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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공사례의 원조 독농가 하 사용(河 四容) '가난은 나의 적'
충북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 3구 454번지
(1) 첫 머리에
하 사용 씨의 사례를 소개하는 데는 약간의 서론이 필요하다.
그 분의 생애는 우리나라의, 우리 농촌의 근세사의 집약이요, 한 농부의 입지전적인 이야기다. 입지전이란? 어느 한 사람이 그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룩해낸 이야기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입지전은 우리 생활의 어느 분야에도 있다. 자기의 뜻을 순리에 따라 남다른 슬기와 지혜, 끈기로서 일구어냈을 때 본받을 만한 입지전이 되는 것이다.
하사용 씨는 별난 분도 특별한 분도 아니다. 그분의 생애는 극히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 농민들의 생애이고, 겪어온 수난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다른 것은 순응만 해온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이라도 생각을 하면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고, 처음 세운 뜻을 버리지 않고, 그 일에만 매진해서 성공을 했다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성공사례라는 말이 생기도록 했다. 그분의 소박한 이야기는 박 정희 대통령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감명을 주었고, 이 일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 입지적인 농부의 탄생
하사용 씨가 태어난 곳은 조치원에서 청주로 가는 국도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미호천 제방 옆이다. 이곳은 원래 애장 터, 떼집 거리 등으로 불리던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다. 옛날의 지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정상적인 마을이 자리한 곳은 아니다.
버려진 황무지에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이나 떼집을 짓고 기거하던 곳이라 몇 집이 모여 살게 되어 마을이 형성된 빈민촌이었다.
하사용 씨는 진양 하 씨 사직공파 28세손으로 1930년 4월,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서 사용(四容)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친은 한학(漢學)을 하신 분으로 생활에 소극적이었고, 어머니 역시 평범한 그 시대의 농촌아낙으로 남들과 같이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농토라고는 한 치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날품을 팔았고, 어머니는 떡 장사나 묵 장사를 하면서 연명했다. 8남매를 포함하여 열 식구도 더 되는 대가족으로 이 가정이 겪어야 하는 가난은 이 시대의 어느 집 사정보다 더 어려웠다.
움막과 떼집은 말이 집이지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운편이었다. 방바닥에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깔고, 흙을 이겨 덕지덕지 붙인 벽의 갈라진 틈에는 빈대들이 낮에도 기어 나온다. 기저귀가 없어서 아이들이 똥을 싸면 개를 방으로 불러들여 혓바닥으로 핥도록 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서 아이들은 벌거숭이로 주린 배를 달랜다.
농사지을 땅 한 뼘 없는 처지들이어서 들과 산을 돌아다니며 나물이나 풀뿌리를 캐야 했고, 운이 좋을 때는 양조장의 술찌개미, 엿방의 엿밥, 두부집의 비지 등을 얻어 와서 배를 불려보는 수도 있었다.
날품을 팔아봐야 끼니를 이을만한 보리쌀도 살수 없을 정도였다. 애장터, 떼집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은 모두가 비슷했다.
이러한 처지에도 사용(四容)은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러웠다. 철부지 사용은 부모님을 졸라댔다. 매를 맞으면서도 어머니를 볼 때마다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야말로 애를 태운 것이다. 견디다 못해 어머님의 결단으로 8살 되던 해에 강외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은 했지만 입은 옷도 남보다 남루했고, 때가 되어도 먹지도 못하는 처지여서 다른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맛있게 도시락을 먹지만 사용은 주린 배를 움켜지고 운동장 한구석으로 피신을 해야 할 처지였다. 두레박 우물가에 가서 물을 들이켜 보지만 몰려오는 허기는 더하기만 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참으며 1학년은 버티었지만. 2학년이 되면서 밀려 있는 월사금(수업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한 달에 50전하는 월사금을 내지 못하여 교실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사용은 이때부터 가난의 슬픔을 뼈저리게 겪었던 것이다. 이런 수난을 거듭하면서 6개월의 월사금이 밀렸을 때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학교 2학년 중퇴, 이것이 사용의 전체학력이다.
학교가고 싶어 애걸하는 자식 소원하나 못 풀어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갖을는지 모르지만, 그 시대에는 이런 처지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날품도 팔 수 없는 겨울에는 고지 쌀(노동으로 갚는 쌀)로 연명을 하고, 다음해 봄부터는 그 품(고지품)을 갚기 위하여 등골이 빠지도록 일만 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악순환)이었던 것이다.
학교를 못가는 사용의 마음도 아팠겠지만.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학교를 보내지 못하는 부모들의 마음은 더 했을 것이다. 사용은 아픈 마음을 달래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학교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논들을 배회하면서 올비(풀뿌리)나 주어먹었다.
이러한 딱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도 안타깝게 했다.
이웃마을에 사는 면서기 아저씨는 사용이 10살이 되던 해에 주재소(면 단위 경찰지서)에 소사(심부름꾼)로 취직을 시켜 주었다.
