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순왕과 고려태조의 딸 낙랑공주(신명순성왕후의 딸) 사이에 출생한 대안군 은열의 후손으로만 알고 살아왔었다. 2009년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아이의 과제물, 친가와 외가의 가계도를 작성하는 숙제를 도와주고 나서 우리집에 있는 대안군파종보(1987년판)를 펼쳐놓고 직계조상을 거슬러 올라갔다. 원정-인위-순웅으로 올라갔는데, 이 직계조상이 어떤 분들인가 궁금하기도 하여 고려사를 뒤져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던 중 머리가 완전히 뒤집히는 충격을 받았다. 순웅 장군이 흔히 마의태자로 일컬어져 왔던 일(鎰)의 둘째아들이란 사실이었다. 자신의 조상에 대한 이해는 자아 정체성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큰 혼란과 충격에 휩싸였다. 이런 크나큰 충격을 계기로 하여 관심 밖의 분야였던 족보연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가지고 있는 대안군파종보(1987년)는 1922년 대안군파 대동보를 편찬하면서부터 있었던 오류를 그대로 이어온 것이다. 순웅-인위-원정-지예로 이어지는 직계조상의 계보가 대안군 은열의 8세손으로 명시된 영고(永固) 밑에 붙어 있었다. 경주김씨 다른 족보에는 순웅 장군이 대안군의 7세손 수서(壽西) 밑에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사 연대기적으로 고찰해 볼 때 김순웅-김인위-김원정은 대안군의 7세손이나 8세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고려묘지명이라는 역사자료를 통해 고증한 바에 의하면 이 계대는 명백히 오류였다. 연대기적 고찰에 따르면 순웅장군의 나이가 은열과 비슷하거나 몇 살 많음이 분명했다. 신라삼성연원보(1934년)와 경주김씨족보(1934년)에 순웅의 아버지가 흔히 마의태자로 불리우던 일(鎰)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이 기록에 대하여 역사고증을 통해 입증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고려사가들 사이에도 고려사 기록이 한줌밖에 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이 많은데, 기록이 전무하다시피한 일(鎰)에 대한 기록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바로 며칠전 고려사절요(김종서) 태조실록편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일(鎰)일의 다른 이름인 겸용(謙用)이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신묘 14년(931년) 봄 2월 정유일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귀순할 뜻을 알려왔다.
겸용(謙用)이라고 하면, 경주김씨족보와 신라삼성연원보 뿐만 아니라 다른 족보에도 나와 있는 바, 일(鎰)의 또다른 이름이다.
태수라고 하면 흔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맡는 직위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931년, 이 당시 왕자 일(鎰=謙用)은 대략 20세 초반의 약관의 나이였는데,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무인 원년(918년)의 기록을 보면 궁예에게 귀부했던 왕건도 그의 나이 18-20세에 금성태수가 되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고려사(정인지)를 들여다 보았다.
고려사 제2권 세가2 태조 신묘 14년(931) 봄 2월 정유일에 신라 왕이 태수 겸용(謙用)을 보내 다시 왕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신해일에 왕이 신라로 갔다. 이날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 경내에 이르러 장군 선필(善弼)을 먼저 보내 신라 왕의 안부를 물었다. 신라 왕이 명령을 내려 백관들은 교외에서 왕을 영접하고 자기 사촌 동생인 상국 김유렴(金裕廉)은 성문 밖에서 왕을 영접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 자신은 정문 밖에 나와서 왕을 맞으면서 절을 하였다. 왕은 그에게 답배하였다. 신라 왕은 왼쪽으로, 왕은 오른쪽으로 궁전에 오르면서 서로 앞서기를 사양하였다. 왕이 수원으로 온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신라 왕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때 회견 석상에는 정분과 예절이 극진하였었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을 때에 신라 왕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에게서 심중한 침해를 받고 있으니 이 통분한 사정을 어찌하겠소?”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니 좌우 신하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왕도 역시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여름 5월 정축일에 왕이 신라 왕, 그의 태후,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 김유렴(金裕廉), 잡간 예문(禮文),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 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餘), 관봉(寬封),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계미일에 왕이 돌아오는데 신라 왕이 혈성(穴城)까지 나와서 전송하고 김유렴을 인질로 삼아 왕을 수종케 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태수 겸용(謙用)이라는 이름은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소생 김 일(金 鎰) 왕자의 다른 이름이 틀림없었다. 