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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및 정책결정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 - 의약품 수퍼판매 어떻게 볼 것인가
작년 하반기부터 언론에 보도되던 일반약 수퍼판매 문제가 점점 확대되더니, 급기야 수퍼에서도 대부분의 일반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대폭 허용하는 방향으로까지 추진되고 있습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마저 장관이 앞장서서 올해 안에 약사법 개정을 목표로 숨가쁘게 진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반의약품을 약사 관리 아래 약국에서만 구입할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은, 비록 의사 처방이 필요없다하나 일반의약품이 잘못 사용되거나 상습적으로 다량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의약품은 무엇을 얼마나 사용하든 소비자가 알아서 결정하는 일반소비재와는 엄연히 다르다는 이제까지의 사회적 합의를 뒤엎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의약품 유통형태는 국민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은 만큼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바꿔나가는 데는 폭넓은 의견수렴과정이 필요하며 짧은 기간동안 졸속으로 추진될 성격의 사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반약 수퍼판매로 이득을 보는 일부 보수언론이 여론을 주도하고, 의사단체와 이들의 후원을 받는 일부 시민단체가 공론화에 나선 가운데 청와대까지 적극 개입하여 제도변화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일반의약품 약국외 판매 문제는 상황과 실정에 따라 나라마다 그 허용여부가 다릅니다. 약국에 대한 접근성이 우수한 나라에서 약국외판매를 허용한 경우는 세계적으로 매우 드뭅니다. 다른 선진국은 대부분 수퍼판매를 허용하고 있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약국에서 소비자에게 일반약을 전달할 때 약사가 이를 검토하고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지 확인함으로써 의약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긍정적인 기능은 악의적으로 축소되고 무시되고 있습니다. 약국외판매로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다면 약사들이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 편의성 증진을 얻는 대가로 치루게 될, 그러나 언론에서 보도해주지 않고 국민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악영향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이를 반대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목소리마저도 일부 보수언론은 약사들의 이기심의 발로라며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일반약 수퍼판매는 특히 취약계층의 약물사고 증가와 맞바꾸어 대기업과 보수언론의 경제적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책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아무 곳에서나 약을 사먹고,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지도록 하는 것을 과연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국가로부터 면허를 받고 약에 대한 업무를 전담하는 잘 훈련된 전문인 집단이 있고, 편의점보다 많은 수의 약국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습니다. 국가가 전문인의 손길을 통해 직접 국민건강을 보살피고 관리하는 의료복지의 가치를 포기하고 시장만능의 논리로 의약품마저 대기업 유통업체에게 넘겨주겠다는 발상이 일반약 수퍼판매의 본질입니다. 일반약 수퍼판매는 특히 생업에 종사하느라 병원갈 시간을 내기 힘든 노동계층과 경제적으로 궁핍한 취약계층, 약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판단하기 힘든 고령자를 더욱더 약물 오남용 가능성에 노출시킨다는 점에서도 결코 서민을 위한 정책이 아닙니다.
심야와 공휴일에 몸이 아파도 약을 구입하기 어려우니 수퍼에서 판매해야한다는, 그동안 수퍼판매 찬성론자들이 펼쳐왔던 논리는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심야와 공휴일에 국민이 아프다면 수퍼에서 불충분한 지식으로 알아서 약을 사먹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부담없이 편리하게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합니다. 그것이 정부가 국민을 위해 정작 고민했어야 하는 방안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의약품 유통을 무분별하게 확대하는 것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책인양 호도하고 있습니다. 구미각국에서 이미 심야시간에 시행하고 있는, 응급콜센터와 연계된 왕진의사 제도와 같이 이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취약시간대 의료공백 문제를 빌미로 국민을 약물오남용의 늪에 밀어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희 약사들이 그동안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좀더 자세히 적어서 첨부합니다. 국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正論, 국민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正策을 펼쳐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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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수퍼판매 어떻게 볼 것인가 -
언론인과 정책결정자들께 상세히 드리는 말씀
[첫번째 꼭지 - 일반약 수퍼판매, 정말 필요한 제도인가]
다른 선진국은 다들 일반약을 수퍼에서 판다구요?