(3) 학교 중퇴 주재소 취직
주재소에는 순사들이 있는 곳이다. 이 시대에는 ‘순사가 온다.’면 울던 아이도 그칠 정도로 순사들은 무서운 존재였다. 사용이 10살은 되었다 하더라도 순사가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순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심부름을 하라고 하니, 밥이라도 얻어먹을 욕심에 주재소에서 일은 하지만 옆구리에 긴 칼을 차고 눈을 부라리며 다니는 순사들을 볼 때는 무서운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듣기만 해도 무서운 순사들과 함께 사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를 더욱 자지러지게 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일본 순사 한 사람이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 황소의 기다란 신(腎:penis) 하나를 가져와 사용에게 한쪽을 잡으라고 하고는, 그곳에 굵은 철사 두 가닥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주재소 벽에다 걸어놓고 말리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하게 생각한 사용은 그것을 무엇에 쓰는 것이냐고 물어 보았으나 일본 순사는 두고 보면 알 것이라면서 대답을 피했다. 그 후 그 물건이 다 말라갈 즈음, 면사무소에 심부름을 갔다 오는데 주재소 안에서 사람의 비명소리와 무엇인가를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사용이 조심스럽게 주재소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까, 일본인 순사는 황소 신으로 만든 회초리로 안면 있는 인근마을 어른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옷 위라고는 하지만, 허술하게 입은 옷 위는 맨살이나 마찬가지인지 회초리가 닿은 곳마다 선혈이 줄을 이으며 돋아난다. 얼마를 맞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매를 더 할수록 때리는 순사 놈도 독이 점점 더 오르는지. 매질은 더욱 사나워지고, 매 맞는 사람은 비명이 신음소리로 변해 버렸다. 한참 난리를 치고 난 순사는 짐승보다도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가버렸다.
무서움에 질린 사용이 얼마 동안 문도 열지 못하고 밖에서 떨고 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필시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매 맞은 어른을 들여다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매 맞은 어른은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엎드린 채 손짓으로 물 좀 달라는 시늉을 했다. 사용은 좀 떨어져 있는 민가로 달려가 바가지로 물을 퍼와 일어나지도 못하는 매 맞은 어른의 입에 갖다 댔다. 그 어른은 그 지경에서도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 어른은 매 맞는 이유를 말할 형편도 되지 못했고, 사용도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그 어른은 일본 북해도에 징용(보국대)으로 끌려갔다가 병환 중에 있는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탈영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를 맞고 돌아간 그 어른은 얼마 후에 다시 징용으로 끌려갔다.
사용이 배가 고파서 주재소에 취직은 했지만,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산에서 생나무를 벴다는 이유, 집에서 술을 해 먹었다는 이유, 자식을 징집에 보내지 않고 빼돌렸다는 이유 등으로 매일같이 사람들이 끌려와 그 징그러운 황소 신으로 매타작을 받는 것을 보아야 했다.
주재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되어 더욱 신바람이 난 사람들도 있었다.
사용에게는 이 모습들이 매일 밤 악몽으로 나타났다. 나이도 어리고 배움이 부족했으니 심부름인들 제대로 했을 리 없다. 그래서 처음으로 얻은 주재소 일자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개월 만에 끝이 났다.
(4) 넝마주이, 나무장사
밥이라도 얻어먹던 주재소 일자리를 잃은 사용의 배고픔은 다시 시작되었다. 가족과 자신의 연명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는 넝마주이를 했다.
그 시절에는 버리는 것도 귀해서 주워 모을 것도 별로 없었다. 마을 어귀를 돌고, 조치원 읍내를 돌아다니며 종이, 철사, 유리조각, 헌 고무신, 버려진 기저귀 등 고물을 빈 자루에 주워 모아 고물상에 갖다 주고 좁쌀이라도 한 줌씩 사왔다.
이 일도 쉽지 않았다. 고물을 줍는 또래의 아이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겨울에는 춥기도 할 뿐 아니라, 눈이라도 내리면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아 넝마주이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나무를 해다 팔았다. 나무 한 짐을 하기 위하여 10 리 이상을 가야했고, 나무를 하다가 산림순시원이나 산 주인에게 발견될 때는 연장들과 나무지게까지 팽개치고 도망쳐야 했다. 그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주재소까지 끌려가게 되므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나무를 했다고 해서 돈이 곧바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조치원 장날 지고나 가면. 나무가 덜 말랐다느니, 적다느니 온갖 이유로 해질 무렵까지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는 값은 둘째가 된다. 다시 집으로 지고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기져서 지고 갈 힘도 없지만 그 나무를 팔지 못하면 가족들이 끼니를 이을 수 없다. 사정을 해서라도 나무를 팔아야 한다. 이러한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가난과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이듬해 봄이 되어 넝마주이를 다시 시작해 보지만 자기구역이 없고, 패거리가 없는 사용으로서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패거리로 몰려오는 양아치들에게 몰매를 맞는 수가 많아졌다. 이제는 얼굴이 익혀져서 조치원 읍내는 갈 수가 없었고, 조치원 읍내가 아니면 주워 모을 것이 없다. 더 이상 넝마주이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나이는 어리지만 엿장수를 해 보기로 했다.
