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이 산만 이어지면
싱싱한 숲이 아름답지만
넓은 들판이 생각난다.
들판이 있어 산이 아름답고
산이 있어 들판이 귀하다.
둘레의 다른 산들은
초록 물결로 출렁이는데
황매산 모산재에는
나무보다 바위가 더 많다.
욕심 없는 사람 밝은 얼굴처럼
바위 때깔이 환하다.
높이 솟은 절벽 위에
올라앉은 덩치 큰 코뿔소
우렁찬 목소리가
온 골짜기를 쩌렁쩌렁 흔들 듯.
온 봉우리가 바위로 덮인 모산재
금방 기적이라도 일어날 듯.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가물가물 어지러운 절벽
내리 쩍 갈라진 바위틈을 보면
예삿일은 아니었을 게다.
바위산 하나 만들어지려고
다른 산들은 저렇게 숲이 우거졌다.
(6) 문 여는 재미
6/17
배움은 닫힌 문을 여는 것
새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한 쪽 세상에서만 지냈다.
문을 열려고 생각도 못 했다.
아예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보니
신기한 세상이 보인다.
새 세상을 못 볼 번했다.
문 두드릴 마음을 열어 준
하느님이 고맙다.
첫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음 문을 열고 싶고
다음다음 문이 자꾸 열고 싶다.
문 하나씩을 열어 가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첫 문을 열기 전에는
두드릴 문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문 하나를 열 때마다
다음 문이 기다린다.
열어 갈 문이 있어 즐겁다.
(7) 흙
6/19
고추, 호박, 상추, 배추, 강낭콩……
밭뙈기마다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구김살 없이 싱싱하게 쑥쑥 자라는 것
싱싱하지만 조금 모자라는 듯한 것
빠득빠득 근근히 자라는 것
핏기 없이 겨우 목숨만 붙은 것
얼마나 부지런한가
얼마나 성실한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흙은 주인을 알뜰히 살펴보고 있다.
하나도 놓지지 않고 성적에 올린다.
언제나 누구나 볼 수 있게
성적을 드러내 보인다.
일한 만큼 곡식들이 자란다.
저마다 제가 한 일을
되돌아보게 한다.
(8) 산길
6/24
나는 분명히 억산엘 다녀왔다.
대구 남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올 때도 남부 정류장에서 내렸다.
앞선 사람을 따라 다녀왔다.
버스로 가기도 하고
기차로 가기도 했다.
내가 앞장서 억산에 간다.
일행들은 내 뒤만 따라온다.
어디에서 어디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할지
차시간은 언제인지
몇 번을 다녀와도
남 따라 다녀온 건 헛것이다.
먼저 다녀온 길은
앞장선 사람이 찾아낸 길이지
내가 찾아낸 길은 아니었다.
내 스스로 찾아야 내 길이 된다.
내가 살아가는 길도 그렇다.
산길을 오른다.
갈림길이 나온다.
저마다 제 갈 길로 갔다.
내가 갈 길은 어느 것일까
잘못하면 엉뚱한 데서 헤맨다.
(9) 강둑을 걸으며 1
6/26
강물이 흐른다.
쉬지 않고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강물처럼 흐른다.
강물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나는 세월 속에서 헤엄친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이었다가
거센 물결이 일 때도 있다.
얼음장이 덮일 때도 있다
(10) 풀벌레 소리
7/19
푸르름이 겹겹이 쌓인 숲 속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
그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풀벌레가 이만큼 목청을 돋구는 건
요즈음엔 처음 들었다.
풀벌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게 있겠지.
저만의 남다른 아름다운 목소리로
뛰어난 노래를 부르고 싶을까.
저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정성을 받쳐 연습을 하고 있을까.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다르듯이
저마다 다른 소리결이 있을 거야.
제 소리결에 맞는 가락을 찾느라
밤낮 쉬지 않고 노래 연습을 하겠지.
찬바람 불기 전에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
서둘러 노래 연습을 하나 봐.
(11) 풀벌레 소리(2)
7/22
풀벌레는 태어날 때부터
노래쟁이다.
노래가 서툴 때부터
목소리가 부드럽다.
물소리가 시끄럽지 않듯이
풀벌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물소리와 어울리면
더 조용해진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산골짝
돌팍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
숲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 물소리처럼
마음이 가라앉는 시를 쓰고 싶다.
풀벌레 소리, 물소리 듣고
내 마음이 맑아지듯
내가 쓴 시를 읽고
풀벌레소리처럼 깨끗해지고
물소리처럼 넉넉한 마음이 된다면…….
(12)병자호란의 부끄러운 역사
-심양의 청나라 고궁
98,7.27
서슬이 퍼렇던 홍타이치도 가고
풀이 죽었던 소현세자도 갔다.
홍타이치가 다스리던
청나라도 사라지고
그가 살던 고궁만 남았다.
힘이 모자라
적장한테 절을 세 번 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던
부끄러운 일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볼모로 잡혀 왔던
소현세자의 쓰린 마음을
되짚어야 한다.
일천육백육십 리 길을
서너 달이나 걸어서 끌려 왔던 땅
삼백육십 년이 지난 지금
옛 청나라 서울 심양 고궁을 보고 있다.
홍타이치가 덩그렇게 앉아 있고
그 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소현세자
산 설고 물도 선 만리 타향에
어린 세자를 볼모로 보내고
시름 속에 잠겨 있을 부모님
오로지 약한 나라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억울함을 참느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밤을 지새웠겠지.
함께 끌려 온 육십만 백성들
바깥 세상을 모르고
안방에만 들어앉아 있던
곱고 나이 어린 처녀들
오로지 집안일밖에 모르던 마님들
죽인대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사정을 할래도 말을 할 수가 있나
목숨이 붙어 있으려면
아무리 무리한 청이라도
뿌리칠 수 없었던 그들
아! 잊지 못할
병자호란의 부끄러운 역사.
(13) 고구려 옛 땅
-요령성 박물관에서
7/27
여기가 고구려의 옛 땅이다.
고구려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고
고구려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다.
조상들이 그린 고분 벽화가 있다.
벽화의 그림처럼
요동 땅 넓은 벌판을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리던 고구려의 조상들.
조상들이 활개치고 달리던 땅에
내가 와서 서 있다.
고구려 옛 땅을 되찾은 기분이다.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달리고 싶다.
관마산성 무성한 숲에서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이 들린다.
*관마산성: 중국 집안에 있는 노령산맥 줄기. 고구려가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성.
(14) 한얼님의 힘
-집안 고구려 옛 무덤 벽 그림
7/12
고구려 사람들은
한얼님과 더불어 살았다.
사냥을 하면서도
한얼님을 생각했고
씨를 뿌리면서도
한얼님께 감사했다.
내 몸과 내 목숨
나한테서 솟아나는 힘
모두 한얼님께서 주신 것이다.
한얼님은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신다.
동쪽으로는 청룡이
서쪽에는 백호가
남쪽에는 봉황이
북쪽에는 거북이
쉴새 없이 보살펴 주신다.
고구려의 두꺼비
고구려의 까마귀는
신통력이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어려울 땐
용케도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힘이 넘치는 선이나 색깔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바로 눈앞에 신나게 달리는 듯한
고구려 무사의 모습
모두 한얼님께서 주신 힘이다.
한얼님은
고구려 사람들이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마음껏 하늘을 날고
신통력 있는 새와 짐승을 거느리는
꿈을 키워 주었다.
요동 땅 넓은 벌을
마음껏 달릴 힘을 주셨다.
회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고구려 고분의 벽화이다. 土塚의 玄室 사면 벽과 抹角藻井의 天障등에 그려진
이 고분 벽화는 그들의 사상, 풍속 등을 나타내는 각종 제재를 갖고 있어서 귀중한 산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壁畵墳은 그 그림의 題材에 의하여 四神?, 角抵塚, 舞踊塚, 狩獵塚 등으로 불리는 것이 보통이다. 벽화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遇賢里 大墓의 靑龍, 白虎, 朱雀, 玄武의 四神圖이다. 패기에 넘치는 선이나 색채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박력을 느끼게 하고, 바로 눈앞에 말을 달리는 고구려 무사의 모습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청룡-좌. 동쪽, 백호-우. 서쪽. 주작-남 현무-북
(15) 장군총 앞에 서면
-집안 장군총에서
최춘해
장군총 앞에 서면
고구려 장군의 당당한 모습
천하를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
힘차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
7층 돌로 쌓은 우뚝한 무덤
면마다 기댄 받침대 힘으로
1500여 년을 잘 버티고 있다.
받침대 12개의 슬기가 돋보인다.
천장에 덮은 50톤의 돌은
고구려의 무게요, 힘이었다.
