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단"이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10월 28일로 못박아 놓은 잘못된 광신자들이 신앙적, 사회적으로 큰 무리를 일으킨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 등을 계기로 "이단"이란 낱말은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세인(世人)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용어의 사용 빈도수와는 반비례로 그 의미는 갈수록 왜곡, 혼미해지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주 요인중의 하나가 기존 기독교계에 난무하는 이단에 대한 그릇된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고로 저울의 눈금이 잘못되면 올바른 판단과 거래의 공정성 또한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현 기독교계는 어떤 특별한 종파적 배경을 초월해서 순수하게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이단의 정체를 밝힘과 아울러, 올바른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일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에 여기서는 이단의 정의,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을 다룸과 동시에 이단에 대한 오해들을 상고함으로써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한몫을 담당하고자한다.
1. 정의 - 이단이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현대 종교 연구 시리즈"를 펴냄으로써 일약 이단 문제의 권위자로 부곽된 죠쉬 멕도웰, 돈 스튜어트 두 교수는 "이단 종파"(Cults)에서 이단종파와 유사 종교들을 이같이 구분했다. 즉, "이방종교는 비기독교 문화권에서 자생되어온 불교, 유교 등을 가리키고, 세속종교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세속적 인본주의 등을 일컫는다. 반면 이단 종파란 성경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을 임의로 변형 왜곡시키고 역사적 근거를 가진 교회의 교훈을 배척하는 집단을 지칭한다." 기독교 이단과 더불어 타종교와의 차이점을 지적한 적절한 분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래 "이단"을 뜻하는 헬라어 "하이레시스"는 "선택"을 뜻하는 어휘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을 좇는 당파나 학파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신약에서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칭하고, 또한 나사렛 당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행 5:17,15:5,26:5 등) 그러나 신약 시대가 끝나기 이전에는 "이단"이란 용어가 더욱 구체화되어 특별히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벗어난 이론과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키게 되었음"을 우리는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 정의내릴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이단들
여기서 우리가 제 1세기 당시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주요 이단들을 살펴보는 이유는, 곧 기독교 이단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주장하는 바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 변질된 신관을 주장한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집중 공격하는데, 예를 들면 인성과 신성을 공유하신 그분의 본성을 부정하고 중보자로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그분의 부활과 재림 등을 불신한다. 그리고 이단들은 구원관에 있어서 비성경적인 신비적 체험을 주장하고, 특히 행위를 통한 구원등을 강조한다. 덧붙여서 그들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 교주를 부각시켜 도덕적 타락을 야기 시킨다.
성경이 말하는 이단
이단이란 어원적 사전 개념에서는 정통 도리에 맞지 않게 도리를 해석하는 자들, 반대되는 이론 을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즉 이단이란 진리와 다른 것을 이단이라 하는데 성경에서는 어떻게 이단을 정의하고 있는가? 성경에 이단을 강하게 표현한 곳은 갈라디아서다. 이단이란 말은 다른 이론을 말하는 자를 지적하는 것으로 갈라디아서에는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에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 다른 예수
첫째, 바울은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바울이 전파한 예수는 어떤 예수였는가?
그것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나사렛 예수이다.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가 아니고 다른 자가 예수로 등장할 때는 모두 이단이다. 다른 예수가 누구인가? 한국에 나타난 재림주는 모두 다른 예수이다. 그렇다면 예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문선명, 조희성, 김풍일, 양도천, 안상홍, 이만희 등등 이런 종류의 모든 자들은 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이며 이단인 것이다.
두 번째로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다.
그렇다면 초기 교인들이 받은 영은 어떤 영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요, 예수님의 영이다. 오순절 다락방에 나타난 보혜사 성령이다. 그런데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혜사라고 하고 있는가? 그들은 모두 다른 영이며, 이단인 것이다.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들 중에 활동이 활발한 자들은 문선명 이만희, 안상홍 등이 있다.
셋째는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에 대하여는 갈라디아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복음을 받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였다. 다른 복음이라고 했으니 참 복음과는 다른 것이므로 그것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한다. 이단들은 전체가 모두 다른 복음을 전하는데 다른 복음을 알기 위하여는 참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의 천사가 와서 가르쳐 준 것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한 것”(갈1:7)이다.
