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직 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 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시집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화살
(1978) - 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시집 '새벽 길', 1978
이 시는 1970년대 유신 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시인의 민주화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화살'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투쟁했던 사람, 즉 민주화 투쟁의 전위를 상징한다.
대동강 앞에서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면
뼛 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거처를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 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난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 새벽 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끈 솟아오른
가멸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 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속에서 500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울이 되어
그 울 안의 하루하루 길들어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인 줄도 몰랐다
절반인 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달디 달더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멜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였다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하러 여기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을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망이었더나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 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운 민족의 세상을
우르르 모여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무엇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대동강 앞에서'는 시인 고은(高銀) 선생님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이 발표된 14일 아침 숙소인 주암산초대소에서 쓴 시로
이날 밤 만찬석상에서 직접 낭독한 시이다.
[시인 고은·오영재씨의 첫 남북 합작시]
민족통신 / 2000-08-18
남의 민족시인 고은씨와 북의 계관시인 오영재씨가 지난 17일 합작으로
만든 첫 공동시 '만나고 싶었습니다'를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합작시를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손수건 백장을 가지고 있어야 할 민족입니다.
우리는 연사흘 울음바다였습니다.
엉엉 울어
멍든 가슴을 쏟아야 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만났습니다.
이제야 만나
뜨거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것을
몇 10년동안 서로 장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말로 각각 달을 노래했고
한낮의 태양을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두 시인
쓰라린 날들 모국어의 육친입니다.
젊은 날을 온통 분단의 세월로 보내면서
그 철천지원수를 갈아 엎고야 말
바람찬 깃발이기를 열망한
남의 시인입니다
북의 시인입니다
오늘밤 우리의 만남이
어찌 우리만의 것입니까
이로부터 수많은 동족들의 눈물방울 빛나는
그 핏줄 타는 만남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의 만남은 작은 씨앗입니다.
북의 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로써 통일로 나아갑니다
남의 시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통일로써 새로운 시를 씁니다
(아 집으로 초대하여 밤 이슥토록 술잔에 얼굴 붉어진 기쁨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날을 기약합시다
그날을 기약하여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야 만나고 싶었던 시와 시인이
만났습니다
만났습니다
서로 주름진 얼굴 마주 보며 밤이 깊어갑니다
2000년 8월17일 오후 8시 하얏트호텔 만찬장에서
평양에 발 디디고 서서
고은
푸른 것은 나무들만이 아니다
장차 올 그날 저녁 바다 밀물과 환희
한 아름 몰고 날아오를
불타는 새떼 꿈에 그리며
내 푸른 울음으로 왔다
1998년 여름
그렇게 평양에 와서 발 디디고 섰다
쥐가 났다
쥐가 났다
