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1부 폭풍전야
제1장 유신과 저항
8. 종교계.사회단체 활동
재야.종교계 정치 현실 본젹적 참여
광주권 목사를 인권투쟁 구속사태
[엠네스티]등 대중 민주역량 결집
이성학. 조아라. 강신석등 광주 YWCA무대삼아 반독재 시민의식 일깨워
70년대 후반 민주역량 결집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은 종교계의 반유신활동과 각 사회단체의 인권운동이다.
먼저 72년 10월 유신직후인 그해 12월 13일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목사가 유신헌법을 반대한다는 입장표명 이유하나만으로 구속된 사건은 교계에 새로운 충격을 던져준다.
학생들만 구속되던 반유신운동에서 종교성직자가 구속되고,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긴급조치 1.4호가 발효되자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활동을 강화하고, 74년 4월 11일 NCC산하에 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켜 인권운동과 반유신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와함께 NCC산하 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켜 인권운동과 반유신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와함께 NCC산하단체인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와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의 활동도 인권 및 반유신운동으로 전환한다.
한편 천주교에서도 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유신정권의 폭압이 강중되것에 대처키위해 74년 9월23일 소위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을 정식 발족시켜 전국단위의 인권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정식 발족시켜 전국단위의 인권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정의구현사제단]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정한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교회사목현장의 요청에 따라 1967년 교황직속으로 결성된 후, 한국에선 1970년 8월24일 첫 창립총회를 갖는다.
한국측 정의구현사제단의 초대위원장은 황민성주교이며 2대가 지학순주교다.
정의구현 광주.전북사제단의 창립은 1977년이며 초대위원장은 장지권신부(월상동천주교회)다. 특히 이들 광주.전남사제단의 활동은 80년 5월의 경우, 윤공희 대주교를 비롯 김성룡.조비오신부등 거의 대부분의 신부들이 [광주5월]의 고통을 함께 한다.
양심수석방과 옥바라지를 위한 기도회와 재야법조인 및 대학교수를의 소규모 강연등을 통해 대중의식 확산과 민주 역량결집을 꾀하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광주.전남에서 최초로 목회자들이 구속된 것은 76년 8월 10일 기장(기독교장로회)계열인 광주 양림교회(속칭 양림웃교회)에서 열린 기독교장로회 임시노회에서 유신헌법을 철폐하라]는 성명서를 낭독한 사건이다.
이와관련 20여명이 연행돼 4명의 목사가 구속되고 12명의 신도가 5일동안조사를 받고 훈방되는 등 급기야 광주.전남 기독계에도 구속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때 구속된 목사는 임기준(장흥읍교회), 조홍래(무안읍 제일교회), 윤기석(강진읍교회. 현광주한빛교회), 강신석목사(목포연당교회. 현광주무진교회)등인데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3-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1년여만인 77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된다.
당시 구속된 강목사에 따르면 이때 낭독한 성명서는 그해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3.1민주구국선언]을 지지하면서 그해 3월 10일 목포연동교회 기도회에서 이미 낭독됐던 것이라 한다.
4명의 목사들 구속사태는 급속하게 광주.전남기독교계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으며, 급기야 이들 목사들의 구명활동을 벌이던 당시 광기독교연합회 회장인 유연창목사(광주신광교회. 현재 대구에서 목회중)가 불과 2주일만인 8월 23일 구속되기에 이른다.
기장 전남노회는 이들 구속된 목사들의 석방을 위해 이후 기도회와 신앙강좌를 열고 줄기차게 반유신활동을 전개한다. 77년 1월 광주양림교회에서 열린 신앙강좌에서 이철우(현 광주무등교회), 안철(목포연동교회소속)등이 연행되고, 그해 3월 1일 대대적인 기도회를 갖는다.
이어 4월3일 광주 YWCA에서 EYC 및 기장청년회 전남연합회의가 부활절 연합예배를 갖고 ▲교회사찰중지 ▲구속인사석방 등을 요구하다 당시 전남대에 재학중이며 KSCF 및 EYC 회원인 조봉훈(현 광주시의회의원), 배호경(현재 경북 김천에서 목회활동), 김영종(현재 사계절출판사대표), 정득용(목회중)등이 구속된다.
또 그해 11월 26일엔 기장전남노회의 [농민을 위한 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았던 고영근목사가(예수교장로회전도목회자)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6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는다.
78년 3월1일 광주양림교회(기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예배에서 유신철폐와 민주회복을 내용으로 한 기도문이 문제돼 박만철집사(강진읍교회. 현재전남교육청)구속된다.
