죽자 그 부인인 지통(持統)이 황제가 된다.
섭씨 33도를 넘어가는 찜통 더위 속에서 잠시 그늘에 앉아 쉬면서 준비해간 자료를 뒤적이다 임신의 난에 대해 살펴보았다. 제명여황시절 여황은 누가다노 오오가미라는 궁녀를 총애하였다. 제명은 중대형과 누가다노 오오가미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줄 모르고 중대형의 동생 대해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제명이 죽고 중대형이 천지천황이 되자 막강한 권력을 이용 이미 결혼한 누가다노 오오가미를 잊지 못하여 보쌈을 해온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대우황자가 태어난다 한편, 사랑하는 아내를 형에게 빼앗긴 대해인은 술에 취해 사냥터에서 천지의 가슴에 창을 겨눈다 형인 천지는 가슴을 대주며 “니가 만약 못 찌르면 내가 널 대신 찌르겠다”라고 하고 대해인은 차마 찌르지 못하고 창을 던져버린다. 이에 천지가 대해인을 참형에 처하려하자 쿠데타의 주역이자 동지였던 중신겸족이 눈물로 만류하여 대해인의 목숨을 구한다. 668년 천지가 병이 들어 중퇴에 빠지자 죽은 후 후계자 계승 문제를 우려하여 대해인을 불러 속마음을 떠보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대해인을 부르러간 소아안마려(蘇我安麻侶)는 이러한 천화의 계획을 넌지시 일러주고 천황 계승의 뜻이 없음을 밝히라고 충고한다.
천왕침전에 불려간 대해인에게 천지는 “내 병이 중하므로 뒷일은 너에게 맡긴다”라고 대해인의 속마음을 떠보지만 대해인은 천왕을 위해 출가하겠다는 말로 위기를 모면한다. 마침내 천지가 죽자 대해인은 그동안 갈아왔던 복수의 칼날을 들어 천지의 대우를 죽이고 천무천왕으로 즉위하였다.(673년)
동대사(東大寺)
나라공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수 백마리의 사슴 떼가 기다린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으며 아무데나 똥을 싸지르고 있다. 사슴들은 사람이 지나가면 혹시 먹이를 줄까해서 졸졸 따라온다. 한번 먹이를 주기 시작하면 주위 사슴들이 다 몰려들어 좀 곤란해지기도 하는데, 과자 몇 개 던져주고 몰려드는 사슴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띤다.
나라공원을 지나 도다이지(東大寺)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도다이지의 규모는 정말 대단하다. 도다이지 정문인 남대문 양쪽에 있는 800살 먹은 금강역사상이 우람한 근육을 자랑한다. 저런 것 하나쯤 우리 집 마당에 놔두면 좋겠다.
동대사의 상징은 뭐니뭐니해도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다. 이 불상은 무려 높이가 약 16미터, 무게 380톤로 얼굴의 길이만 5미터이며,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의 길이가 1․5 미터나 된다. 손바닥에만 사람이 16명 올라설 수 있다니 할 말 없지 않은가! 여기에 사용한 구리는 440톤을 넘고, 도금에는 180킬로그램의 금을 사용하였으며 완성하는데 20여년의 세월이 걸렸고, 주조하는 데는 연인원 30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불상의 조성은 백제인의 총 지휘 아래 고구려인, 신라인이 합세하여 만든 한국인의 미술품이라는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총 책임자는 백제계 도래인인 국공마려(國公麻呂) 등이었고, 주조 책임자는 신라계의 왕씨(王氏)와 고구려계의 고려마려(高麗麻呂)였다. 특히 불상 조성 과정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 백제계인 양변 스님과 행기 스님이었으며, 이 두 사람은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 이 중 행기스님은 백제의 왕인박사의 직계후손으로서 서기 740년에 신라 의상대사의 제자였던 심상 스님이 이곳 나라(奈良)땅으로 건너 와 화엄불교를 펼 때 심상스님을 맞아 금종사에서 강원을 열었는데 바로 금종사 터전이 지금의 동대사인 것이다.
