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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플랜의 개요
계획의 범위 및 성격
- 계획의 범위
- 시간적 범위
- 계획기준년도: 2009년
- 계획목표연도: 2020년
- 공간적 범위
- 계획의 성격
- 전략계획
- 6가지 추진전략을 수립, 자락별 사업방향 제시
- 실행계획
- 생태환경과 역사성을 복원하고, 한국의 전통 이미지를 기반으로 남산만의 브랜드를 창조하기 위한 사업의 실행 전제
- 장기사업
- 남산 제모습 가꾸기 사업의 큰 맥락 속에서 시민과 함께 남산만의 자락문화 창조
계획의 흐름
- 계획의 범위
남산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은 ‘회복’과 ‘소통’이라는 두 개의 큰 틀 아래 6대 추진전략을 제시하여 남산의 브랜드화를 실현한다. 이와 함께 장충, 예장, 회현, 한남 4개의 자락과 N서울타워 주변의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시민과 함께하는 남산의 새로운 자락문화를 창조한다. 
2020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도시환경정비사업부문)
2010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도시환경정비사업부문)
2001 도심재개발 기본계획
용산국제업무도시
추진배경
철도청 부지와 서부이촌동 지역을 통합 개발하여 용산을 국제업무기능을 갖춘 서울의 부도심으로써의 위상확보와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수변도시로 조성하여 강북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함
사업개요
- 위 치 : 용산구 한강로3가 40-1, 서부이촌동 일대
- 면 적 : 566,000㎡
- 주요 사업내용
- 국제여객터미널 및 한강변 아트센터 등 문화·상업공간을 한강변으로 확장 - 강변북로 지하화, 확장 및 지역도로 구조개선으로 교통난 해소 - 초고층 건축물 및 도심속의 신도시 건설로 국제업무·관광 단지조성

추진경위
- '01. 7.10 : 용산 제1종지구단위계획 결정(서고 2001-229호)
- '07. 4.19~8. 7 : 서울시 - 코레일간 협의회 구성 및 회의(총 13회)
- '07. 8.17 : 서울시 - 철도공사간 합의문 발표
- '07. 8.30 : 이주대책기준일 공고 및 사업자 재공모
- '07.11.02 : 사업후보자 선정(코레일)
- '07.12.18 :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 위한 법인(PFV,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주식회사)설립
- '08. 3 ~ 5 : 주민설문 조사 (드림허브)
- '08. 4 ~ 5 : 용산국제업무지구 조성에 따른 안내문 배부(서울시)
- '08. 4 ~ : 용산일대 광역교통 개선 대책 수립
- '08. 9. 3 ~ 10 : 찾아가는 현장방문 상담소 운영
- 장소 : 이촌제2동 주민센터(1층) - 내용 : 용산국제업무지구에 대한 설명 및 주민의견 수렴
- '08. 10. 23 ~ 계속 : 사업설명회 및 동의서 접수 (드림허브)
- '09. 3.30 : 제안서 접수 (철도공사 → 용산구)
- '09. 4.16 : 국제공모 당선작 발표(다니엘 리베스킨트, 아키펠라고21)
- '09. 7.20 ∼ 8. 3 : 구역 지정 및 개발계획에 대한 공람공고
- '09. 7.20 ∼ 8. 3 : 구역 지정 및 개발계획에 대한 공람공고
