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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20100314 주일 낮 예배 설교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딛 1:3
하나님 사랑합니다.
<유 머>"네, 우선 죽어야 합니다!!!"
교회학교 주일 아침 예배시간에
교육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물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러자
한 어린이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손든 어린이 말해 보세요!”라고 하였습니다.
---
어린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죽어야 갑니다!!!"
<본 문>
(딛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나무아미타불 [南無阿彌陀佛]
<국어사전>
[Ⅰ][명사]
1 <불교>아미타불에 돌아가 의지함을 이르는 말. ≒나무아미타.
2 공들인 일이 헛일이 됨을 이르는 말.
[Ⅱ][감탄사]<불교>아미타불에 돌아가 의지한다.
<백과사전>
요약 : 아미타불에 귀의(歸依)한다는 의미.
나무 [南無] : [명사]<불교>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믿고 받들며 순종함을 이르는 말. 부처나 보살들의 이름 앞에 붙인다.
아미타불 :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로서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살며 인간의 구제에 진력하는 불타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정토종(淨土宗)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진심으로 염(念)하면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한다고 가르친다.
무량수불 [無量壽佛] [명사]<불교> ‘아미타불’을 달리 이르는 말. 수명이 한없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무량광불 無量光佛 [명사]<불교>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 십이광불의 하나로, 부처의 광명의 덕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중생에게 한없는 이익을 준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서방정토 [西方淨土] <불교> =서방 극락.
정토종 [淨土宗] [명사]<불교> 정토교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종파. 정토 삼부경과 세친(世親)의 왕생론을 주요 경론(經論)으로 한다. 우리나라 불교 전체에 깊이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 ≒정종(淨...
정토 [淨土]
[명사]<불교>
1 부처나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 ≒각원(覺苑)·불계(佛界)·정계(淨界)·정방(淨邦)·정찰(淨刹)·청정 세계.
2 =정토종.
염 [念] [명사]
1 {주로 관형어의 수식을 받아}무엇을 하려고 하는 생각이나 마음.
2 <불교>주관인 마음이 객관인 대경(對境)을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아니하는 정신.
왕생 [往生] [명사]<불교> 목숨이 다하여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왕생하다
극락왕생 [極樂往生] [명사]<불교> 죽어서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남. ≒안양왕생·왕생극락·정토왕생.
이것을 6자명호(六字名號)라 하며 기본적으로는 중생의 신심(信心)을 표현한 것이나, 아미타불의 자비심도 담겨 있어 소위 기법일체(機法一體:중생의 근기와 자비로운 불법의 조화)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국어사전>
다비식 [茶毘式] [명사]<불교> 시체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의식.
극락 [極樂] [명사]
1 더없이 안락해서 아무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장소.
2 <불교>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 ...
<성철 스님의 열반 송>
인간의 공로 사상 중에서 최고로 잘 정립된 사상이 불교입니다. 일전에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성철 스님을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한 마디로 대단한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결혼 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십육 년 동안 솔잎 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능한 얘긴지 모르겠는데 팔 년 동안 장좌불와,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잤다고 합니다. 그는 이런 식의 수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행을 쌓고도 심령과 양심에 평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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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의 마지막 유언
2010.02.08 19:07 | 생각, 생각들 | joyanghk
http://kr.blog.yahoo.com/joyanghk/1515
초인적인 극기 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어
성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성철스님.
그는 그의 마지막 임종 직전에
"한평생 남녀 무리를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속인 죄가 너무 커 지옥에 떨어진다"고
회한으로 몸부림치며 천추의 한을 토로했습니다.