고구려는 지금 살아있다.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만주 땅 구석구석 백의 민족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살다가 힘이 부치거든
장군총에 와서 장군을 만나보고
힘과 용기를 얻어 갈 일이다.
장군총 앞에 서면
고구려 기세가 되살아난다.
조선족 자치주 아이들아,
너희 몸엔 고구려 피가 흐른다.
너희는 고구려의 후손이니라.
(7.28)
(16)광개토왕비
최춘해
광개토왕비를 만나서
고구려 한창 때를 본다.
요동 땅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땅 구석구석을
고구려 말발굽이 누비었다.
중국 성 64개가 무너지고
1400 마을이 무릎을 꿇었다.
신라를 넘보는 왜병을
낙동강에서 산산이 쳐부수었다.
넓은 만주가 모두 고구려 땅이다.
여기서 우리 겨레가 활개를 쳤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다.
활을 잘 쏜다고 주몽이라 했단다.
주몽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서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졸본부여(고구려)를 세웠다.
1500여 년 전에 이 비를 세웠다.
고구려 시조가 자랑스럽다.
우리 겨레가 자랑스럽다.
고구려 아이들은
날마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고주몽 이야기를 들었지.
고주몽이 닮고 싶어
활 쏘는 연습도 하고
쇠등을 타고 말 타는 연습을 했지.
광개토왕이 닮고 싶어
땅뺏기 놀이를 즐겼겠지.
높이 6.39m의 우뚝 선 비
고구려 땅 넓이만큼
고구려 나라 힘만큼
튼튼하고 실하게 생긴 비
장하다, 너 광개토왕비여!
광개토왕비가 있어
고구려 얼이 되살아난다.
(7.28)
(17) 환도산성
최춘해
만주 벌 너른 땅이
저절로 고구려 땅이 된 게 아니다.
예, 맥, 옥저, 현토 등 한족 틈에서
용하게 살아남은 슬기가 있다.
삼 면이 산으로 막힌 이 골 안을
성 만들 자리로 어떻게 찾아냈을까
하느님의 아들이 세운 나라였기에
하느님의 도움이 내리셨다.
제사상에 오를 돼지가 안내한 터다.
환도산성이 있어
뿌리 깊은 한족을 물리쳤다.
환도산성 들어가는
통구하 강변 바위벽을 보라.
바위를 뚫어 굴을 팠다.
10m쯤 사이로 잇달아 굴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밤낮
나라 지키는 일에 마음을 썼다.
환도산성 근처에는
만 기가 넘는 옛 무덤이 있다.
장군의 무덤도 여럿이다.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몸바친 영령들이 누워 있다.
이름 없는 돌무덤들
작은 힘들이 모이고 쌓여서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었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그 때 힘이다.
(7.29)
(18) 압록강
최춘해
가 보고 싶은 땅
우리 나라 북한 땅
휴전선이 없으면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땅을
바다를 건너
남의 나라 중국으로 와서
압록강 건너 편 우리 땅을 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반갑다.
강 저쪽 산밑으로 길이 나 있고
우리 북한 동포가 지나간다.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가 탄 배를
북한 강가에 대서는 안 된다.
우리 동포를 만나서도 안 된다.
길을 지나가는 북한 사람들도
내가 북한이 궁금하듯
남한 소식이 얼마나 궁금할까
지키는 사람 눈이 무서워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다.
겉으로는 원수를 대하듯
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안타깝다.
갈 수 없는 북한 땅
발로 밟을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기에
카메라에 산을 담았어요.
나무 한 포기, 풀 한 포기
산꼭대기에 심어놓은 곡식
연기 나지 않는 우뚝 선 굴뚝
저들이 다니는 강변 도로…….
놓지지 않고 사진기에 담았다.
북한 사진을 보고 있는 동안은
내가 북한에 가 있는 것이다.
북한이 나한테 와 있다.
통일이 되었다.
(7.29)
(19) 일송정
최춘해
일송정을 바라보니
선구자 노래가 절로 나온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조국을 찾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이 보인다.
두 손 불끈 쥐고
두 눈 부릅뜨고
왜군을 향해 달리는 모습
하늘을 가르는
우렁찬 함성이 들린다.
고구려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 사는 땅
배달 겨레 뜻이 모여
왜군을 물리쳤다.
김좌진의 청산리 싸움에
하느님도 우리를 도왔다.
거룩한 조상을 둔 게 자랑스럽다.
목숨을 내걸고 되찾은 조국이기에
우리 나라가 더 아름답다.
일송정에서 나라 찾으려고
맹세하던 선구자
그 피가 우리들 가슴가슴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7.30)
(20) 백두산 천지
최춘해
백두산은 여느 산은 아니다
바위 모양이며 색깔들이
영산이란 걸 알려 준다.
어느 한 자락을 골라도
전설이 흥건히 담겨 있겠다.
배달의 나라 정수리
하늘을 떠받친 백두산
반도 삼천리가 예서 뻗었다
모든 기운이 예서 생긴다.
감싸주는 마음도 예서 우러난다
2749m 이 높은 산꼭대기에
저렇게 많은 물을 담은 천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일 게다.
하늘엔 밝은 해가 비추어도
구름이 수시로 천지를 가린다.
단군 왕검이 내리실 때도
구름과 안개로 가렸겠지.
평생에 보고 싶었던 백두산
남북을 가로막은 휴전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 땅을 밟고
우리 영산 백두산을 바라본다.
어렵게 찾아온 걸 살피시고
구름과 안개를 잠시 여시었다.
(7.30)
눈에 익은 들녘 풍경은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그리던 할머니를 만난 것 같다.
남의 나라에 온 것 같지 않다.
조상이 같으면
생각도 같아지고
살아가는 방법도
같아진다는 걸 알았다.
배달 겨레끼리는
같은 피가 흐른다
우리 나라에선 미처 몰랐다.
(23) 두만강에서
9/28
중국 땅 도문시에서
두만강 다리 건너 편
함경북도 남양시를 바라본다.
북한의 우리 동포가 지나간다
소리쳐 부르면 대답이 듣기겠다.
중국 사람은 북한을 드나들어도
남한 사람은 북한에 못 간다.
달려가서 손을 덥석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한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한 형제들인데
왜 등지고 살아야 할까
먼길을 돌아
그리던 땅을 찾았는데
같은 피붙이가 사는
우리 땅을 코앞에 두고
한 발 밟아 보지도 못하고
남의 땅 중국으로 돌아간다.
네 편 내 편
꽁꽁 언 마음은
반 백년 봄이 지나가도
녹을 줄을 모른다.
아직도 기다려야 한다
언 마음이 풀리기까지는.
서둘면 안 된다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24) 황옥공주 인어상
10/3
동백섬 동쪽 바닷가
파도 소리, 튀는 물보라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고
생각에 잠겨 있는 황옥 공주
이름만큼 고운 얼굴로
황옥 보석에 비친
수정 나라를 그리고 있는가
수정처럼 깨끗한 집
수정처럼 환한 거리
맑고 고운 마음으로
서로 믿고 사는 사람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황옥 보석에 비친
바닷 속 수정 나라
딸 소식 궁금해하실
근심 어린 용궁의 부모님
초가 삼 칸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이태백이 놀던 달
노래 소리도 들릴까.
(25) 甄萱 산성
10/13
마주 보이는 속리산 문장대가
돋보인다.
하늘을 떠받쳐 높이 솟은 바위
모로 비스듬히 누운 바위
깎아지른 듯 절벽을 이룬 바위
용하게 맞물려 버티어 선 바위
큰 것 작은 것 들쭉날쭉
흙, 바위, 나무, 풀들이
보기 좋게 참 잘 어울렸다.
내가 선 이 견훤산성엔
피비린내가 풍긴다.
더 많은 성을 빼앗으려고
피를 흘리고 사람을 죽이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후백제 임금 자리를
자식한테 빼앗겼다 다시 치고….
욕심이 든 산성은 무너지고 있다.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은 아름다운데
무너지는 산성은 너무 흉물이다.
사람의 욕심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6) 흙
12/16
도움을 주는 흙이 되고 싶다.
없어서는 안 될 흙이 되고 싶다.
잡초를 안고 키워도
텅 빈 가슴보다야 낫지만
같은 값이면 곡식을 안고 싶다.
흙보다는 자갈이 많은 거친 땅
이대로는 곡식이 못 자란다.
굵은 돌은 골라내고
거름 넣고 주물러서
흙 속에 땀 냄새를 묻어야
곡식들이 마음놓고 자란다.
할아버지는 날만 새면
파일구고 뒤집고
엎치락뒤치락
흙과 함께 숨을 쉬며
흙이 되어 살았다.