- '09. 9. 11 : 용산구 도시계획위원회 자문
- '09. 9. 23 : 구역지정 요청서 접수 (용산구 → 서울시),
- '09.10. 5 : 관련부서 협의
- '09. 12. 2 : 도시계획위원회 심의
용산국제업무지구 조성 기준
도시공간 구조 구상
- 남산 정상~용산국제업무지구 중앙부~63빌딩을 잇는 조망축 구축
토지이용계획 구상
- 랜드마크 : 도시중심축 중앙에 위치
- 수변지역 : 유람선 선착장, 한강시민공원 등과 연계 시설 배치
- 지구 중심부 : 중심상업지역 주변에 일반상업지역을 배치, 상업·업무 및 주상복합시설 균형배치
- 랜드마크를 정점으로 하는 스카이라인 형성
녹지축(보행축) 개선
- 한강 ~ 랜드마크 ~ 용산역 ~ 국제빌딩 주변 ~ 민족공원을 녹지축으로 연결하여 걸어서 한강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계획
- 철로의 데크화로 추가 녹지공원 조성
용 적 률
- 서부이촌동지역(2,200세대)을 포함하여 개발함에 따른 제반 여건을 감안하여, 당초 결정된 용도지역의 범위 안에서 조례가 정하는 최대까지 허용(평균 608% 이하)
주거비율
최고높이
- 랜드마크는 350m이상 620m 이하
랜드마크 주변은 250m이하, 그 외 지역은 100~150m
- 한강변은 중·저층을 유도하여 한강으로 열린경관 형성
기반시설 부지
- 사업대지(철도제외) 면적의 40%이상을 도로, 공원, 학교, 문화시설, 공공청사 등으로 조성
교통계획
- 서울시가 수립할 광역교통개선대책과 향후 사업자가 추진할 교통영향평가 결과에 따라 교통대책을 수립하되, 지하철 신안산선과 신분당선이 용산역을 경유하는 방안 및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모노레일 등도 검토
- 사업구역에 접한 강변북로를 지하화하고, 주변지역의 도로체계 개선을 추진

- 남북1축
원효대교 북단 개선 운영방안
- 문제점 : 원효로 다중교차로 개설 동선체계
- 개선 : SPC사업자 선정시 원효대교 북단 개선대책 수립
- 동서1축
백범로 개선 운영방안
- 현재 고가차도(2차로)→지라차도(4차로)개설
- 연장 : 약520m
- 남북2축
한강로 개선 운영방안
- 용산역앞 지하차도(4차로)개설→한강로 교통량분담 도모
- 업무지구축 주요 연결로 지하차도화
- 동서2축
신설강변북로 운영방안
- 지하차도 개설(8차로)
- 한강대교북단 - 업무지구 연결 지하차도(6차로)개설 →한강철교로 인한 도로단절 해소
- 일산 → 업무지구 연결램프 설치 → 상부도로에서 U-turn
사업의 단계별 추진
- 상업시설의 집중, 서부이촌동지역 주민의 호응도, 도로 등 교통영향 등을 감안, 사업을 단계별로 추진
국제업무지구 조성계획
사업자 선정 당선작 <2007. 11. 2>
- 세계의 중심, 드림허브(DREAM HUB) 계획
- 랜드마크 건축물(620m) : 오피스(1~68층), 호텔(69~136층) - 주요시설 : 업무시설 12개동, 주거시설 8개동, 6성호텔 2곳, 쇼핑몰, 백화점, 아트센터, 컨벤션센터, 국제여객터미널과 유람선 나루터, 디지털리버파크, 드림파크 등 - 교통 개선계획 : 강변북로 확폭 및 지하화, 철도변 입체도로, 모노레일,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연결 보행교 등

국제현상공모 당선작 <2009. 4. 16>
- 국제현상공모 당선작 : 아키펠라고21(작가:다니엘 리베스킨트)
- 마스터 플랜 컨셉 · 다도해의 개념을 도입한 섬과 호수의 수변 녹지공간 조성 · 신라 금관의 형상을 닮은 스카이 라인 계획 · 랜드마크타워를 중심으로 한강을 향한 배치계획 · 인근주변 도시 맥락과의 조화 - 랜드마크 건축물(665m) : 리테일(1~2층), 오피스(3~71층), 호텔(72~98층), 전망대(99~106층) 랜드마크 타워 및 개별 건축물은 차별화된 상징성을 고려하여 별도 기본계획으로 추진 예정