큰 밑천이 드는 장사가 아니어서 힘은 모자라도 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조치원 읍내 엿 공장에 가서 엿을 받아 지게에 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돈다. 어린아이들이나 아주머니들이 못쓰게 된 삼베옷 걸레, 찢어진 고무신짝, 부러진 숟가락, 담뱃대, 깨진 보습 등을 들고 나와 엿으로 바꾼다.
하루 종일 엿 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저녁나절이 되면 바꾸어진 고물 짐도 무겁지만 허기가 져서 기진맥진하게 된다. 아침에 신고 나간 새 짚신도 바닥이 다 달아 맨발로 걷게 되지만. 고물을 엿 방에 팔아 돈을 받는 순간에는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
힘은 더 들지만 넝마주이보다는 수입이 좋아 하루 종일 번 돈으로 보리쌀 두 되, 좁쌀 한 되는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된다는 보람으로 어린 몸으로 힘겨운 엿장수를 몇 년을 계속할 수 있었다.
(5) 해방, 그리고 새로운 농업기술 터득
사용이 17세가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 금방 잘살게 될 것 같던 생각도 잘 못이었다. 해방이 되었어도 가난은 여전했고, 사는 방법이 달라진 것도 없었다.
하고 있는 엿장수도 연명은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되지 못하였다. 엿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도 항상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이 원수 같은 가난을 벗어 날 수 있을까?’였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엿장수를 하고 다니는 인근 마을에 중국 사람이 채소농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국 사람이 심는 무․배추는 해마다 잘 된다. 한국 사람들이 심는 조선배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도하고 속도 많이 찬다.
사용은 이상했다. ‘다 같은 배추씨를 심을 텐데 어떻게 중국사람 배추는 저렇게도 잘 자랄까?’ 엿 장사를 마치고 마을에 돌아온 사용은 아버지와 어른들에게 물어본다. ‘다 같은 배추를 심는데 왜 중국사람 배추는 그렇게 큰가요?’ 어른들은 중국 사람은 기술이 있어서 잘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기술이 없는가 하고 물어보면 기술은 아무라도 갖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용은 어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중국 사람이 갖고 있는 농사기술을 왜 우리는 가질 수 없단 말인가? ‘ 중국사람 같이만 농사를 지으면 농사도 돈벌이가 될 것 같았다.
엿 지게를 중국사람 채소밭 옆에다 받쳐 놓고 중국 사람이 농사하는 것을 보기라도 할 양으로 지체를 하면 중국 사람은 ‘저리 가라’는 손짓을 한다. 무슨 큰 비밀이라도 있는 듯 사용이 얼씬거리면 별다른 일을 하지도 않는다. 사용은 마음을 먹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기술이라는 것을 밝혀내야지‘
엿 장사도 별로 신통치 않아서 채소장사를 하기로 했다. 중국 사람이 생산한 무․배추, 오이, 호박 등을 지게에 지고 조치원 시장 또는 주변의 전의 장이나 옥산 장에 내다팔았다.
옥산 장이나 전의 장을 보려면 삼사십 리길을 걸어야 한다. 무거운 채소를 한 짐 가득 지고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다. 혼자서 걷는 새벽길에는 희미한 달그림자와 산 속에서 들리는 짐승소리가 같이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남보다 일찍 장터에 도달하면 그 먼 곳에서 벌써 왔느냐고 격려해 주는 아주머니들과 남보다 먼저 다 팔고 나설 수 있는 재미가 있어 항상 새벽길을 나서게 된다. 오는 길에는 은주산에서 땔나무를 한 짐 해 지고 온다. 닳아빠진 집신 때문에 발바닥이 아리고, 어깨가 내려앉는 것 같고, 주린 배가 쓰려오지만, 사용이 그 정도의 고통을 참는 데는 벌써 이골이 났다.
뿐만 아니라 엿장수보다는 수입이 나았고, 중국 사람의 농사기술을 엿볼 수 있어서 사용은 채소장사를 계속했다. 중국 사람도 남보다 열심히 하는 사용에 대한 경계심도 누그러졌다.
다음해 배추파종을 할 때 사용은 중국 사람의 배추씨 두 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귀중한 보물이라도 얻은 듯 조심스럽게 집에 가져와 집에 있는 배추씨와 비교해 보았다. 겉모양은 같았다.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사람이 심을 때에 맞추어 두 가지 배추씨를 마당가에 같이 심었다.
심는 방법도 중국 사람과 같이 잘 썩은 퇴비를 골고루 뿌리고, 밭을 곱게 다듬은 다음 배추씨 한 알 한 알을 정성껏 심고, 엷게 흙으로 덮은 후 고운 풀을 뜯어 덮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상태를 보아가면서 물을 주었다.