그 당시 겸용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왕자 일(鎰) 외엔 없었다. 경주김씨족보(김태훈 편저 1934년),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편저 1934) 뿐만 아니리 여러 경주김씨족보에 鎰(謙用)으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겸용(謙用)은 경순왕과 죽방부인 박씨 사이의 첫째 왕자 일(鎰)이 분명했다. 나는 일 왕자가 만일 당시 신라를 고려에 넘기고자 하는 경순왕의 뜻에 결사반대하고 있었다면 경순왕의 명을 받들어 고려 왕건에게 달려가 신라를 양국하는 뜻을 전달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삼국사기(김부식)와 삼국유사(일연, 김견명)의 기록을 근거로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걸치고 평생 초식하며 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록이었다. 왕자 일(겸용)이 김부대왕의 뜻-신라를 고려에 양위하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고려로 달려갔던 것은 그 역시 경순왕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고려로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12월 31일 1시쯤 나는 고려사와 관련하여 숱한 책을 썼던 김창현 교수의 <광종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일(鎰) 왕자의 둘째 아드님 순웅대장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광종의 제국>을 읽고 있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문장이 들어왔다.
"충주의 힘은 혜종 원년(944)에 건립한 두 개의 비석에 잘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영월 흥녕사에 건립된 징효대사의 비석으로 여기에는 군(君)인 왕요와 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등이 관여하였다. 이 중 유긍달과 그의 외손인 왕요, 왕소, 그리고 좌승 유권열은 충주 계열이다. 왕경은 명주 왕순식의 휘하 장군이고 왕렴은 왕순식의 아들이며, 김일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 김부의 아들이고, 태조를 옹립한 공신으로 태조의 임종을 지켰던 염상은 정계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었는데 해찬이라는 칭호로 보아 비석 건립 당시 해군을 지휘하였던 것 같다"(<광종의 제국>, 김창현 지음, 푸른역사 p.143-144)
뭐랄까 무엇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흥녕사 징효대사의 비문에 김일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이 정보는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김일이라고 한글로만 썼는데, 옆에다 일의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줬었으면 좋으려만 싶었다. 만일 "일"이란 이름의 한자가 중량 鎰이라면????? 급한 마음에 우선 "일"의 함자가 어떤 한자인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책의 뒷면에 수록되어 있는 참고문헌을 살펴보니 이지관 스님(전조계종총무원장)이 펴낸 <역대고승비문고려편> 눈에 띄었다. 이 책에 일의 한자가 표기되어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구하려고 교보문고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품절이었다. 2011년 새해가 밝아오는 1월 1일 아침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1월 1일 신정이라 휴관이었다. 서울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등뒤로 하고 돌아서며 나는 그 앞길의 눈을 밟았다.
인터넷으로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를 찾아보니 국보612호였고, 고려 혜종2년 944년에 건립되었으며 소재지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였다.
이 비문은 최언위가 지었다. 최언위는 최치원-최승우와 함께 삼최(三崔)로 불리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다.
고려사절요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혜종 의공대왕 갑진 원년(944년) 겨울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 최언위가 죽었다. 최언위는 신라사람으로 타고난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며 어릴 때부터 글을 잘하였다. 나이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오르고 42세에 비로소 본국에 돌아오니 집사시랑 서서원학사로 임명되었다. 뒤에 신라가 귀부하자 태조가 최언위를 타자사로 삼아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조록 명하였다. 궁원의 액호(편액에 쓰는 전각)는 모두 그가 지어 정한 것이요, 당시의 귀족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77세에 죽었으며 시호를 문영(文英)이라 하였다.