이어 그해 4월 가톨릭농민회가 주도하는 함평고구마부정수매를 규탄하는 농민대회가 북동성당에서 개최되고, 6월엔 전남대에서 [민주교육지표]사건이 터진다.
이런 일련의 반유신저항은 70년대 후반 당시 광주.전남 재야의 원로인 홍남순변하사, 조아라 광주 YWCA회장, 현재 고인이 된 이성학 광주양림교회장로, 은명기 광주양림교회목사등을 주축으로 재야전반을 선도케 했는데, 이가운데 특히 이성학장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해남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돼 화순에서 오래동안 전도사로 활동하다 광주양림동으로 이주, 광주양림웃교회장로가 된 이장로는 78년 광주 NCC인권위원장을 맡으며서 본격적인 반유신활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을 서게된다.
이장로에 대한 강신석목사의 증언. [이장로는 한마디로 [교통정리]를 잘했다. 구속인사나 구속학생들을 위해 법원, 검찰, 경찰서를 오가며 구명운동을 몸소 실천했으며, 특히 젊은이에 대한 이해심이 깊었다.]
70년대 기독교회의 반유신과 인권회복운동은 79년 10.26직후인 11월 28일 광주 신.구교및 재야인사, 6개의 민주단체가 연합으로 [민주주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는 성명서를 낭독, 19명이 연행돼 3명이 불구속기소됨으로써 70년대 반유신운동을 마무리하고, 80년을 맞으며 신군부에 대한 [반군부독재투쟁의 칼]을 갈게된다.
이때 기소된 사람은 명노훈 전남대해직교수 강신석목사 윤기석목사등이고, 연행자는 이성학 이영생 조아라 이애신(당시 YWCA총무) 황석영(소설가 현재. 서울구치소수감중) 배성용목사 등이다.
70년대 후반기독교회의 운동은 특히 NCC기장교회와 사회위원회가 주도했다는 것이 강신석목사의 증언이다. [이슈만 있으면 수시로 기도회와 강좌만을 통해 독재정권을 물고 늘어졌으며, 민주단체들에 대한 인적.물적지원을 꾸준하게 해왔다]고 강목사는 술회한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은 광주 YWCA에 대한 부분이다.
70년대 후반, [광주시민들의 공회당]은 누가 뭐라해도 지금은 이전하고 다른 새건물이 들어섰지만 동구 대의동 75번지에 위치한 3층건물의 광주 YWCA회관이다.
이곳에선 남자들도 갖기 힘든 강한 의지와 투지로써 초지일관 앞을 향해 돌격하는 조아라회장의 지휘아래 수많은 인권관련 기도회와 시민대상의 의식교육강좌, 반유신운동과 관련한 각종행사및 모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론 금남로1가 의 광주 YMCA가 연 앞선다.
또 80년 5.18당시 조회장을 비롯, 김경천강사, YWCA신협의 김영철참사(현재 정신이상으로 투병중)가 수배 또는 구속되고 YWCA신협 직원이었던 박용준은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광주 YWCA의 상징성은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는 재야단체와 시민들의 공회당역할을 했다는 점이지만, 자체프로그램인 [민중논단]을 통해 시민의식교육에 앞장섰다는 대목도 평가해야할 부분이다.
특히 77년 12월 10일, 지방으로선 처음으로 결성돼 80년 5월을 거쳐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는 광주앰네스티티지부(국제사면위원회)는 조아라 회장 윤영규(전전교조위원장) 문병란(조선대교수) 송기숙(전남대교수) 이기홍변호사(초대지부장) 이성학장로(2대지부장) 윤기석(3대지부장) 박석무(현국회의원) 서명원(4대지부장) 위인백(5.18민중항쟁동지회장) 등을 주축으로 활동했는데, 주로 YWCA에서 회합을 갖고 양심수석방과 옥바라지에 매진케된다.
또 당시 신용협동조합의 일환으로 78년 생겨난 광주양서조합 역시 YWCA 2층에 사무실을 갖고 의식확산을 꾀했는데, 안진오(전남대교수) 이상식(전남대교수) 장두석(자연건강연구가)을 주축으로 황인태(현 광주시의회 운영위원장)이 총무로 활약하기도 한다.
5.18당시 핵심적 근거지로 활용됐던 광주 YWCA. 정신적, 물적 인적자원을 제공했던 광주YWCA가 외부요인에 의해 북구 유동 107의 5번지현재의 위치로 이전한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바 있다.
5.18이 이미 13년이 지나건만 당시의 광주 YWCA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뇌리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정용화차장>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