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씨의 장편 『랩소디 인 베를린』의 김상호는 재독 작곡가 윤이상을 연상시킨다. 구씨는 실제로 “상당 부분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중앙포토]
소설가 김중혁은 월간 문화전문지 ‘브뤼트’ (상상마당) 4월호 기고문에서 좋은 장편소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①발동 걸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탓에 20쪽까지는 천천히 읽히지만 그 후부터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②중반 넘어서부터는 분량 줄어드는 게 아쉽다. ③책장을 덮는 순간 주인공과 함께 거대한 세계를 헤쳐 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중견소설가 구효서(53)씨가 새 장편소설 『랩소디 인 베를린』(문학에디션 뿔)을 펴냈다. 480여 쪽의 두툼한 분량이다. 읽어 보니, ‘김중혁식 좋은 소설 분류’에 끼워 넣어도 손색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내용은 웅숭깊고 정서는 종종 아득하다. 대화체가 감칠맛 나면서 감동 또한 묵직하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67세의 일본인 여성 하나코다. 그가 자신 앞에 던져진 절박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소설의 뼈대다. 20대 초반 하나코는 운명적인 사랑을 했다. 상대는 동갑내기 재일 한국인 겐타로였다. 해국(海菊)이 만개해 온통 보라색 천지인 산자락에서 ‘섭리’ 운운하며 사랑을 고백해 온 겐타로에게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둘의 사랑은 20대 중반에 끝난다. 겐타로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독일로 떠나면서다.
봉사단체 일을 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꿋꿋하게, 한편으로는 절치부심 이를 갈며 살았을 하나코에게 어느 날 겐타로의 부고 소식이 들려온다. 자살이었고, 유언에 ‘평생 가 닿고자 했던 곳이 하나코’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사실과 함께. 화들짝 놀랄 만한 저음의 허스키에 불굴의 유머감각으로 무장한 하나코 할머니. 떠난다, 독일로. 대체 왜 자살했으며 그렇게 절실했다면 왜 진작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닌 실존적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이 소설의 서사를 틀 짓는 뼈대라면 음악과 예술, 그에 대한 담론은 살과 피를 이룬다. 한국명 김상호, 독일에서 토마스로 불린 겐타로는 성공한 작곡가였다. 우연찮게 선조가 조선인인 18세기 작곡가 요한 힌터마이어의 행적을 좇아 1970년대 초 북한을 방문했다가 남한에서 17년간 옥살이한다. 구씨는 겐타로와 힌터마이어의 삶과 사랑, 예술을 능란하게 겹쳐 놓는다. 힌터마이어가 자신의 음악적 성공과 파산, 위험한 사랑 등을 밝힌 자서전격인 ‘토카타와 푸가’를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일종의 액자로 겐타로-하나코 이야기와 교차시키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 과정을 통해 제국주의 가해자로서 독일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 끔찍했던 우리의 공안통치 경험 등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의 ‘거대한 세계’의 메시지를 한 줄로 요약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겐타로가 하나코를 ‘사람’ 아닌 ‘곳’으로 표현한 점에 유의할 때, 겐타로와 힌터마이어가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바는 이데올로기나 맹목적 신앙, 혹은 관습적 예술 등이 ‘예술’을 옥죄지 않는 보다 자유롭고 보편적인 세상이었을 게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내용과 형식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랩소디(광시곡)의 세계다.
첫댓글 '종종 아득한 정서'라는 평에 끄덕끄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