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은 과거 10 년 간10 번의 파이널 챔피언을 배출했는데 이중 앤디 훅(96년)과 마크 헌터(01년)를 제외한 8 번을 이 선수들이 차지했으니까 K-1 은 네덜란드가 접수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지요. 왜 이렇게 네덜란드가 강할까요? 인구 불과 1500만의 조그만 나라가. 그 뿌리에는 극진이 있습니다.
1954년 방콕 룸피니에서 최영의 선생이 무에타이 복서 코브라를 KO시킨 일은 극진의 전설이지만 무에타이계에서는 타류 시합에서 최초로 패배한 치욕의 기억입니다. 그로부터 10년후 최영의 선생의 제자 구로사키 겐지가 후배 두 명과 라쟈담넨에서 3대3 시합을 갖게 됩니다.여기서 후배 둘은 이겼지만 정작 구로사키 본인이 KO패를 당하고 여기에 충격을 받은 그는 무에타이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가라데와 무에타이를 합친 새로운 무술을 창안합니다. 이게 킥복싱이라는 거죠.
방콕에서 돌아온 그는 동경 메지로가(街)에 메지로 도장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무도 유학을 온 겁니다. 그중에 얀 플러스, 요한 보스등이 있었고 얀 플러스는 귀국 후 암스테르담에 일본과 같은 이름의 메지로 도장을 세웁니다. 메지로 소속의 선수로는 피터 아츠와 그 날아 무릎차기로 유명한 레미 본야스키가 있습니다.
요한 보스는 귀국 후 보스 체육관을 세우고 밀란 해밀튼 등과 함께 어니스트 후스트, 뵤른 브레기, 쯔요시등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킥복싱 체육관으로는 차쿠리키 도장이 있습니다. 극진 출신의 톰 해링크스가 세운 것인데 붉은 색의 가라데 도복으로 유명하죠. K-1경기에 선수들 세컨드 봐 주는 머리를 뒤로 묶은 할아버지 그 분이 톰 해링스 관장입니다. 차쿠리키 라는 말은 착력(搾力) 즉 힘의 극한을 쥐어 짠다는 말의 일본어 발음입니다. 차쿠리키 소속의 선수로는 블랑코 시카틱, 피터 아츠(후에 메지로로 이적),로이드 반담, 하야시 노부키 등이 있습니다.
현재 메지로, 보스, 차쿠리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3대 명문 도장이 되었지만 그뿌리를 올라 가면 극진과 직 간접적으로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현대 킥복싱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로사키 겐지는 얼마 전 국제 무도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역시 극진 출신으로 종합 격투기의 세미 슐츠를 가르친 존 블루밍 (그전에 블루밍은 극진 탈퇴 후 극진 무도회의 수장이었음), 극진의 또다른 분파인 아시와라 가라데의 데이빗 융커가 동참했고 전세계 약 120개의 도장이 소속되어 있다는 군요.
비단 킥복싱 뿐만 아니라 가라데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단체도 계보를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극진이 나타 납니다. 대략 정리를 해 보면,
시도카이칸(士道會館) 74년 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들을 연속으로 쓰러뜨린 극진의 호랑이로 불렸던 소에노 요시지가 설립한 극진의 분파. 그래플링 기술도 채택하고 있음.
신국제 공수연맹 (NEW IKO) 싸움 10단으로 불렸던 극진의 싸움꾼 아시와라 히데유키(1944-1995)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극진에서 파문 당하고(1979년) 그 이듬해 이 단체를 설립함.
아시와라 가라데 인터내셔널 역시 아시와라 계열임.대표는 후세인 나커.
엔신카이칸(円心會館) 아시와라의 제자였던 니노미야 요코,75년 제1회 극진 세계대회 3위, 78년 전일본 대회 우승자였던 그 니노미야가 설립.
월드 오야마 가라데 최영의 선생의 직전제자로 미국 지부의 개척자 오야마 시게루(한국이름 조일삼)관장이 설립. 곰을 죽이고 안토니오 이노키와 싸운 윌리 윌리엄스((1979년 2회 세계대회 3위)가 조일삼의 제자임.
세이도카이칸(正道會館) K-1 프로듀서로 유명한 이시이 카즈요시 관장이 설립. 소속 선수로는 87년 4회 극진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문장규 관장에 져서 2위,91년 5회대회에서 프란시스코 필리오에게 예선에서 KO패 한 앤디 훅이 유명함. 앤디는 정도회로 이적, 96년 K-1 우승을 차지함. 그외 사타케 마사아키, 무사시, 호주의 샘 그레코(극진에서 이적), 아담 와트 등이 있음.
다이도쇼쿠(大道宿) 79년 극진 2회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아즈마 다카하시가 설립한 독특한 캐릭터의 분파. 투명한 창이 달린 안면 보호구와 얇은 장갑을 끼고 안면 가격과 그래플링을 적극적으로 채택함. 북두기 대회라는 자체 대회를 개최하고 있음.
이외에 무수한 분파들이 존재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극진을 떠났을까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타일에 대한 차이입니다. 극진은 언제나 지상 최강을 추구해 왔고 그것을 증명하려면 끝없이 타류와 겨루어 보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 받을 수 없으니까.)
타류와 겨루고 나면 이기든 지든 자기 스타일에 대한 반성과 수정이 가해 지게 되고 이는 곧 새로운 스타일의 창안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의 무술은 타류와의 교류를 통해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교류에 개방적인 무술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극진을 떠났고 수많은 분파가 생겨 났지만 그들은 극진에 대한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고 극진을 마음의 본향으로 여기고 있으며 최영의 선생을 여전히 자기 스타일의 개조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입식 격투계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언제나 그 중심에 극진을 만날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