2.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함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위에 있는 말씀처럼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므로 그 말씀 속에 우리라는 단어를 넣어 바울 자신도 전에 전하던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바울이 전하였던 참 복음은 무엇이었는가? 그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성경에 아들에 관해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들에 관하여 무엇이 약속되었는가? 창세기 3장 15절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 예언되었고, 아브라함에게는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18)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자손은 곧 예수그리스도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또한 이사야서 11장 1 절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하여 다윗의 자손을 통해 예수님이 올 것을 예언했으며 예레미야 33장 15절에는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다윗을 통해 다윗의 동네에 나셨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10:43)고 하였으며, “모세의 율법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던 모든 일에도 예수를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요한 약속은 믿는 자마다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했는데 회개해서 죄사함을 받는 것과 이름을 함입어 죄사함을 받는 것은 조금 다르다. 회개해서 받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요 이름을 힘입어서 받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받는 것이다. 우리의 죄사함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아무공로 없이 거져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누구든지 영생과 천국과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아들에 관하여 약속된 것이며,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즉 예수 그 자체가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수는 누구의 자손이 되어야 하는가? 성경에 말씀한 대로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 바울도 역시 이 복음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로마서 1:3절에 말씀하였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그러므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지 않은 자가 나타나 자기가 예수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짜요, 이단이다. 또한 예수는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므로 부활해서 살아난 예수가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구주라고 주장하는 예수가 많았었고 현재 한국에도 재림주나 예수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예수였다면 죽었다가 부활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어디 있는가? 자기가 예수라고 주장했던 자들 중 한사람도 없다. 복음은 예수인데 그 예수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온 자라야 하며 둘째, 다윗의 혈통에서 나야 하며 셋째, 부활한 자라야 한다.롬(1:4) 그렇다면 그 예수는 어디 있는가? 그 예수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하늘에 계시며 보좌 우편에 계시다. 그런데 현재 지상에는 내가 하나님이다, 예수님이다, 보혜사다, 재림주다 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하늘에서 보낸 자이므로, 자기를 따르고 자기의 말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또한 저들은 영생도 자기에게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가 가짜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인 것이다.
3.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란 죄인이 아무런 공로 없이 죄에서 해방되고 천국 갈 수 없는 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멸망에서 구원 얻는 것을 복음이라 한다. 그렇다면 구원자는 누구인가? 오직 예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인 것이다. 예수 외에 어떤 사람이 구원을 준다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요, 율법이 구원을 준다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요, 어떤 단체나 장소나 희생이나 노력이 구원을 준다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다. 복음은 오직 예수뿐이며, 구원도 오직 예수뿐이다. 예수 외에 어떤 것도 구원에 포함시키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갈라디아교회는 어떤 문제로 다른 복음이란 정죄를 받았는가! 이제 그 사실을 검토해 보겠다
4. 갈라디아 교회의 다른 복음
갈라디아 교회가 몇 가지 다른 복음으로 지적 받은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10,11) 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날은 안식일이요, 달은 매 달마다 돌아오는 월삭(초하루)이요, 절기는 여러 가지인데 특히 유대인에게는 삼대 절기가 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 외에도 절기가 많으나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거룩하게 지켰다. 또한 해를 지킨다고 하였는데 해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이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이 것들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한 것이다.
5. 할례 받는 것이 죄인가
또 하나는 할례 문제인데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할례 받는 것이 죄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또한 건강에도 좋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여자들에게는 자궁암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바울은 할례 받는 것을 반대했을까?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5:2) 왜 할례를 받으면 예수님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 할례 받는 자는 천국에 못간단말인가? 아니다. 할례를 받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바울은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는가? 그 점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인의 말을 듣고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 위와 같이 유대인들은 할례에 구원 문제를 포함시켰기 때문에 바울은 할례를 받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가 되던지 안식일이 되던지 절기가 되던지 어떤 것이라도 구원과 연관시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 갈라디아서에 율법과 할례 문제를 다룬 것을 보면 무엇이든지 구원과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복음)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10)
