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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
서론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대위임령 혹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 28:19-20)을 수행하는 것이며, 이 지상명령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방안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체계를 이룩하는 신학의 한 분야가 선교학(Missiology) 혹은 선교신학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총체적인 이름으로서 선교학에는 20여개의 세분된 과목들을 포함한다.
특별히 본 강좌, <선교학개론>이 포함하는 내용들은 선교에 대한 기본적이면서 일반적인 주제들을 고찰하는 것으로 선교의 개념에 대한 이해, 선교의 중요성과 동기, 선교의 대상과 목표, 선교의 방향, 선교의 대상으로서 인간 이해, 선교에 있어서 말씀선포와 사회봉사의 관계, 선교와 성령, 교회와 선교의 관계, 선교의 전략과 방법들, 등을 주로 고찰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선교학 연구에 있어서 함께 수반되어져 할 신학의 분야들은 성경신학, 역사신학, 이론신학, 실천신학 등의 신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선교학이 신학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종합 보완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학은 이미 신학공부를 한 사람이나 신학연구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해가 용이할 수 있다. 아울러 선교학 연구의 기본자세는 단순한 학문 연구이상으로 복음을 사랑하며,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뜨거운 마음이 연구의 토대를 이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1 장 선교학(Missiology)란 무엇인가?
1.1 선교학의 용어
구스타브 바르넥(Gustav Warneck) :
- “선교론(theory of missions) ”(자신의 방대한 저서를 “선교론”이라 명명).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
- “증가학(prosthetics)”(사도행전 2:41; 5:14; 11:24에서 힌트).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 :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학문”(교회성장학파 이룸).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 : “선교의 원리 와 실제 (missionary principles and practice).”
반 룰러(A. A. Van Ruler),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얀센 스춘호벤(E. Jansen Schoonhoven),
린데(J. M. van der Linde) 와 같은 화란의 신학자들 :
“사도의 신학(Theology of the Apostolate)”.
마굴(H. J. Margull) : “전도의 신학(Theology of evangelism)”.
벨카일(J. Verkuyl) : “선교학(Missiology)”.
1.2 선교학의 정의
앤더슨(Anderson)에 의하면,
선교학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으로부터 기독교 세계 선교의 동기, 메시지, 방법, 전략과 목표를 확고히 하는 기본 전제와 중요한 원리들에 대한 한 연구”.
벨카일(Verkuyl)의 견해를 요약해 보면,
(1) 온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 활동에 대한 연구.
(2) 선교의 도구가 되는 교회가 성령을 의존하여 이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준비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연구.
(3) 선교학은 또한 여러 형태의 죄악들과 투쟁하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들을 분석하여 이미 도래한 그러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하나님 나라의 표준과 목표들에 어울리는지를 파악하는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
알란 티펫(Tippet)에 의하면,
선교학은 선교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들을 신학적으로 밝히고, 아울러 역사와 문화인류학의 변천과정들까지 분석하여,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들을 인간과 삶의 과정에 효과적으로 적용시키는 방안들을 연구하는 학문적 훈련.
스춘호벤(E. Jansen Schoonhoven)은 선교학의 임무와 관련하여 선교학을 정의하기를,
(1) 복음을 그 시대와 상황에 적합하도록 해석하고 적용해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학문적으로 기여해야 할 책무.
(2) 선교 일선에 있는 선교사들을 이론적으로 도와주는 학문.
(3)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uniqueness)과 독특성(particularity)을 확인시키는 학문.
(4)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 목표와 사명을 확인시켜 주는 임무.
필자가 보다 포괄적인 입장에서 정의를 내려본다. 선교학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교회에 위임하신 복음전파와 세계 속에서의 봉사적인 사명에 관한 성경의 원리들을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서 고찰하며, 그 원리들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방안들을 역사의 과정과 문화적 배경과 관련시켜 연구하고,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를 실질적으로 적용하는데 필요한 훈련들을 다루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1.3 신학 전체 속에서 선교학의 위치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Schleiermacher) : 실천신학의 단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 실천신학의 과목들 중 목회학적 부류.
바빙크(J. H. Bavink) : 실천신학의 목회학적 부류.
구스타브 바르넥(Gustav Warneck) :
-선교의 역사 - 교회사 /
-선교의 성경적 기초 - 성경
-신학 과목 / 선교에 관한 연구 - 실천 신학.
영국의 포스터(John Foster), 독일의 밀브트(C. Mirbt), 미국의 라토렛(K.S. Latourette) : -교회사.
디엠(H. Diem) : 조직신학(삼위일체와 종말론 교리들에 관한 과목).
벨카일(Verkuyl) : 다른 과목들을 보완하는 한 개별적인 과목으로 주장.
최근에 이르러 선교학은 실천신학, 성경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과 같은 위치에 나란히 놓여지는 이해를 더해가고 있다.
(1) 선교학이 성경신학, 역사신학, 이론신학, 실천신학의 배경 위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것들을 총괄적으로 적용하는 학문으로서의 이해를 얻어 감.
(2) 모든 과목들을 총괄 보완하는 과목으로 이해할 때에 선교학 연구에는 신학의 다른 과목
들에 대한 이해가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감.
(3) 신.구약 성경의 모든 부분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본문으로 통하여
선교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를 전재하는 주장.
1.4 선교학과 다른 과목들과의 관계
1.4.1 신학 과목들과의 관계
(1) 선교학과 전도학의 관계.
(2) 성경 신학, 특별히 주석학, 해석학과 선교학의 관계
(3) 조직신학의 과목들 즉 교의학, 교리사, 변증학 등과의 관계
(4) 기독교 윤리학과의 관계
(5) 교회사 분야에서의 선교학과 관계
(6) 교회연합학(ecumenics)과의 관계
(7) 선교학과 종교학(science of religion)과의 관계
1.4.2 비신학(非神學) 과목들과의 관계
(1)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과의 관계
(2) 비서구사회학(non-western sociology)과의 관계
(3) 정치학과의 관계
1.5 선교학의 발전 역사
교부 시대에 이미 순교자 저스틴(Justin)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같은 교부들의 글에서 선교에 대한 단편적인 글들이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이교도 반박(Summa Contra Gntiles)>같은 글들은 선교학의 탁윌한 작품이 있으나 간헐적인 것에 멈춤.
1.5.1 선교학 연구의 시작기
(1)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반에, 레이몽(Raimon Lull)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당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연구하기 위한 학교를 세울 것을 주장.
(2) 1622년에 동인도 무역 회사가 화란의 레이든(Leiden) 대학의 신학부에 요청하여 인도에
가서 봉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이교도 회심”에 관심이 있는 목사들을 위한 위탁 학원 설립 계획을 요구(10동안 12명 배출로 폐지).