효 과
- 국제업무기능을 담당할 서울의 부도심 조성 및 국제적인 명품 수변도시로 탈바꿈
- 한강변 아파트 병풍 및 강변북로를 철거함으로써 열린 한강 구현
- 한강르네상스 및 관광객 1,200만 유치 실현
- 민간 사업자 참여로 고용창출 효과 및 경제적 활성화에 기여
- 한강을 열어 세계로! 항구도시 서울
- 강변북로를 지하화하고, 업무·문화시설을 강변으로 끌어내어 한강르네상스의 구체적 실현
- 경제문화의 허브, 문화도시 서울
- 유동인구 연 1억4천명[일 38만명], 관광객 5,000만 유치, 경제유발효과 67조, 고용창출 36만명<삼성경제연구소>
- 도심속의 신도시, 강북개발의 기폭제
- 건국이래 최대사업[사업비 28조], 일본 롯본기 힐즈 5배, 영국 카나리워프 2배로 강북활성화의 기틀 마련
- 복합화된 도시기능, 컴펙트 시티 서울
- 금융·IT·관광·주거가 어우러진 복합단지 조성, 도시의 경쟁력이 국가발전과 성장을 견인
향후 추진계획
- 2010. 3 : 도시개발구역 지정 및 개발계획 결정
- 2010. 6 : 사업인정고시
- 2011. 7 : 실시계획인가
- 2016. 12 : 건축물 준공
마곡도시개발사업
개 요
사업개요
- 위 치 : 강서구 마곡·가양동 일원(3,665,336㎡)
- 사업방법 : 수용 및 사용방식의 도시개발사업
- 사업시행자 : SH공사
- 사업기간 : 2007년 ~ 2031년
- 주요내용
- 미래지식 첨단산업단지(R&D) 및 국제업무단지 조성 - 워터프론트 조성을 통한 친수공간 개발 및 고품격 중층 주거단지 조성 등
추진배경
- 서울의 마지막 미개발지인 마곡지구에 대해 우리시는 그 동안 개발과 보존이라는 큰 틀에서 효율적 관리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 검토를 진행하여 왔음.
- 서울은 현재 인구가 감소하고 제조업 비율이 하락하는 등 서울의 성장이 둔화추세에 있고, 향후 공공기관 지방이전 등이 가시화될 경우, 서울의 지속적 성장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대외적으로는 동북아 경제권 부상과 함께 서울이 국가경제의 중심으로서 핵심적 역할수행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임.
- 따라서, 서울의 국제경쟁력 제고와 지속적 성장을 위해서는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이를 위한 전략적 첨단지식산업 집적지의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마곡지역은 최적의 대안이라고 판단되어 개발하게 되었으며
- 이러한 마곡지구 개발은 장래 토지수요에 대비하는 한편,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개발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발할 계획임.
추진방향
서울의 미래지식산업을 통한 동북아지역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서남부지역의 활성화를 통해 지역간 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GT?BT?NT 등 미래지식 산업단지, 컨벤션센터 등 국제업무단지, 선착장과 수변공간 등이 설치되는 워터프론트, 고품격의 중층 주거단지, 친환경적이고 에너지절약형 도시건설 등을 조성할 계획으로 우리시 SH공사에서 도시개발사업을 통한 공영개발로 추진 중에 있음.