결론적으로 복음이란 예수요, 예수로 구원을 얻는 것인데 구원이 오직 예수가 아니고 다른 것을 첨가시키므로 다른 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므로 바울이 전한 것이 헛될까 두렵다고 했는데 그와 같이 지금도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안상홍 집단이다. 그들은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저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뿐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외에 무엇을 해야 구원 얻는다고 가르친다면 그들은 모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며 성경대로 저주를 받을 자들이다. 이것은 특별히 이상한 어떤 집단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기성 교회 안에도 해당된다. 주일을 안 지키면 지옥 간다고 하든지 십일조를 안내면 지옥 간다고 하든지 무슨 법이든 안 지키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해당된다. 기성 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많다. 길음동에 있는 혜성 교회도 십일조를 안내면 지옥에 간다고 한다. 그들뿐만 아니라 또한 종말론을 모르면, 계시록 모르면, 자기에게 안 오면, 이 무리에 속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무엇을 안 하면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른 복음”이며 그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성교회들 중에도 주일을 안 지키면 지옥 간다고 하면서 주일날 돈 거래를 금하는 교회들도 더러 있다. 심지어 어느 퇴직목사가 오랫만에 옛 교회를 찾아갔더니 교인들이 대접한다고 좋은 음식들을 사왔는데 주일날 사온 것이라 해서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이단이란 어떤 것인가? 간단하게 이단이란 구원 문제가 다른 것을 말한다. 사람마다 또는 교단마다 성경의 견해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단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이 조금 다르다 해도 구원 문제가 확실하다면 구원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성경 해석이 똑같다할지라도 구원 문제가 틀리면 그것은 이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을 변형시키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 된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변형시켰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 것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로만은 구원 얻을 수가 없고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 또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 월삭이나 절기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로만 얻는 구원을 변하여 그리스도가 있어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는다고 하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고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형시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되며 이단인 것이다. 천사의 지시를 받아 그렇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복음이며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형시켜서 가르치거나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 죄를 모두 사하셨으며,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므로 우리로서는 이 사실 을 믿으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믿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무엇을 잘해야만 구원받게 된다고 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외에는 모두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며 이것이 이단인 것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무엇을 이루셨는가?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를 다 이루셨다(계12:10)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또 이루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른 복음인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1:7) 오직 예수 안에서만 승리 또 승리한다. 할렐루야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이단적 교훈
한 마디로 행위를 강조한 율법주의를 가리킨다. 즉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으로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사상이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유대 종교에 익숙해 있는 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으로서 A.D.56년경에 씌여진 갈라디아 서신을 살펴보면, 이미 그 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 이같은 행위 강조의 율법주의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행위를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범죄한 후에 취한 최초의 행위는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새를 치장한 것이었다.(창 3:7)
양심의 고소,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은폐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온 인류가 답습한 행위 종교의 효시이다. 그리하여 이 행위 종교는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가인의 제사로 계승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범죄한 결과로서 이미 저주받은 땅의 열매로 제사를 드렸다.(창3:17) 그런데 주목해 보라. 창세기에서 "땅이 저주받았다."는 표현이 갈라디아에서 율법 행위 아래 있는 자들이 "저주아래 있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는 점을!
요건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 양과 기름으로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땅의 소산, 즉 범죄한 인간의 행위 종교와 노력의 산물을 바친 가인의 인간 공로 제사는 열납 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창4:1-5) 더 나아가 이 율법주의는, 율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 발전 되었는 바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한 소치였다. 율법의 주된 의의는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구속자를 갈망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헬라의 부유층 자제를 훈육하는 가정교사로서 자제들을 학교에까지 인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함)이 되어, 모든 죄인들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게 한다.(갈3:19,24, 롬3:20,7:7이하)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는 도덕법과 의식법이 있어 의식법은 폐해졌으나 도덕법은 그 효력을 계속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탁월한 성경 교사로 기독교계에 알려진 독일의 에릭 사우어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율법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불가분의 단일체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법법한 자가 되나니(혹은 율법 전부를 지킬 책임이 있으니)(약2:10,갈3:10). 그러므로 도덕적인 율법과 의식적인 율법을 구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의식적인 법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으며, 도덕적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도 성취되지 아니해서 지금도 꼭 준수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등 마치 두개의 율법처럼 만들기 때문이다"(세계 구속의 여명, 에릭 사우어 저, 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P.243)
실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완전성을 보여주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로서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다.(갈3:19) 예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사 친히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10:14)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렇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은 자이다.(롬7:4) 결국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소욕을 부정하고 성령의 인도함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권고 받고 있다.(롬8:4-6, 갈5:16-26) 그러나 사실상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법 아래 삶으로서 율법 아래 살 때보다 더 거룩하고 수준 높은 경건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단에 대한 오해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약 이천년 정도를 지나오면서 순례하는 교회로서 모진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때로 참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박해를 받아 왔는가 하면, 역으로 거짓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 정통 신앙의 고수자로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에 여기서는 이단에 대한 오해 및 잘못된 판단들과 그 문제점 등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이단에 대한 그릇된 판단 기준을 살펴보자.