(3) 1627년 로마에 신앙 전파의 대학도시(Collegium Urbanum de Propaganda Fide)가 설립.
(4) 1702년 프랑케(A.H.Francke)에 의하여 동양신학대학(Collegium Orientale Theologicum)
이 독일의 할레(Halle)에 설립 : “지식을 통한 신앙전파”(propagatio fidei per scientias)를 목적으로 신학 후보생들의 훈련을 위한 센터였으나 효과는 미미했음.
1.5.2 선교학의 발전과 현대의 연구들
종교개혁자로 시작된 개신교의 초기 선교학의 발전에 대한 평가는 두 경향을 보임.
종교개혁 이후에 각 국가별로 나타나는 발전의 과정들.
(a) 화란
(1) 화란에서는 사라비아(Hadrianus Saravia: 1531-1613) : <주님께서 세우신 복음 전
도자들의 여러 분류(De Driversis Ministrorum Evangelii Gradibus, Sicut a Domino Fuerunt Instituti)>에서 교회의 선교적 임무 강조.
(2) 호일니우스(Justus Heurnius: 1589-1676) : <인도를 얻는 복음의 사신(De Legatione Evangelica ad Indos Capessendo)>에서 성경적인 선교의 기초와 선교의 방법론, 선교의 식민주의 위험성 지.
(3) 후른비크(Johannes Hoornbeeck: 1589-1676) : 기독교가 대결해야 하는 이교도들의 종교 를 논하고 그들의 설득을 위한 전략들을 논함.
(4) 보에티우스(Voetius) : <교회 설립론(De Plantatoribus Ecclesistios)>에서 선교의 3중 목적으로 이교도의 회심, 교회의 설립, 하나님의 영광을 논함.
(5) 현대에 이르러 네이메이힌(Nijmegen)의 로마 카톨릭 대학이 알퐁스 물더스(Alphons
Mulders)를 1930년에 강사로, 1936년에 정교수로 임명함으로써 선교학을 처음으로 개설한 화란의 대학이 됨.
(6)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은 바빙크를 선교학 교수로 세움으로 화란에서 선교학을 개설한 첫
개신교 대학이 됨 / 그의 <선교학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s)>은 개혁주의 선교 신학의 대표적인 저작이 됨.
(7) 크래머(Hendrik Kraemer) : 1938년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제선교 대회에서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메시지(The Christian Message in the Non-Christian World)>란 저서를 발표.
(8)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선교학자는 호켄다이크(Hoekendijk) :
<흩어지는 교회(The Church Inside Out)>와 <독일 선교신학에 있어서 교회와 민족 (Kerk en Volk in de Duitse Zendingswetenschap)> /
그는 교회 중심의 전통적 선교를 비판하며, 하나님은 더 이상 교회에 역사하기 보다는 세상에 역사하기 때문에 신자는 선교지 보다는 세상으로 나가서 영혼 구원보다는 세상의 평화를 선교의 목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주장.
(8) 블라우(Johannes Blauw) : <교회의 선교적 본질 : 선교에 대한 성경적 신학의 개관(The
Missionary Nature of the Church : A Survey of the Biblical Theology of Mission)>.
(b) 독일
(1) 독일은 17세기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 이전에 대표적인 한 사람은 폰 베즈(Justinian Von Wez)인데, 루터교 사람으로 3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자발적 선교회 설립 주장.
(2) 경건주의 운동의 시대에 들어와서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와 프랑케
(August Herman Francke: 1633-1729) : 전도의 방향과 교회설립의 이론을 세움.
(3) 진젠도르프(Tiu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 선교와 교회연합 운동의
중요함을 강조함.
(4) 경건주의 이후에는 쉴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 : <신학 연구 소론(Kurze
Darstellun des Theologischen Studiums)>에서 “선교 본질의 이론(die thearie des missionwerens)”이란 용어를 사용. / 그의 선교 사상은 복음을 선포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독일 국가 이념을 확장에 둠.
(5) 그라울(Karl Graul: 1814-1864) : 라이프찌히 선교단의 책임자와 에르랑겐 대학에서 강의
/ 선교학이 점차 두각을 나타낼 것과 신학의 최고 자리에 이를 권리가 있을 것을 강조했음.
(6) 구스타브 바르넥(1834-1919) : 할레 대학의 탁월한 교수로 발탁되어 1896년부터 1908년 까지 선교학을 가르쳤으며 유럽 선교사 협의회를 조직한 숨은 공로자로 1874년
<선교총람지(Allgemeine Missions Zeitschrift)>를 창간하여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간행물들을 발간케 하는데 기여함.
(7) 프레이타그(Walter Freytag: 1899-1959) : 함부르그 대학의 첫 선교학자로서 그리고 독
일 복음주의 선교회(GEMC)의 총무로서 활동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학자로 국수주의의 늪에 빠진 독일 선교학을 건져내는데 기여.
(8) 홀스텐(Walter Holsten) : <케리그마와 인간(Das Kerygma und der Mensch)>,
안델슨(Wilhelm Andersen) : <선교 신학의 방향(Towards a Theology of Missions)>,
말굴(Hans Tochen Margull) : <행동의 소망(Hope in Action)>,
비르클(Horst Bukle) : <선교신학(Mission-theologie)>,
비체돔(George F. Vicedom) : <하나님의 선교 (Mission of God)>”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 : <Mission: Which Way>와 <Schken Foundation>.
(c) 영국과 스코틀랜드
(1) 스코틀랜드에서는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 1806-1878)가 <전도신학(Evangelistic
Theology)>이란 제명의 연설을 함으로써 에딘베라 대학(New College in Edinburgh)에서 선교학자로서 활동했다 (Verkuyl, 1978:12).
(2) 영국에서는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가 선교학을 발전 시켰는데, 그의 저서 <이방인
을 회심시키기 위하여 수단을 사용해야 할 신자의 의무에 관한 연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for the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에서 선교의 의무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사명으로 강조했을 뿐 아니라 선교의 효과적 수행을 위하여 수도원 같은 선교회를 선교의 수단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3) 19세기 영국의 선교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람들로는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으로, 그가 교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총무로 일했으며, 19세기 선교 이론의 기초인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nment), 자력 확장(self-extension) 원리를 1867년에 발표했다.
(4) 알렌은(Roland Allen: 1868-1947)은 20세기 영국 선교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성공회 출
신이며, 중국 선교사로도 사역했다. 그의 저서로는 <선교 방법론(Missionary Methods: St. Paul's or Ours?>와 <자발적인 교회 확장(The Spontaneous Expansion of the Church)>이 대표적이다.