조선의 심장 평양이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런 외줄기 길 같은 인사말 한마디에도
분단생존 50년 역력하도록
내 마음속 어디 통증과 함께
나는 손님이 아니었다
일찍이 조상 대대의 말을 섬겨
목마른 세월 보낸
한갓 남쪽의 내가 무슨 회오리이리
여기 발 디디고 서기까지
세월은 얼마나 마주 벼랑같이 척박하였더냐
배가 고팠고
말은 말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보라 여기 굽이치는 대동강에는
배 한 척 띄우지 않고도
그대로 빛무리 쌓이는 아름다움이었다
흘러라 흘러
원수여야 할 그것이 삶이었던 날들
수많은 무덤으로 쌓여
차라리 흙속의 백골들마저
부끄러워야 할 오늘에야
강물은 새삼 유구하고
또 끊어졌다 이어지는 저 건너 멍울 선 메아리였다
찬 재 날리지 말자
젊은 날 콜레라균으로라도
휴전선 사슬 넘어
여기에 오고 싶은 날이 있었다
여기 와 함께 병들고 싶고
병들어
숨 거두고 싶었다
그 묻힌 데서 피어난 꽃이
숨쉬는 새 세상이고 싶었다
아니었다
남과 북은 남북이 아니라
다른 마음 송이송이 등불 같은 꽃으로 피어
서로 누구인 줄 모르도록 만나고 싶었다
대동강 능라도가
한강 여의도이고
인천항이 원산항 되어
뱃고동소리 미치게 우짖어 만나고 싶었다
아직껏 그 시절이 아닌
갈라선 날들의 연기 찬 가슴팍에
그 눈부신 하나의 빛나는 금빛 못 쾅쾅 박히지 않았다이제 와서
그것을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이라 하지 말자
어리석기보다
너무나 길어서 아픔인지 아닌지
그런 하루들이었다
오늘밤 나는 손님이 아니었다
주체탑말고는
온 불빛 다 꺼진 어둠속
오늘밤 나는 손님이 아니었다
창광거리 지나
청춘거리 지나
내일은 천리마거리
충성의 다리 건너서
동으로 외금강 내금강 간다
또 내일은 개마고원 간다
그 끝의 우리네 근본 백두 천지물에 몸 담가
그토록 나라의 절반 산야의 피 도는 얼굴들
만나야겠다 잠이 오지 않아 더 미더운 밤이었다
역사에 대하여
우리 민족
4천년 동안이나 미완성입니다
대개 역사가들은
고려에 이르러
민족 완성되었다 합니다
아닙니다
통일신라 통일 아닙니다
통일신라야말로 분단입니다
그야말로 종속이었읍니다
깊이깊이 분열이었읍니다
일제 40년
남북분단 40년
이제야말로
우리 민족 완성될 때입니다
재통일이 아니라
첫 통일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어렵습니다
이번 통일은
남북뿐 아니라
동서남북 남동동 북북서까지
구석구석 잔뿌리까지
4천년 이래 생전 처음이자
온전한 통일입니다
4천년의 미완성으로 완성합니다
추가령지구대 들국화 하나하나여
내가 그대들을 노래할 날
그날이야말로
우리 민족 크리스마스입니다
선통일이여
후통일이여
지금 잘못되면 큰 죄입니다
어린이 앞에서
애국자여 그대들은 무엇입니까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눈길
(1960) -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 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집 '피안 감성(彼岸感性)'(1960)
1958년 '현대 문학'지 11월호에 '봄밤의 말씀', '천은사운(泉隱寺韻)' 등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아 발표된 실질적 데뷔작으로서 첫 시집 '피안 감성(彼岸感性)'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과 구별하기 위하여 본디 '속(續) 눈길'이라 하였으나, '속(續)'자를 떼고 보통 '눈길'이라 불리운다.
이 시는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긴 방황과 고뇌를 가라앉히고 명상에 잠기는 체험을 노래한 시다.
이 시는 시인이 아직 민족과 역사와 만나기 전, 허무주의적인 세계에 탐닉하던 시절에 쓰여진 초기 작품이다. 허무주의는 1950년대의 폐허를 배경으로 개인적인 방황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노장(老莊)의 무위 사상 내지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허무 의식은 사사성(私事性)과 함께 초기시의 특징을 대표한다.
이 시에 설정된 상황은 '눈'과 '어둠'이 갖는 함축 의미의 해석이 다소 문제가 될 뿐 비교적 명료하다. '나'의 마음은 어둠에 잠겨 있고 세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구도(求道)를 위해 온 겨울을 방황하고 고뇌하던 시인의 영혼은 '눈길'을 바라보면서 잠시 명상에 잠긴다.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눈 내리는 풍경'은 모든 고뇌와 고통을 덮어 버리고 '설레이는 평화'가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다. 시인은 지난날 자신을 집요하게 붙들던 현상(現象)이 소멸되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움직임', 들리지 않던 '대지의 고백'이 비로소 들리는 체험을 한다. 이는 일상적 경험에 의한 감각이 아니라, '묵념' 속에 얻은 깨달음이다.
결국, 공(空)으로 정화된 외부 세계는 내면화되어 '눈'이 세상을 덮듯, 시인의 마음을 '어둠'으로 덮는다. 실로 자아와 세계의 정서적 융합인 것이다. 여기서 '어둠'은 절망이 아니라 번민과 고뇌가 정화된 무념 무상의 경지요, 암흑이라기보다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곧, 그 동안의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명상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이 작품도 그렇지만 고은 시인의 초기시는 행려 의식(行旅意識)과 허무주의와 평화의 철학이 배경을 이룬다. 이 시절 그는 뛰어난 언어 감각과 예리한 감성이 결합된 시를 주로 썼다.
