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원문화원 사무국장 이석홍 선생의 홈페이지 <묵묵재>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옹정리를 소개하는 글로 널리 알려졌다. 알기쉽게 간략하게 정리된 게 특징이다. 홈페이지에 올린 시점은 2005.3.26일이다.
연 혁
본래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甕井) 지역으로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룡리(古龍里), 호산리(狐山里)의 각 일부와 주포면(周浦面)의 제천리(諸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옹정리(甕井里)라 하고
금지면(金池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가 되었다. 옹정리에는 금정(金井), 석정(石井) 등이 있다.
옹정리 금정(金井)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리(甕井里) 지역으로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룡리(古龍里), 호산리(狐山里)의 각 일부와 주포면(周浦面)의 제천리(諸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옹정리(甕井里)라 하고 옹정리에 편입되었는데 1972년 옹정리의 동편 마을을 금정(金井), 서편 마을을 석정(石井)으로 분리하였다.
금정(金井)마을은 최초 통일신라 초기에 원주 원씨(原州元氏)가 처음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요천수가 마을 뒷산 밑을 굽이 돌아 흘렀는데 이때 흥덕 장씨 제각이 세위진 부근에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김씨, 장씨. 양씨 기타 성씨가 모여들어 오늘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원씨 일가가 많이 모여사는 속칭 큰 골목부근에 맑고 시원하여 제아무리 가물어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은 남원 제일의 샘이 있으니 이 샘이 유명한 옹정(甕井)이다. 어느 샘이고 항아리처럼 생긴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 곳 샘이 유달리 항아리 속에 또 항아리가 있는 것 처럼 생겨 이로 인해 ⌈독우물⌋, ⌈돋우멀⌋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항아리 옹(甕)과 우물 정(井)으을 써서 ⌈옹정(甕井)⌋으로 바꾸었다. 1972년 행정분리에 따라 옹정리의 동편마을을 금정(金井)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취락지역으로 지정되어 총 110여가구가 농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1992년도 마을회관을 신축해 일부 시설에 노인을 위한 복지시설로 쓰고 있다. 최근 마을 식수원 고갈과 오염으로 1996년 암반관정을 개발해 전주민이 맑은 식수와 깨끗한 환경속에서 생활하는 등 점차 변모해가고 있으며 마을 출신중에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 김주열 열사, 전 대법관 배석, 전 국회의원 김병오(서울 구로구)씨를 배출하였다.
1. 지리적 위치 와 리세(면적)
남원시에서 서남부 기름진 곡창지대로 금지면의 상부 마을이며 남원에서 9.2㎞지점에 위치하며, 주생면 제천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마을 앞으로 요천이 흐르고 있다. 국도 17호선(남원↔곡성)이 위치하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충지이다.
1997년 6월말 현재 총면적은 141㏊로 금지면 전체의 4.3%를 차지하며, 전답비율은 전 11㏊로 농경지의 14.5% 답은 65㏊로 농경지의 85.5%이다. 임야는 30㏊로 총면적의 21.3%이고, 기타는 35㏊로 총면적의 24.8%이다. 가구수는 총 116호로 금지면 전체의 8.8%이고, 이중 농업에 105호가 종사하고 기타 11호이며, 인구수는 총 362명(남 179명, 여자 183명)으로 금지면 전체의 8.8%이다. 다수 성씨로는 김씨가 41호, 장씨11호, 원씨가 6호, 기타 58호이다.
2. 지 형
마을앞으로 요천수가 흐르고 해발 100m미만의 평야지대로서 95%의 경지정리가 되어 있고 산림은 해발 130m이내의 야산지대로 일부는 개간을 하여 과수원 (배, 포도, 복숭아)을 조성하였다.
3. 교 통
마을앞으로 국도 17호선(남원↔곡성)이 지나고 마을 뒤에는 전라선 철도(남원↔여수)가 관통하고 금지 옹정역이 마을에서 500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한 편이다.
4. 주요산업 및 토산물
산업구조는 농립업이 95%이고 기타업이 5%이다. 주산업으로는 쌀농사 위주의 농업에서 1982년도부터 점차 시설원예로 딸기. 배추. 포도를 확대되어 지금은 전가구의 40%가 참여하고 있다.