(5) 현재의 선교 학자들로는 와렌(Max Warren)과 네일(Stephen Neill)이 있으며, 뉴비긴
(Lesslie Newbigin), 포스터(John Foster), 오차드(R. K.. Orchard), 테일러(John V. Taylor)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기여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입장을 취한다. 복음주의 선교학자로는 그린(Michael Green)과 존 스토트(John Stott)의 활약도 대단하다 (전호진, 1994:29-30).
(d) 미국
(1) 미국 내에 신학교가 선교학을 처음 강의 과목으로 도입한 곳은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로 1918년에 임명된 프레밍(Daniel J. Fleming)이 첫 정교수가 됨 / 이어서 예일(Yale), 맥코믹(McComick) 신학교 등이 선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1940년쯤에는 선교학과가 없는 신학교는 거의 없었으며, 1966년에는 적어도 100개 이상의 신학교가 선교학 과정을 설치.
(2) 미국 해외 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s for Foreign Missions)의 총무
앤더슨(Rafur Anderson)이 자립, 자치, 자전의 원리를 강조함, 저서로는 <해외 선교론 (Foreign Missions: Their Relations and Claims)>이 있음.
(3) 무디(D. L. Moody)와 피어슨(A. T. Pierson)으로, 학생 선교 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낳는데 공헌했고, 피어슨은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주장하면서 여러 저서들을 남김.
(4) 20세기에 이르러 라토렛(K. S. Latourette: 1884-1970)은 예일 대학교의 선교학 교수로서
그의 저서<기독교 확장사(A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로 통하여 선교의 원동력, 선교의 과정, 선교가 문화에 끼친 영향 등을 기술.
(5) 선교학자 맥가브란(D. A. McGavran)은 “교회 성장”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성장
학파를 이루었는데, <하나님의 가교(The Brigde of God)>, <교회 성장학 (Understanding Church Growth)>, 등의 많은 저서를 남김.
(6) 복음주의 진영에서 영향력이 있는 선교 학자들로는 달라스 신학교의 피터스(George
Peters) 트리니티 신학교의 케인(Herbert Kane)과 헷셀그래이브(D. J. Hesselgrave)가 있으며, <Christianity Today>의 편집장으로 지냈던 린드셀(Harold Lindsell)도 포함됨.
(7)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 위에서 선교학을 발전시킨 사람들로는 콘(Harvie M. Conn), 그린
웨이(Roger S. Greenway), 리델(Richard R. Ridder), 보어(Harry Boer) 등이 있음.
근래에 와서 선교학의 연구는 제 3세계에까지 파급되어 지난날 피 선교 국가들이었던 나라의 교회에서도 선교 학자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선교학 연구에 동참하고 있다.
제 2 장 선교란 무엇인가?
(1) 선교란 용어의 개념
라틴어 : mitto(보내다의 의미) 에서 유래.
신약의 헬라어 :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135회)와 “펨포”(πέμπω)(80여회)이다.
영어의 “missionary”(선교사)의 사용 유래.
독일의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 (G. Warneck)의 정의 :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고전 4:1) 파송되는 것이 성경적인 선교의 개념이다.
(2) 전도(Evangelism)와 선교(Mission)의 차이
데이비드 보쉬(David J. Bosch)는 “선교와 전도 두 가지가 다 오로지 복음을 구두로만 선포하는 것”이 초기의 견해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선교 학자들 중에서 헨드릭 크레이머(Hendrik Kraemer) 와 요하네스 호켄다이크(Johannes Hoekendijk) 같은 학자들은 전도와 선교를 같은 의미로 해석할 것을 요청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경우로서 전도와 선교를 구분하는 경향이 일어나기도 했다. 보쉬에 의하면 과거에 전도와 선교는 지리적이거나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① 지리적 구분
전도 : 본국에서 복음전도
선교 : 타국에서 복음전도
영(John M.L. Young) : “선교란 용어는 아직 복음을 모르거나 조금 밖에 모르는 다른 나라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주로 외국에 하나님의 백성을 파송하는 일을 말한다.”
② 신학적 구분
전도 :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No-more-Christians)나 혹은 이름만의 기독교인으로 자칭하는 사람들(Nominal Christians)의 신앙을 부흥시키는 일.
선교 : 아직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Not-yet-Christians)과 관계되는 일.
반 룰러(A. Van Ruler) :
사실상 서구인은 이제 이교도로 되돌아갈 수 없다. 서구인은 이제 다시는 기독교 이전의 세계로 또는 이교주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고, 그가 이미 기독교 이후의 세계에 속해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선교와 전도를 구별한다.
다른 하나의 경향을 추가하여보면
③ 문화적 구분
전도 : 동일문화권에 복음전도
선교 : 타문화권에 복음전도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가지고 문화의 경계를 뛰어 넘는 것”
(3) 포괄적 사역으로서 선교와 중심적 사역으로서 전도에 대한 이해
전도 : 복음전도
선교 : 복음전도를 중심사역으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확장을 위한 포괄적 사역.
케인 (Herbert Kane), 스토트(John R. W. Stott) 등.
필자의 선교에 대한 정의 : 선교란 주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전도의 중심적 사역과 더불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봉사의 활동들로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는 포괄적인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교는 복음전도보다 더욱 포괄적인 개념이며, 복음전도는 선교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유의가 필요한 것은 복음전도를 선교에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복음전도를 선교에서 분리한 봉사사역은 선교가 아니라 단순한 봉사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전도를 중심으로 하는 치료행위는 선교일 수 있으나, 복음전도를 제외한 치료의 행위는 선교가 아니라 단순한 치료행위에 지나지 않다는 의미이다.
(4) 포괄적 사역으로서 선교 이해에 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토대
(a) 그리스도의 사역 : 마 4:23, 9:35
(b) 사도들의 사역
(c) 개혁주의 신학이 이해하는 선교의 목적
벨카일(J. Verkuyl)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증거 하신 것은 실제로 어떤 목적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의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행위로써 증거 하셨는데, 그것은 자유케하시는 주권적 통치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통하여 자신의 의도를 가장 명백하게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d) 문화명령
창 1:28
헤드런드(Roger E. Hedlund)는 문화적 명령이 선교적 개념임을 주장.