일반약 약국외판매를 주장하는 이들은 상당수의 선진국이 일반약을 약국 외 장소에서 판매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OECD 27개 회원국 중 약국당 인구수가 3000명 이하인 7개 나라 중 단 1개 나라 만이 약국외판매를 허용하고 있으며, 유럽연합 회원국 중 약국당 인구수가 3000명 이하인 8개 나라 중 단 2개 나라만이 약국외판매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
이는 약국에 대한 접근도가 일반약 약국외판매 허용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의 약국 1곳당 인구수는 2300명으로, 세계 어느나라 보다도 약국 접근성이 뛰어납니다.
또한 약국외판매를 허용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그럴 수 밖에 없는 제도적, 사회적 여건에 놓여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경우 넓은 국토와 인구에 비해 적은 약국 수로 인해 접근성이 열악한 사정 외에도, 국민의 15%인 4800만명이 어떠한 건강보험에도 가입해있지 않아 이들은 간단한 감기로 병원진료를 받으려해도 수백달러의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열악한 의료접근성으로 인해, 일반약을 알아서 구입해 복용하도록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여건이 존재합니다. 병원문턱이 높아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일반약을 수퍼에 풀은 결과, 미국의 약물사고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편 영국,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는 의료비용을 국가에서 전적으로 부담하나 의료시스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엔 수개월씩 기다려야하고, 그동안 급한대로 일반약을 구입해 복용하도록 약국외판매를 허용한 면이 큽니다.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일반약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배경에는, 나름의 이러한 사정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미국의 경우 지나치게 의약품 취급 규제를 완화한 결과 약물 사고가 잇따르자, 소아용 종합감기약 판매를 중단하고 마약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코감기약 성분의 구입량을 제한하는 등 뒤늦은 조처에 나서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를 면밀히 살피지 않은 채 우리 현실에 단순대입하여 약국 아닌 곳에서 약을 취급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주장은 허구일 뿐입니다.
일반약을 수퍼에 풀었을 때 문제점은 없는가?
일반약을 약국외 장소에서 구입한다는 것은, 전문인의 조언과 관리가 아닌 다른 기준에 의해 구입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기준은 다름아닌 <광고>가 될 것입니다. 최근 방통위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일반약 광고량이 증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몰상식한 발언을 했습니다만, 사실인즉, 광고는 제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구매욕구를 부추기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습니다. 복용하는 사람에게 이 약이 적절한 것인지에 답하기보다는, 구매심리를 자극하여 매출 증대를 꾀하는 것이 광고의 속성입니다. 약국 외에서 약품이 유통될 경우 광고는 훨씬 더 교묘해지고 그 양도 대폭 증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약물의 오용과 남용을 가져옵니다. 불완전한 광고 내용에만 의존해서는 내게 맞는 적절한 약물을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광고품목인 코감기약 콘택골드의 경우, 이를 두통약이나 종합감기약으로 알고 구매하는 경우를 약국 일선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판피린을 짝으로 사다놓고 조금만 몸이 찌붓해도 먹는다고 하면 만류하는 약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편의점과 마트에서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면허를 지닌 자로서의 도덕성과 책임감보다는 이윤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약 수퍼판매 주장의 속내는?
이렇듯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일반약 약국외판매 주장의 배후에는 청와대, 기획재정부, 조중동 보수언론, 의사협회가 있습니다.
우선 기재부는 일반약 수퍼판매를 의약품 유통확대에 따른 유관산업 확대와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기재부가 추진 중인 <전문자격사 선진화방안>과도 그 궤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의약품 일부분을 떼어내 대형 유통업체에서도 자유롭게 취급하게 하고, 의사 변호사 약사 등 전문직종에게만 허용되어 왔던 의원 변호사사무실 약국 개설을 일반인도 이들 전문인을 고용하기만 한다면 자유롭게 개설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이 두가지 방안은 모두 이제까지 사회의 합의 아래 전문직능에게 맡겼던 영역에 대자본의 진출을 허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이 진출하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효율이 재고된다는 것은 시장주의자들에게는 교리와도 같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과 폐해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영리 추구에 골몰한 대형병원의 과잉진료 행태라던가, 로펌이 즐비한 시장만능의 나라 미국이 소송 천국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것만 생각해보아도, 전문지식이 필요한 영역까지 자본과 시장에 맡김으로서 벌어질 암물한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방통위는 종합편성채널 사업을 조중동매연 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에게 사실상 몰아준 상태입니다. 전문가들은 종편사업에 선정된 4개 채널 중 결국에는 1~2개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들 방송이 공중파채널 및 다른 종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막대한 초기 자금이 소요되며, 이는 대략 종편 한 곳 당 연간 2000억원에서 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됩니다. 갓 태어난 공룡인 종편채널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액수의 광고를 수주해야 하는데, 이에 이들이 새롭게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의약품 광고시장이지요.