석무대(石舞台)
아스카 촌의 주변 도로 곁에 낮은 언덕 위에 거석을 쌓아 올린 이시부다이라 불리는 석무대 고분을 찾았다. 처음에는 그 용도가 모호하여 제단 내지는 춤을 추던 바위였을 것으로 추정했단다. 천년의 세월 속에 신비를 머금고 있는 석무대 비조천(川)의 상류에서 땡볕 더위 속에 찾아온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 거대한 중압감. 천장을 덮고 있는 큰 돌 하나만 해도 길이가 13m, 폭 18m로서 무게는 77톤이 되는데 사용된 돌은 총 39개이며 무게는 2300톤이나 된다니 이처럼 크고 무거운 돌을 당시 원시적인 토목 기술로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불가사의하다. 막강한 부와 권력이 아니면 축조가 불가능한 이 석무대 고분의 파장자는 백제 계의 호족으로 앞서 밝혔던 소아마자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카마쓰(高松)의 고분
아스카촌에 있는 다카마쓰총 고분은 지금은 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지만 1973년 한 농부가 감자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발견하였는데, 발견 당시만 해도 늙은 소나무 한그루가 높이 서 있어 高松, 즉 다카마쓰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카마쓰 고분을 향하는 길은 오솔길과 언덕으로 이루어져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찾아가는 이들을 힘들게 하였다.
이윽고 고분에 도착하였으나 고분은 보존을 위하여 봉쇄되어 현재 벽화는 모조품을 만들어 바로 50미터 옆의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었다. 이 고분의 석실벽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옛부터 임금을 상징해온 四神圖인 청룡(동쪽벽), 백호(서쪽벽),현무(북쪽벽)가 각각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남쪽벽의 주작도는 도굴 당할 때 훼손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동서 양쪽벽 청룡,백호의 윗쪽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해와 달의 모습을 담은 日像과 月像이 그려져 있고 좌우 양쪽벽에는 네사람씩의 여자군상과 남자군상이 각각 그려져 있다. 그리고 천정에는 북두칠성등 20개의 별자리를 그린 성좌도가 그려져 있으며 도굴 때 훼손된 남쪽벽의 주작도를 제외하고 모두 아홉점의 그림과 한점의 성좌도가 그려져 있는 셈이다.
이고분의 벽화는 5-6세기경의 고구려 화법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아스카 역사 공원에는 다카마쓰총(高松塚)이 있다. 여기에서 나온 고분 벽화는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72년 이 고분이 발굴되자 일본의 언론은 연일 특보며 특집을 꾸몄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고구려 것이다', '아니다' 해서 논쟁이 크게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토론의 결과 학계의 결론이 고구려 고분 벽화로 결론지어졌다고 한다.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치마의 상의가 밑에서부터 흘러 내려오고 있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 여성의 치마는 옷의 위쪽에서부터 입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귀부인은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에서처럼, 치마의 위쪽에다 웃옷을 내미는 오버 블라우스였다. 즉 저고리, 스커트, 그리고 스커트의 자락에 달려있는 찬 등은 고구려 시대의 복장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한 머리를 보면 앞 쪽에서 추켜 올려서 뒤쪽에서 묶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풍속과 같은 것이다.
법륭사(호류지)
아스카시대란 지금으로부터 1천 4백여년 전인데도 그때 세워졌던 건축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法隆寺(호류지)이다. 호류지는 그래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1993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그렇게 들어오던 호류사가 아닌가. 산책도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쉬기도 하면서 백제의 숨결을 느낀다.
쇼토쿠 태자(574~622)는 일본에 불교를 진흥시킨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중 혜자와 백제의 중 혜총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에 심취하여 불경 주석서를 쓰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유력한 각 씨족은 저마다 氏寺를 세웠는데, 쇼토쿠 태자는 사천왕사와 법륭사 등을 세웠다. 법륭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중문은 飛鳥시대 것으로 기둥도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 양식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의 호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생전에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금당과 5층탑은 그가 죽은 직후 그를 기려서 세운 것이다.
금당은 호류지의 중심 건축물이다. 가람의 중심을 이루는 대웅전이기 때문이다. 중심공간이기에 제일 먼저 축조되었다. 그래서 호류지를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불리게 했던 것이다. 금당은 쇼토쿠(性德)태자 일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불(佛)의 세계, 즉 정토(淨土, 천국)를 형상화한 것이라면서 내부의 불상과 벽화 또한 이를 위해 동원된 것이라고 한다.