(e) 두 번째 큰 계명
(f)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내용
마 28:16-20
막 16:14-18
눅 24:44-49
요 20:19-23
행 1:8
(g) 선교란 용어의 현실적 사용
(5) 현대선교 이해에 사회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는 이유
(a) 현대선교 신학의 변천
(b) 제3세계 파송되는 선교사의 선교현장 체험
(6) 결론
선교 = 해외선교 이기보다
선교 = 해외선교, 학원선교, 군 선교, 문화선교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성도들의 선교적인 삶
(2) 해외선교의 중요성 인정
(3) 2세 교육에서 포괄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 양성
(4) 교회의 균형 잡힌 선교 시행
(5) 전문인선교 사역자들과 교회개척 사역자들 사이에 바른 이해 위에서의 협력
제 3 장 선교의 중요성
3.1 중요성
선교의 중요성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자라면, 그가 성경을 읽거나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 깊이 깨닫게 된다.
3.1.1. 본질적인 중요성
기독교 선교의 본질적인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지역, 그리고 상황과 관계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내리신 본질적인 과제라는 사실이다. 선교학자 피타 와그너(Peter Wagner)는 기독교선교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세상을 사는 데는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신발을 신는 것은 선택적인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선택적이 아니다. 차를 운전하는 것도 선택적이다. 그러나 당신이 한번 운전하기로 했으면 우측통행(미국의 경우)은 선택의 요소가 아니다(필수라는 의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선택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으로 결정했다면 세계선교의 참여는 더 이산 선택의 요소가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비록 당신이 신자이지만 선교를 거절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다음의 3가지에 놓여 진다고 말한다. 첫째는 당신은 게임에 역할을 맡아있으면서도 의자에 앉아있는 당신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둘째, 당신은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성을 잃을 것이다. 셋째, 당신은 지상에서 행한 바가 불로 심판을 받아 오직 금과 은, 그리고 보석만이 남게 되는 심판의 때를 위하여 불쌍하게 준비될 것이다(고전 3:12-15).
3.1.2. 시대적인 인간의 상황과 관련한 중요성
선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시만드(John T. Seamands)는 그의 저서 <교회의 지상과제(The Supreme Task of the Church)>에서 피력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현시대에 속한 최대의 과제
지난 수세기 동안의 인구 성장률에 비하면 최근에 이르러 세계 인구의 성장률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1835년 세계 인구는 불과 10억에 지니지 않던 것이 백년이 지난 1935년엔 20억에 달했고, 1962년에는 30억, 1976년에는 40억에 이르렀다. 현재 세계 인구는 한 주간에 150만 명, 한 달에 600만 명, 1년에 7천만 이상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출생하는 전체가 구원되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체에게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는 면에서 현시대에 속한 최대의 과제이다.
(2) 인류에게 가장 깊은 필요의 취급
인간은 의, 식, 주, 그리고 교육과 의료를 필요로 한다. 세계인구의 5분지 3이 비생산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겨우 생명유지를 위한 필수품을 사용하며 기아 사이에 끼어 생존하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잊을 수 없다. 우리시대에 있어 온갖 과학과 공업이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어느 시대에 있어서보다 세계에 더 많은 수난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아이러닉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물질적인 요구의 절박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눈감아 버린다면 기독교 교인이 될 자격이 없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러한 필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성인교육과 농촌 전도의 프로그램, 그리고 병원과 보건소들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관여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과 사랑의 심정으로 수많은 대중의 정신적, 물질적 요구에 진력하셨다. 그의 제자인 우리들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할 요소는 이러한 모든 요구의 해결이 인간의 근본 요구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선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의 이해가 놓여진다.
얼마 전, 남 인도의 어느 마을에 기독교 교인인 선생이 성인 교육을 지도하고 있었다. 몇 주간의 강의를 한 후에 그는 자기 반 학생들에게 간단한 문제를 주었다. 그는 각 학생들에게 칠판에다 “나의 이름은 OOO입니다”라고 쓰도록 했다. 그랬더니 그 마을의 유력한 사람이며 제일 마지막에 나간 분이 만족한 기분으로 “나의 이름은 사무엘 입니다”라고 자기 나라 말로 썼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마을의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쓰라고 한 것 외에도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다고 느꼈는지는 몰라도 나의 이름은 사무엘 이라고 쓴 바로 밑에다 “나의 구세주의 이름은 예수”라고 썼다.
육신의 먹을 것을 위하여 빵을 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의 양식 또한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여야 그들이 자기의 이름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의 구세주의 이름을 쓸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지식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들의 삶에 좋은 길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을 인도해야 한다. 기독교 선교는 인류의 가장 깊은 요구를 취급하는 일이 되기에 중요한 것이다.
(3) 강력한 경쟁에 직면
아시아에 있어서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하게 되므로 국가주의의 새로운 정신적 출현과 더불어, 국민문화의 부흥이 일어났다. 동시에 여러 종교가 우후죽순 격으로 일어나 제각기 포교의 전략을 세우며 기독교 선교에 강력한 경쟁의 국면을 형성하고 있기에 선교이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불교(Buddhism)는 진척을 시작했다.
기독교의 여러 방법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경전을 세계의 여러 방언으로 번역했고, 그들도 설교와 주일학교를 실시한다. 그들은 불교 청년 연맹 (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을 조직했다. 그들은 우리들의 찬송에서 몇몇 적절한 부분을 뽑아 “내 영혼을 사랑하는 부처여!” 또는 “나를 사랑하시는 부처님” 등등을 사용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불교의 포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불교도들은 랑구운(Raangoon)에다 큰 불교의 신학교를 세워 놓고 세계 각처에 보내어 포교 사업을 하도록 불교 승들을 훈련한다. 이들은 영어와 힌두어를 배우는데 영어는 영국과 미 대륙에 선교 사업을 하려고, 힌두어는 인도에서 일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를 포섭하기 위한 일정한 시도를 계획한 것이다. 인도에서 힌두교도 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다는 인도의 신문을 읽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큰 대중 집회로 통하여 하루에 10만 명 가량 되는 힌두교도 들이 불교도가 될 것을 선언하였다. 그 군중 가운데는 인도의 최하층 계급(Untouchables)에 속한 힌두교도들 6억을 형성한 지도자 암베드칼(Ambedkar)박사도 있었는데 그는 인도 헌법의 기초자이다.
일본 불교에 신(Shin)이라는 종파가 있는데 이 종파에서 미 대륙에 아마도 삼 백이 넘는 불교 포교사들을 파송했으리라 추측된다. 유럽 이교도들 가운데서 부처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한 유인물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늘날 불교에서 전하는 것은 평화의 메시지이다. 불교도들은 기독교가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데 실패했다고 선전하며, 오직 불교만이 인류를 위한 평화를 이룩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평화의 상징으로 랑구운에다 평화의 탑을 세웠으며 일본의 히로시마에 두 번 째 평화의 탑을 세우고 있다. 소위 기독교국가가 처음으로 원자탄을 투하했던 그곳에다 평화의 탑을 건립하는 것은 무언의 도전인 것이다.