5. 관광문화 및 공공시설
김태인 삼효기적비가 있고. 공공시설로는 마을회관 (’91년)1동과 모정 (’79년)이 있다.
6. 기 타
1960년4월19일 혁명의 기폭제로 승화되었던 고 김주열 묘역과 추모각이 있다.
옹정리 석정(石井)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리(甕井里) 지역으로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룡리(古龍里), 호산리(狐山里)의 각 일부와 주포면(周浦面)의 제천리(諸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옹정리(甕井里)라 하고 옹정리에 편입되었는데 1972년 옹정리의 동편 마을을 금정(金井), 서편 마을을 석정(石井)으로 분리하였다. 1919년 창산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옮겨와 면 소재지가 되었다.
석정(石井)마을은 최초 통일신라 초기에 원주 원씨(原州元氏)가 처음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요천수가 마을 뒷산 밑을 굽이 돌아 흘렀는데 이때 흥덕 장씨 제각이 세위진 부근에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김씨, 장씨. 양씨 기타 성씨가 모여들어 오늘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원씨 일가가 많이 모여사는 속칭 큰 골목부근에 맑고 시원하여 제아무리 가물어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은 남원 제일의 샘이 있으니 이 샘이 유명한 옹정(甕井)이다. 어느 샘이고 항아리처럼 생긴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 곳 샘이 유달리 항아리 속에 또 항아리가 있는 것 처럼 생겨 이로 인해 ⌈독우물⌋, ⌈돋우멀⌋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항아리 옹(甕)과 우물 정(井)으을 써서 ⌈옹정(甕井)⌋으로 바꾸었다. 1972년 행정분리에 따라 옹정리의 동편마을을 금정(金井)이라 하고 서편을 석정(石井)이라 했다.
1919년 창산리에 있던 면 청사가 화재를 입어 전소 되어 면청사를 다시 지을때 지금의 옹정리로 옮겨 면소재지로서의 행정, 교육의 중심지로 발돋음하게 되었고 1995년도에는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으로부터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 지리적 위치 와 리세
남원시에서 서남부 기름진 곡창지대로 금지면의 상부 마을이며 소재지로 행정, 교육, 교통의 중심지로 남원에서 9.2㎞지점에 위치하고, 주생면 제천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앞으로 요천이 흐르고 있으며 국도 17호선(남원↔곡성)이 위치하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충지이다.
1997년 6월말 현재 총면적은 134㏊로 금지면 전체의 4%를 차지하며, 전답비율은 전 8㏊로 농경지의 10.8% 답은 66㏊로 농경지의 89.2%이다. 임야는 39㏊로 총면적의 29.1%이다. 가구수는 총 107호로 금지면 전체의 8.1%로 이중 농업에 101호가 종하하고 기타 6호이며, 인구수는 총 329명(남 146명, 여자 183명)으로 금지면 전체의 8.1%이다. 다수 성씨로는 김씨가 30호, 장씨28호, 하씨가 11호, 기타 38호이다.
2. 지 형
마을앞으로 요천이 흐르고 해발 100m미만의 평야지대로서 95%가 경지정리가 되어 있다. 산림은 해발 130m이내의 야산지대로 일부는 개간을 하여 과수원 (배,포도,복숭아)을 조성하였으며, 마을 뒷편으로는 풍촌천이 있으며 1989년도에 5㎞의 호안공사를 완료하였다.
3. 교 통
마을앞으로 국도 17호선(남원↔곡성)이 마을앞을 지나고 있고 마을뒤에는 전라선 철도(남원↔여수)가 관통하고 금지 옹정역이 마을에서 500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한 편이다.
4. 주요산업 및 토산물
산업구조로는 농립업이 95%이고 기타업이 5%이다. 주산업으로는 쌀농사 위주의 농업에서 1982년도부터 점차 시설원예로 딸기. 배추. 포도를 확대되어 지금은 전가구의 40%가 참여하고 있다.
5. 관광문화 및 공공시설
○ 공공시설 : 금지면사무소, 금지동초등학교, 금지중학교, 금지파출소, 금송단위농협,
남원소방서 금지파출소, 농어민상담소
○ 복지시설 : 보건지소 (물리치료실포함)가 있고 마을공공시설로는 마을회관 1동과 모정 2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