그런데 사용이 중국사람 농장을 드나들면서 한국 사람이 배추를 심는 방법과 중국 사람이 배추를 심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한국 사람은 배추는 해마다 같은 밭, 같은 장소에 심는다.
그러나 중국 사람은 작년에 배추를 심은 자리에 또 배추를 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 금년배추를 심고 있었고, 배추밭을 갈 때도 우리같이 대충 거름을 넣고, 고르고, 배추씨를 선 자세로 훌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숙성된 퇴비를 골고루 뿌리고 흙을 곱게 다듬어 이랑을 만든 다음 배추씨를 한 알, 한 알 정확한 간격으로 심었고, 흙을 덮을 때도 천천히 고르게 덮어주었으며 싹이 어느 정도 힘을 찾을 때까지 마른풀을 덮어 보호했던 것이다.
사용은 중국 사람이 하는 대로 해 보았다. 배추씨가 싹이 트고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두 가지 종자에서 차이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두고 보라’고 하셨다. 결과는 보나마나 다를 게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배추가 중간쯤 자랐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사람 농장에서 구해온 배추는 속잎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무슨 병이 든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사용은 그런 상태로 정성을 계속했다. 매일같이 돌아보며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가을추수 때가 다 되어 갈 즈음에는 답이 나왔다. 우리 배추는 아직도 잎이 있는 대로 넓게 벌리고 속이 찰 줄을 모르는데 중국사람 종자는 속이 차기 시작하더니 보기에도 탐스러운 중국사람 배추 같은 모양을 갖추었다. 서로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도 차고 크게 자랐다.
사용은 알아냈다. 별다른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더해야하고, 종자를 잘 골라야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국 사람이 길러놓은 채소를 팔아왔는데 직접 생산을 해서 시장에 판다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사용은 땅이 없었다. 한 치의 땅도 없는 것이다.
(6) 6․25동란, 인민군, 빨치산, 탈출, 포로…….
1950년 여름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남의 집 모를 심으러 가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른들이 난리가 났다고 하면서 철길을 가리킨다.
미호천 뚝방 너머로 깔려 있는 경부선 철로, 하행선 기차에는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타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힘겹게 지나가는가 하면, 큰길 신작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보퉁이를 이고지고 아이들을 걸리면서 길이 메이도록 내려가고 있었다.
당황한 어른들은 심던 모를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 걱정들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젊은이들은 모두 피난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은 동네 친구들과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대로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긴 하지만 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노숙을 하면서 삼일동안 걸어간 곳이 금산이었다. 금산까지 가고 보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돈도 없었고, 날이 샜을 때는 인민군이라는 사람들이 사용보다 앞장서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피난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인민군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 인민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인민위원장이 불러서 갔더니 인민군이 입회해 있고, 같이 피난 갔던 일행 모두가 불려와 있었다.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추궁하면서 인민군에 입대하라고 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거절을 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끌려갔다.
방향도 모른 채 한 달 만에 당도한 곳이 평안도 강동 인민군야영소라는 곳이었다. 이곳이 인민군훈련소인 것 같았다.
그날 밤 친구들과 같이 의논을 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훈련을 마치면 전선으로 나가 전쟁을 할 텐데, 전쟁터에 나가면 죽음을 당할 게 뻔한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을 바에는 탈출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러 친구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모두 잠든 틈에 막사를 빠져나와 대동강 강가에 도착했다. 별만 보이는 칠흑 같은 밤에 방향도 모르고 산 속을 헤매다가 인민군들에게 다시 잡혔다.
그들은 탈영병임을 쉽게 알아차리고 날이 밝자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사형집행 직전의 순간에 미군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혼비백산 모두가 방공호를 찾아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다시 산 속으로 도망을 했다.
한번 잡힌 경험이 있어 조심조심 하면서 야음을 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갔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개성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군이 도착해 있었다. 아군들을 보았을 때는 이제는 살아난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말했더니 자수를 하라고 해서 경찰서로 찾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아군 또한 자기편이 아니었다. 자신들은 인민군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지를 않았다. 며칠 후에는 미군들이 와서 그들을 잡아가면서 포로취급을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목에는 포로 번호표를 걸어 주었다. 그때는 사상여부를 파악도 하지 않고 남녀를 불문하고 잡히기만 하면 포로라고 했다.
이리하여 사용은 미군들의 엄한 감시 속에 처음 끌려간 곳이 인천소년형무소, 그 다음에는 동래수용소를 거처 거제도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악명 그대로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빨갱이들이 주동이 되어 폭동을 일으키고,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토막을 내어 죽이는가 하면,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했다. 그 상황은 이루 다 표현을 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포로자유송환이 발표되면서 사용은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것으로 인정 되어 경북 영천수용소를 거처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기는 고생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연명을 위하여 품팔이를 다니셨다.