이슬람교(Mohammedanism)도 역시 진취적이다.
그것의 공격적인 아메디야(Ahmeddiya)파에서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 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하여 파키스탄에 이슬람교 선교본부를 건설하였다. 아메디야파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를 공격하기 위한 책을 대량 출판하였다. 아프리카 대륙에도 1억이 훨씬 넘는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다. 마호멧의 가르침은 종족 숭배자들(tribal cults)을 아마 1년에 900만 이상이나 개종시킨다. 카이로에 있는 이슬람 방송국에서는 코란의 메시지를 하루에 12시간씩 8개국어로 방송한다. 중앙 및 남아프리카에 수 백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시키기 위하여 훈련소를 가진다.
오늘날 이슬람교의 중요 메시지는 형제애(brotherhood)이다. 모슬렘교도들이 선언하는 것은 세계 온 인류가 통일된 단일 단체요, 종족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한 형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슬렘 사원이 모든 종족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지적한다. 그들은 아직 기독교는 종족 편견과 차별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얼마 전 한 미국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한 시장에서 설교하고 있었다, 그가 전하는 내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다가서며 군중들을 선동하는 한 모슬렘 선교사에 의하여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모슬렘 선교사는 “여러분 기독교인이 되지 마시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 되어 저 선교사의 나라에 간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흑인이란 이유 때문에 저이와 같이 한 예배당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선전은 종족간의 긴장을 가진 아프리카 종족들을 끌기에 효과적이다.
힌두교(Hinduism) 역시 오늘날 부흥 일로에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그릇된 양상들을 제거하면서 기독교 교훈에 비추어 그들의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힌두교 사상은 기독교 신학 서적과 함께 많이 읽혀지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나 병원을 시작하며 사회적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에 개종한 대중을 힌두교로 다시 되돌리는 강력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선교지의 하나로서 미국을 생각하고 있다.
현대 힌두교의 메시지는 관용(tolerance)의 종교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최상권의 선포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요, 구원의 방편이라는 선교에 도전한다. 힌두교도 들은 모든 종교는 진리의 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 우리의 해야할 최선의 일은 모든 종교의 진리를 택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편협한 종교와 완고한 종교는 싸움과 분열을 일으킬 뿐이라고 논박하며, 오직 진리와 이해가 있는 “한 세계”를 갖는다는 그 길만이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요, 평화적 공존의 원리를 채택하는 것이라고 공박한다. 현대의 기독교회는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강한 경쟁을 해야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가장 짧은 시기에 살고 있음
오늘날의 문명은 위기 일로에 놓여있다. 어떠한 한 미치광이가 또 다른 전쟁을 유발시키게 될 그 때 원자탄과 수소폭탄, 로켓트와 미사일로 인류와 문명을 쓸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사건들이 발생하여 정부들이 밤사이에 생겨나고 넘어진다. 따라서 선교의 전선에도 어떠한 변화가 올는지 모른다. 언제 복음의 문이 닫혀 질는지 모른다.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바울 사도 역시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하여 오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교회는 (1) 여전히 이 세상이 들어왔던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2) 이 시대가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의 기회임을 깨닫고, (3) 복음선포를 위한 최상의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4) 아울러 이 영광스러운 소식을 선포하는데 유용한 가장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 4 장 선교의 동기
Cook은 동기란 사람이 행동하도록 자극하는 어떤 것으로,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을 하도록 하는 힘이며, 왜? 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선교에 있어서 동기란 선교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자극이요 힘이며, 동시에 왜 선교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Cook은 계속해서 성공적인 선교사들의 경험 안에 있는 두 동기를 말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다.
둘째는 첫 번째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보다 세분화된 동기들을 볼 수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크게 두 가지의 동기로 나누는데 순수한 동기(pure motives)와 불순한 동기(impure motives)이다.
4.1. 순수한 동기들
(1) 영광의 동기 (the doxological motive)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선교의 동기이다.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이 “...주의 말씀이 온 세상을 통하여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살후 2:1; 빌 2:11)이라 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피력한 후에 세 장(롬 9-11장)에 걸쳐서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이 동기는 수세기 동안 선교 사역에 동참했던 많은 선교사 자신들의 삶과 사역을 고취시켰다.
(2) 순종의 동기 (the obedience motive)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의 선교 사역이 내적 필연성 (고전 9:16)과 모든 사람에게 “빚진 상태”(롬 1:14)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선교 임무의 수행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두고 있다. 이 동기는 자신들의 생애를 선교 사역에 헌신한 많은 사람들을 고취시켰다. 윌리암 케리 (William Carey)는 선교 명령을 사도 시대에만 국한시켰던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방인의 회심을 위한 수단들을 사용할 기독교인의 의무에 대한 연구>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의 생애가 되었다.
(3) 사랑과 자비, 그리고 동정의 동기 (the motives of love, mercy and pity)
성경은 선교 사역의 동기가 사랑과 자비와 동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도록 재촉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고후 5:14). 그리고 그는 그의 전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의미했던 것에 관하여 감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금 똑 같은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한다.
(4) 하나님 나라의 동기 (the Kingdom motive)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영역으로서,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강력한 선교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취를 위한 도구로서 수종들어야 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선교의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5) 종말론적 동기 (the eschatological motive)
종말론적 동기는 하나님나라 동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 안에서 도래했으나 미래에 완성될 것을 가르친다. 여기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의 완성 사이에 있는 긴장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 안에 성도들의 참여의 정확한 배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지막 시간” (the last hour: 요1서 2:18) 과 “마지막 날” (the last days: 딤후 3:1) 안에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하도록 명령된다. 이것은 선교의 종말론적인 동기가 된다.
(6) 교회론적 동기 (the ecclesiological motive)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다양한 이름을 사용한다: 하나님 나라 혹은 백성 (the nation or the people of God, 롬 4:17; 벧전 2:9; 계 21:3), 하나님의 자녀 (children of God, 마 5:9, 45; 13:38; 요 1:12; 갈 3:26), 하나님의 교회 (church(es) of God, 살전 2:14; 살후 1:4; 딤전 3:5),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the body of Christ, 고전 12:14; 롬 12:5).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동일하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며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설립과 확장은 선교를 위한 교회론적 동기가 된다.
(7) 서두름의 동기 (the motive of haste)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성도는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수종드는 일에 긴급히 서두르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했으며 (엡 5:16),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하도록 명했다 (갈 6:10). 기회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선교의 동기가 된다.
(8) 개인적 동기 (the personal motive)
복음전파가 자신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가져온다 (고전 9:25). 자신의 믿음이 복음 전파로 통하여 확증되고 더욱 성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상급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선교에 있어서 개인적 동기에 속한다.