프로필 :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을 추천 받아 등단
미국 하버드대학 하버드 옌칭 연구 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
1974년 한국문학 작가상
1989년 제3회 만해 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고은, 그에 대하여 :
살아 있는 시의 역사 고은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고은태(銀泰)이며, 법명은 일초(一超)이다. 군산중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휴학했으며 1952년 입산하여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여 년 동안 수선(修禪)과 방랑생활을 하다가 1962년 환속했다.
1958년 시 '폐결핵'을 최초로 발표했으며, '봄밤의 말씀'으로 <현대시>의 추천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한 이래 <피안감성>(1960),<해변의 운문집>(1964), <신 언어의 마을>(1967)을 위시하여 많은 시집을 발간하였다. 1956년 <불교신문>을 창간, 초대 주필을 지냈으며, <반야바라밀다심경 해의>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에 대한 절망을 노래하면서 허무의 정서에서 젖어 있는 시적 자아의 형상에는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보다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시적 언어는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감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서의 편린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시세계는 1970년대 중반에 발간된 <문의마을에 가서>(1974), <입산>(1977), <새벽길>(1978) 등을 통해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시적 자아는 자기혐오나 허무감을 떨쳐버리고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과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이러한 자기 인식을 통해 시인은 정의롭지 못한 현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 의지를 노래한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유 실천 문인협의회 회장, 민족 문학 작가회의 회장, 민족예술인 총 연합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74년 한국문학 작가상, 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99년 제회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에 대한 평가 :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온몸으로 관통해 온 고은 시인은 최근 티베트 지역을 떠돌았던 경험을 담은 기행 시집 <히말라야 시편>에서 다음처럼 고백한 바 있다. "생각컨대 나를 키운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길이었다". 그렇다. 그는 미군 항만운수과 검수원, 엿장수, 중학교 교사, 거지, 승려, 시인, 정치범, 교환교수 등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하고 굴곡 많은 '황홀한 방랑길'을 그야말로 꿋꿋하게 헤쳐 온 시인이다. 이처럼 고은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녹록치 않은 삶의 편력을 지닌 시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그의 전무후무한 필력은 실로 가공할 만하다. 만년필 촉이 닳아서 새 만년필로 바꾸기를 수 차례, 그 동안 그가 낸 시집과 에세이집들만 대강 따져 봐도 줄잡아 100여 권이 넘어선다. 하루에 원고지 백 장씩을 먹어 치우는 그의 끝없는 문학적 열정에 우리는 주눅이 들어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법이 없다. 그는 문학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폐소에 들어가 숨어 버리는 일을 가장 부도덕한 경우로 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문학은 저 혼자의 밀실에서 나오는 생산품이지만 그것의 진실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민중적 고난과 만나는 전장(戰場)에 동참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진창에 뛰어 들어 뒹굴며 사람과 현실의 면면을 철저하게 내면화 ·자기화 ·일반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시인이란 울기 위해서 태어났고 울부짖고 괴로워하기 위해서 태어난 꽃이며 고난의 꽃이다".
시력 40년! 폐허와 초토의 비극적 현실이 비유적으로 투영된 50 ·60년대의 허무주의적 시풍들을 통과해, 70·80년대 민중적 삶과 민주화 운동에 토대를 둔 현실 참여시를 거쳐, 최근 통일 시대의 문학으로 넘어오는 그의 지난한 문학적 항적(航跡)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우리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의 개인적 시사는 20세시 한국 현대사의 곡절과 불운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이다. 그는 요즈음 그가 그토록 바라고 투쟁해 왔던 민족 문학의 진정성이 확립될 수 있는 '통일 이후의 문학' 풍경을 그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근자에 발표한 시집 <남과 북>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어쨌든, 그는 문학에 미쳐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아무튼 나는 20대, 30대의 시대나 오늘이나 문학에 미쳐 있는 상태는 같지요. 아니 날이 갈수록 문학에 관한 한 나는 동경의 사망이 없는 상태지요. 이 점에서는 나는 불사약(不死藥)을 먹었지요.” (류신/문학평론가)
고은 시의 밑바탕 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시의 원천을 나는 천진난만성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시대와 역사와 이웃과 시와 만나는 방식의 치열함에서 온다. 그는 삼라만상과 강렬하게 만난다 --- 인당수 깊은 물에 치마폭 뒤집어 쓰고 몸 던질 만큼의 강도와 깊이와 천진난만함이 있는 만남의 결실인 그의 시는 우리의 삶을, 생명을 해방시킨다.
- 김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