집에는 돌아왔으나 어린 동생들을 포함한 가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한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사용은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먹고살기 위하여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한 겨울에 군 입대 징집영장이 나온 것이다. 또 그 어려운 가족을 남겨두고 군에 가야하는 것이다.
군에 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빠지고 생계대책도 없는 처지의 자신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입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더 서러웠다. 가난은 생명까지도 보호하지 못한다는 한이 매쳤다. 그때는 전쟁 중이어서 입대는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사용으로서는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을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은 최전방 강원도 양구 문동리 20사단이었다. 이때도 돈 없는 설움을 뼛속 깊이 받았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훈련도 수월하게 받고, 후방으로 배치를 받는데 돈이 없어 포연(砲煙)이 자욱한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신병으로 전투경험이 없어서 전투에 투입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부상을 당하였다. 63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원대 복귀되었다.
또다시 부상을 입었다. 이번에는 109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던 중 폐결핵에 걸려 치료불가능 판정을 받아 의병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으나 가난한 형편에 폐병치료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정성과 휴식덕분으로 조금은 회복되어 가벼운 거동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공사례의 원조 독농가 하 사용(河 四容) '가난은 나의 적' 2부 |
글쓴이 : 우보 조회 : 14 |
(7) 결혼, 그리고 농사시작 사용이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숙부께서 짝을 지어야 산다면서 중매를 서둘렀다. 그러나 가난한 형세에 넝마주이 엿장수, 인민군포로, 폐병환자 등의 좋지 않은 평판은 다 갖춘 사용의 처지로는 좋은 혼처가 나올 리가 없었으나, 그래도 인연이 닿아 청원군 오창면 상평리에 사는 신 경복이라는 처녀와 중매결혼을 하게 되었다. 오창면 상평리는 강외면 정중리에서 50리길도 더 된다. 장가가는 날 남의 집 두루마기를 빌려 입고 차비를 아끼기 위하여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추웠든지 사용은 장가가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고 한다. 사용의 처가는 산 속에 있는 외딴집이었다. 가까이 당도해 보니 사용의 집보다 나을 데가 없는 토담집이었다. 이 집에서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하는 혼사였다. 문자 그대로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예를 올리고, 홑청 없는 단 한 채의 이불을 혼수로 받아 지고 신부와 같이 집으로 왔다. 그래도 집으로 올 때는 2십리 길을 걸어 나와 기차를 탔다. 신부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랑이 좋다, 건넌방이 좋다’하지만 가정도 꾸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남의 식구를 데려다 놓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신부와 의논할 염치도 없어서 이른 봄 어느 날, 신부가 잠든 틈에 밤길을 나섰다. 걸식을 하면서 정처 없이 발이 닿은 곳은 강원도 춘천의 어느 부잣집이었다. 요행히 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할 수 있게 되어, 1년에 쌀 4가마니를 받고 3년을 살았다. 그 동안 늘어난 이자 3가마니를 더하여 15가마의 쌀을 모았으나, 사용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일은 열심히 해줄 수 있었지만. 정도 들지 못한 새색시에게 소식 한 마디 전하지 못하는 마음고생은 더했다. ‘이 15가마니의 쌀로 그 원수 같은 가난을 몰아내리라‘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거칠어진 아내의 손목을 잡았을 때 사용은 솟구치는 설움을 주체할 수 없었으나, ‘이제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다짐을 하며 위로했다. 아내의 고생인들 오죽했을까. 소식도 없는 자신을 기다려 준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다. 피 맺힌 쌀 15가마니를 밑천으로 하천부지 밭 270평을 살 수 있었다. 한쪽에 움막을 짓고 처음으로 가정을 꾸렸다. 이제는 부러울 것이 없다. 열심히 일만 하면 된다. 부부는 그렇게 하고 싶던 채소농사를 시작했다. 밤이 어둡도록 모래밭에 흙을 퍼 날랐고 새벽이면 조치원 읍내에 가서 인분을 퍼 날랐다. 때로는 인분을 푸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인분 통이 박살이 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늘어나는 옥토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고 힘들지 않았다. 사용은 농사를 시작하면서 하나의 마음자리를 정하였다. ‘사람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첫째 일원 한 장 함부로 쓰지 않고 수입범위 안에서 지출한다. 둘째 남이 놀거나 화투를 쳐도 나는 일을 한다. 셋째 항상 남보다 일을 더 한다. 넷째 작은 돈, 큰돈을 막론하고 저축을 한다. 그리고 1차, 2차의 구체적인 10개년계획을 세웠다. 매일 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20년 계획을 세웠다. 목표는 내 땅 만평을 가질 때까지……. 그렇게 한 다음, 옛날 채소장사를 할 때 채소를 받아오던 중국인에게 가서 배추종자를 좀 팔라고 부탁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조선 사람은 비싸서 살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종자를 가져가봐야 기술이 부족해 자기같이 재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은 포기하지 않고 종자를 살 수 있는 곳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사정을 했다. ‘네가 종자를 사와야 어떻게 나같이 기를 수 있을까?’