흙이 바라던
곡식 씨앗을 품은 흙은
지성으로 곡식을 가꿨다.
흙의 품에서 생긴
옥수수, 고추, 고구마, 배추…….
알차고 탐스러운 살찐 열매들
흙과 한뜻으로 만들어 낸
할아버지 솜씨다.
(27)늘 푸른 겨울 나무
12/29
모두가 잎을 떨구고 겨울잠을 자는데
소나무, 대나무, 척백, 향나무는
추위 속에서도 쉼없이 일을 한다.
이 세상에 산소가 모자랄까 봐
더 부지런히 탄소동화작용을 한다.
겨울잠 자는 나무와 풀들의
몫까지 하느라 쉴 새가 없다.
소나무 숲에 다가가면
산소 만드는데 쓰일 햇볕이
소복소복 모여 있다.
솔잎에서 산소가 쏟아진다.
갓 나온 싱싱한 산소가 바글바글
솔숲에서 새물내가 난다.
지나는 사람들 얼굴이 밝아진다.
(28) 섣달 그믐
98/12/31
지난 한 해가 되돌아 보인다.
올챙이 알을 수조에 옮겨 기르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이고 말았다.
뒷다리도 마저 나서
펄쩍펄쩍 뛰어다닐 날을 기다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내 잘못으로 아까운 목숨이 사라졌다.
나는 목숨을 함부로 죽인 죄인이다.
특수반에서 공부하는
덩치는 나보다 커도
책도 못 읽고 숫자도 모르는 미숙이
머리에 이가 기어 다니고
침도 흘리고 코를 흘려서
아이들이 모두 미숙이를 피한다.
미숙이 옆에 앉아서 코를 닦아 주고
함께 점심을 잡수시는 선생님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냄새가 난다고, 더럽다고
미숙이를 피해 다닌 내가 부끄럽다.
지하철 계단에 엎드려서
새까만 손을 내밀고 한 푼 달라고
애걸하는 할머니
책값이 모자랄까 봐
그냥 지나친 게
사뭇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29) 토끼해의 꿈
98.1/2
새해 달력을 들여다본다.
착하고 영리한 토끼가 귀엽다.
올해는 내가 토끼가 된 기분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살려 주었는데
살려 준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한다.
"어떻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사실대로 해 보라"
토끼 말대로 호랑이가
함정에 다시 들어갔을 때
토끼는 사람 보고 그냥 가라고 했다.
토끼처럼 착하고 영리해지고 싶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야지.
세계의 정보를 내 것으로 녹여서
내 작품을 생산해야지.
컴퓨터의 파도를 타는
영리한 토끼가 되어야지.
(상주문학)
(30) 할머니께
1/4
산에서 땅에 쓰러진
고목을 보았습니다.
해가 바뀐 뒤에 보는 고목은
내가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나이가 차면 다른 나무들도
저 고목과 같이 될 것입니다.
짐승도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서 한 해가 됩니다.
쓰러진 고목도 하루에 조금씩
고목이 되어 간 것입니다.
하루하루 마음 상하지 않게
할머니께 귀여운 토끼가 되겠습니다.
(상주문학)
(31) 까치 집
1/20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까치집이 없다면
까작 까작까작
정다운 소리도 못 듣겠지.
마음이 갑갑할 때도
까작까작 까작까작
까치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마음이 풀리지.
아침에 일어나 까작까작 까작까작
까치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진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반가운 소식이 기다려진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까치집이 없다면
오늘의 밝은 꿈도 사라지겠지.
우리 동네엔
까치 집 지을 미루나무가 있어 좋다.
까치집을 받치고 있는 미루나무
둥지 무게를 받아 안은 보람으로 산다.
폭풍이 몰아쳐도
눈비가 내려도
언제나 무던하다.
까작까작 까치 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까치 둥지.
(상주문학)
(32) 정동진 해돋이
1/22
새날을 여는
새해가 돋으며 생각한다.
덜 차린 채로 나타날 수는 없다.
티 없이 깨끗한 얼굴인가.
웃음이 가득 찬 얼굴인가.
사랑이 넘치는 얼굴인가.
모두를 끌어안는 얼굴인가.
새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마지막 챙기느라 시간이 걸린다.
해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은
조바심이 난다.
바다에서 솟는 해는
어떤 모습일까.
동산 위로 돋는 해보다
더 크고 더 깨끗할까.
새로운 모습을 놓칠까 봐
사진기를 들이대고
거룩한 해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동쪽 하늘이 밝아지며
새날이 열린다.
거룩한 햇살이
온 누리에 뻗친다.
가려 있던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벗겨진다.
저마다 햇덩이 하나씩
받아 안고
가슴이 부풀었다.
(상주문학)
(33) 촛대 바위
2/26
꽃밭 둘레를 아름답게 꾸미듯
바다와 육지 사이에
갖가지 모양의 바위를 세웠다.
조물주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동해항 바닷가도
우리 집 꽃밭 둘레처럼 보일 테지.
곡선이 아름다운
촛대바위 그 언저리에
가시 돋힌 철조망이 쳐졌다.
있어서는 안 될 흠이다.
조물주가 철조망을 보고
간 곳마다 얼룩이라고
혀를 '끌끌' 차겠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통일을 이루자.'
스스로 죄인이 된 마음으로
소리 없이 노래를 부른다.
조물주여, 우리 손으로
깨끗이 철조망을 걷을 거예요.
(34)드러난 강바닥
2/26
산에는 숲이 우거져야 하고
강에는 물이 흘러야
제격입니다.
금호강엔 물이 떨어져서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껄끄러운 바위 바닥
가려졌던 못 볼 데를 본 듯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들은
물을 따라 사라지고
황새 한두 마리 기웃대다
제 갈 길을 찾아 날아갔습니다.
낚시군이 붐비던 때는
지난 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은
죽은 강입니다.
강물이 흐를 때는
헤엄치는 물고기,
찾아오는 오리, 황새
붐비는 낚시군들이
꼭 있어야 하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35) 삼일절
3/1
팔십 년 전 오늘
평양에도 서울에도 부산에도
도시에도 농촌에도 어촌에도
어른, 아이, 여자, 남자
손에 손에 태극기 물결
서슬 푸른 왜놈의 총칼 앞에서
목숨도 바치겠다는
하나로 뭉친 굳은 마음
대한 독립 만세!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립니다.
왜놈의 말발굽에 쓰러진
피로 물든 조상들
안타까운 모습이 선합니다.
용기 있는 우리 조상들
거룩한 조상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집 대문의
태극기가 자랑스럽습니다
(36) 파라다이스 비단나비
땅 바닥이나 겨우 기어다니던
징그러운 벌레
못 생긴 벌레라고 흉볼 때도
속으로는 큰 꿈을 꾸었구나
남들이 별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갈 때도
변신을 꿈꾸고 있었구나.
말 없이 변해가고 있었구나.
나뭇잎을 갉아먹으면서도
하늘을 날 꿈을 꾸었구나
날개 모양을 생각하고
날개 색깔을 생각하고
꿀을 빨 입 모양을 생각했겠구나
번데기 속에서도
그냥 있은 게 아니었구나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저리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날개를
네가 홀로 생각했느냐?
한 쌍의 보기 좋은 더듬이,
꽃봉오리에 사뿐 내려 앉을 다리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 데가 없구나
(이후 문학)
(37) 동강의 비오리
3/7
동강 절벽에 아기 비오리,
먹이를 가져 올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둥지 밖으로 고개를 내민
보송보송 아기 비오리
배가 고파도
엄마가 먹이를 가져올 걸
믿고 있다.
오로지 엄마만 믿는다.
엄마만 곁에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아쉬운 것도 없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엄마가 둥지 안에 있으면
엄마 따라 둥지 안에 머물고
엄마가 밖에 나가면
엄마 따라 밖에 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얘들아,
겁내지 말고 날 따라 해라."
엄마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눈 딱 감고 엄마 뒤를 따랐다.
첫째, 둘째, 셋째 …….
50m 낭떠러지 강물에 떨어졌다.
엄마를 쫓아 강물을 헤엄쳤다.
좁은 둥지에서 나와
너른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엄마가 가는 길을 따라간다.
엄마의 길을 가는 아기 비오리
(38) 봄맞이
3/11
봄님이
겨울 삼동 긴 잠을 자고
기지개 뿌둑뿌둑 켜고
하품 크게 하고 일어난다.
몸이 개운하다.
목련이 맑은 얼굴을 내민다.
무엇이든지 뜻대로 될 것 같다.
눈 딱 감고
입 굳게 다물고
아예 말도 말자던 나무들이
부드러운 몸짓을 한다.
말이 하고 싶은 얼굴들이다.
