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군파 계대 천오(舛誤: 잘못) 주장의 오류(誤謬)
이 글은 2016년 12월 15일 경주이씨중앙화수회 대회의실에서 개최한 월성군파(月城君派) 계대 천오 주장에 대한 전국 각 문중 대표자 공청회에서 발표된 글로서 경주이씨 종보 제191호(2007. 09. 14. 금요일) 7면 및 제192호(2007. 10. 15. 월요일) 경주이씨 본종 분파도 자료 오류에 대한 기사를 바로잡고자 기고(寄稿) 합니다.
[서론]
옛 말에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각 가정마다 족보가 있는 것은 나라에는 국사가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국가에 사기(史記)가 없다면 어찌 민족의 역사를 알 것이며 가정마다 족보가 없다면 어찌 조상 대대로의 행적(行蹟)과 일가 간 위 아래의 파생 서열을 알 것이며 또한 우리는 보첩의 서열에 따라 숭조 돈목 하는 도(道)와 예(禮)를 같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경주이씨 족보는 1684년 갑자보 간행으로부터 이미 333년간 보존되어 왔고 앞으로 천년 2천년 긴 세월 동안 후손들에게 이어져갈 귀한 씨족 실록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족보는 사실에 입각해서 수록해야 하므로 “이신전신(以身傳身). 이의전의(以疑傳疑)”로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즉 고증이 되어 믿을 만한 것은 그대로 수록하고 의심이 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수록해야지 후손들이 함부로 개보(改譜) 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아울러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월성군파 천오(舛誤) 주장과 관련하여 어느 특정 문중을 폄하(貶下) 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며 오직 조상의 후손 된 자로서 혈연의 정은 한결 같고 문중 간의 연대는 무궁하다는 의미에서 사심 없이 객관적(客觀的)인 의견을 개진하는 바입니다.
[월성군파 천오 주장 측의 요점]
경주이씨 월성군파 천오 주장 측에 의하면 오문의 국사학계 이현희(李炫熙/전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및 이상식(李相寔/전 전남대 사학과 교수) 양 교수의 논리를 인용(引用)하여 선대 계대 중 중시조인 소판공(蘇判公)을 1世로하여 12世로 되어있는 시랑공(侍郞公) 휘 신우(申佑) 선조의 계대가 1748년(英祖 24)에 간행된 오문의 무진보(戊辰譜) 발간시 5世나 아래로 잘못 등재하였다고 주장하나 1745년(영조 21)에 대사간과 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국당공 후 28世 삼호당(三湖堂) 중협『重協,1681(숙종 7)~?』공께서 무진보 서문에 이르기를 연표(年表)나 종표(宗表)의 미비점을 보충(補充)하여 완전한 족보 16권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21世 월성군(月城君) 지수(之秀) 공의 6대손인 조선초기의 문신학자 용재공(慵齋公/諱 宗準,1454~1499/퇴계 이황의 숙부인 松齋 李堣는 용재공의 妹弟이기도 함)의 후손 이창욱(李昌郁) 공께서 용재 공의 유문(遺文)을 모아 1824년(순조 24)에 편집 간행한 용재 유고(慵齋遺稿) 초간본과 1936년에 간행된 만오일고(晩悟逸稿/諱>相鉉,1817~1895/용재공 12대손) 세계도에도 신우공은 12世로 되어있는바 이같이 월성군의 저명(著名)한 학자 후손(學者後孫) 분들이 간행한 유고(遺稿) 마저도 부정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월성군파의 천오 주장은 확실한 고정 없이 불합리한 논리의 모순이며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천오를 주장하는 측의 이유
중시조(中始祖)로부터 17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인 이제현(李齊賢)과 21世 월성군파(月城君派)의 파조인 이지수(李之秀)의 아들 정렬공(貞烈公) 규(揆)가 익재공과 동(同) 시대에 활동한 동연배(同年輩. 나이가 같은 또래)이니 익재공은 17世이고 정열공 『규(揆) 』은 22世로 되어있는 것은 맞지 않으니 월성군 이지수(李之秀)를 익재공 보다 높은 계대인 16世가 맞을 것임으로 5世를 상향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천오주장에 대한 반론
동시대에 살았고 연배가 비슷하다고 같은 계대(동 항렬)일 것이라는 주장은 한편 일리기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논리는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오문에 생존하는 중앙화수회에 출입하시는 일가 여러분들의 항렬을 살펴보면 37世종(鍾) 자 항렬에서 44世동(東)자 항렬까지 8世가 함께 지내고 있으며, 한마을 집성촌에서 세거 하는 전라남도 영암 망호리 일가 분들의 예(例)에서도 38世우(雨)자 항렬에서부터 43世준(濬/濟)자 항렬까지 6世가 현재 함께 세거 하며, 동년배로서 6世항렬 차이 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한 마을에 사는 일가 분들의 동년배 항렬 차이도 이를진대 수백여 년의 세월 차이는 10여世이상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천오를 주장하는 측의 이유
장파(長派) 보다는 지파(支派)의 계대(항렬)가 높을진대 오히려 지파(支派)인 월성군파의 계대(항렬)가 5世나 낮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 천오주장에 대한 반론
위의 논리는 일반적으로 한가정의 형제들 중 장자(長子)가 먼저 태어나 혼인함으로 계대가 번성하여 항렬이 낮고 아우인 지파 집은 장자보다 혼인을 늦게 하니 항렬이 높다는 논리지만 이것은 한 가정의 단편적인 논리일 뿐, 일 예(例)로 장파인 형이 아우인 동생보다 혼인은 먼저 했지만 첫아들이 전란, 또는 병사(病死)로 단명했다거나 연이은 딸 다산 후 막둥이 아들을 두었다거나 또는 아들을 득남하질 못해 양자를 입적하였을 경우 등은 당연히 지파인 동생 집보다 형인 장파 집이 오히려 항렬이 높을 것임으로 오늘날 같이 평화적인 민주사회가 아닌 고려와 조선시대의 잦은 전란(戰亂)과 빈곤(貧困) 사회의 백 년. 수백 년의 후손 벌열 관계는 각자 다를 것임으로 위의 논거는 잘못입니다.