실제로 방통위는 작년 12월 17일 현행법을 바꿔 전문약을 광고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펼쳤으나 의사 약사 단체가 반대하자 1월 11일에는 입장을 약간 바꿔 전문약 일부를 일반약으로 재분류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2) 3) 현행법 아래에서 광고가 불허되는 전문약과 달리 일반약은 광고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의약품 광고가 활발해지려면 의약품이 약국 이외의 곳에서도 널리 판매되어 유통채널이 확대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약국에서만 판매되도록 규제한다면 광고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조중동 보수언론이 일반약 수퍼판매를 반대하는 약사들에게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내면서 수퍼판매 여론 확산에 적극 나서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통위의 이러한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은 "콧물이 나면 내가 아는 약을 사먹는다. 그러면 개운해진다. 미국 같은데 나가 보면 슈퍼마켓에서 약을 사 먹는데 한국은 어떻게 하냐?"며 일반약 수퍼판매 논의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보수언론과 기재부의 행보를 청와대가 측면지원하고 있다는 심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으로, 일반약 수퍼판매가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은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이제까지 언급한 주체들의 특징은, 자본과 시장의 전지전능함을 교리로 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자본에게 봉헌하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중요한 실천과제 중 <의료민영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많은 진보세력들이 일반약 수퍼판매 논의 뒤에 너울거리는 의료민영화의 베일을 감지하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의료민영화란 의료를 국가가 아닌 시장에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국민건강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시장 - 또는 다른 말로 대기업과 자본 - 에 떠넘기는 정책입니다. 최고수준의 의료민영화가 달성된 식코의 나라 미국이
일반약 판매에 있어서도 가장 규제가 적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해열진통제까지도 대형마트 매대에서 1+1 행사를 하거나 세일을 합니다). 나라가 국민을 돌보지 않으니, 국민이 알아서 스스로를 돌볼 필요악에서 도입된 것이 미국의 일반약 수퍼판매입니다. 돈도 없고 사보험 가입도 거절당한 취약계층이 스스로 알아서 약이라도 사먹으라는 취지라고 하겠습니다.
대한의사협회 또한 일반약 수퍼판매라는 대국민사기극의 주요 배우 중 하나입니다. 약이 안전하니 수퍼에서 사먹어도 된다는 말은 상식적으로도 국민건강을 가장 염려해야할 의사들 입에서 나올만한 말은 아니지요. 의약분업 이후 의사와 약사는 건강보험재정이라는 파이를 나누어 먹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최근 인구고령화와 노동인구 감소로 건강보험재정 적자 문제가 심각해지자, 의협은 자신들의 파이를 확보할 전략 차원에서 약사를 공격하는 동시에 의료민영화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일반약 수퍼판매와 약사 조제료 삭감 주장으로 약사사회를 약화시키고, 한계에 봉착한 건강보험 대신 새로운 돈줄기를 의료시장에 유입시켜줄 민영의료보험의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약 수퍼판매로 동네약국이 타격을 입고 사라져 가는 것은 국민들 입장에서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약국 수 감소는 보건의료환경에 또다른 여러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꼭지 - 그렇다면, 정말 필요한 제도는 무엇일까?]
의약품 재분류, 어떻게 볼 것인가?
의약품 재분류란 무엇인가 하면, 전문약 중 일부를 일반약으로 그리고 일반약 중 일부를 의약외품으로 전환하자는 것입니다 (전문약->일반약->의약외품, 오른쪽으로 이동). 전문약은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일반약은 처방전 없이도 약국에서 구입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충 말해서, 전문약을 처방받아 먹을 때는 70% 정도 나라에서 건강보험재정으로 보조를 해줍니다. 반면에 일반약을 사먹을 때는 나라의 보조를 받지 못합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의약품 재분류는 의약품 광고시장은 확대하고, 국민이 건강보험으로 보조를 받아 먹을 수 있는 약은 줄어드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전문약보다는 일반약이, 일반약보다는 의약외품이 좀더 자유롭게 광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좀더 제한없이 광범위하게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진수희 복지부장관이 약사법을 개정해서라도 자유판매약 (약국이 아닌 곳에서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는 일반약의 일종)을 새로이 만들겠다는 것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대폭 증가한 광고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형할인점, 마트, 편의점에서도 제한없이 판매해 유통규모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죠.