겨울 탱자나무는 가시를
빳빳하게 세우고
누구든 덤비면
찌를 듯 날카롭더니
봄을 맞은 탱자나무는
손발이 나긋나긋해졌다.
바위도 말이 하고 싶은 얼굴이다.
(39) 무창포 썰물
3/30
멀쩡하던 바다 물이
순식간에 갈라진다.
물 속에 잠겨 있던 밑바닥이
한 줄기 길이 된다.
갈라진 길을 따라
너도나도 섬을 향해 나간다.
돌을 제치면
떡조개도 숨어 있고
바지락도 나온다.
키조개, 굴, 전복, 뱀장어……
갖가지 생물들이 살던 곳
물 속에 잠겼던
바닥이 드러났다.
바다가 기울어진 것도 아닌데
저 언덕에 그득 찰랑이던 물이
순식간에 빠질 수 있을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일으키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 딱 떼고 있다.
조물주는.
(40) 부소산성
5/31
천 년 전 백제를 찾아
부소산성을 밟는다.
반월성, 사자루, 낙화암, 백마강,
고란사, 군창터, 영일루, 삼호루
의자왕도 가고 계백 장군도 갔다.
삼천 궁녀도 가고 나당연합군도 갔다.
성은 허물어졌어도
부소산은 남아 있다.
낙화암 밑 백마강은 예대로 흐른다.
백제 때 서 있던 나무와 풀들이
대를 이어 부소산에서 자라고 있다.
백제 때 백성들이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간다.
의자왕은 가고 백제는 없어졌어도
그때 이야기는 남아서
풀처럼 나무처럼
대를 이어 자라고 있다.
(41) 나무를 심으며
4/1
느티나무를 심는다
아직은 어려도
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나무도 자라 어른이 되지.
싱싱하고 푸른 잎으로
두터운 그늘도 만들고
새들도 품안에 안겠지.
푸르름을 심자
새들의 보금자리를 심자.
감나무를 심는다.
내가 자라 대학교에 갈 땐
우리 집 지붕보다 더 커겠지.
가지마다 주렁주렁 감이 열리면
입학금도 되고 책값도 되지.
내 꿈을 심자
장래를 심자.
백일홍을 심는다.
꽃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무덤 가에 심는다
꽃 보고 얼굴 활짝 펴시라고.
꽃 향기 맡으시고
꽃과 같이 고운 마음
자손 대대로 이어 주소서.
마음을 심자
사랑을 심자.
(이후 문학)
(42) 만리장성 호두 장수
4/3
만리장성 층층대를 오른다.
물건을 팔려는 장수들도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한 중국인 상인이 다가왔다.
두 손에 여러 개를 내밀었다.
호두에 조그만 사람이
빽빽이 새겨져 있다.
웅장한 만리장성과
호두에 새겨진 작디작은 사람.
감탄을 하며 만지작거리다가
그 신기한 호두를 떨어뜨렸다.
성벽 계단을 계속 굴러갔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중국 상인은 한참을 뛰어내려가
간신히 호두를 잡았다.
우리 쪽으로 올라온 상인에게
깨지지 않았냐고 묻자,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를 내며 돈을 물어내라고
떼를 쓰야 할 상인이
싱긋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마음 넉넉한 상인을 만나
또 한 번 감탄했다.
(이후 문학)
(43) 섬진강
4/15
지리산 1915미터
천왕봉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섬진강이 흐르며
지리산 눈치를 살핀다.
지리산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흐른다.
섬진강댐이 만들어진 것도
지리산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섬진강이 발전기를 돌렸다고
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들판의 목마른 곡식
과수원의 과일 나무
섬진강이 걱정할 몫이다.
지리산의 높은 뜻을 헤아리느라
섬진강은 생각하며 흐른다.
(44) 화엄사 십 리 벚꽃
4/15
화엄사 들어가는 십리 길
길 양쪽에 줄 서 있는 벚꽃
환하게 활짝 웃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환하게 활짝 웃는다.
저 많은 꽃 가운데 누군가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렸겠지.
첫 웃음소리 듣고
모두 한꺼번에 활짝 웃었겠지.
남들이 웃으면
나도 웃음이 나오고
내가 웃으면
저절로 즐거워진다.
벚꽃이 웃는 걸 보고
내가 웃음이 나오듯이
내가 환하게 웃는 걸 보고
남들도 활짝 웃게 하자.
이 세상 모두 즐겁게 하자.
(45) 돌산 금오산 꼭대기에서
4/16
금오산 꼭대기 323m
눈 아래 낭떠러지 끝이 바다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시원스럽게 트였다.
눈이 모자라 더 보지 못한다.
동서쪽을 바라보면
들쭉날쭉 해안선
크고 작은 섬들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만약 사람 보고
해안선을 만들어라 고 했다면
가는 곳마다 직선이요,
섬들은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섰겠지.
역시 조물주는 위대하다.
조물주는 일찍부터
곡선이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 조물주가 만든 예술품을
감탄하며 감상하고 있다.
(46) 진달래꽃
4/17
우리 나라
산 어디에나
봄 되면
진달래 핀다.
진달래 붉게 물들면
산새들도 저마다
제 짝을 찾는다.
진달래 필 때쯤
보리가 패고
보리가 익기도 전에
양식이 떨어졌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진달래꽃잎을 따먹었지.
산에만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덥석 손을 잡아 주었지.
가난한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아무나 정답게 맞아 주었지.
진달래꽃을 만나면
부황이 나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긴 긴 해에
보리 고개 넘던 때가 생각난다
(47) 오월
5/17
오월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갓 피어난
나뭇잎 색깔일 거야.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우리들 마음처럼
싱싱하게 자라는
푸른 색일 거야.
(48) 어버이날
5/18
지난 어린이날엔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리라
욕심도 생겼다.
부모님은 용하게도
내 마음 알아 차리고
내가 읽고 싶던
새책도 사주시고
산 놀이, 들놀이
함께 가 주셨다.
잘못도 용서해 주시고
칭찬만 해 주셨다.
오늘 어버이날엔
부모님 마음도 설레일 거야.
어린이날 나처럼.
부모님이 나한테
바라는 건 무얼까?
기뻐하실 일은 무얼까?
착한 일만 찾아서 하고
용기 있는 사람 되는 것
날마다 나한테 당부하는 말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내 마음이 여물어 가고 있다는 걸
편지에 담아 드리련다.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49) 스승의 날
5/19
오늘은 선생님이
더 거룩하게 보인다.
우리 선생님은
뭐든지 다 잘 아신다.
방학 때 내가
선생님 보고 싶었던 것도
미리 다 아셨다.
글씨도 제일 잘 쓰고
노래도 참 잘 부르신다.
국민체조도 잘 하고
구구법도 참 잘 외운다.
나도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글씨도 선생님처럼 쓰고 싶고
걸음걸이도 닮고 싶다.
목소리도 닮도 싶다.
나를 칭찬할 때
웃으시는 눈 모습도 닮고 싶다.
어린이날엔
내가 선물을 받았는데
스승의 날엔
선생님이 선물 받는 날이다
뭐든지 드리고 싶다.
뭐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내 마음속의 선물
선생님은 벌써 다 아실 거야.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0) 작은 꽃
5/22
산에 오르다가
우연히 만난 꽃
집에 와서도
자꾸 생각이 난다.
하도 작아서 놓칠 뻔했던 꽃
키가 1Cm쯤 될까
꼬부리고 앉아서
한참을 데려다 봤다.
줄기, 잎, 꽃을 갖추고
땅에 뿌리를 박고 섰다.
암술과 수술이 있을 테고
꽃이 지면 열매를 맺을 테지.
아들, 손자 대를 이어 살아갈 테지
내 눈높이로는 작지만
불개미가 바라보면
몇십 길이나 높은 나무
우람한 나무에 핀
엄청나게 큰 꽃으로 뵈겠지.
코끼리가 나를 바라보면
갓 낳은 아기코끼리를 보듯
귀엽다고 여길까?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1) 고엽제 후유증
6/6
미군이 뿌린 고엽제에
베트남 숲이 말라 죽었다.
사람은 맞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시원한 맛에
거리낌없이 맞았다.
사람도 풀처럼 나무처럼
말라 죽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고엽제 후유증엔 약도 없다.
팔다리가 틀어지고
살이 썩어 들어간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꼼짝도 하기 싫다.
풀잎처럼 나뭇잎처럼
천천히 말라 들어가겠지.
병원에서도 어쩔 수가 없단다.
고엽제를 뿌린 미군이 밉고
나라가 원망스럽다는 할아버지.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일어나야 한다면서
우리들을 바라보신다.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2) 흙
6/5
목이 말라 고개 떨구고
풀이 죽어 있던
고추, 파, 들깨, 참깨들.