과연 그가 도달한 깨달음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성철스님의 열반송. - (조선일보 1993.11.15.15면)
(동아일보 1993.11.5. 31면)(경향신문 1993.11.5. 9면)
(중앙일보 1993.11.5. 23면)(도서출판 "삶과 꿈" 류범상)
생평기광 남녀군 - 일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미천과업 과수미 -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활염아비 한만단 -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구나
일륜토홈 괘벽산 – 한 덩이 붉을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성철스님은 조계종 종정으로 있던 1987년 "부처님 오신 날" 법어에서
"사단(하나님을 부정하는 귀신의 우두머리)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조선일보 - 1987. 4. 23 7면 경향신문 - 1987. 4.23 9면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사서실 [큰빛총서 1] - 서울사시연 1994년 p.56-59
운명 전 지옥의 석가를 보고 쓴 성철의 시
[성철의 마지막 운명 전 참 깨달음의 시 - 최후의 말]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녀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칼을 휘두르니 만 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알든지 모르든지 삼신실명을 면치 못하리니 말해 보거라
이 무슨 도리인가!
작약꽃에 보살의 얼굴이 열리고
종녀 앞에 夜叉 야차(마귀 이름)의 머리가 나타난다.
목 위의 무쇠간은 무게가 일곱 근이요,
발밑의 지옥은 괴로움이 끝없도다.
석가와 미차는 뜨거운 구리 쇳물을 마시고
가섬과 아난은 무쇠를 먹는다.
몸이 날려 백옥 난간을 쳐부수고
손을 휘둘러 황금 줄을 끊어버린다.
산이 우뚝우뚝 솟음이여
물을 느릿느릿 흐르며 잣나무 빽빽함이여
바람이 씽씽 분다.
사나운 용이 힘차게 나니
푸른 바다가 넓고 사자가 고함지르니
조각 달이 높이 솟았네 알겠느냐?
1 2 3 4 5 6 7 이여 두견새 우는 곳에
꽃이 어지럽게 흩어졌네 억!"
그리고는 "억-!" 소리와 함께 운명하였습니다.
위의 시는 성철 스님이 운명 전에 시사저널 담당자가 취재한 것이며,
이 시는 추상적인 시가 아니라
운명 전 영안이 열려서 영계를 직접 보면서
지옥의 석가와 달마와 가섬과 아난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시로 묘사한 것입니다.
영계에서 직접 보지 않고는
자기가 평생 섬겼던 석가를 도적이라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극락은 천국의 낙원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며
석가와 달마도 극락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성철 스님이 영계 속에서 직접 본 것이지요.
구례 화엄사에 보관 중인
불경 나마다경(38:8)에 보면
다음과 같은 석가모니의 예언적인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何時 爺蘇來 吾道 無油之 燈也
하시 야소래 오도 무유지 등야
이 말은 놀랍게도
蘇來 (야소래) "언젠가 예수(爺蘇)께서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이 쓸모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 참고 : (중국에서는 예수를 야소(爺蘇)로 표현)
석가가 입멸하기 전 최후로 한 설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석가모니는 마지막에는 자신이 깨닫고
가르쳐왔던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부정하고 갔습니다.
딸 불필 스님에게 남긴 유언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희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내가 잘못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스님이 전도해 예수를 믿고 나니... >
나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 집안은 당시 다들 그랬듯이 유교와 불교를 두루두루 믿었다. 집안이 좀 부유한 편인데다가 여자아이가 나 하나여서 귀여움을 받으며 별 고생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세에 이삼십 리 떨어진 근방 마을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당시 아직 학생이어서 나는 시부모님과 시골에 살면서 남편과는 떨어져 생활하였고 남편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직업군인이 되었기 때문에 떨어져 사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시집은 퍽 넉넉한 편이었지만 나는 밤낮으로 집안일에 들일까지 해야 했고 밤으로는 바느질에, 베 짜고, 방아질을 하는 등 힘든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 마을 보통의 여자들이 모두 하는 일이었지만 한 번도 궂은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너무나 힘든 일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26살에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병원에서는 원인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을 어른들이 초학이라고도 하고 학질이라고도 부르는 말라리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보통은 그 병을 다들 귀신 들린 병이라고 했다. 하루는 죽을 것처럼 앓고 하루는 밥 먹고 일 할만큼 괜찮고, 한나절은 떨고 한나절은 괜찮고 하는 증상이 정말 귀신 들린 것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나는 그 병을 육 년간 앓았는데 나중에는 몸이 바짝 마르고 사람 구실을 못 할 만큼 형편없어졌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시아버님께 "친정에 가서 병을 고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버님 진짓상도 못 봐 드리고 이래 같고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시아버님은 "야야, 니가 벽을 지고 앉았어도 괜찮타. 저 아들은 다 우얄끼고. 내 니 필요한 거 다 해 줄꼬마"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아버님은 나를 위해 점치고, 굿하고 하는 갖은 미신 숭배를 하셨고, 뱃속에 들어있던 송아지며, 염소, 사슴 등을 구해 먹이셨다. 그러나 내 병은 나아지질 않았다.