4.2 불순한 동기
(1) 제국주의 (imperialism)
이것은 서방의 국가들이 복음전도를 다른 민족이나 나라들을 지배하려는 수단으로 삼는 것과 관련되어 나타났다. 교황 니콜라스 5세와 알렉산더 6세는 15세기와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향을 이용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영국과 화란의 동인도 회사는 신교의 선교를 결탁시켜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유익을 꾀하였다.
(2) 문화적 동기 (the cultural motive)
이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 선교를 문화 전달의 수단으로 꾀한 것에서 나타났다. 즉 서방의 문화가 어느 다른 문화보다 뛰어나다는 전제하에서 그것을 선교로 통하여 식민지역에 이전시켰다.
(3) 상업적 동기 (the commercial motive)
선교를 상업적인 유익과 길을 트는데 관련시킨 것을 말한다. 그러한 실례로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의 오지 탐험은 이러한 현상을 본의 아니게 일으켰는데 정당한 상업이 아닌 노예 장사의 길을 트는데 기여하게 되어졌다.
(4) 교회론적 식민주의의 동기 (the motive of ecclesiastical colonialism)
이것은 선교의 교회가 피선교지의 토착 교회에 자신의 교파와 교회의 형태만을 심으려는 동기에서 선교를 시행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을 수용한 토착교회는 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구미의 형태만을 본 받아야 하기보다는 신약적인 형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19세기의 영국의 성공회 선교는 이러한 교회론적 식민주의의 동기에 강했다.
(5) 낭만주의 (romanticism)
선교를 자신이 속한 문화보다 낮은 문화의 지역에서 시행함에서 오는 우월감에 도치되거나 혹은 아직도 미개한 지역을 탐사하는 모험적 심리에서 가지는 우월 의식과 낭만적인 감정에 기인되는 선교적 동기를 말한다.
(6) 해방과 인도주의 동기 (liberation and humanization as motives)
이것은 현대의 에큐메니칼 선교와 해방신학의 선교 동기 속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 주로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기독교의 선교를 관련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에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며, 모든 비인도적인 형태의 삶에서 인도주의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차원에서 선교가 시행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제 5 장 선교의 목적 (Goals of Missions)
선교의 목적이란 선교 사역을 통하여 이룩하려는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의 목표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으로, 선교의 목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선교 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목적이 사역의 방향과 방법뿐만 아니라 사역의 성격까지 결정지어 주기 때문이다.
한 실례를 들어본다면 현대 선교 신학의 강한 흐름 중에 하나인 에큐메니칼 선교론과 해방신학의 선교론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균형 잡힌 선교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요건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는 몇몇 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가 쉽도록 정리하여 고찰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에서의 목적을 살피려 한다.
1. 바빙크 (H. Bavinck)
선교 학자 보에티우스(Voetius)는 그의 저서 <Politica Ecclesiastica>에서 선교의 목적 세 가지를 정의했다. 거기에 표명된 삼중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설립, 이방인의 회심이다. 바빙크는 보에티우스가 세운 이러한 삼중 목적을 성경적인 근거 위에 있는 선교의 목적으로 평가하면서, 바빙크 역시 자신의 입장으로 표명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삼중 목적은 서로가 분명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총체적 목적의 세 가지 양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1) 하나님의 영광
선교의 목적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신.구약성경이 명하고 있는 바이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을 차례로 고찰하려 한다.
구약성경의 고찰
(a) 구약은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사명을 가진 민족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을 보여준다.
* 민수기 14:16은 모세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무능하다고 생각할 것에 대하여 근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이 없기를 바라는 표현이라 하겠다.
* 시편 83편은 이방 권세들이 멸망하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 자로 알게 하소서”(18절)라는 간구로서, 여호와의 승리로 그 영광을 송축하고 있는 내용이다.
* 시편 72편은 열방이 그를 섬기며 그로 통하여 누리게 될 복을 말하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만 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라(11절)....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 지어다 아멘”(17-19절).
(b) 구약의 신실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이 위기에 처하며 모독을 받게 되는 경우에 언제나 그들의 마음엔 두려움을 가졌다.
* 하박국 선지는 이스라엘의 소망하는 바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합 2:14).
*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선교의 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을 그에게 주신 것을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38:23)고 말했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피조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하나가 되어 완전한 조화를 돌릴 것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가졌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아래서 이룩될 장엄한 역사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하나님의 나라 성취로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광을 열망한 것이다.
신약성경의 고찰
(a) 신약에도 구약과 같이 선교 사역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교 사역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는 모두에게 평강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는데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첫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서 놀라우리 만큼 풍부한 표현을 하셨는데, 이러한 영광의 나라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있으며, 그것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끝이 온다고 했다(마 24:14).
(b) 서신서들에는 이러한 사실이 더욱 선명하다.
* 에베소서 1:9-12에서 바울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했다.
* 고린도전서 15:24-28에서 바울은 이러한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리니...만물을 저에게 복종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러한 인용들에 의하면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성취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데 선교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
(2) 교회의 설립
교회 설립은 선교의 구체적인 목적이다. 교회의 설립과 확장이 선교의 구체적인 목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선교의 포괄적인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의 설립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수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하나님의 백성 즉 성도와 성도의 연합체로 통하여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의 손으로 작용하여 이루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하는 성도의 연합체로서 교회가 자신을 그리스도이시라는 신앙 고백 위에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마 16:18).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고백되는 일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의도하셨다는 의미이다. 바울 역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신 데,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고 했다(엡 1:23; 2:20-22).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교회는 전 세계로 확장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모든 민족과 모든 방언들, 모든 나라들로부터 불러 모으시는데 하나님의 어린양이 그들 모두를 위하여 죽임 당하셨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최후 완성은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부터 그의 백성을 불러 모으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우리는 그 일에 하나님의 동역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방인의 회심
하나님 나라 완성의 두 번째 요소로서 교회 설립은 이방인의 회심이 그것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의 회심으로 통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교회의 설립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이루어 간다는 차원에서 이방인의 회심은 선교의 구체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회심이란 의미가 정확히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회심이란(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역이기에, 하나님이 구원을 일으키실 때 인간 나 자신 편에서 반응하여 나타나는 면을 의미함) 완전히 옛 생활을 버리고 죄의 사슬을 끊는 것이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심은 무한히 위대하고 값진 것으로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골 1:3).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고후 5:17). 이것은 곧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은 홀로 즐길 수 없는 것이기에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의 축복이 흘러 넘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어야 한다. 구속은 개별적이지만 다른 신자들과의 연합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과 연합될 때에야 우리는 더욱 ”지식에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여지는 Bavinck의 선교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란 대 주제를 세우고 그것과 관련된 3요소들을 말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서 교회의 설립과 이방인의 회심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이 단순히 문화 선전이나 가난과 질병의 해결을 위한 활동의 차원에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한다.