[1]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교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도는 한국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경우 교인기리 만나면 최초로 던지는 질문이 "무슨 교파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느냐"이다. 이는 물론 쉽게 이단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중생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교제가 어느 교파 소속 교인인가 보다 훨씬 중차대한 문제이다. 교파 소속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끗느 교파에 소속되었으며, 그가 오늘날 이곳에 있다면 무슨 교파를 지지했을 것 같냐?" 반문하고 싶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파주의로 전락할 위험성을 감지 통탄한 바 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한 자라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2-13)
요컨대, 기존 교단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면 무조건 잘못된 교회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기실 미국 기독교계의 경우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아도 정통 신앙을 고수하며 복음을 증거 하는 교회들이 많다. 이같은 교회를 일컬어 "독립 교회"(Independent Church)라 부른다. 요즘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자, 강해 설교자 중의 한 분으로서 <두란노 서원>과 <생명의 말씀사>의 번역서를 통해 한국 교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바 있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목회 하는 "은혜 공동체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의 경우를 보자. 그 교회는 어떤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으나 2만 가량의 교인을 둔 교회로 미국에서 여타 교회의 귀감을 손꼽히는 교회 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와 비슷하게 독립 교회를 하면서 미국 기독교게, 그리고 한국에도 "영적싸움", "그리스도의 지체"등의 역서로 잘 알려진 레이 스테더만(Ray Stedman)이 목회 하는 "반도 성서 교회"(Peninsula Bible Church)를 보자. 이 교회 역시 기존 교파와 무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교파를 초월해서 모이고 있는 수 많은 독립교회가 결코 이단의 시비를 받아본 적이 없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진 전도자요 선교 학자로서, 교인 한 가정에 한 사람 꼴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는 캐나다의 "민중 교회"(Peaple"s Church)의 목회자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의 글을 되새겨 보자.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거기서는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오순절교인, 플리머스 형제단, 성결교인 등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만 상봉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저서"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중에서)
[2] 집회 시간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물론 과거 사도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도 신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및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 또한 성령의 역사와 교회 성도간의 친교, 사죄와 성도의 몸의 부활, 영생 등, 이 모든 주제들은 신구약 전반에 걸친 기독교 핵심 교리이다.
게다가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서 제시한 바,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 동안 간구해야 할 기도의 요약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규 집회시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릇된 판단 기준이 문제인 것이다.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그릇된 잣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도 신경은 단순한 암송의 단계를 넘어서 성도 전 생애를 통한 일관된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은 단지 자기 중심적인 기도만 일삼는 무리에게 기도의 내용과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되어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바, 성도 전 생애를 통해 실현되어야 할 기도 제목이자 약속이다. 사실상 집회 시간마다 이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과 그것을 삶 속에서 믿고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요컨대, 마음으로 깊게 동의하거나 신뢰하지 않고서도 일사천리로 줄줄이 그것을 암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상담 경험을 통해서 하는 말이다. 물론 암송할 뿐더러 암송한대로 믿고 실천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같이 외모만 보고 사람들과 모임을 판단하는 일은 진정 무지의 소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강단 휘장에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잘못되었다는 견해
차제에 또 한 번 유치한 내용 같지만, 다루어 보자. 사실 "십자가 상징물이 없으면 이단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더러 만나 보았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십자가 없는 교리와 교훈은 곧 전통 기독교 신앙을 떠난 자유주의 사상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고로 십자가는 구약의 온전한 성취인 신약 전반에 깊게 깔려 있는 바, 전통 신앙의 토대이자 주춧돌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 로마법으로 어떤 죄인을 극형에 처할 때 쓰는 처형틀로써 저주받은 것을 상징했다(신21:23, 갈3:13). 실로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케 해주셨다.(고후5:18-21)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코 몸에 걸치고 다니는 악세사리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성도가 전 생애를 통해서 증거 해야 할 전도의 중심 내용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2-23)
더 나아가 십자가는 우상으로 전락해서도 안된다. 아니, 십자가가 우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불행스럽게도 그럴 수 있다. 구약의 유다 왕 히스기야는 왕으로 등극한 후 곧 바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그 때 그는 거의 만든지 800여년 간이나 된 모세가 만든 놋뱀을 향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향하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수고 단지 "놋 조각"이라 칭하였다.(왕하18:4) 놋뱀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진대 십자가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로마 카톨릭은 그 같은 죄악을 십 수세기 동안 자행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심령에 십자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그가 다니는 예배당 건물에 십자가 상징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멋진 십자가 상징물을 세운 예배당에 출석하면서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피 뿌림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강조하되,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십자가를 강조하고 전파하라.