결국 나는 시아버님이 낚시 가신 틈을 타서 편지 한 장을 써놓고 밑의 아이들 둘만 데리고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서는 나에게 내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다가 죽은 시누이 귀신이 붙었든지, 폐병일 거라며 쌀 한 가마니와 함께 절에 데려다 놓으셨다. 아이들에게 전염될 것을 걱정하신 것이다. 절에서 49일 동안을 음식을 해 놓고 절을 하고 불경을 외워도 내 병은 나을 줄을 모르고 오히려 더 심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절 뒤편에 있는 바위에 앉아 아주 어렸을 때 빵 얻어먹을 요량으로 친구를 따라 가서 배운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찬송가를 부르게 되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지나가던 스님이 듣고는 대뜸 "아니, 여보, 김 선생 예수 믿소"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요, 저 예수 안 믿어요. 근데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귀신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저 예수 믿으면 좋겠어요. 다들 저더러 내게 붙은 귀신을 모시고 점쟁이나 무당이 돼야 병이 낫는다는데 전 죽어도 싫어요."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럼 한 번 믿어보소. 난 암만해도 안되니..."
이미 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본 뒤라 나를 포기하신 것 같았다.
나는 휴가 나온 남편에게 부탁하여 집안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었던 당숙모가 계신 김천으로 갔다. 내가 가자 당숙모는 "시집오니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니 너라도 이래 믿는다니 좋다. 잘 왔다" 하시며 기껍게 내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나는 당숙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사님도 보기 싫고, 말씀도 듣기 싫고, 그저 졸음만 올 뿐이었다. "야야, 저 말씀 좀 들어봐라." 하는 당숙모의 채근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좀 지났을 때 당숙모는 나를 신유 은사가 있다는 어떤 분의 부흥회에 보내셨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밀려 교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 하고 일주일을 교회 밖에서만 맴돌았다. 대구에서 다음 집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도 부흥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를 쓰고 교회로 들어가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나는 앉은뱅이며 문둥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부흥회가 다 끝나도록 나는 기도도 받지 못하고 낫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부흥회가 끝난 후 부흥사님이 심방 가신 집을 찾아가서야 그분의 기도도 받고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가 있었다.
이후 세 번째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나는 내 병을 고침받게 되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린 후 그분이 하신 말씀은 "집에 가거든 가까운 교회에 가서 열심히 예수 믿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시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후로 그전까지 겪었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나는 쉽사리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없고 갖은 미신이 있는 곳으로 가기가 무서웠다. 한참을 더 당숙모 집에 머물면서 교회도 다니고 여러 집회도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기도 중에 영화필름을 돌리듯 지난날의 잘못을 보이시며 회개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 모든 삶의 중심이 예수가 되었고, 그 이름으로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어...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가자 시댁에서는 외며느리가 살아왔다며 반가이 맞아 주셨다. 내가 집에 처음 한 일은 구석구석에 있는 귀신 단지와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다시 아플 거라는 내 말에 시아버님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삼십 리나 떨어진 교회에 나가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너무 멀어 수요예배나 저녁예배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는데 그럴 때면 내 몸은 마치 불덩어리에 맞은 듯 뜨거워졌다. 나는 뒤뜰 뽕나무밭에 호롱불을 옮겨 놓고 혼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 것을 한동안 하니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서른 명 가까운 아이들이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 공책에 찬송가를 써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성경도 읽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그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예배드리던 어느 날 시아버님은 지게 작대기를 들고 모여있는 아이들을 쫓으시며 "예수 믿을라면 혼자나 믿지 와 니는 아들은 데리고 뽕나무밭은 다 망치고 이기 무슨 짓이야. 에이. 이놈들 어여 집에 가 어여" 하시며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방천으로, 뒷산으로 여러 번 예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예배처를 갖고 싶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때는 마을 청년 일곱 명이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 예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산에서 흙을 가져다가 물을 부으면 청년들이 그것을 이겨 벽돌을 찍어냈다. 꼬박 보름밤을 일하자 우리는 육백 장의 벽돌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벽을 올렸다. 나는 집집마다 돌며 볏짚 두 단씩을 얻어다 지붕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바닥도 가마니고, 문도 가마니를 단 것에 불과했지만 예배처를 얻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예수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하며 쑥덕거렸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내가 집안 살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또 예수 믿지 않으면 아플 거라 하니 어쩌지를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때였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고 못 갈 때면 예배처에서 예배드리는 생활이 계속되던 중에 전방에 있던 남편이 대구 본부중대장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대구로 함께 가자고 하였다.