라는 심사인지, 대전 어디에 가면 살 수 있으나 값이 아주 비싸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알려주었다. 묻고 물어 대전의 씨앗가게를 찾아갔다. 중국 사람이 말하는 씨앗 값은 월등하게 비쌌다. 우리 재래종 배추씨는 홉 단위로 팔았는데, 사고자 하는 신품종은 작은 숟가락으로 팔면서 돈은 더 달라고 했다. 그렇게 비싼 씨앗이니 훌훌 뿌려서는 안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심고 가꾸었다. 채소들은 공을 들인 만큼 잘 자라 주었다. 중국사람 농사에 조금도 손색없었다. 처음으로 배추 한 지게를 지고 조치원 장에를 나갔다. 배추 짐을 내려놓자 사람들이 몰려왔다. 얼마를 받아야 할지도 몰라 두 단에 쌀 한 되갚을 불렀다. 에누리를 하자는 사람도 없이 삽시간에 배추 한 짐이 다 팔렸다. 정신없이 다 팔기는 했지만 사용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받아도 되는가? 처음으로 만져보는 알찬 수입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는 배추가 더 있는가 하고 물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상인인데 있는 대로 사겠다는 것이다. 물건이야 월등하게 좋았지만 값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 해 가을 농사로 사용의 처지로는 땅바닥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듯이 짭짤한 재미를 보았고, 다음해 봄부터는 상추, 오이, 호박, 파 등 여러 가지 채소를 골고루 심었다. 사용은 봄채소를 심으면서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며칠이라도 일찍 출하해야 값을 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 수확을 하기 위하여 일찍 심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 봄에는 아침으로 서리가 내리는데 서리를 피할 수는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때는 일부 학교에서 육묘를 하기 위하여 양지바른 곳에 땅을 깊이 파고, 두엄을 두껍게 넣은 다음 두엄이 부식하는 열로 온도를 높이고, 창호지에 기름을 먹여 서리를 막는 온상을 했다. 사용은 그 생각을 하고 양지바른 곳에 호박이나 오이를 심고, 기름종이로 서리를 막아주면 조기재배가 될 것 같아 방안에서 기른 모종을 심고 기름종이를 덮어주었다. 남들은 씨 뿌릴 생각도 하지 않는 이른 시기에 종이를 덮어 모를 낸 것을 보는 이웃사람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종이 속에서 작물이 어떻게 숨을 쉬고 사느냐?’ ‘종이 한 장으로 찬기를 어떻게 막느냐?’ 등 되지도 않는 짓을 한다고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그러나 몇 포기는 얼어 죽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오이, 호박이 남들보다 일찍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주었으며, 일찍 수확한 채소들은 값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상추 한 평을 수확하면 땅을 3-4평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재미를 보고 있는지 주변사람들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미친놈이 범 잡는다고 하더니 어설픈 재주로 돈 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용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묵묵히 일만 하고, 한 푼이라도 생기면 은행에 저금을 했다. 돈은 쥐고 있으면 쓰게 마련이다. 은행에 넣으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돈이 생기는 대로 저축을 하며 재미있게 일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또 시련이 찾아왔다.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해서인지 사용이 군에 있을 때 앓았던 폐결핵이 재발한 것이다. 온 방구석에 선혈을 토하면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주변사람들은 살아나려면 갖고 있는 땅이라도 팔아서 병원에를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용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땅은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다. 그 땅을 없앤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땅을 판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운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아내는 남자가 하던 온갖 일을 다 하면서, 병든 사용을 간호했다. 그때에 아내가 격은 고생은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고 한다. 땅을 팔지 않기 위해서는 농사일을 더 해야 했고, 죽어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는 몸에 좋다는 것은 없는 살림이지만, 무엇이나 해 먹여야 했던 것이다. 이런 아내의 지극정성 덕분인지 투병생활 3-4년 후에는 사용이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즐기던 술과 담배도 끊고, 자기는 살아나야만 한다는 집념이 그의 재기를 앞당겨 주었다. 이 투병기간 중에 아내는 자전거를 배웠다. 길러놓은 채소를 내다팔기 위해서는 머리로 이고 걸어 다녀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배우면서 무릎을 다치고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자전거는 다쳐야만 배우는 것이라고 타이르며 가르쳤다. 여자가 자전거를 타면 어떻게 된다고 사람들이 흉도 보았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쓸 형편이 되지 못했다. 자전거가 익숙해지니까, 한 짐이나 되는 채소를 한 번에 실을 수 있고, 걸어서 한번 다녀올 수 있는 조치원을 세 번은 다녀와도 되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1958년 90평을 시작으로 2-3년 간격으로 계속 땅을 늘렸다. 