또한 전문약이 줄어든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나라에서 건강보험으로 보조해주는 약의 가짓수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약을 먹을 때 나라에서 도와주던 것을 줄이고 대신 편리하게 알아서 사먹도록 한다는 얘기죠. 이는 국가가 점점 국민건강에서 손을 뗀다는 흐름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의 끝에는 의료민영화가 있습니다.
국민불편을 핑계로 국민안전을 져버리지는 말아야
일반약 수퍼판매를 주장한 이들이 애초에 내세운 것은 "밤 늦은 시간에 약을 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작년 가을 이후 약사사회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런저런 방안을 내놓으며 국민여론에 호소하려 애썼습니다. 심야시간의 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려면, 제한된 장소에서 밤에만 취급하게 하는 식으로 현행 제도를 보완하는 선에서 대책을 논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사회의 이러한 제안을 4월말 청와대는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미온적이던 보건복지부를 질책하여, 현재는 감기약과 해열진통제 마저도 24시간 모든 유통형태에서 판매할 방안을 찾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지고 보면, 밤늦은 시간에 아파도 약을 구입하기 불편하다는 것은, 심야시간 등 취약시간에 값비싼 응급실이 아니면 이용할 만한 마땅한 의료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심야시간에 몸이 아파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의사가 집까지 찾아와 간단한 진료를 해줍니다. 밤에 아프면 일단 수퍼에서 약 사먹고 아침까지 견뎌보라는 것보다 훨씬 나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심야 공휴일의 의료공백 문제입니다.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자는 국민건강을 돌보아야할 정부이며, 취약시간대 의료공백 문제를 일반약 유통을 확대하기 위한 빌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수퍼판매로 잃어버리게 될 것들... 그리고 당부의 말씀
일반약을 수퍼에서 판매할 때 얻게될 편의만이 부각되고 있는 지금, 안전성에 대해 우려하는 약사들의 목소리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약사는 일반약을 복용자에게 전달할때 다음 과정의 일부 또는 전부를 거칩니다.
1) 약리학적 검토 :
특정 약물의 작용기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복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상황에 이 약이 적절하고 알맞은지 검토합니다.
예를 들어 끈끈한 가래가 있으면서 기침하는 경우에는 진해제 사용을 지양하고 거담제를 추천합니다.
콧물만 있는 경우 항히스타민제를, 코막힘이 있는 경우 비충혈제거제가 함께 들어있는 제품을 소개합니다.
두통을 자주 겪는 사람은 진통제 사용보다 신경외과 진료를 권합니다.
단기간의 경련성 복통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진통제가 아니라 진경제를 사용해야한다고 말해줍니다.
이러한 과정은, 의사단체에서 오해하고 있는 바와 같은 "진단"에 해당하는 월권행위가 아닙니다. 진단은 현재 환자의 병명을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끈끈한 가래에 진해제를 사용하면 가래를 배출하려는 몸의 정상반응을 가로목아 폐렴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기침을 멈추기 보다는 가래는 제거하기 위해 약을 사용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항히스타민제는 콧물 재채기는 완화시키지만 코막힘에는 효과가 미약합니다. 소화기계의 경련성 복통은 내장평활근을 이완시키는 진경제가 효과적이며, 복통의 원인을 은폐할 수 있는 진통제 사용은 자제해야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진단과 관계가 없으며, 약물이 작용하는 기전을 알면 곧바로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2) 약을 복용하는 방법과 복용량을 설명 :
많은 국민들이 약이란 모름지기 식후 30분 하루에 세번 먹어야하는 줄로 아시지만, 실제로는 식사 후에 분비되는 위산을 이용하여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 식후 즉시 복용하거나, 위산에 약하기때문에 공복에 복용하거나, 생체리듬을 활용하기 위해 아침이나 밤에 복용하는 등 복용법이 다양합니다. 또한 복용량도 혼동하시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주 확인해드리는 부분입니다.