최언위는 죽기 얼마전에 징효대사 탑비문을 지었는데 이 탑비를 건립할 때 관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김창현 교수의 <광종의 제국>에 따르면, 군(君) 왕요, 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등이 이 탑비를 세우는데 관여한 명단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 단순히 시주한 명단만이 아니라 왕요와 왕소를 중심으로 그를 지지하는 정치집단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2010년 1월 3일 와이프와 아이 셋을 데리고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고려편(이지관)은 "디지털 열람"으로만 가능한 문헌인데 공교롭게도 디지털 열람실은 휴일이었다. 혹시 다른 논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징효대사탑비문"이라 검색했더니, 노용필 著 <신라고려초정치사연구>라는 책이 검색되었다. 1층 서고실에서 열람이 가능한 책이었다. 열람을 신청하고 무려 30여분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건네 받은 책을 단숨에 펼쳐보았다. 탑비에 새겨진 김일의 한자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鎰, 놀랍게도 중량 일(鎰)이었다!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944년)에 새겨진 소판(蘇判) 김 일(金 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이종욱이 <고려초 940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이란 논문에서다. 김 일(金 鎰)의 이름은 징효대사 탑비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고 경문왕12년(872) 때신라 황룡사 9층 목탑찰주본기에 송악군태수(松岳郡太守) 대나마(大奈麻) 신(臣) 김일(金鎰)이라 쓰여진 이름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성여왕4년(890) 때 낭혜화상 탑비명(郎慧和尙 塔碑銘)에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무주도독(武州都督 소판(蘇判) 일(鎰) 개왕손야(皆王孫也)라 되어 있는 이름이 있다고 한다. 이종욱은 그의 논문 <<고려초 940년대의 왕위계승전과 그 정치적 성격>에서 944년징효대사탑비가 건립될 당시 일(鎰)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생존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찰주본기는 872년에 작성되었으므로 그 당시 김일(金鎰)이란 사람의 나이를 20세로만 잡아도 944-872=72+20= 92세가 된다. 그리고 낭혜화상 탑비명이 890년에 세워졌으니 당시 일(鎰)이란 사람의 나이를 20세로만 잡아도 944-890=54+20=74세가 된다. 최소한 20세로 잡아도 나이가 92세, 72인데, 실제 나이가 이 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종욱은 944년 징효대사 탑비건립 당시 이 일(鎰)이란 인물들이 생존했을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았던 같다.
노용필은 <신라고려초기정치사연구>(2007년, 한국사학)에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872)의 김일, 낭혜화상탑비명(890년)의 김일을 징효대사탑비(944년)의 김일과 동일인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최소한 20세로 잡더라도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의 김일을 근거로 하면 자그만치 92세의 나이인데 그런 사람이 君 왕요(훗날 정종), 왕소(훗날 광종)의 정치그룹에 포함되었다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 노용필의 논문을 읽노라면 그가 경순왕의 아들 가운데 김일(金鎰)이란 이름을 쓰는 왕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고려사와 관련하여 여러 많은 저서를 썼으며 고려사가들의 논문에 자주 인용되는 김창현 교수는 2003년 <광종의 제국>에서 이 김일(金鎰)의 이름에 대하여 "김일은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 김부의 아들이라고 썼다"(<광종의 제국>, 김창현 지음, 푸른역사 p.143-144).
(君)왕요, 君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 이 이름들은 그 태조-혜종 당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징효대사 탑비에 상위 그룹에 등장하는 "왕렴"에 대해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김순식(왕순식)의 아들로 김장명(왕렴)이라는 기록되었으므로 이 탑비를 사료로 인용하는 고려사가들이 명주의 김순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려사가들이 왕경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왕경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정목부인(貞穆夫人)은 왕씨로 명주인 삼한공신 태사 삼중대광 경(景)의 여(女)였고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를 낳았다"
징효대사 탑비에 새겨진 왕경(王景)은 김순식(왕순식)의 아들 김수원이다.
김순식, 김예, 김수원, 김장명 등 그 일가 친족들은 922년 7월에 고려태조에게 항복하였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씨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김순식은 왕순식, 김예는 왕예, 김수원은 왕경, 김장명은 왕렴으로 바뀐다. 936년 9월(태조19년) 김순식, 김예, 김수원, 김장명은 신검의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일리천전투에서 2만여명의 마군(馬軍) 이끌고 나가 승리의 공신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고려초 삼한공신에 올랐으며, 왕예(김예)의 딸이 대명주원부인으로 고려태조의 제 14비가 되고, 김순식의 아들 수원(왕경)의 딸이 정목부인으로 고려태조의 제 8비가 되었다.