바라던 비가 내리자
좋아서, 반가워서
방글방글 웃으며
살래살래 어깨 춤을 춘다.
눈만 뜨면 밭에 나와
흙과 한몸이 돼서
곡식을 내 몸처럼 아끼고
함께 숨을 쉬던 할아버지.
곡식이 가물 들면
할아버지도 목이 마르다.
지금 곡식이 웃는 걸 보고
할아버지 얼굴도 활짝 펴졌다.
역시 하느님 덕이라고
고마워하시는 할아버지.
사람이 아무리 애써 물을 줘도
턱도 없이 모자란다.
사람이 아무리 안달이 나도
하느님은 미리 다 아시고
때 맞춰 비를 내려 주신다.
(구미문학 99년 연간집)
(53) 지리산 천왕봉
6/22
허리에 구름을 두르고
하늘에 떠 있는 천왕봉
속이 깊은 가슴에서
돌아 나오기 때문인지
물소리도 속이 깊은 소리다.
생각이 얕은 나 같은 사람도
골이 깊은 길을 걸으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리산은 속 깊고 품이 넓어
갖가지 목숨들을 고루 품었다.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시닥나무
회나무, 다릅나무, 물푸레나무…….
호로로- 새비쫑
낮은 산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새소리
정원수로도 좋을 이름 모를 꽃들.
하늘에 닿을 만큼 뜻이 높아서
지리산에 놓인 바위들은
우선 덩치부터 큼직큼직하다.
조그만 일로 누나와 다투고
별명을 부른다고 친구와 토라졌던
지난날 내가 부끄럽다.
(경북문협 99년 연간집)
(54) 문익점 선생의 목화
6/22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심었던 곳
경남 삼청군 면화 시배지.
내 어릴 때 늘 내 곁에 있었던 목화
참 오랜 세월 잊고 있었다.
그립던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때 그 얼굴이 반갑구나.
목화 꽃이 피어서 다래 열매가 열고
다래가 익어서 하얀 목화송이
광주리에 그득 목화송일 따 모았지.
목화송일 씨아에 넣고 돌리면
앞으로는 솜털이 나오고
뒤로는 염소 똥 같은 씨앗이 빠졌지.
그게 그렇게 신기했었지.
씨를 뺀 솜털을 활 끈으로 퉁기면
구름처럼 솜털이 부풀려졌지.
갓 털이 난 강아지 크기만큼 떼어서
말대로 밀면 속이 뚫린 고치가 되지.
고치를 가락 끝에 대고 물레를 자면
용케도 가느다란 실이 돼 이어진다.
실이 가늘어야 고운 베를 짤 수 있다.
우리 할머니는 베 매는 솜씨가 좋아서
마을에 불려 다니며 베를 매 주었단다.
어머니도 할머니 뒤를 이었단다.
온 식구 옷은 어머니가 짠 베로 만들었단다.
어머니는 베를 잘 짠다고 소문이 났단다.
내가 중학교 갈 때 입학금도
어머니가 베를 짜서 댔단다.
할아버지는 전시장을 돌아보며
지금은 사라진
베를 짜는 모습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문익점 선생이 고맙다고 했다.
(경북문협 99연간집)
(55) 불에 탄 새싹들
- 화성 씨랜드 수련원 화재
7/1
창문도 방문도 사방이 꽉 막힌 방
뜨거운 불길이 덮쳐 오고 있다.
방에는 어머니도 선생님도 없다.
유치원 아이들 20명이 갇혀 있다.
자다가 뜨거워서 깬 아이들
"아야, 앗, 뜨거워."
"엄마, 엄마,"
"선생님, 살려 주세요."
"선생님, 구해 주세요."
뜨거운 불길을 피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몰리다가
불길이 몸에 덮쳤을 테지.
어머니를, 선생님을 원망하며
숨을 거두었겠지.
재혁, 형민, 성옥, 세라, 가현, 나현,
소희, 찬영, 혜지, 연수, 수나, 재우,
형수, 도현, 송이, 한슬, 영종, 선교
수영……
이들은 천당이나 극락세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믿지 못할 선생님들
믿지 못할 사람들
믿지 못할 세상을 믿은 걸
후회하고 있겠지.
(시와 동화 99년 가을호, 구미문학)
(56) 덕유산 향적봉 오르는 길
7/8
옛 신라에서 백제로 들어가는
나제통문을 그냥 지나간다.
지금은 이쪽 저쪽 다 같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무주군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 사이
판문점이 막힌 지도 반세기
언젠가는 열려야 할 길
나제통문을 그냥 지나 듯
판문점 지나갈 날을 생각한다.
덕유산 가는 길에
부여에서 온 사람과 만나
절경을 함께 구경하며 간다.
백제와 신라의 자손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싹이다.
백제와 신라가 합쳐졌듯
뿌리가 같으면
갈라질 수가 없다.
남북이 통일될 날도
다가오고 있다.
(57) 무주구천동 계곡
7/11
싫증 나지 않는 물소리
바닥이 다 보이는 맑은 물
저마다 모양이 다른 바위
그냥 좋아서 이끌려 간다.
시오리 기나긴 구천동 계곡
골짜기 한 굽이 돌 때마다
수심대, 월하탄, 인월담, 사자담
비파담, 구월담, 이속대, 안심대…….
전설이 주절이 담긴 절경들.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조화로운 예술품들.
물소리, 물빛, 돌, 나무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과 새소리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만
꼭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눈짓, 몸짓으로 숨을 고르고 있다.
(58) 저마다 다른 나무와 꽃들
(제 할 일을 찾아 하는 것들)
7/25
나무들이 팔을 펼치고
구김살 없이 자라고 있다.
참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싱싱한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더없이 행복하다는 몸짓이다.
나무 그늘 짙은 숲 속을 걷다 보면
바보여뀌, 큰까치수염, 달개비, 질경이
구슬봉이, 짚신나물, 패랭이꽃,
개쑥부쟁이, 바위채송아, 꽃며느리밥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제가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작은 꽃은 작아서 곱고
큰 꽃은 커서 아름답다.
색깔이 진한 것은 진한 대로
연한 것은 연한 대로 아릅답다.
제나름의 향기가 있어 좋다.
제가 피운 꽃을 자랑으로 여긴다.
한 자리에 섞여서 살아도
다른 꽃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나무가
한 가지뿐이라면,
꽃이 한 가지뿐이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이 없을까
저마다 달라서 귀하고 아릅답다.
(노인문학회,한국아동문학인 협회),
흙
최춘해
흙의 입김으로
저리도 많은
생명들이 태어난다.
남에게는 많아 보여도
어느 것 하나라도
많다고 생각되지 않는 흙.
흙의 따슨 입김이
배어 들면
그것이 곧 힘이 된다.
그래서
호박 넝쿨이 죽-죽-
벋어 가고
미루나무 키가
저렇게 잘도 큰다.
싱싱한 푸른 잎에서
나무들의 즐거운 목소리를
듣는다.
앞으로 앞으로 척척 나아가는
나무들의 발자국 소리.
저마다 피운 꽃은
흙에서 배운
고운 마음의 표시다.
꽃이 풍기는 향기도
흙에서 배운 마음이다.
흙의 입김이 고여서
귀여운 감이 된다.
불어가는 풋감의 무게를
흙이 받아 안고 있다.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센터 발행
'THE EARTH' 책에 영문으로 번역됨)
printed by dai nippon printing co. japan
(59) 여름만 있는 나라
8/17
춥지 않은 나라
언제나 잎이 푸르다
쉴새 없이 나무가 자란다.
추위가 있어야
나이테를 만들 텐데
나무의 나이를 어떻게 알지?
비가 많이 오는 때와
적게 오는 때가 있을 뿐
늘 여름만 있는 나라
1년 내 여름 꽃만
피어 있는 나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피는 꽃이 달라서
철철이 새로운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겪어 봐야
따뜻한 봄 햇살의
고마움을 안다.
산과 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을 때
더운 여름이 그리워진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
(60)자카타르타 민속 박물관에서
8/21
세계 제일의 목재 나라
나무에 새긴 솜씨가 뛰어나다
박물관 벽면에는
인도네시아 역사가
티크 나무에 조각돼 있다.
우리 나라 독립기념관에서
우리 조상들이 왜놈들에게 당한
고통을 보는 듯 마음이 쓰리다.
35년도 긴 세월이었는데,
350여 년이나 설음을 받았구나.
10여 대나 대를 이어
포르투갈, 네델란드, 일본 등
남의 나라가 정치를 했는데
제 나라 말은 잃지 않았구나.
누더기 같은 판자 집에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겠구나.
추운 겨울이 없어
추위에 떨지 않아서 다행이겠다.