3) 이 약물을 사용해서는 안될 사람을 걸러내기
특정 약문에 특이체질이어서 알러지가 잘 생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생제나 소염진통제 종류에서 흔합니다). 그밖에 어린 아이는 먹을 수 없거나 나이에 따라 먹는 양이 달라지는 약, 임신 중이거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경우 먹을 수 없는 약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타이레놀은 임신 중에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통제이지만 간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합니다. 부루펜은 임신 중에 사용하면 안되는 주의점이 있지만 타이레놀과 병용할 수 있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약사가 일반약을 드릴 때 이런 점을 머리 속으로 체크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4) 이 약을 현재 사용중인 다른 약과 함께 복용했을 때의 문제점 검토
감기약 중에도 어떤 성분이 이 약 저 약에 중복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열진통제인 아세트아미노펜이 종합감기약에도, 코감기약에도, 기침약에도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약은 코감기약이고 저 약은 기침약이니까 서로 전혀 다른 약이고 함께 먹어도 괜찮아보입니다. 그러나 둘 다 아세트아미노펜이 들어있으므로 함께 드시면 아세트아미노펜을 지나치게 복용하게 됩니다. 약사가 일반약을 드릴 때, 당연히 이런 상황을 체크합니다.
5) 무엇이 자신에게 필요한 약인지 잘 모르실 때 적절한 약을 추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르고 계신 경우도 상당히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소독약 하나도 선택의 기준이 있습니다. 상처가 난지 오래 지나 피가 묻어있지 않은 경우, 과산화수소는 살균력이 떨어집니다. 소독약 하나도 꼼꼼하게 물어보고 고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드리면서 골라드리면 대부분 매우 고마워하십니다. 국민이 잘 모를 때 언제든 무료로 조언을 해드리는 전문인력인 약사가 있는데, 왜 스스로 알아서 사용하라고 부추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6) 약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 바로 잡아주기
약국 일선에서 일하다보면, 코감기약인 콘택을 기침약으로 알고 달라고 하시거나, 종합감기약인 판피린을 두통이 있을 때마다 먹는다거나, 술마신 다음날 머리아프다고 타이레놀을 찾는 경우를 왕왕 봅니다. 생업에 바쁜 국민이 약에 대해 속속들이 잘 모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럴 때 도와드리기 위해 약사가 존재한는 것이니까요. 녹색소비자연대가 수퍼판매를 반대하는 것도, 아직은 소비자가 의약품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소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민단체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에게 수퍼에서 약을 사먹으라고 말하는 것은, 약국에서 약사에게 받아왔던 이상과 같은 관리 내지 보살핌 대신 광고를 참고하여 알아서 복용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약사의 기본적인 역할은 약을 잘못 먹거나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약 모르고 오용말고 약 좋다고 남용말자)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의약품 유통을 확대하고 광고를 촉진하며 판매를 증대시키려면 골치아픈 훼방꾼인 약사의 역할을 폄하하고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사들이 복약지도를 열심히 안 하니 약사는 필요없는 존재다, 약의 전문가는 약사가 아니라 의사이므로 약은 수퍼에서 판매해도 된다는 궤변이 횡행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대한민국의 약사들은 언제나 국민 곁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잘못하는 점도 있었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면허를 받은 자로서 일반인과는 다른 전문지식과 소명의식으로 소소하게나마 국민건강을 염려하고 힘이 닿는 한 보살펴왔습니다. 일반의약품을 어떻게 사용하면 가장 효과적인지, 때로 겪을 수 있는 위험성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알고 조언할 수 있는 것은 약사들뿐입니다.
사람들이 의약품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돕기 위해 국민 중 일부를 교육시켜 그에 대한 소임을 맡긴 것이 약사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사를 잘 활용하여 국민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한국사회가 발전해나갔으면 합니다.
1) 건강과 대안 이슈페이퍼, http://www.chsc.or.kr/xe/?document_srl=63775#3
2) 방통위의 방송광고 규제 완화, 최대 수혜자는 ‘종편’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263
3) 방통위, 전문의약품 방송광고 위한 ‘꼼수’?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05#
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첫댓글 이글을 방송이나 메이져 신문에 올렸으면하는바람입니다 ㅠ
새벽까지 고민하시고 이른 아침에 글올리셨네요 ..응원의 박수 보내드려요
고생하셨습니다. 항상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