금당 내부의 벽면은 남쪽을 향해 나 있는데 앞에는 세 개의 커다란 금동불(金銅佛)이, 뒷 벽면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다. 중앙의 불상은 호류지의 상징인 석가삼존불이다. 삼존불은 석가여래와 우협시(右脇侍) 약상(藥上)보살, 좌협시 약왕(藥王) 보살로 되어있다. 광배(光背)또한 세 개로 중앙의 큰 광배에는 많은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쇼토쿠 태자를 기려 안작지리(鞍作止利)로 하여금 스이코 31년(623년)에 제작케 했다」는 명문(銘文)이 있어, 그 제작동기와 제작년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안작지리는 백제 출신의 장인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법륭사 금당벽화! 고구려 중 담징이 그렸다는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는 일본전래의 불화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예술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실물을 보지 못했다. 담징은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 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벽화는 1949년 1월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지금은 지하창고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화재의 원인 또한 아이러니 하다. 이 세계적인 벽화를 만일의 경우에 대비코자 일본화가들을 불러 모사작업을 하는데 추위를 막기 위해 금당 내부에 전기방석을 깔고 일하다가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 그 전기방석이 합선되어 불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문화재를 영구 보존하려다가 오히려 그 문화재를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손끝으로 빚어낸 담징의 금당벽화를 보지 못하고 1968년에 모사된 가짜를 보고 서있는 것이다. 해체수리 중 발견되었다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는 목판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망향의 회한을 지니고 소리 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사방사불(四方四佛) 대벽화」란 이름의 이 벽화는 아주 크고 또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남면을 향한 불상 뒤에는 마치 아들을 감싸고 있는 형상의 비천도(飛天圖)가, 외벽 안족으로는 모두 12폭의 불화가 그려져 있다. 동쪽으로 난 입구를 기준으로 하여 남-서-북 방향으로 석가정토, 일광보살, 관음보살, 세지보살, 월광보살, 아미타정토., 聖관음보살, 문수보살, 미륵정토, 약사정토, 11면관음보살 순으로 되어 있는데 금동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픙겨준다.
금당에 안치되었다가 1941년 금당옆 대보장전(大寶藏殿) 으로 옮겨진 백제관음상은 210센치미터의 청아한 높이와 우아한 자태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그 은은한 미소와 늘씬하고 부드럽고 유려한 선(線)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발하게 한다. 일본인 스스로도 「무한한 신운(神韻)을 들려주는 고대의 일대 걸작」이라고 평하는 이 거대한 입상 또한 백제의 숨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호류지는 참으로 한국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우선 건축물의 날렵한 곡선이 그렇고, 석가삼존상을 백제인 안작지리가 조각하였으며. 거기다가 중심이 되는 벽화를 고구려인 담징이 그렸던 것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창건 과정에 많은 고구려인, 백제인이 참여했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한국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약사사 (藥師寺)
일본에 있는 백제계통의 사원과 관련하여 주목받는 사원은 약사사이다. 이 약사사에는 약사 삼존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에 약사여래, 좌측에 월광보살, 우측에 일광보살을 협시하고 있다. 원래 금색이었는데 잦은 화재로 인해 지금은 흑색으로 변모해있다. 중앙 약사여래의 대좌 무늬가 당초무늬신상, 사신도, 연화무늬, 등 다양함 속에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 절은 지통의 병 치유기원을 위해 天武가 680년대부터 698년 사이에 지었다고 전한다. 무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한 탓인지 모두들 어깨가 축 쳐져있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京都(도쿄) 로얄 호텔에 짐을 풀고 도산(挑山) 학원대학 서용달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 온지 55년이나 되었다는데 우리말이 매우 유창하였다.
재일 교포들이 일본에서 받고 있는 지문날인 등 각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한 지식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무관심과 분단된 조국이 주는 또 하나의 아픔이 진하게 베어 나옴을 느꼈다.