추진상황(계획)
- ’05.12.20 : 마곡R&D시티(MRC) 기본구상 발표
- ’07.12.28 : 구역지정 및 개발계획 수립고시
- ’08. 1~10 : 4대 영향평가(재해, 인구, 교통, 환경) 실시
- ’08. 1~10 : 지구단위계획 수립
- ’08. 5~8 : 토지·물건조사 실시
- ’08. 8.29 : 보상계획 공고
- ’08.12.23 : 이주대책 및 대토보상계획 공고
- ’08.12. 4 : 마곡 워터프론트 기본 및 실시설계 착수
- ’08.12.30 : 실시계획 인가
- ’09. 1~ : 협의보상, 재결 및 공탁, 강제집행 등
- ’09. 1~9 : 기반시설 및 단지조성 실시설계
- ’09. 9.30 : 단지조성공사(1공구) 착공
- ’10. 1 : 단지조성공사(2공구) 계약 및 착수
- ’12.12 : 단지조성공사 준공(예정)
- ’10. 2. 1 : 단지조성공사(2공구) 착공
- ’10. 2.11 : 구역 및 개발계획 변경결정 고시
기본구상
개발목표

첨단과 주거가 조화된 환경친화적 첨단산업단지
- 동북아경제 네트워크 거점
- 서울 차세대 성장원동력 전초기지
- 주변녹지거점과 수계가 연계된 친환경 단지
- 서남부지역 활성화 및 지역균형발전
개발전략

- 국제교류강화
- 국제교류 활동기능 수용공간 조성
- 글로벌시대에 맞는 국제적 클러스터로 육성
- 전략산업 공간조성
- 국내외 연구개발형 기업유치
- 외국인 투자유치 활성화를 위한 기반 조성
- 첨단문화 공간
- 한강르네상스와 연계한 첨단문화공간 조성
- 다양한 문화활동 및 문화창조 거점
- 친환경주거공간
- 쾌적한 친환경 주거공간 조성
- 외국인을 위한 주거공간 계획
동북아 중심으로서 서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첨단산업단지 조성
개발방향
- 적정밀도의 친환경적 단지 개발
- 역세권 주변 대중교통 중심으로 개발
- 한강르네상스와 연계한 워터프론트 개발
- 서남권 중심지 기능 및 활성화
토지이용계획(안)
-
토지이용계획(안)
구분 |
면적 |
비율(%) |
비 고 |
천㎡ |
전체면적 |
3,364 |
100.0 |
|
주 거 |
660 |
19.6 |
|
일반상업 |
339 |
10.1 |
|
중심상업 |
95 |
2.8 |
|
연구복합 |
742 |
22.1 |
|
도 로 |
518 |
15.4 |
|
공 원 |
722 |
21.5 |
|
공공청사 |
51 |
1.5 |
|
학 교 |
72 |
2.1 |
|
의료시설 |
43 |
1.3 |
|
기타용지 |
122 |
3.6 |
주차장, 기반시설 등 |
부분별 체계도
- 자전거도로체계
- 교통체계
- 공원녹지체계
- 수(水)체계
- 건축계획
마곡 워터프론트 조성
사업개요
- 위 치 : 마곡지구 중앙공원 및 서남물재생센터 확장예정부지, 마곡유수지
- 면 적 : 791,000㎡
- 조성방향
- 도시 이미지 향상 위한 쾌적한 친수공간 개발 (한강과 마곡지구를 연결하는 인공수로, 호수, 수변공간 조성 등) - 유람선, 요트 등 수상교통 운행 및 선착장 설치 (갑문 설치, 올림픽대로 ·양천길 입체화 등)
추진경위
- ’07. 7.20 국제현상공모 추진계획 수립
- ’07.11.15 국제현상공모 공고
- ’08. 1.31 참가등록 총 439팀(국내 235팀, 국외 204팀)
- ’08. 6.10 작품접수 총 105팀(국내 45팀, 국외 60팀)
- ’08. 6.24 당선작 발표 (1등 1작품, 2등 1작품, 3등 2작품, 가작 3작품)
- 1등 : Heart of Magok is Nature of Living Water (살아숨쉬는 마곡의 중심) :김관중(삼우종합건축),권순기(삼우뉴욕지사),유덕희(서영엔지니어링)
- ’08.7~11 당선자와 설계 계약 협의, 기술용역 타당성 심의
- ’08.12. 4~ 마곡 워터프론트 기본 및 실시설계 추진중
- ’08.12.30 마곡 도시개발사업 실시계획 인가
- ’10. 2.11 구역 및 개발계획 변경결정 고시(워터프론트 추가편입구역 등)
향후계획
- ’10. 9 마곡 워터프론트 조성공사 착공(예정)
- ’12.12 마곡 워터프론트 조성공사 준공(예정)
- 주요시설
- 녹색제방(페리터미널, 레스토랑·카페 등), 요트 마리나(레스토랑·카페, 정비시설) - 호수공원(수변활동 공간), 생태공원(다양한 습지공간), 유수지공원(저류용량 34만㎡, 자연정화) - 갑문(2중, 슬라이딩 방식), 빗물펌프장, 호텔 및 컨벤션 센터 등 - 올림픽대로(지하화), 양천길(지하화), 보행자 교량 등
서남권르네상스 개요
추진배경
- 서울의 경쟁력강화 및 낙후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5대권역(동북, 동남, 서북, 서남, 도심)에 대하여 『서울시 권역별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2006년부터 추진.