[4] 영원한 속죄(구속)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견해
사단이 극히 간교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드는 기독교 진리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계를 향한 사단의 이같은 전술전략은 가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올바른 확신도 없이 교회에서의 여러 봉사에 온 정성을 쏟고 있으니 말이다.
사단은, 소위 은사 체험, 즉 방언, 예언, 환상 등에 몰두하고, 병을 치유하는 등 신유집회에 관심을 쏟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귀신론 교리에 집중하는 자들을 결코 경계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서도 그 같은 신비적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방 종교인 이슬람교도나 기독교 이단 중 하나인 몰몬교(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들도 방언 등 신비적인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중병을 치료받은 기적은 자랑하지만 막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진리는 모르거나 거절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단은 인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평가절하 시키려고 획책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극소화시키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우리 지난날의 죄는 완전히 처리했으나 현재 범하는 죄는 자신의 회개를 통하여 해결, 구원받는다는 식의 변질된 복음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있다. 이 같은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이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탄식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 같은 가르침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며 가히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주어진 노력의 대가라고 본문의 내용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결국 사도 바울의 구원관을 반박하는 행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실상 그리스도의 공로가 지난날의 죄는 해결해 주었지만, 현재 살면서 짓는 죄는 그 때마다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받아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만일 회개하지 못한 죄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반감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밝히 말하기를, 구원은 우리 행위(회개하는 행위 조차라도)가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선물임을 명백하게 선포한다.(요5:24, 롬3:23,24,28, 4:5, 딛3:5, 유1:3)
주님은 온 인류의 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약 이천년전에 해결해 주셨다. 우리의 죄 값을 다 갚아 주신 것이다.(요19:30) "다 이루었다"의 원어적 의미는 "다 갚았다"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구속)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여기 히브리서 9:12의 영원한 "속죄"는 구속(Redemption)이란 뜻인데, 이에 대해 금세기의 탁월한 강해 선교자로 알려진 바 있는 마틴 로이드 죤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구속이란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서 7회, 히브리서 2회, 누가복음에서 1회, 이렇게 해서 신약 전체에 10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결과로서 해방을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마귀의 노예인 우리를 속(贖)하여 인도하여 내기 위해 오셨고 또한 그는 값을 지불하셨다. 고로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혀 있던 감옥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롭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자기의 공로로 우리를 사시고 자유롭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단번에 용서함 받았고 오직 그분에 의해 사단의 능력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 강해 1, 로이드 죤스 저, 서문강 역, CLC, P85,87)
따라서 구원받은 것(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근거로 믿음을 통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회개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강조하는 바이다. 이에 대해 확실히 해 두고자 다른 분의 견해를 살펴보자.
성경 교사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윌리암 맥도날드는 신약 주석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주님께서는 갈보리에서 구속 사역을 완전히 성취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단번에(once for all)란 용어를 보면서 도저히 기쁨을 멈출 수 없다. 주님은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영원히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제 주님의 피는 그 효력이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의 죄,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게 될 사람들의 죄를 깨끗케 하기에 충분하다"(Believer"s Bible Commentary, Nelson, P.1001)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현재 살면서 범하는 죄에 대해 자백과 아울러 회개하는(죄에서 돌아서는 행위) 삶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회개라는 반복적인 행위가 구원의 조건인 양 가르치는 교훈이 비성서적이라는 뜻이다. 반복하건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과거에만 적용되고, 현재의 범죄는 자신의 회개라는 수단과 행위를 통해서 결국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면서 자백(혹은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빛 가운데 계신 주님과 동행하려면 이 같은 삶이 없으면 안된다. 그러나 한 번 구원받은 자녀의 신분은 만에 하나 그가 범죄했더라도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범죄할 때 곧바로 주님과의 교제가 깨져 영적 상태가 악화 될 수는 있다. 따라서 속히 죄악을 토설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투명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결코 멈춰서는 안된다.
결 론
위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 가운데 중요한 교리들을 더듬어 보았고, 또한 현대 한국 기독교계가 이단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는 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미 성서적인 정통 신앙을 떠난 이단들, 예컨대 천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등과, 교주들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신흥종교나 재림의 날짜를 지적하는 그릇된 종말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재론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 이곳에는 다루지 않았다.
사실상 여기서는 한국 기독교계 중, 기존 교단에 속해 있지 않으나 성경적인 정통신앙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 기존 교파에 소속한 사람들의 섣부른 정죄와 그 기준들의 허구성을 지적함으로써 올바른 분별력을 갖도록 시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특정 교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나 묵묵히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게 믿고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하고 격려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