셋째 천오를 주장하는 측의 이유
1781년에 간행된 원주이씨 신축보(原州李氏譜)에 오문의 중시조 손자이신 3世 휘(諱) 금서(金書)의 여서(女壻: 사위) 이현집(李賢執)이 시랑공(侍郞公) 신우(申佑) 공의 처 증조부(妻曾祖父)이기에 12世인 신우(申佑) 공은 7世인 문하시중 공 휘 칭(偁)과 동시대일 것이며 동항(同行) 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천오주장에 대한 반론
오문의 3世 휘(諱) 금서(金書) 공은 신라 말 때 중원 태수(中原太守/청주지역의 수장)를 역임하다. 935년(신라 경순왕 8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로 귀순할 때 함께 귀순하여,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삼한 공신(三韓功臣)에 책 록 되신 분으로 1684년에 간행된 오문의 갑자보에 3世 휘(諱) 금서(金書) 공의 여서(女壻)로 이현집(李賢執)이란 이름만 기록되었을 뿐 그의 관향이나 여타 기록정보가 없음으로 이는 동명 2인일 수도 있는데 오문의 갑자보 보다 후에 간행된 타성의 원주이씨 족보 기록을 인용하는 것은 9세기 경의 고려 초기 일임으로 신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주이씨는 선조의 기록을 따를 뿐 여타 주장은 따르지 않는 것이 정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문의 1684년 갑자 보에는 월성군 지수(之秀) 공의 상계가 확실치 않아 별록(別錄) 1권 成페이지에 지수(之秀) 공을 1世로 하여 수록해 두었었고 1748년 무진보 간행시 월성군의 상계를 찾아 11세 생원공 현복(玄福)의 차자로 입적되었습니다.
그리고 족보는 한 씨족의 혈통 관계를 밝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소 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씨족 사료인데 12世 신우(申佑) 공을 6世 주복(周福)의 아우인 제정(齊廷) 공의 아들로 5대나 상향 개보(改譜) 하려는 것은 지금 까지 제정(齊廷) 공은 수백 년간 무후(无後)한 집인데 신우공(申佑公)이 제정(齊廷) 공의 아들이란 고증(考證)도 없이 그저 무후(无後)한 집에 붙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탁보(濁譜)가 따로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위사 족보(僞史族譜)가 되는 것임으로.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론
생존(生存)한 자손(子孫)이야 자신에 관한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선조들이 기록한 족보의 계대를 후손(後孫)이 임의(任意)로 올렸다 내렸다 옮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는 숭조 보본(崇祖報本)의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사도(邪道=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한 도리)이기 때문에 우리 경주 이씨는(慶州李氏門中) 엄중(嚴重)히 금(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위의 천오주장대로라면 지금까지 수백 년간 선대가 간행한 족보의 대동보와 파보들은 물론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귤산(橘山) 유원(李裕) 선조가 1868년(高完 5年) 간행한 경주이씨금석록, 1914년에 간행한 월성이씨세장보(月城李氏世藏譜)는 경주표암산수도를 포함하여 전국각지에 산재한 월성이문출신(月城李門出身)의 명현50人의 산도(山圖)가 있는 목활자본으로 시조의 표암공사적, 씨족의 분적도 및 본종분파도 등, 월성이씨의 전반을 수록한 자료로 당시 가문의 쟁쟁한 석학들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이 책에도 신우공은 12世로 수록되어있습니다.
또한 1932년에 간행한 경주이씨세전보감(慶州李氏世傳寶鑑/李圭彰)에 수록된 경주이씨 세계도와 분적도 기타 고려 이후 120여분의 선조가 간행한 문집, 묘지명, 묘갈명 기타 수많은 씨족의 서책들을 모두 고쳐야 하는 개작(改作)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중대한 일을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선조들이 엮은 족보나 실록들을 권한도 없는 후손들이 누드기 족보로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이른 일은 선대 조상들께 죄를 범하는 일임은 물론 현재 보첩에 수록된 생존한 족인 들에게도 누를 범 하는 일로 대법원의 판례도 종중의 관습법에 따라 천오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족장 여러분의 현명한 성찰(省察)을 기대하며 이 일은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보함이 합당할 것입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년 12월 15일(목)
월성군파 계대 천오 주장에 대한 공청회에서
중앙화수회 선조현향위원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