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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막 11:1-10)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늘나라 야구>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늙어가자 하늘나라에서도 야구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먼저 죽은 친구가 가서 확인을 하고 알려주기로 했다. 한 친구가
먼저 한국시리즈가 끝난 날 밤 행복하게 죽었다. 며칠 후 밤에 죽었던 친구
가 다른 친구에게 나타났다.
"어! 자네 정말 왔구먼!"
"그려…"
"그래, 하늘나라에서도 야구를 하던가?"
"그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뭘 먼저 듣고 싶나?"
"좋은 소식부터 말해주게나"
"응, 하늘나라에서도 야구를 한다네"
"하야~ 멋지구만! 그런데, 나쁜 소식은 뭔가?"
그러자 죽은 친구가 대답했다.
"자네가… 내일 밤 선발투수라네!"
(본문 이야기)
예수님의 일생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여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료하신 기록이 여러번 나옵니다.
그 중에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눅 13:33)
이는 예수께서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두고 나타낸 비장한 그의 결심을 나타내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실려는 예수님의 굳은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심으로 오실 선지자로 예언된 자신의 십 자가 최후를 예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죽음을 향한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 예루살렘 입성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Ⅰ. 왕의 입성이었습니다(눅 19:28-34)
예수께서 예루살렘 근교인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약 2㎞ 거리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유하신 다음 날 아침입니다. 제자 중 둘을 시켜 맞은 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아마 벳바게 일 것 같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누가 묻기를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어미 나귀와 함께 묶여 있는 새끼 나귀를 보았습니다(마 21:2). 결국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 는 예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곧 순종하였고,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를 풀어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나귀 새끼 등에 타셨습니다.
전지하신 주님은 자기가 입성할 때 타고 가실 나귀 새끼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주의 뜻에 순종하도록 이미 섭리하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 자신의 초자연적 권능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타신 나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제물이 될 정결하고 순결한 짐승이었습니다. 온전하여 흠이 없는 제물이었습니다(민 19:1-2, 신 21:3, 삼상 6:7).
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은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스가랴의 예언에서 그가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왕의 입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공의를 행하시는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슥 9:9).
②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슥 9:9).
③ 그리고 겸손한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슥 9:9).
④ 그리고 평화의 왕이라 고 하였습니다(슥 9:10).
⑤ 그 정권 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는 우주적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슥 9:10)
⑥ 물론 영원한 왕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정권은 다 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슥 9:10).
주님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최후 입성을 하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왕이심을 알려 주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는 자연계의 왕(통치주)이었습니다. 그는 만물의 왕이었습니다(마 28:18). 은혜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예루살렘 입성은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적 왕이심을 선포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왕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또한 주가 쓰시겠다 하면 다 들려야 합니다.
Ⅱ. 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입성이었습니다(눅 19:35-40)
<(호산나) 여호와여 구하오니 이제 구원하소서>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 쳐놓고, 길에도 펼쳐 놓았습니다(눅 19:35-36). 이것은 왕께 대한 최대의 존경과 축하를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왕하 9:13).
뿐 아니라 마태는 무리의 대부분 이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하였습니다(마 21:8). 그리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여기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의미합니다. 이것도 군왕의 입성식에 축하를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온 무리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환호는 저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능한 일을 본데서 기인되었습니다.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나(요 12:1), 여리고 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친 일 (막 10:46) 등을 본 저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신 예수께서 지금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 길을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마침내 저 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터지고, 저들 의 입술에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라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 나 하더라」(마 21:9)고 하였습니다. 이때 온 예루살렘성은 소동하면서 이르기를 「이는 누구뇨」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답하기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답하였습니다.
이 열광적인 무리들의 환영에 바리새인들은 반대하고 예수께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환영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하시다는 주님의 주장이십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막는 날에는 돌들이라도 일어서서 나를 환영해야 할 것이라는 주님의 단호한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으실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인류를 구원하려 입성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여 구원받아야 합니다.
성도님들만 아니라 성도님들의 식구들도 모두 예수님을 핍박하시면 안됩니다. 모두환영하여 구원 받아야합니다.