왕인 박사 묘
35도의 찜통더위 속에서 우리는 왕인 박사 묘를 찾아 헤매었다. 안내를 맡은 마에다 감독도 이곳은 처음 길이라 한다. 물어 물어 언덕길을 한참 돌아 올라갔더니만 원위치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잘못 찾아온 것이란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이동해야 한다나 그러나 짜증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60이 넘은 마에다 감독은 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이곳 저곳으로 뛰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있지 않은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중간지점인 히라가타(枚方)의 주택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왕인 박사 묘소에 도착하였다. 일본문학의 시조로 추앙 받는다는 인물의 묘소치고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여기서도 일본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묘소입구에 만발한 무궁화꽃과 우리말로 “어서 오십시오”라고 씌여 있는 작은 나무 팻말의 글귀가 반갑기만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응신(應神) 15년(285)에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왔고 응신은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또 응신은 아직기에게 “(너희나라에) 너 보다도 나은 박사가 있느냐”고 물으니 “왕인(wani)이란 사람이 제일 우수하다”고 하였다.
응신은 황전별(荒田別), 무별(巫別)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초빙키로 하였다. 그 이듬해 왕인이 왜국에 도착하자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는 백제 고이왕 때에 해당하는데 일본서기가 120년 정도 시기를 앞당겼다 하면 405년이 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말년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사기(古事記)에는 역시 이를 응신 때의 일이라 하면서 당시의 백제왕은 조고왕(照古王)이라 하여 조고왕이 숫말1필과 암말1필을 아지길사(阿知吉師)에 부치어 보내고 따로 큰칼과 큰종을 보내 주었다 한다. 또 백제에 대하여 현인(賢人)이 있거든 보내달라고 하였더니 화이길사(和邇吉師)란 사람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의 조고왕은 즉, 초고왕(肖古王) 다시 말하면 근초고왕(346~376)의 지칭이며 아지길사와 화이길사(wanikishi)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서기의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에 해당한다. 吉師란 말은 우리 고어에 의하면 귀인(貴人), 대인을 의미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면 왕인의 정식 이름은 화이(和邇)이며 길사는 단지 존칭으로 붙인 것이 된다.
속일본기에서는 왕인을 漢 高祖의 후예로 백제에 귀화한 왕씨의 인물로 구소왕(久素王:久爾辛王)때에 왜국에 초빙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왕인의 본명은 和邇로서 본명에 가까운 音을 취해서 중국식 氏名으로 지은 것을 가지고서 무의식적으로 잘못 기록했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왜곡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고교 교과서인 신편일본사 21쪽을 보면 “응신천황 대에 백제로부터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헌상하고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가 왕인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제전적(諸典籍)을 배웠다고 전하는 것은 漢字를 전했다는 상징적인 전승인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헌상’하였다 라고 하며, 한편으로는 태자의 스승으로 섬겼다 하니 앞 뒤 안 맞는 것은 고사하고 이러한 내용이 버젓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는 일본이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 교과서에는 고대로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에 얼마나 깊고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현재까지 우리문헌에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지난 1987년 전남 영암 동구림리에 남아있는 왕인 박사 관련 설화가 있어 현지에 왕인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1984년 11월 3일 제 1회 왕인 박사 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그 뜻을 기리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
묘소 옆에서 박남준 시인의 구성진 쑥대머리 한 곡과 마에다 감독이 부른 이스라엘 민요가 한데 어우러져 잠든 영혼과 왠지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 마음을 달래주었다.
백제사적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중간지점에 히라카타(枚方)가 나온다.
해발 30미터의 히라카타 구릉에 위치한 백제 사적은 160평방미터의 절터에 남문, 중문, 동, 서 양탑, 금당, 강당 등의 자취가 남아 있다. 백제사가 있는 이곳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선광의 후손인 경복때 이곳에 정착하면서 백제의 들(百濟野)로 불리기 시작한다.
백제사의 창건은 경복때로 750년쯤 된다. 경복은 앞서 얘기한 동대사 대불 주조때 금을 헌납한 사람이다. 경복의 후손들은 백제왕 성씨를 200년간 사용하다 三松씨로 바꿔 일제시대까지 그 맥이 이어졌다. 백제사는 11~12세기경 불에 타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잡초에 뒤덮여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특별사적이란 말이 무색하리 만치....(오사카의 특별사적은 오사카성과 백제사적 두 곳뿐이다.) 백제의 혼과 손때가 이 땅 일본 곳곳에 묻어있건만 그 빛이 바래가고 있으며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찾아오는 우리들의 발길을 착잡하게만 한다.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 더하자, 長野縣 松代町 千曲川東巖 지역의 大室고분군 이곳에는 무려 502기의 고구려계통의 적성총(積石塚)이 있는데 그 발견 경위가 이채롭다. 지금으로부터 약 56년 전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달해 만약을 대비 일본천황과 고위관리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반공호를 파다가 발견하였는데 조사결과 5c말 ~ 6c 초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죽은 고구려 선조들의 넋이 불렀을까? 그런데 그 일대는 그대로 방치되어 인근 포도밭의 지주대나 밭의 계단을 만들기 위해 돌을 마구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100여기 이상이 없어지고 그나마 제대로 형태를 갖춘 것은 7 ~ 8개 정도라 하니 문화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가치 기준을 알만도 하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파트 공사한답시고 경주도 깔아뭉개는 우리들인데.....