김선희-대광대보 김예(왕예)-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내사령 女 대명주원부인(고려태조왕건 제 14妃) 김순식(왕순식)-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김수원(왕경)-삼한벽상공신 태사 삼중대광 女 정목부인(고려태조왕건 제 8妃) 김장명(왕렴)
주원(周元)-신(身)-자사(紫絲)-동정(東靖)-영진-식희-춘용-굉보 영길-선강-강명-수웅 선희- 예- 밀 육 필 대명주원부인(태조14비)
순식-수원-정목부인(태조8비) 장명 영견-견술 영환-선환-광열 광육 경겸(사위) 강명(사위) 김순웅(사위) 원충(사위) 옥경대주(女)
탑비의 비문에 이름이 함께 올라 있는 것을 볼 때, 김일(金鎰)은 왕순식(김순식)의 아들 왕경(김수원), 왕렴(김장명)과 가까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일(鎰)의 둘째 아들 김순웅 장군이 명주의 김순식의 사촌 동생 김선환의 세째 딸과 혼인을 하게 된 연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거의 모든 고려사가들은 징효대사 탑비에 등장하는 상위 그룹의 인물들은 왕요(정종)-왕소(광종)의 정치세력들이었을 것으로 본다.
특히 탑비문에 소판 유긍달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유긍달은 충주의 호족으로 태조의 왕비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다. 왕요, 왕소의 어머니가 신명순성왕후이니 왕요, 왕소에겐 외조부다. 신명순성왕후의 딸이 바로 경순왕과 혼인을 하고 대안군 은열을 낳은 낙랑공주다. (君)왕요, 君왕소, 대승 왕경, 소판 김일, 소판 유긍달, 좌승 유권열, 좌승 왕규, 좌승 왕렴, 해찬 염상의 이름 순으로 새겨져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승 유권열은 고려태조의 모사로 명주의 김순식 일가를 태조 왕건에게로 돌려놓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던 인물이다.
고려사절요 태조 5년 7월에 이런 기록이 있다.
"명주 장군 순식이 항복하였다. 일찌기 왕이 순식이 항복하지 않음을 근심하니 시랑 권열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고 형이 아우에게 훈계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지금 승(僧, 스님)이 되어 내원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권열의 말을 따르니 순식이 드디어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순하였으므로 왕씨의 성을 내려주고 집과 토지를 주었다"
(여기에 맏아들 수원이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징효대사 탑비에 등장하는 왕경이다)
모사 유권열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해찬 염상(廉相)도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염상은 왕규, 박수문 등과 함께 태조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몇 안되는 인물이다. 또 하나 주목해 봐야 할 인물이 왕규인데 그는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왕씨성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보여지는데, 태조의 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 6비 소광주원부인, 혜종의 후광주원부인이 그의 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왕규가 왕요-왕소 형제를 해치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혜종 즉위 이후 왕위계승싸움에서 왕요, 왕소 그룹에게 밀린 왕규는 궁궐을 애워싼 왕식렴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진다.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문 작성시기를 탑비건립 1전년인 943년으로 잡는 것이 고려사학계의 정설인데, 이 당시만 해도 좌승 왕규는 혜종의 장인으로써 정치적인 세력이 강했다. 혜종과 왕요- 왕소의 형제의 왕위계승싸움은 치열했는데, 고려사가들은 한결같이 왕경(김수원), 김일(金鎰), 유긍달, 유권열, 왕렴, 염상 등을 왕요, 왕소의 정치그룹으로 본다. 그렇다면 김일은 왕요가 정종으로 등극하는데 공헌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경주김씨 족보에서 보는대로 김일(金鎰)의 다른 이름은 겸용(謙用)이다. 신라를 고려로 양위하려는 경순왕의 뜻을 태조 왕건에게 전달했던 태수 겸용(謙用)이 바로 징효대사의 탑비에 새겨진 김일(金鎰)과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결론적으로, 나는 징효대사탑비문(944년)에 새겨진 김일(金鎰)이란 이름과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14년(931년)기록된 겸용(謙用)이란 이름을 동일인(鎰=謙用)으로 보는 것이다.
2011년 1월 4일
제갈량과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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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갈량과 사마의 담론 원문보기 글쓴이: 제갈량과 사마의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분명한 증거물이 발견되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