일년 내 과일이 있어
굶지 않아서 다행이겠다.
(61) 보로부루드 사원
8/23
엄청나게 큰 탑이다.
사각으로 된
밑변 한 모서리 길이가 120m
한가운데 탑의 높이가 42m
이 탑에 있는 부처 수가 504개
이백만 개나 되는 네모난 돌로
시멘트 하나 없이 만들었다
무게가 삼백오십만 톤으로
오천 사람이 함께 내는 힘을
감당해낼 수 있단다.
12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단다.
요새처럼 돌을 자르고 다듬는
기계도 없었을 텐데
저 많은 돌을 어떻게 정확하게 잘랐을까
저리 많은 부처 상
층층이 벽마다 새겨진 수많은 조각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어떤 큰 힘이 내려졌음이 분명하다.
벽면을 따라서 층층이 돌아 오르는 사이
부처님 이야기가 점점 진하게 배어졌다.
나도 부처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부처님이 되고 싶었다.
(62) 쁘람바난 사원
9/2
엄청나게 많다.
눈에 들어오는 사원만도
벌어진 입을 못 다물겠다.
안 보이는 것도 있고
없어진 것도 여덟 개나 된단다.
저 많은 사원들이
저마다 독특한 뜻을 지녔단다.
중심 사원이 가운데 있고
딸린 사원들이 둘러싸고 있단다.
저마다 하나씩 맡은 일이 있단다.
벽면마다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벽면 안팎에 이야기가 가득하다.
마음이 착하면 부처님이 돕는다
착한 사람은 마침내 성공한다.
이야기는 달라도 뒷맛은 비슷하다.
둘레를 돌다 보면 저절로 착해진다.
부처님 하나만도
높이가 삼 미터나 되는데
저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저렇게 상세하게 새겼을까.
8세기, 9세기에 세웠다는데
분명 부처님의 힘이 보태진 거다.
(63) 족자카르타 불새
9/2
족자카르타 하늘에는
가는 곳마다 불새들이 날고 있다.
자기가 생각한 불새 모양의 연을
하늘 높이 올리고 있다.
우리 집 복이 하늘까지 닿았다.
불새는 복을 점지해 준다.
그래서 집집이 불새를 기르고 있다.
집마다 둥지에서 불새가 노래한다.
불새가 노래를 부르면
멀리 있던 복들이 찾아 든다.
길거리나 가게에서 파는 노리개도
불새 모양의 입에서 불새 노래를 한다.
하늘에도 불새가 날고
길거리에도 집에도
가는 데마다 불새들이다.
새들이 자랑스레 노래를 부르고
새들이 마음놓고 살아간다.
새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새들의 노래 속에서 즐겁게 산다.
이 나라 사람들은 마음이 부드럽다.
(64) 긴따마니 화산 지대
8/4
화산이 폭발할 때
거멓게 그을린 흔적이 그대로 있다.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한다.
더러는 푸른빛을 띤 데도 있다.
70여 년 전에 화산이 폭발했었단다.
분화구 자리는 호수가 되었다.
너무 넓어서 바다인 줄 알았다.
지금도 내 발 밑 땅 속에는
붉은 용암이 이글거리고 있겠지.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른다.
(65) 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
-긴따마니 화산 지대 가는 길
9/5
길섶에 보이는 집마다
수호신 제단이 있다.
꽃으로 제물을 만들어
정성껏 받든다.
지난날도 꿰뚫어 보고
다가올 날도 꿰뚫어 보는 신이
가정을 지켜 주고 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도
신의 뜻이고
내 몸이 건강한 것도
신이 지켜 주기 때문이다.
신을 잘 받들어 모셔야
집안이 두루 평안하다.
신의 뜻으로 태어난 건
신처럼 받들어야 한다.
소도 강아지도 마음놓고 산다.
수호신을 지켜주는 원숭이는
대우를 받으며 산다.
길섶에 늘어진 가게에는
신의 모습을 새긴
나무 조각들이 즐비하다.
살아가는 데에는 어디나
신이 함께 있다.
신의 제단에 올릴 꽃들이
일 년 내 어디에나 마련돼 있다.
벤자민, 보겐필, 캄보지아꽃……
제단에 올릴 제물을 든 사람들이
줄을 지어 사원으로 가고 있다.
(66) 야자나무 밟고 내려오는 신
9/8
내 곁에는 늘 신이 따라 다닌다.
신이 내 곁을 떠나면
마음이 안 놓인다.
잡신이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
잡신을 물리칠
수호신이 내려와 주십사 고
아침저녁 들며나며 제단에 빈다.
신이 가장 쉽게 내려올 수 있는
3124m의 아궁산을 보고도 빈다.
이 곳 발리에는
높이가 4m 이상 되는 건물은 없다.
신이 내려오는 데 방해가 된다.
야자나무를 딛고 내려오기 때문이다.
(67) 식물원과 주룽새 공원
- 싱가폴에서
9/9
싱가폴은 공원 속의 도시요,
도시 속의 공원이다.
먼저 깨끗한 게 자랑이다.
물이 깨끗하고
도시가 깨끗하고
정부가 깨끗하다.
국민, 정부가 한 마음으로
깨끗한 나라를 만든다.
손수건 나무, 여자입술나무
눈물난, 코끼리풀난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수상만큼이나
자랑스럽고 고맙다.
새 공원 원형극장에는
새들이 사람 말을 용하게 알아듣는다.
부르는 대로 날아와서
제자리에 찾아가 앉는다.
사람이 시키는 대로
실수 한 번 않고 묘기를 부린다.
앵무새는 영어를 잘도 따라 한다.
새들도 다 제몫을 하고 산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것들은 다
나라가 고맙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68) 짜오프라야강의 메기
9/20
메기들이 사람을 따라다닌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메기한테 먹이를 준다.
낯선 사람들도 이곳 사람들 따라
먹이를 사서 던져 준다.
메기한테 베풀어야
다음 세상에 잘 살 수 있다.
메기가 저렇게 많아도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다.
떼지어 헤엄쳐 다니는 모습이
그냥 아름다울 뿐이다.
그냥 고운 눈으로 바라볼 뿐
아무도 탐을 내지 않는다.
메기를 잡으면 다음 세상엔
벌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해코지 않는다는 걸
메기들은 너무 잘 안다.
사람이 가까이 와도
메기들은 마음 편하다.
바쁠 것도 없고
조심할 것도 없다.
짜오프라야강은
메기들의 천국이다.
(69) 메콩강
-황금의 삼각지에서
9/21
메콩강에서 배를 타고 달린다.
서북쪽은 미얀마 땅이고
서쪽 땅은 타이, 동쪽은 라오스 땅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을 거쳐 티뱃에 이른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산맥
티뱃 고원에서 출발하여
중국, 미얀마, 타이, 라오스
베트남을 지나 태평양으로 흐른다.
매콩강은 골고루 베풀고 싶어
일부러 기나긴 여행을 한다.
매콩강이 지나가는 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없다.
그나마 생기가 도는 나라는
타이라는 나라 하나뿐이다.
타이 사람들은 누구나
매콩강 물에 목욕을 하면서
강물을 고맙게 여긴다.
강물에 사는 물고기도 아껴 준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모두 자기 탓이라 여긴다.
미얀마, 타이, 라오스
세 나라가 만나는 황금의 삼각지.
더운 나라인데도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찬바람이 불어온다.
(70) 국경 도시 배싸이와 탁킬래기
9/27
다리 하나 사이를 두고
이쪽은 타이, 저쪽은 미얀마
이쪽은 자본주의, 저쪽은 사회주의
이쪽보다는 저쪽이 더 가난하단다.
못 먹어서 바싹 마른 아이들
웃옷도 못 입고 맨발로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외국인인가 싶으면 손을 벌린다.
어른도 맨발로 손을 벌리고 따라온다.
다리 이쪽 거지들은
다리 저쪽 미얀마에서 건너 왔단다.
한 사람 동정하다가
떼서리 몰려오면 감당키 어렵단다.
우리 나라에서는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는데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먹을 것도 안 가지고 태어나나 보다.
고급 식당 음식을 맞이해 앉으니
손 내미는 아이들이 자꾸 떠오른다.
한 끼도 거르기 어려운데
몇 끼나 굶었기에
갈비뼈가 그렇게 드러났을까.
(71) 네 다리 뻗고 잠자는 개
11/14
미얀마 탁킬래기
사람이 다니는 복잡한 계단
개가 다리를 뻗고 누워 잠을 잔다.
잠을 깨울까 봐 조심스레 피해 간다.
개는 한 번도
발길에 차여 본 적도 없다.
맞아 본 적도 없다.
사람이 해코지 않는다는 걸 안다.
짖을 일도 없다.