계획의 성격
- 권역내 제조업 기반 위축으로 낙후되고 산발적인 개발사업으로 중심성이 약하며, 기반시설 부족으로 생활환경이 열악한 서남권의 입지적 특성을 고려하여
- 쇠퇴한 환경개선과 산업재생을 통해 문화 인프라를 갖춘 경쟁력 있는 지역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으로
-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권역별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2008년 구체화한 실행계획임.
사업개요
- 사업기간 : 2008~2020
- 대상지역 : 강서, 양천, 영등포, 구로, 금천, 동작, 관악구
- 주요내용 : 4대 중점전략 10대과제 100개 단위사업
추진경위
- '06. ~’07.12. 도시기본계획에 따른 「서울시 권역별 발전계획」수립
- '08. 6.25 서남권르네상스 계획 발표
- '09. 2월 세부실행계획 수립(10대 과제 100개 단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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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권 르네상스란?
동북권 르네상스 프로젝트
동북권 르네상스 프로젝트
- 서울 4대권역 중 인구규모가 가장 큰 지역의 종합 도시재생계획
- 8개구 350만명에 이르는 대생활권의 신성장거점 육성, 인프라 개선, 산업 재배치 등을 포괄하는 동북권 최초의 종합 도시재생계획
- 예산계획이 수반되는 실행력 있는 지역발전계획
- 10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연차별 Action Plan 수립 및 재정계획에 반영
동북권 르네상스 기대효과
- 민선4기 지역균형발전 의지의 본격적 가시화
- 재정격차 해소, 교육격차 개선사업에 이어 주거 및 상권부문의 격차 해소 의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지역균형발전의 본격적 가시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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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진화
1394년 10월 서울이 조선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간 서울의 인구는 100배 이상 늘어났고, 면적도 38배나 늘어났다. 조선시대의 서울인, 한성부 시대의 초기에 인구는 대략 10만인 정도였으며, 인구가 20만인 으로 증가하는 데 약 400년(조선조 세종대에서 순조)이 걸렸다. 일제시대의 서울 즉, 경성부 시대의 초기 인구는 대략 25만인 으로서 100만인으로 증가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대한민국정부 수립후 서울은, 서울특별시 시대가 시작된 1945년 인구는 90만인이었으며, 인구 100만인에서 200만인으로 되는 데 15년, 200만인에서 400만인으로 또 400만인에서 800만인으로 되는 데 각각 약 10여년이 걸렸다. 또 인구의 증가와 함께 행정구역도 해방당시의 136.04㎢, 1973년의 627.06㎢로 확장 되었고 현재 605.95㎢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인구증가와 면적확장이 이루어지는 동안 서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큰 변화를 경험하여야 하였다. 임진왜란을 위시한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도성내의 화재 등으로 시가지를 다시 복구하여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상실한 적도 있었다. 광복 이후에는 6.25동란으로 시가지가 폐허화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의 비약적인 경제개발과 도시성장으로 이제는 세계 유수의 거대도시중의 하나로 된 것이다.
수도이전의 서울
한반도의 중앙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변 일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서울 부근은 선사시대 이래로 줄곧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민족역사의 중심에서 성장해왔음을 기록과 유물, 유적들이 말해주고 있다.
선사시대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던 서울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의 도읍지로 선택되어 처음으로 수도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삼국의 각축장이 된 백제의 도읍 위례성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결과로 고구려 영토인 북한산주, 남평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삼국의 주도권이 신라에 넘어가게 되자 서울은 다시 신라의 한주, 한양군이 되었다.