백제왕 신사(百濟王神社)
백제왕신사는 백제왕 氏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성무천왕의 칙령에 의해 세워졌다. 이방인을 맞이하는 백제왕 신사 입구 도리이에 걸려 있는 현판엔 <백제국왕 우두천왕(百濟國王 牛頭天王)>라고 쓰여져 있어 또 한번 이국 땅에서 백제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사에 숨겨진 비밀, 우두천왕은 누구일까?
원래는 사천왕사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현재 위치로 옮겨져 왔다는 백제왕 신사는 비운의 백제왕족 경복이 백제가 멸망하자 이곳으로 망명하여 조국 부여에 있던 종묘를 세운 것이다.
안내자의 말을 들어보면 이 지역에 사는 일본인들은 감각적으로 자신들의 선조가 백제인 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단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신사 입구에 돌로 만든 울타리의 세워진 돌 하나하나에 그들의 이름과 신사개축 헌금 내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수사 (淸水寺)
교토 제일의 전망대! 청수사로 향하는 언덕진 골목길은 토산품 가게가 즐비하다. 평안시대에 판상전촌마려(坂上田村麻呂)가 창건 했다 하나 전란으로 불탄 것을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건축물처럼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짜 맞췄다는 청수무대에서 내려다보니 교토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본 사람들은 과거 예술인들의 공연장인 이곳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단다. (경치가 너무 좋은 나머지 감격한 상태에서) 절 안에 신사가 있는 점이 조금 특이하였으나 좋은 사람 만나게 해준다는 신사라 그런지 많은 청춘남녀로 붐비었다. 한국인들도 많은 것으로 보아 정해진 관광코스 인 듯하다.
그들이 재미로 하는 신사참배가 일제시대 강요당한 그것과는 다르지만 괜히 심사가 꼬여 일행과 떨어져 먼저 내려오는데 약수터에서 여학생들이 모여 호들갑을 떤다.
이곳에 세 개의 약수가 있는데 첫째 물은 건강을, 둘째 물은 머리가 맑아진다는, 마지막 셋째 물은 연애가 잘 이뤄진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욕심 많게 세 번 다 마시면 효험이 없단다.
항전신사 (杭全神社)
고마다는 원래 백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애써 지워버리고 싶은 한국의 냄새를 의식하여 音만 살려둔 채 뜻은 절구를 의미하는 항전(杭全)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신사 내에는 필총(筆塚)이 있는데 이 신사를 만들 때 사용한 붓을 모아서 만든 붓 무덤이란다. 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중간이 마치 여성의 젖가슴 모양으로 불거져 나와 이 나무아래에서 빌면 젖이 잘 나온다 하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심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떠밀려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학교(鶴橋)를 지나 오후 3시 35분 발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4박 5일의 짧고도 긴 여정 속에서 우리가 둘러본 일본 속의 백제 유적지 기행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뭔가를 배우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가슴에 느끼는 그 무엇을 담아오자는 생각이 컸던지라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그 의미가 새로웠다. 이번 여행이 일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왔나 아니면 오히려 더 두터운 편견의 벽만 쌓고 돌아왔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담아온 소중한 것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알게되는 즐거움은 차지하고서라도,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로 내가 담아온 소중한 그것이리라.
첫댓글 소중한 자료 감솨 ^^
다음주엔 구시장 투어 준비하면 어떨까요
벙개는 대빵에게... 저번에 엄청 힘들었음 ㅋㅋ
사라진 대빵 찿기는 죽은자식 불알만지기예요..
구시장 투어는 유효 합니다...
일본 속의 백제문화.
언제 한번 직접 가볼 수 있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