마음놓고 자유스럽게 산다.
먹을 것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부처님 덕이다.
(72) 대마도 가는 배를 타고
11/15
초등학교 역사책에서 본
키가 조그맣고 머리가 홀랑 벗겨진
키 만한 칼을 든 왜구들
평화롭던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와서
시도 때도 없이 도적질해 갔던
그들이 살던 대마도를 간다.
왜구들 노략질로
불안에 떨던 우리 조상들
1592년 임진왜란,
1910년부터 36년 동안 일제 강점
왜놈들한테 당했던
조상들의 쓰라린 고통을 되새긴다.
대마도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씨-썬플라워가 32노트로 물살을 가른다.
북 섬에서 남 섬까지 1시간이 넘었다.
생각보다는 큰 섬이다.
해안선마다 절벽인데다 평지가 안 보인다.
사람 살 곳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헐벗고 굶주리다 못 견디었겠지.
기름진 땅에서 배불리 먹고 잘사는
우리 나라가 부러웠겠지.
현해탄을 건너 노략질할 만하다.
(73)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11/17
우리 할아버지 경주 최씨 익현 선생
옳지 않은 일은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대원군이 서원을 폐지하는 등
옳지 않은 일에 반대를 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공조판서, 중추원 의관, 의정부 찬정 등
높은 벼슬도 마다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데 힘을 썼다.
제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를 반대하여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칠 결심을 했다.
왜구들이 득실거리는 대마도로
귀양을 가면서 더욱 마음을 다졌다.
외교권을 빼앗아간 원수의 나라
왜국에서 난 음식은 먹지 않겠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에서
굽실거리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단식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나라 사람이 지었다는
대마도 슈이젠지 절 한 켠에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서 있다.
선생의 거룩한 뜻에 비하면
민망할 만큼 초라하다.
우리 민족이 살아 있는 한
선생의 넋은 더욱 빛날 것이다.
(74) 진실된 믿음
- 아메노모리 호슈의 묘에서
11/27
아메노모리호슈는 일본 외교관이다.
4세기 전, 한국 담당 외교관이다.
남의 나라 사람의 무덤인데도
왜 자꾸 만나 보고 싶을까.
나라와 나라가 사귀는데
진실된 믿음을 주장했다.
믿으면 가까워지고
못 믿으면 멀어진다는 걸
일찍부터 깨우쳤다.
내가 거짓말하지 않고
상대편을 믿어 주는 걸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그 거룩한 마음을 만나고 싶었다.
자기의 참된 마음을 알리고 싶어
중국말을 배우고 한국말을 배웠다.
그의 거룩한 뜻은
대마도 이즈하라 조슈인 절 뒤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75) 와다즈미 신사
11/29
곳곳에 신사가 눈에 띈다.
왜정 때 학교에 드나들 때마다
공손히 절을 해야 했던 그 신사
우리 집 시렁 위에
대대로 받들던 삼신을 내쫓고
강제로 들어온 아마데라스오미가미신
와다즈미 신사를 참배하기 편하게
새 길을 닦아 놓고
엄청나게 큰 도리이가 세워졌다
일본 사람들은 신을 받들며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친다.
다리, 도로, 비석 어디든지
서기가 아닌 쇼와, 헤이세이 등
일본만의 연호를 적어 놓았다.
일본 사람들은 이 도리이를 지나
와다즈미 신사를 참배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단군왕검 동상을 부수어도 될지
도리이를 한번 지나가 보자.
※ 삼신: 우리 나라 땅을 마련했다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 세 신. 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
(76) 친절한 일본 사람들
12/1
길을 가다가 얼굴을 마주치면
웃음을 머금고 인사를 한다.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인데도
서먹했던 마음이 저절로 사라진다.
더 가깝게 사귀고 싶다.
작은 일이라도 도와주고 싶다.
여러 사람한테 인사를 받고 나니
나도 먼저 인사를 하고 싶다.
길을 물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가운 얼굴로 길을 안내한다.
멀리까지 따라오며 가르쳐 준다.
너무 친절해서 미안하다.
누구한테 물어도 한결같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려는데
내가 사려는 게 안 보인다.
점원에게 사고 싶은 물건을 물으니
우리 상점에는 없다고
다른 상점으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자기 상점에 없는 물건을 찾으면
안내는커녕 재수 없다고 돌려세우는
우리 나라의 안타까운 사람들.
(77) 일본 도로
12/1
낭떠러지 길을 달려도
겁나지 않겠다.
우리 나라 차들이
낭떠러지에 굴러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다.
찻길과 인도가 붙어 있다.
찻길은 낮고 인도는 높다.
인도 양쪽에는 철책이 쳐 있다.
차가 인도로 오를 수가 없다.
차가 낭떠러지에 구를 수가 없다.
목숨을 존중하는 나라이다.
찻길은 차가 다니기 편리하게
인도는 사람이 다니기 편하게
요모조모 보살핀 흔적이 보인다.
눈가림으로 손질한 곳은
눈 닦고 봐도 없다.
나를 위해, 내 집 식구를 위해
정성을 모아 만들었다.
(78) 코끼리를 운전하는 카렌족
12/5
다리 하나만도 못한 사람이
저리 큰 코끼리 등에 올라앉아서
코끼리를 마음대로 몰고 간다.
코끼리와 카렌족은 같은 식구다.
배고프지 않게 먹이 걱정을 하고
아프지 않게 건강을 걱정해 준다.
함께 있으면 서로가 든든하고
떨어지면 보고 싶어 못 견딘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한 집 식구다.
카렌족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숨소리와 냄새만 맡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을 한다.
서로가 헤어져서는 안 될 사이다.
몸 냄새가 맡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
함께 살아야 한다.
(79) 치앙마이 산상 사원
12/5
도이스텝사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으뜸 가는 사원
굽이굽이 산길을 차를 타고 올라서
까마득 높은 층층대를 올라야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있다.
부처님을 만나는 길은,
내 스스로 부처가 되려면
이렇게 가파로운 계단을 오르듯
어렵고 힘든 길을 올라야 한다.
신을 벗고 나를 낮추어야
부처님의 참 모습이 보인다.
큰 종, 작은 종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들
종소리 속에서 부처님을 만난다.
종소리에서 부처님 말씀을 듣는다.
종소리 하나라도 건너뛰면
복이 따라 오다가 되돌아간다.
진신사리를 모신 탑 둘레는
모두가 황금으로 입혀져 있었다.
누구나 바라는 고귀한 것이기에
오히려 황금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산상사원 진신 사리를 모신 탑을
만난 것만으로도 큰 소원을 이뤘다.
(80) 멧뗌강의 뗏목
12/26
3000m 이상의 높은 산악 지대
여기는 차가 다니는 길이 없다
발로 걷다가 코끼리를 타기도 하고
뗏목을 타고 강을 따라 가야 한다.
(81)수리부엉이의 울음
경기도 안성시 안성면 덕봉리 뒷산 고성산
수리붕엉이의 두 마리 구슬픈 울음 소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암벽 틈새
둥지에 아기수리부엉이 세 마리
우지끈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에
놀란 아기수리부엉이 왕방울 눈
살려 주세요. 우리 귀여운 아기들
한 달만 참아 달라
애원하는 어미수리부엉이
둥지를 가려 주었던 숲이 없어지면
아기 새는 몸 숨길 데가 없단다.
산불에 그을린 나무라도
아기수리부엉이에겐 큰 힘이 된단다.
(이후문학 00)
(82)기다리고 있는 벚꽃 나무
벚꽃나무가 충정로 한길 가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
꽃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수학여행 갈 차비를 갖추고
때만 기다리고 있는 초등학생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
처음 만나는 산과 들, 낯선 사람들
들뜬 마음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다.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벚꽃나무
그 얼굴이 더 없이 아름답다.
(이후문학 00)
(83)까치가 아침을 연다
내가 지나가는 길섶
향나무 바로 위에서
까치가 까작까작 신호를 보낸다.
까치 소리 듣고
덜 깬 새날이 환하게 밝아온다.
곁에 선 나무들이 옷매무새를 고친다.
까치가 보내는 신호를
저 멀리 동산 너머서도 들었는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동글동글 곱게 다듬어진
붉은 불덩이가 솟아오른다.
솟는 해를 바라보면
내 팔다리에 힘이 솟는다.
(이후문학 00)
(84)낙엽을 비집고 솟는 봄
- 흙 (61)
최춘해
우리 할머니는
숱하게 많은 제삿날,
손자손녀 가족들 생일
적어 놓지 않아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아무 생각 않을 것 같은 흙도
할머니처럼 한 번도
때를 놓친 적이 없다.
품속에 품고 있는 수많은 씨앗들
저마다 싹틀 날을 챙기고 있다.