결혼 후 10여년. 1차 10개년계획이 끝났을 때는 최고의 적으로 삼았던 가난도 이길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자립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 사용 씨는 여러 가지를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어린 자식을 기르는 마음으로 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농민은 원래 가난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정성으로 일하면 도시처럼 살 수 있다. 그리고 농사꾼은 3가지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첫째 땅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사람처럼 땅마다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둘째 땅의 나이를 알아야 한다. 땅도 늙으면 결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셋째 땅도 병들지 않고 건강해야 한다. 질소를 과다시용(施用)하면 땅도 병이 난다. 이러한 기본을 알고 땅의 비위를 맞추어 나가면 틀림없이 생각보다 더 많은 수확을 가져다준단다. 농사기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란다. 하사용 씨는 어디 가서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농사의 원리를 터득한 독농가가 된 것이다. (8) 비닐하우스 시설원예의 창시 정부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을 끝낸 다음, 낙후된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67년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을 시작했다. 하 사용 씨가 사는 강외면에도 이 사업의 하나로 비닐하우스 시설채소단지가 배정되면서 하 사용 씨는 150평분의 융자를 받아 비닐하우스를 확대하고, 이 마을 주민들과 인근마을 농민들도 하우스재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사용 씨는 하우스재배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 동안 기름종이로 시작한 조기재배, 촉성재배, 보온시설재배 등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단체로 견학을 오거나, 이웃 농민들이 함께 실습을 하면서 시설채소 재배기술을 익혀갔고, 전국적으로 비닐하우스를 보급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했다. 이때 하 사용 씨가 자기 농장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강조한 말은 “첫째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둘째 배우거나 터득한 것은 남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셋째 아는 것은 반드시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9년 겨울에는 엄청난 눈이 내렸다. 3일 동안 밤낮으로 눈이 내렸던 것이다. 하 사용 씨 부부는 밤을 새워가며 내리는 눈을 치웠다. “저 눈이 쌓이면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고, 저 하우스가 내려앉으면 그 속에 가꾸어 놓은 채소는 다 얼어 죽고 빚만 남는다.” 다른 사람들은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두 내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내리 3일을 눈과 싸운 것이다. 눈이 그쳤을 때는 인근 마을을 포함한 모든 하우스들이 다 내려앉고, 하 사용 씨네 비닐하우스만 온전했다. 전국에서 설해가 컸기 때문에 그 해에는 채소 값이 아주 좋아 더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고, 비닐하우스는 800평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동상(凍傷)의 위협 속에 자연을 극복해낸 대가로 얻은 것이다. 전국으로 비닐하우스가 확대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득수준이 높아지게 되자 일반 소비자들의 성향이 변하고 있었다. 하사용 씨는 이것을 알아차렸다. 1차 10개년 때는 양적으로 생산을 많이 하면 소득이 올랐는데, 소비자들이 이제는 맛과 눈으로 상품을 고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어 농사방법을 더욱 발전시켜야만 했다. 과채류(果菜類)의 색과 모양이 더 좋아야 하고, 더 좋은 맛을 내게 하기 위하여 더 많은 퇴비(유기질비료)를 장만하고 시비(施肥)를 해야 했다. 같은 종자를 같이 사오고, 뿌려도 다른 농가보다 하루라도 더 일찍 수확하기 위하여 종자를 물에 붉혀서 파종했고, 적과(摘果)와 순치기에 더 정성을 들이는 등 더 많은 노력을 했다. 이러한 소문이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충북 도지사와 청원군수도 하사용 씨의 농장을 찾아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9) 박 대통령과 영농지도자 하사용 1970년이 되면서 농민들에게 영농기술 확산과 과학적인 영농의식을 높여주기 위하여 시‧군 단위, 도 단위, 전국단위로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 경진대회가 있었다. 농촌지도소의 추천으로 군 단위 경진대회에 나간 하사용 씨는 청원군에서 1등을 하고, 충청북도에서도 1등을 했다. 그렇게 되자 전국대회에도 나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게 된다. 경진대회에 나가려면 우선 자기의 행적을 원고로 써서 사전심사를 한 다음 내용이 좋은 후보자의 사례를 발표하는데, 하사용 씨의 경우는 일은 많이 하고 사례내용은 좋지만 본인이 원고를 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군에서 원고를 제출하라는 요청이 여러 번 있었지만, 쓸 수도 없고 그런데 나가려고 일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본인은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관계공무원들이 애를 태우고, 체험사례를 공무원들이 대신 쓰면서, 원고에 초등학교 2학년 중퇴를 졸업으로 하자고 하거나, 넝마주이나 엿장수 경력은 별로 좋지 않으니까 빼버리자 거나, 소득을 부풀리자고 해서 실랑이를 하는 수가 있었고, 도 단위 경진대회에 나갈 때부터 입지도 않고, 입어보지도 않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으라는 성화가 되풀이되었지만, 하 사용 씨는 끝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발표하는 연단에 올라가서는 원고는 아랑곳없이 자기가 해 