2. 영 (John M. L. Young)
세계는 변하여도 선교의 진정한 목표와 사람들이 그 선교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변치 않는다. 이러한 변할 수 없는 선교의 목표는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선교를 명하신 것에 포함되어 있다.
첫째 목표는, 교회의 세계 선교의 직접적 목적은 복음을 전파해서 각국 나라 사람들 가운데
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삼아 이방 종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와 영혼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쁨으로 간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빙크의 견해와 비교할 때에 이방인의 회심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목표는, 첫째 목표에 수반하는 것으로 대위임령의 제 2부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불신자들 사회로부터 개종된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세우고 감독자를 임명하여 저희를 돌보게 해서 그들이 영적으로 자라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며, 그래서 교회가 계속하여 설립되게 하며 삼위 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을 영구한 제도로 만들어 나가는 일도 역시 포함된다. 바울은 이러한 요소를 시행한 것으로 그는 전도 여행하는 동안에 그렇게 했다.
이러한 교회의 설립이 계속되기 위하여 교회는 비록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을 지라도 그들에 의존할 수 없고 반드시 자치하고, 자급하고, 그리고 자전하는 토착 교회로 자라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회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으로 확고한 교훈을 받아서 모든 성경의 원리에 철저하게 닦아져야 한다. 복음전도 그 차체는 교회의 세계적 선교에 적당한 목표가 아니라 (전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의미), 교회를 한 단체로 만들어 그리스도 교회를 설립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만 계속하여 전도 사업이 진취되게 해야 할 것이다. (Young의 두 번째 목표는 Bavinck의 선교 목표에서 모여진 교회의 설립과 동일한 것으로 보여진다).
세 번째 목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어린 교회들이 참다
운 교회의 표를 나타내려면, 그 교회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교육받아서 그 위에 세워져야 한다. (Young의 이러한 세 번째 목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시행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상의 기술에 의하면, 죤 M. L. 영에게 있어서 선교의 목적은 대위임령이 가르치는 내용들이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는 제자들을 삼아, 그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시행하는 제도적인 교회가 되게 하여 계속적인 교회 건설의 역할을 이행하도록 하며, 아울러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가르쳐 실천케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하는데 선교의 목표를 두고 있다.
3. 벨카일 (J. Verkuyl)
화란의 개혁주의 선교학자 벨카일은 선교 목표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증거 하신 것은 실제로 어떤 목적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의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행위로써 증거 하셨는데, 그것은 자유케 하시는 주권적 통치를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통하여 자신의 의도를 가장 명백하게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이 나라의 영역을 개인의 내적인 생활에만 한정한다. 이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분명히 다루고 있는 바는 개인의 영혼을 넘어서는 주제들을 생각해 볼 때 매우 완전한 해석이라 할 수 없다.
또 다른 부류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배타적으로 교회에 한정시킨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교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두 용어가 서로 관련은 있지만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이해는 인간의 영적 필요만이 채워질 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죄 사유와 용서를 포함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인 것만으로 국한하거나 인간의 영적인 요구에 국한되는 식으로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체적인 구원의 실현과 선포로서, 인류를 강타하는 모든 죄악과 슬픔을 파괴하여 인간의 필요를 그 전체적인 범위에서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통치로 말하고 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주권의 시행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고 또한 그분에 의해서 완성되는 새로운 질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들 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까지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신자들이 전한 메시지이며,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다. 베드로 역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말하고 있다(벧후 3:13).
그러면 그 나라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 성취되는 창조이다. 혼돈은 극복되고, 모든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유케 하시는 역사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다 이룰 것이다. 교회의 깊고도 넓은 선교적 사명은 그 초점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 맞추고, 이것으로부터 전체적인 안목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세 구절은 선교의 가장 깊고도 궁극적인 목적을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마 6:9-10).
벨카일에 의하면 선교의 목적 은 하나님 나라의 설립인데,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개인 영혼과 교회의 차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이 시행되는 보다 포괄적인 영역으로 나타내고 있다.
4. 결론
위에서 인용된 몇몇 학자들을 참조하면서 선교의 목적을 다시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 선교의 포괄적 목적으로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목표들로, 교회의 설립과 이교도의 회심을 포함시킬 수 있다. 이교도의 회심과 교회의 설립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선교의 목표이긴 하나 그것만으로 한정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선교의 포괄적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개인의 심령에 일어나는 구원이나 교회의 설립 이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 심령의 구원과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그것의 중심 요소로 하나 그것에만 제한 될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 삶의 영역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의 회심을 일으키며 회심하는 이들로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며,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섬김과 봉사를 시행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는데 선교의 목적이 있음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제 6 장 말씀 선포와 사회봉사
여기서 다시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소는 선교의 중심적 과제로서 복음전도, 즉 말씀 선포와 사회봉사의 관계를 어떤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말씀 선포와 사회봉사의 관계 역시 바른 균형 위에서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서 말씀 선포와 사회봉사의 관계에 대하여 그릇된 이해에 머물기 쉽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주의는 말씀 선포만을 강조했고 진보주의자들은 말씀 선포보다는 사회봉사만을 강조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특별히 후자의 경향으로 현대인들이 말씀 선포에 대하여 그것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말없는 봉사를 선호하며 그것에 우선권을 두려는 경향들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도 그 일례이다.
1. 선교를 사회문제 해결에만 두려 한 경향들이 생겨난 이유.
(1) 현대 선교 개념이 변천과 관련
과거에는 선교와 복음전도에 어떤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가 인간의 영혼 구원에 관심을 두는 이상이 아니었는데 현대에 이르러 사회관심도 선교에서 외면될 수 없는 요소로 이해하는 선교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전환이 비록 급진주의 신학과 사상에 의하여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복음주의 신학자들까지도 지난날 개인 영혼의 관심에만 기운 복음주의의 선교에 대한 이해를 반성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한 실례들로는 칼 헨리(K.F.H. Herry)로서,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들 중에 대표자로 인정되는데, 1947년에 이미 복음주의 교회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될 것을 말했다.