Ⅲ. 멸망받을 자들에게는 슬픈 눈물의 입성이었습니다(눅 19:41-44)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입성은 베다니에서 시작되어 감람산 길을 넘어서 내려오는 길 편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 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전경이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은성을 보고 우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시는 중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탄하신 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 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 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바 있습니다.
그러시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마지막으로 보시는 이 순간 울어버 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약 성경에 그가 우신 장면 의 기록이 세번 나옵니다.
친구 나 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께서 눈 물을 흘리시더라」고 한 사실입니 다. 여기 눈물은 다크루오( )입 니다. 이른바 동정의 눈물이라고 합니다(요11:35). 조용히 소리없이 흘 리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눈물 에크라우센( )은 클라이오( )에서 온 단어로, 단순한 동정 의 눈물이 아니라 갑자기 복받쳐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감정(소리)까지 섞어서 눈물과 함께 밖으로 나타내는 경우의 눈물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나인성 과부가 죽은 자식의 관을 붙잡고 울 때(눅 7:13),
예수께 나아와 그 머리에 기름을 붓 고 있던 여인이 예수 앞에 눈물을 흘릴 때(눅 7:38),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만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고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눅 8:52). 이런 경우를 종합 해 보면, 단순히 그리고 조용히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애통하고, 비통하면서 토하는 애절한 눈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우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 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 )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한 경우입니다.
큰 소리를 발하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흘리시던 최후의 눈물입니다.
그가 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을까?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시고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 한 일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는 평화에 관한 일이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평화에 관한 일이란 바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에 관한 구원의 복음을 거절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은 예수께서 앞서 보 낸 선지자들을 돌로 쳐죽이고, 마지막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까지를 죽이는 패역을 범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인 병아리를 그의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주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려고 하였으나 저들이 주님께 오기를 거절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멸망의 날이 오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루살렘 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로마 장군 디도 (Titus)가 3일 만에 급히 토성을 쌓고, 그 성을 포위할 사실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때마침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모인 일 백만명이 훨씬 넘는 유대인들이 성안에 갇혀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성을 이용하여 예루살렘 안으로 침입한 로마의 군대들은 아이들을 메어치며, 사람들을 학살하였고, 성전과 성곽을 위시하여 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 렘 성전의 모습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이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44). 여기 「권고 받는 날」이란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곧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는데, 저들이 그 예수를 죽여버린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요 1:11).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고, 예수께서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한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우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예수님 돌아가신 지 40년 이후에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은 영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향락과 타락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슬퍼하는 눈물을 흘려랴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범죄한 인류를 구속하시 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 중에 사건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하늘과 땅과 온 인류가 환영하고 찬미한 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이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잠잠하다고 하면, 길거리에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질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예루살렘의 입성은 이방의 개선 장군들이 군마를 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피묻은 전리품을 싣고,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무리들의 환호 속에 입성하는 그런 입성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타시고, 소박한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입성이었습니다.
찬란한 기계 문명의 드높은 만세 소리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눈 에 비친 나사렛 선지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습니까?
※ 그러나 성경은 예수, 예루살렘 최후의 입성을 영광의 입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이 왕의 입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세상의 왕관을 쓰는 보좌에 오르실 입성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한 십자가 희생의 입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 값인 사망 문제를 해결하는 대속의 입성이야말로 영광이 아닌가?
사망을 정복하러 가는 입성이니 영광이 아닌가?
※ 더욱이 그의 입성은 최후 승리를 내다보는 영광의 입성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이후에 제3일 에 다시 살아날 것을 내다보고 가는 최후 승리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숙적인 죽음의 문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므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길이었습니다.
승리의 영광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는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요 12:23-24)?
오늘 교회는 예수님을 교회 한가운데 모셔야 합니다.
나귀의 등이 아닌 우리들의 등에 모셔야 합니다.
모든 좋은 겉옷을 벗어 예수의 발 앞에 깔아야합니다.
종려나무가 아닌 십자가를 높이 들어 흔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호산나! 예수 만세를 불러야 합니다. 주께서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를 보시고 기뻐하고 웃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 서 사랑의 눈물을 흘리시면서 축복을 하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영광을 나타낼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왕으로 섬기고, 따르는 교회여야 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의 겸손을 본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인류 구원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교회여야 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