온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상에 올라가면 우선 다리가 떨리고 앞이 캄캄해서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원고가 보일 리 없고, 원고를 의식하다가는 말머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겪어온 사실 이외에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전국대회에 나갈 때는 관계 공무원들과 높은 양반들까지 말 잘하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했고, 그가 단상에 올라갔을 때는 실수를 할까봐 안절부절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사용 씨는 잠바 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박 대통령과 3천여 명의 청중이 모인 단상에서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소개했던 것이다. 처절했던 과거를 되새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기설움이 북받쳐 몇 번이나 말문이 막혔고, 3천여 명의 청중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2층 특별석에 앉아 있던 박 대통령도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발표가 끝나자 모든 청중은 일어나 기립박수를 했고, 단상으로 내려온 대통령은 하 사용 씨의 목에 동탑산업훈장을 걸어주며 손을 잡고 “참으로 훌륭한 일을 했소.”하는 말밖에는 더 말을 잇지 못 했단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준비해온 치사를 접어두고 하사용 씨의 회고담을 들은 소감으로 치사를 대신하면서 “하 사용 씨 같은 분은 우리 농촌의 등불이요, 국민 모두의 스승이다. 우리나라 농촌의 빈곤도 하사용 씨 같은 정신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 고 하면서 하사용 씨 내외를 그 다음날 청와대로 초청하여 특별히 격려했다고 한다. 하사용 씨는 청와대에 갈 때도 역시 잠바와 고무신 차림이었다. 하 사용 씨의 성공사례는 박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구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의 사례는 새마을교육이 시작된 후에는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새마을운동을 확산 발전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특히 그분의 비닐하우스 시설영농기술은 실질적으로 잘 살게 되는 농가소득증대에 직접적인 교과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분의 농장은 3,000평의 비닐하우스와 7,000여 평의 농지를 갖게 되었고, 충청북도 농촌진흥원 4H기술교환농장으로 선정된 후 25년 동안 수백 명의 농촌후계자를 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견학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그분은 전국의 새마을연수원과 각 사회교육기관, 교도소, 기업체, 직장단체 등의 초청을 받아 3,000여 회의 강연을 했다. 그분의 이야기는 어느 계층의 사람들에게나 많은 감동을 주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분은 절대가난의 처지에서 부농이 되기까지 자기만을 위하여 일한 것은 아니다. 우선 형제들의 생활 기반을 안정시켜 가정의 평안을 확보했고, 지역발전에 시범과 참여를 통하여 공헌한 바가 커서, 본인은 극구 사양함에도 관내 농협분소 안마당에 송덕비를 세울 정도로 추앙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농업경제학 박사(박 진환)는 그분의 생애를 대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과 그 성과의 정신 기조를 분석하는 논문집을 발간하여 후대의 귀중한 자료로 남기게 하기도 했다. (10) 근면․자조․협동 새마을정신의 상징 하사용의 노익장 70대 중반에 접어든 요즈음 그분의 생활은 아들에게 농장운영의 대(代)를 넘기기는 했으나 당신에게 맞는 일거리를 만들어 하루도 한가로울 여가가 없다. 남들이 쓰다버린 생활용품들을 수집하여 집안에서 재활용하거나,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 사용한 편지봉투를 뒤집거나 지나간 달력, 이면지 등을 수집하여 각종 봉투를 만들어 본인이 쓰거나 관공서에 나누어주는 일, 일회용 종이컵을 모아 육묘(育苗)용으로 재활용하는 일 등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이 가득하다. 자녀들은 이제는 좀 쉬시라는 권고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생활신조이기 때문에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특히 조치원과 인근 기관에서 수집하는 일회용 종이컵은 농촌에서 필요로 하는 채소모종 재배용으로, 1년에 근 10만개를 소비한다. 쓰고 버린 종이컵에 각종 모종을 생산함으로써 주변농가에 건강하고 우수한 모종을 공급하여 농사에 크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노부부의 중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다. 유명하고 저명인사로 불리는 사람들이 외지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이웃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하사용 씨는 등잔 아래 이웃에서 인정받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의 칭송과 존경은 인근에서 더 높다. 그분은 항상 겸손하다. 내가 할 짓을 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자기가 배움이 더했더라도 이웃들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이상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남들이 알아주는 것이 보람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2004년 봄에는 오토바이가 넘어져 종아리뼈가 세 동강이가 난적도 있지만, 폐품 종이컵을 오토바이에 잔뜩 싣고 뚝방 아래를 달리는 하사용 씨는 아직도 활기차기만 하다. 2. 동영상 땀에젖은 훈장 가난을 이긴 부부(하사용 VTR) 종이컵 할아버지 신 자린고비 3. 육성 자료
하사용 사례발표 육성자료 : 용량관계로 추후에 올리겠습니다. |
4. 사진 기록
초기 어려웠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농장을 찾으신분들
성공사례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