스코트(Waldron Scott) 역시 복음주의 선교 학자로서, “선교란 질적으로는 복음을 우리 시대의 큰 이슈에 적용시키는 것이며, 양적으로는 가난한 자와 무력한 자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유기적으로는 선교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이라고 하여 선교에 대한 개념이 복음전도의 차원에만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들에 의하면 선교의 개념 속에서는 개인 구원에 치중했던 과거의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봉사에도 관심을 가지는 선교관의 변천에서 시작하여 사회 관심에 더욱 무게를 두는데서 생겨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개발도상국가들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들이 선교에 사회 관심을 더 함
제 3세계의 개발 도상 국가들이 이제 정치적으로는 서구의 식민주의에서 풀려났으나 억압의 무서운 정권들이 다시 국내적으로 형성되어서 역시 억압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특별히 이러한 현상들은 남미의 나라들에게 두드러졌고 지금도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내전들이 그러한 경향이다. 경제적으로도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나타났고 정치와 경제가 정상을 되찾지 못한 곳에서의 사회란 여전히 많은 문제들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 3세계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체 개인의 영혼에만 관심을 고정시킬 수 없게 되어졌다. 영적인 문제와 아울러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선교에로 새로운 관심을 띄고 나타났다.
독일의 선교학자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는 개인 영혼의 관심으로서 수직적 차원으로서 선교와 수평적인 사회적 관심으로서의 균형을 피력했다. 영국의 스토트(J.R.W. Stott) 역시 우리가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바른 결합을 발견하는 것이 주님의 종 된 역할을 바로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들이 사회 관심과 활동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선교에 대한 관심은 피선교지의 상황들을 외면해 버릴 수 없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2. 말씀 선포로서 복음전파와 사회 봉사의 관계에 대한 이해
선교 사역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사회 관심을 외면하고 복음 선포에만 집중한다면 그것은 포괄적인 사역으로서의 선교로 보기 어렵고, 반대로 사회 활동을 전도로 대치한다면 더 큰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선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는 모순에 놓이게 된다. 지금까지 이 두 요소의 관계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이해들 안에서 내려왔다.
1) 사회 활동을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보는 이해.
(1) 이러한 이해의 의미
이 경우에 있어서 선교는 복음전도에만 역점을 두어 회심자를 얻음이 최고의 목적이 되며 사회 활동은 그 목적을 위한 예비 조건이나 효율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2) 이러한 이해에 대한 비평적 측면
이러한 경우에 기독 신자의 박애 활동 배후에는 외식의 악취가 풍기는 요소가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 신자가 엉뚱한 속셈을 가지고 사회 활동에 종사하도록 강요되는 면이 있겠다.
2) 사회 활동을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복음전도의 표현 혹은 적어도 선포되고 있는 복음 자체로서의 이해.
(1) 이러한 이해의 의미
이 경우에 사회 활동은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부과될 부과 물이 아니라 전도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 전도 자체에서 자라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에서 동의하기를 망설일 필요가 없다. 예수님으로 통해서도 이러한 전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과 행위들은 상호 보완적으로서 말씀들은 그의 행위들을 해석하고 행위들은 그의 말씀들을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3) 이러한 이해에 대한 비평적 측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봉사를 전도의 한 분파, 즉 선포의 한 면으로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요소가 남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선행이 예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을 때 증거의 가치를 가졌음을 부인하지 않으며 우리에 의해서 행해질 때도 증거의 가치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마 5:14). 그러나 이러한 입장 역시 선행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 쪽에 남게 된다. 만일에 선행이 가견적인 전도라면 그것은 역시 보상과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되고 만다. 선행이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닌다면 거기에는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눅 6:35).
3) 사회 활동이 말씀 선포의 동반자로서의 이해.
(1) 이 이해에 대한 의미
이것은 참으로 기독교적인 관계로서 전도와 사회 활동은 서로 동반자로서 서로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독립적인 관계이다. 양자는 각기 올바른 위치에 독립적으로서 있으면서도 서로 협력적이다. 양자는 각각이 다른 한편의 수단이거나 그것의 표현도 아니다. 각각은 그 자체의 목적을 가진다.
(2) 이러한 이해를 실천하는 방안
그렇다고 해서 말과 행도, 전도와 사회 활동이 항상 병행하여 종사해야만 된다고 하는 불가분리의 동반자들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소명에 따라서 경우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든다면 한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가장 긴박한 상황일 때가 있다.
또한 소명의 다양성과도 관계가 있다. 의사는 복음전도를 위하여 의료 행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전도자가 말씀의 사역에서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도들도 그런 진리를 깨달았다(행 6장).
3. 말씀 선포와 사회 활동을 동반적인 관계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요소들
(1) 성경에서 보여지는 주님의 관심이 표명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전파를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도록 말씀하셨다. 여기 빛과 소금의 역할이 반드시 복음의 효과만을 노리는 말씀으로만 보여 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빛과 소금의 역할이 곧 말씀 선포와 동일시하는 것으로도 보여 지지 않는다.
(2)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선교의 개념이 표명하고 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포괄적 사역이며 복음전도는 그 포괄적 사역의 중심 과제로 정의할 때에 동반자의 위치로 놓여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선교에 대한 포괄적 이해 속에는 복음전도가 선교사역 내에 중심적인 과제로 있긴 하지만 다른 사역들 역시 각자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이해 위에서 선교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반자의 위치에 있음이 분명해 진다. 복음전도만을 선교로 이해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사역들만을 선교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선교 이해라면 동반자의 위치로 이해된다.
(3) 개혁주의가 이해하는 선교의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표명하고 있다
선교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교회를 이루는 것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 개인이나 교회와 동일한 규모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우주적으로 시행되는 영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와 교회는 그들 자신의 삶의 전 영역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는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를 포함하는 다양한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영역들은 말씀 선포를 중심 하여 함께 협력되어야 하는 동반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4)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양자가 동반자의 위치에 있음을 표명하고 있다
지상명령은 단순히 복음전도 만을 명령하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고, 그들에게 또한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신 것에는 주님이 보여 주셨던 관심을 포함한다. 주님은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고치시는 것을 그의 사역에 주된 분야로 나타내셨다.
4. 결론
복음전도와 교회의 사회봉사의 사역에 대한 바른 관계의 이해란 실로 중요하다. 기독신자의 봉사 활동들이 오직 복음전도의 효과만을 더하는 수단으로 이해한다면 분명 봉사활동의 순수성에 문제가 생겨난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봉사 대상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선별된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봉사 활동 자체가 곧 복음전도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문제가 있다. 말로 설명되어져야 할 복음의 내용은 활동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의 봉사를 받는 대상이 나의 봉사로 통하여 내가 믿는 종교에 호의를 보일 수는 있으나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일은 봉사의 행동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로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사명은 성도가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독자적인 봉사의 영역에 두면서 동시에 말씀 선포에 동반자로서 서로가 서로는 협력하는 위치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에 의하면 말씀선포와 함께 수행될 수 있는 전문 선교 사역들은 각각 그것의 가치와 위치가 있게 된다. 동반자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있는 가치와 위치를 가지게 된다.
(이복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