품고 있던 개구리와 뱀도
제때가 되면 어김없이 내보낸다.
곤히 잠자던 풀잎들도
제때에 깨워서 밖으로 내보낸다.
낙엽을 비집고 새싹 하나 솟아오른다.
(대구아동문학 42호)
(85)조개가 사는 법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산보다 더 큰 비밀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돌멩이나 흙덩이처럼
목숨 없는 덩어리인 척한다.
딱딱한 껍질 속에
땅을 파헤치는 무서운
도끼 발이 숨어 있을 줄이야.
바다 물을 힘차게 밀고 나아가는
용한 재주가 숨어 있을 줄이야.
물건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힘있는 끈이 들어 있을 줄이야.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는
산보다 큰 재주를 담고 있다.
흙에서 태어날 때
사는 재주 하나씩 타고났다.
(이후문학 00)
(86)정숙
선열공원 여기저기
<정숙>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원 안에 있는 나무들이
<정숙>이란 글자를 읽었는지
대나무, 소나무, 무궁화 모두가
말없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삼일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선열들이 근엄하게 앉아 계신다.
수다쟁이 참새들도 이 공원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을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은 꽃끼리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댄다.
나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쳐 애쓰는 모습
가슴속에 그리며 공원을 걷는다.
(이후문학 00)
(87)야무진 돌 하나
최춘해
문복산 높은 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에
씻기고 닦이고 깎인 돌.
모나고 덜 된 건
세월 속에 사라졌다.
있어야 할 알맹이만 남아
동글동글 아름답다.
높은 봉을 타고 내린
높고 귀하고 맑은 물.
수많은 세월
쉴새 없이 한결같이
갈고 닦은 보람있어
바라는 모양으로 돼 간다.
동글동글 야무진 돌 하나.
* 문복산: 경북 청도에 있는 산 이름
(대구아동문학 42호)
(88)경주 남산
최춘해
신라의 역사가 차곡차곡 담겨 있다.
발자국을 내딛기가 조심스럽다.
세 임금님의 묘가 있는 삼능계곡 입구
돌 하나 바위 하나에도
신라의 입김이 서려 있다.
부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 있다.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도
부처님의 뜻이 담긴 말이다.
천 년 전 스님의 염불 소리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천 년 전 신라 사람들 모습이다.
신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그루 나무, 풀 한 포기도
화랑의 얼이 깃들이다.
말 한 마디가 조심스럽다.
(대구아동문학 42호)
(89)엄마와 아가
최춘해
엄마 품안에 안긴 아가
마음놓고 잠을 잔다.
아기를 가슴에 안은 엄마
행복이 가득한 얼굴.
차야 달리든 말든
아가는 엄마만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엄마는
아가 코, 아가 입
발가락, 손가락
안 귀여운 데가 없다.
(대구아동문학 42호)
(90)동촌 강변의 식구들
-흙 62
최춘해
몇 아름도 넘을 고목들이
제 마음대로 자리를 잡아
마음껏 길길이 자라고 있다.
밤낮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은
제 마음대로 갈 길을 정해서
흐르고 싶은 대로 흐른다.
큰 나무를 좋아하는 새들은
큰 나무에 집을 짓고
물가를 좋아하는 새들은
물가에 집을 짓고 산다.
나무와 나무, 나무와 새
서로 우연한 인연이 아니다.
흙의 품에 안겨 사는 한 집안 식구다.
(대구아동문학 42호)
(91)하지
최춘해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작년과 똑같은 시각
햇살의 두께도
바람의 향내도
용하게도 똑같다.
소나무 새순도
아기 감, 아기 모과도
작년 만났을 때 크기만큼 귀엽다.
아기 새 목청도
풀벌레 노래 소리도
작년 이맘때만큼만 다듬어졌다.
흙은 참 용하다.
품안에 든 것은 어느 것이나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때맞춰 키운다.
(2000년도 노인문학)
(92)사물놀이
최춘해
농사 짓는 일이 하늘 아래 으뜸이다.
農事天下之大本也(농사천하지대본예)
꽹과리, 징, 북, 장고들이
어울리면 흙의 소리를 낸다.
흙을 파 먹고
흙과 더불어 사는 농촌에는
일년 내 풍물 소리
농사철이 시작되는 정 이월에는
논밭마다 소복소복
풍년이 들 꿈을 안고
얼씨구 좋다 얼쑤
어깨가 들썩들썩
저절로 등실등실 춤이 나온다.
모심고 논매기하느라
고달프고 지쳤어도
꽹과리 장고 징 북 소리 어울리면
팔다리에 절로 힘이 솟는다.
얼씨구 좋다 얼쑤
논배미에 벼들이 우쭉우쭉
논배미마다 그득그득
잘 익은 황금 들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 많은 곡식을 주신
흙의 은혜에 깊이 감사
얼씨구 좋다 얼쑤
낟알 하나 하나가 사랑스럽다.
(2000년도 노인문학)
(93)김영랑의 모란
최춘해
영랑 시인이 살던 집 뜰에는
모란이 무더기로 살고 있었다.
모시 바지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영랑.
모란꽃보다 더 고운 눈빛,
모란꽃보다 더 향기로운 냄새가
뜰에 가득 차 있었다.
사철 쉼 없이 자라는 종려나무처럼
영랑의 고운 눈빛과 향기는
온 누리에 쉼 없이 퍼지리라.
(2000년도 노인문학)
(94) 송강은 천사였다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에서
최춘해
송강은 하늘이 내려보낸 천사였다.
눈, 귀, 코, 입, 손발은 사람 같아도
사람으로서는 못 쓸 글재주를 주셨다.
사람 사는 세상이 더 부드럽게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이 세상에 없던 귀한 곡을 내려 주셨다.
이곳의 경치가 아무리 빼어나도
송강이 아니었던들 사미인곡이 생겼을까?
아! 속미인곡, 성산별곡
송강 정철은 과연 천사였다.
(2000년도 노인문학)
(95)땅끝 마을
최춘해
우리 나라 육지의 가장 남쪽 땅
북위 34도 17분 38초 땅 끝
뜻 없이 점지한 땅이 아니리라
하느님이 태초에
우리 배달 겨레 위해 점지하신 땅.
사자봉이 엄마의 젖가슴처럼 아름답다.
맴섬 사이로 떠오르는 해돋이 모습은
태초에 세상이 열리는 바로 그것이다.
바다로 들어가는 출발점이고
또한 육지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첫 단추를 끼우라고 점지한 땅이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새 길을 열기 위해
한번 깊숙이 생각해 보라고 한다.
(2000년도 노인문학)
(107) 남북 정상회담
다시 쓴 날 9/20
(96) 윤선도가 살던 녹우당
아름다운 향기를 따라
먼길을 따라 찾아온 녹우당.
몸은 가신 지 오래 되어도
시는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있다.
고산 선생이 살던 집 뜰에 섰다.
어부사시사, 오우가 노래가
뜰에 가득 차 있었다.
대문을 열고 나오니
그때 심은 비자나무가
먼 산을 바라보며
시를 쓰고 있는
고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 유물관에는
고산의 글과 손때 묻은 책들.
고산의 빼어난 글이 있어
우리 나라가 자랑스럽다.
(97) 매미 소리
매미 소리가 자지러지다
뙤약볕이 이글거린다
강가 미루나무 숲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수많은 잎사귀들이
빠질세라 저마다 팔랑팔랑
후끈 달아오른 남새밭에서
옥수수가 익어간다.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다.
대추, 감, 밤, 배 과일나무들이
삼복 더위를 잘도 참아낸다.
모두가 매미 소리 덕이다.
강물이 흐르듯 매미 소리 흐르면
오곡백과 저마다 열매를 익힌다.
소리가 강물을 이루듯
풍성한 가을이 온다..
(이후문학 01)
(118) 소쇄원
(119) 오대산 비로봉의 전나무
(98) 오대산 큰 나무들
오대산 비로봉 오르는 길목에
꿈이 큰 나무들이 보기 좋게 서 있다.
큰산에 자라는 나무는
큰산 정기를 받나 보다.
오대산 품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팔다리가 튼튼하고 싱싱하게 자란다.
큰산에 어울릴 나무답게
인물이 미끈하고 점잖아 보인다.
(새로 쓴 날짜 01.6/15)
(99) 태백산 주목
높은 산이 아니면
발붙이지 않는 나무
다부진 몸매만큼
품은 뜻도 높겠구나
태백산 정기 받은 목숨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찬바람을 참아내며
마음을 다스린다
높은 뜻 흐트러질까봐
죽어서도 꼿꼿이 섰다.
(새로 쓴 날짜 5/12)
(이후문학 01)
(100) 태백산에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