"목사님도 안 계시는데 서른 명이나 되는 아들은 어쩌고 내가 대구로 갑니까. 난 안 갈랍니다." 하였다.
그 무엇보다 내겐 예수님이 중요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목사님께서 우리 마을 예배처에 와서 예배를 드려주신다는 말을 듣고서야 남편을 따라갈 수 있었다.
예수 마을, 예수꾼들 그렇게 그곳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나 그곳에 가보니 번듯한 교회가 세워지고 시무하시는 전도사님도 계셨다. 게다가 백 명이 넘는 성도도 생겼다. 이후로도 전도가 계속되어 온 마을이 예수 마을이 되어갔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옷을 모아다 가져다주면 예수 옮는다며 내가 돌아가자마자 새 것 같은 옷들을 서슴없이 태워 버리던 올케도 권사가 되었다. 시댁 식구들도 모두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처음 나와 함께 예배처를 만들던 그 일곱 명의 청년들은 지금 목사로, 전도사로, 장로로 모두들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고, 그곳도 열심 있는 지역으로 소문이 자자하다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 한평생 나와 함께 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 남지 않은 내 남은 시간 속에서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욕 전도>
옛날 마산에 사는 어느 집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마당에 물을 떠 놓고 빌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여인이 우상숭배라며 욕을 하고 지나갔다.
화가 나서 따지려고 뒤쫓았는데 이 여성은 이 골목 저 골목을 지나 ‘호주 선교부’라는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갔더니 문제의 여성은 보이지 않고 어떤 서양인이 서투른 한국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었다. 홧김에 들었으나 호기심이 생겼고, 이내 닫힌 마음도 열렸다.
어머니는 훗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딸이 돼 욕을 한 여성과 함께 다니는 전도 부인이 됐다. 그의 아들은 박형규 목사로, 교회를 섬기며 우리나라 민주화와 인권, 평화 통일을 위해 크게 헌신하는 분이다.
예수의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이나 주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 23:24)라며 심한 욕을 하셨다. 기독교가 욕을 먹는 시대다.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욕도 많이 하고 세상에 대한 맞불 욕도 하는 ‘충격요법 전도’는 어떨까.
<그때 전도했으면 그 자매가 자살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교회 한 집사님이 얼마 전에 울면서 한 고백이다.
옆집 자매를 전부터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총력전도 주간을 맞이해 복음을 전하며 교회로 초청했다.
놀랍게도 그 자매는 “교회에 꼭 갈게요”라며 흔쾌히 응했다.
그런데 다음 주에 함께 가기로 했던 집사님이 갑자기 집안에 큰일이 생겨 지방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너무나도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화랑제 때 불꽃놀이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만 아파트 옥상에서 그 자매가 뛰어내려 자살을 한 것이다.
그 집사님은 “지난주에 약속을 지켰더라면 그 자매를 살릴 수 있었는데 집안일 때문에 불쌍한 영혼을 구원할 기회를 놓쳤어요”라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 많은 성도들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결 론>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라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3)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인 2명을 전도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병이어 교회 성도들은 모두 전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