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09월23일부터 24까지 전주에 사는 이종문 대부와 증손자뻘인 이천용 홈피지기가 메르스 때문에 미루어진 답사를 이번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끝내고 작전상 1박2일과 10여일을 머물던 위도와 선유도 그리고 고창 답사를 다녀왔다.
23일 새벽 05시 20분 첫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04시 반경의 용산역
인형인가 사람인가의 모양을 하고 있는 변산반도에 들러
변산 격포항에서
위도면사무가 있는 항(港) 입구의 모습 이곳은 1597년(정유년) 9월19일 춤무공의 일기에 칠산 (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너 저녁에는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을 들렀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는 곳이다. 우리가 마침 도착했을 때는 썰물 때였다.
위도면 진리에는 위도 관아가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위도진의 첨사가 근무하던 곳으로 관할지역이 고군산, 우포, 법성포, 금오포 등으로 규모가 큰펀이었다고 한다. 마당가에는 4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일기에 의하면 이곳 위도에서 하루를 묵고 선유도로 출발했다. 아마도 이곳은 배를 숨길데가 그리 충분치 않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작전상 선유도로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일행도 위도를 빠져 나오며 아름다운 풍광에 도취 했다. 그때의 참담하고 절망적이던 고통을 망각한채... 또한 이곳에서 장대라는 생선이 맛있기로 유명한데 우리는 처음 듣는 물고기 이름으로 현지나 친척들이 소비해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위도에서 나오며 바라보는 변산반도는 한 폭의 수묵화처럼 보인다. 격포에서 군산으로 향했다.
위도쪽에서 저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섬들이 고군산 열도 이다. 이중간 쯤에 선유도가 자리하고 있다.
정유년(1597) 9월21일 일기에 "맑다. 일찍 떠나 고구산도 (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던 곳이다.
선유도도 연육교가 한창 공사중이다. 돗단배 모양의 교각이 좌측에서 반긴다. 당시는 아마도 이 다리 아래로 위도에서 들어왔지 싶다.
군산 선유도 우체국
이 뒷편은 당시 수군진지였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개발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고 아래 횟집은 헐리어 있는 걸 보면 개발계획은 서 있고 예산이 없어 지연됨이 느껴진다. 왼쪽으로는 후대의 절제사 등 다섯명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1397년(태조6년) 수군만호영이 설치되었다. 당시의 관할지역은 임피, 옥구, 만경, 김제, 부안, 고창, 무장, 영광 등 8개 현의 해상을 방어하는 곳이었다 한다.
이 수군 진지 앞은 선유도 말 그대로 신선 들이 놀던 곳 처럼 풍광이 수려하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10여일 머무는 동안 일기를 보면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불편 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간의 중압감 (스트레스)이 엄청났음을 절로 알겠다.
10월1일 일기에도 아들 회(薈, 임실공)를 보내서 제 어머니도 보고 여러집안 사람의 생사도 알아오게 하였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자가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남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 이튼날 아들 회가 배를 타고 올라갔는데 잘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내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하랴.하였다. 처음에는 이 처럼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시고 몸도 추스렸으니 생각을 했으나 일기처럼 참담하고 괴로운 소식을 듣고 있었으니 이 좋은 경치가 눈에 들어왔을까? 성급했음을 자책한다.
충무공이 1597년 10월3일 법성포로 가기 위해 나온 것처럼 우리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우며 윤슬이 떠받치고 있는 선유도를 나왔다.
내륙으로 들어 오며 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에 비늘처럼 바다 이랑을 이룬다.
첨금정에서 이종문 대부 한 컷 법성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에 있는 이 고인돌 바위는 첨금정과 기훈암으로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되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1597년 (만력 25년)으로 ‘통제사 이순신 명(萬曆二十五年 十月 統制使 李舜臣 銘) 선무종신공신/김해김공 휘 김천귀 순절’이 음각으로 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휘하에 총애하던 부하 김위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입관시 묘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눈물로 갑옷을 적시며 애도하며 비문을 남겼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하지만 ‘ 기훈암’의 진위여부를 두고 이견이 분분하다.
'만력이십오년 시월 통제사 이순신 명(萬曆二十五年 十月 統制使 李舜臣 銘)'이라고 새겨져 있는 첨금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진영의 진하장으로 임명돼 진도 전투에서 독화살을 맞아 순절한 김위(1567~1597)가 주인공으로 "이순신은 총애하던 부하가 전사하니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출장길에 친히 관을 하사해 입관한 후 위의 본가까지 호송·치장하고 묘 앞 바위에 앉아 눈물로 갑옷을 적시며 국사를 한탄, 이 때부터 김위의 순절비를 첨금정이라고 일컫게 됐다"고 말하는 곳이다.
첨금정 바위에서 한 300m 쯤 떨어진 곳에 김해김씨 장사군파 김위장군의 선대와 후대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김해김씨 장사군파 후손 김성렬씨와 충무공 후손 이종문 대부가 처음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김성렬씨 집에 들러 차를 마시며 오랫동안 만났던 사람들처럼 담소를 나누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종문 대부가 거주하는 전주에 있있으며 덕수이씨 선조분들과도 관련이 있는 풍패관을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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