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의 의미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다. 사건의 장소와 시간을 드러내는 소설의
요소를 배경이라 한다. 배경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다. 말을
바꾸면, 배경이란 소설 내의 사건, 행동, 인물에게 부여된 시공간적 한계이다.
배경은 사건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세계, 사건의 물질적 환경이며 인물의 활동무대이다. 배경
의식이 싹튼 것은 근대문학에 와서이다. 근대의 환경결정론에 영향을 받아 근대소설에서 배경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가운데 일련의 사건과 인물을 구축한다. 근대소설은 사람이 살아가는
현장의 문제를 주로 취급하게 됨으로써 그 현장이나 시대 배경 자체가 탐구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배경의 선택과 처리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보증하고, 주제나 의미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과
통한다. 배경은 인물의 행동과 심리, 삶의 양식을 구체화하며, 작품의 주제에 신빙성, 필연성을
높여준다. 배경을 바꾸면 작품의 의미와 맛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선택한 배경에 따라
그의 문학세계가 결정될 수도 있다.
2. 배경과 분위기
이야기의 사실성, 인물의 생동감, 적절한 분위기는 배경에 의해 구현된다. 배경은
1) 사실적 정확성의 관점에서
2) 소설을 위해 무엇을 달성했는가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후자의 경우 배경은 분위기, 상징을 통해 작품에 기여한다.
소도구가 조직된 것인 배경이 은유나 상징으로 되는 경우(광란의 바다, 폭풍우, 황량한 평원,
어두운 산중 호숫가의 허물어져가는 성),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다. 대체로 은유로서의 배경은
인물의 심적 정서적 상태에 대한 비유이다. 이때 배경은 인물의 정신적 조건, 내적 상태를
객관화하게 된다. 이는 인물의 내적 상태, 정서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배경의 영향과는 구분
되어야 한다.
분위기를 창출하는 배경은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분위기는 <독자가 작품 속에서 숨쉬는
호흡>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배경에 의해 환기되는 정감적인 기분이다. 물론 분위기는
하나의 원인에 의한 결과라기보다 소설의 여러 요소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배경이
분위기 형성에 구심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물질적인 시공간의 산물이면서도 보편적 추상적인 기분을 형성하여 작품의 정신을
물들이는 독특한 색조를 흔히 분위기라고 한다. 분위기란 물질적 장소의 개념이 작품의 정신에
접합된 정신적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의 정신면과 연관된다는 측면에서, 배경에 의한
분위기는 작품의 주제,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작품의 <비> <폐가>와 같은 것은 작중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드러
내고 주제와 연관되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비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대기로 가리어서 방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다다미 여덟 장 깔리는 방안은 다다미 위에다 시멘트종이로 장판 바르듯한 것이었다.
한편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 촐랑 쪼르륵 촐랑, 빗물은 이와 같은 연속적인 음향을 남기며 바께쓰 안에
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덤 속 같은 이 방안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구해 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빗물 소리마저 바께쓰에 차츰 물이 늘어갈수록
우울한 음향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손창섭 비오는 날」)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 버섯이 퍼렇게 뻗어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린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
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 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일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어,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선 지렁이와 두꺼비 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고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
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김동리 「무녀도」)
3. 배경의 유형
특별히 한정된 장소, 예를 들어 기차역, 집안의 특정 장소만을 무대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갈 수도
있다(임철우 「사평역」, 서영은 「사다리가 놓인 창」). 또 사회적 신분, 직함, 직업, 인물의 지적
도덕적 종교적 환경도 배경이 된다.
작가의 태도나 문체에 따라 주관적 배경과 객관적 배경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자연적 배경
낭만적/사실적 배경으로 나눌 수 있다. 지리학적 장소 또는 실내의 세부적 묘사장면. 주로
사건이 일어나는 지정학적 공간을 의미하며 특정한 장소를 구체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도시빈민촌, 시골풍경, 소록도, 제주도 등 그 지역의 특수한 환경)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김승옥 「무진기행」)
2) 사회역사적 배경
때때로 단순한 장소의 개념을 벗어나서 사회적 환경을 제시하기도 한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군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방향은 서서남으로 빗밋어 충청 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섭슬어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허기야 가끔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에돌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채 얼러 좌르르 쏟아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 『탁류』)
3) 심리적 배경
시공을 초월한 주인공의 의식. 전통적인 사실적 배경을 탈피한 심리적 배경. 공간영역을
혼합하고 시간을 뒤섞기 때문에 인물이 동시에 여러 세계에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지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턱살 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버린다.(중략)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일곱째 칸이다. 럭키 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이상 『날개』)
4) 상황적 배경
환경결정론을 배격하는 실존주의 작가들의 경우, 실존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상징하는 배경은
곧장 주제를 나타내기도 한다. (감옥, 벽, 뜨거운 태양)
5) 기타
*일상적/비일상적 배경, 전체적/부분적 배경, 시간적/공간적 배경.
*중립적/기능적 배경 : 전자는 리얼리티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소설 진행상 필요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제공할 수 있다. 이야기에 필요한 핍진성을 제공할 뿐이지 작가는 그 배경에 실제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독자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중립적인 배경은
드물다. 말하자면 단순히 물질적인 배경은 없다. 예를 들어 시골풍경은 정신적 기능적이라고 할
어떤 가치를 암시한다. 물리적 배경 속에 구현되거나 암시되는 가치를 지닌 배경을 정신적 기능적
배경이라고 한다. 이런 배경은 상징성을 가질 경우가 많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시켜 그
현실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한다. 대체로 인물의 내면정황, 사건전개에 대한 예시, 상황에 대한
해설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고 작품 전체의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날개>의 방,
<광장>의 중립국을 향한 선상, <무진기행>에서 무진을 오가는 버스, <불꽃>의
동굴 등)
4. 배경 설정의 방법
1) 배경 설정은 소설의 전체 구조 안에서 다른 요소들과 서로 어울려야 한다.
2) 따라서 실제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처리하고, 필요하다면 유사한 현장을 답사한다.
3) 배경은 작품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그 자체 복선이 되도록 장치하는 것이 좋다.
4) 인물의 활동무대인 배경은 생생하고 기억에 남을 정도로 충분히 묘사되어야 한다. 친숙한
무대일지라도 색다른 각도에서 포착하여 그려내면 독자를 매료시키는 낯선 세계로 만들 수
있다.
5) 배경은 주제와 인물에 적합해야 하며, 그 세부에 있어 과학적 엄밀성이 있어야 한다. 낯선
이국을 배경으로 할 경우에도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행동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환상소설이나 공상과학소설의 경우에도 배경은 과학적(마술적) 가능성과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5. 배경 처리 방법
1) 배경 설정의 의도, 목적, 다른 요소와의 관계를 확실히 마련한다.
2) 그 의도를 실현 위해 어떤 방식으로(사실성/상징성) 처리할까를 선택한다.
3) 그런 배경 처리에 필요한 소재나 모티브를 정한다.
4) 문체를 결정(묘사/서술)한다.
6. 기타 주의사항
1) 타인의 배경을 모방하지 말라.
2) 전반적인 강한 인상을 주고, 두드러진 몇 개의 세부사항을 제공하라.
3) 자질구레한 것들이라도 엉터리로 속여 넘기지 말라.
4) 지리적 문화적으로 이국적인 배경이 효과적이다.
5) 자주 사용되는 특정한 지리적 배경이라고 꺼릴 필요는 없다.
6) 배경의 비중을 너무 크게 잡지 말라. 잘못하면 기행문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