서울이 도시로서의 어엿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와서였다. 1067년(문종21)에 삼경제도가 갖추어짐에 따라 서울은 고려왕조의 남쪽 서울(남경)로서 궁궐이 세워지게 되고 주민의 이주가 시행되어 비로소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서울은 삼경중의 하나가 아닌 본격적인 수도의 후보지로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우왕과 공양왕 시기에 각각 6개월동안 천도가 현실화되어 실제로 수도가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특히 공양왕 2년(1390)에는 관서를 구경(개성)과 신경(서울)에 양분하여 천도하였으나, 서정체계의 미비, 호환과 모해사건으로 인한 민심불안 등으로 인해 이듬해 환도해 버리고 말았다.
한양천도
태조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의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역성혁명을 한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긴다는 당위성 아래 흩어진 민심을 일신시키자는 계기로서, 구왕조와의 보이지 않는 끈을 끊어버리기 위한 의도로서 천도의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조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1392년 태조가 한양천도를 명한 이후 새 왕조를 위한 새로운 도읍지가 실질적으로 확정되기까지는 13년에 걸친 논쟁을 거쳐야 하였다.
천도의 후보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풍수지리였다. 계룡산이 후보지로 대두된 것도, 무악이 거론된 것도, 그리고 개성을 고수하자는 의견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풍수지리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풍수지리라고 하는 것은 한 지역을 놓고서도 의견이 엇갈릴 수 있었다.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정종대에 수도가 개성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었으나 결국 1405년 10월 태종에 의해서 한양으로의 전격적인 천도가 이루어졌다. 태종은 마지막까지 논의된 3개의 후보지인 한양, 무악, 개성을 두고 최종 결심하여 결국 한양이 수도로서 결정된 것이다.
당시 한양천도론자들이 주장한 한양의 수도로서의 적격성은, 첫째 풍수지리상으로 송악(개성) 다음가는 훌륭한 자리이고, 둘째 수운이 편리하여 물자수송에 유리하고, 셋째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어상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중앙집권체제에 편리한 여건을 갖춘 점이었다.
또 위와 같은 현실적인 지정학적 여건도 중요하나 서울이 갖고 있는 수도로서의 민족사적 당위성도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서울은 삼국문화의 교차지로서 고조선으로부터 흩어졌던 민족의 문화를 다시 통합하여 통합된 민족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문화사적 중심성과 개방성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국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신수도의 건설
태조는 한양 천도를 결정한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신수도의 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을 설치하여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인 신수도 건설을 시작하였다. 천도 다음해인 1395년에는 1월에 대신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주택을 건설할 대지를 나누어주어 본격적인 도시의 형성이 시작되었고 9월에는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한편 1395년 6월 태조는 신수도의 명칭을 한양부에서 한성부로 고치고 신수도를 5부52방의 구역으로 분할, 행정구역을 확정지었다. 즉 한성부는 도성 내부와 구 주변의 십리구역, 이른바 '성저십리'로 획정되어 행정구역상의 이원적 체제가 확립되었고, 도성내를 5부로 나누고 그 밑에 방을 두었다.
그러나 천도와 동시에 시행하려 하였던 성곽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이라는 성곽수축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9,500척에 이르는 성을 쌓을 자리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하고, 다음해인 1396년 1월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두차례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태조에 의한 약 4년간에 걸친 건설로 신수도의 틀은 윤곽을 갖추어 갔으나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해 버림으로써 한양은 다시 쇠락하였다.
본격적인 신수도의 건설은 1405년 태종이 환도한 후 시전행랑을 건설하여 신수도내의 간선도로의 구획을 확정하고, 1422년 태조때 건설한 성곽을 세종때 석축으로 개축하여 성곽의 둘레를 확정하며, 1403년 신수도내 중심을 동서로 흐르는 개천의 정비공사를 마무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조선초기의 서울의 상황은 조선중기의 전란에 휩쓸리기까지 약 150년간 큰 변화없이 지속되었다.
조선중기의 서울
태조에서 세종기에 형성된 서울의 시가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들의 거듭된 전란에 휩싸여 초기의 모습을 잃어 갔다. 계속되는 외침과 내란, 화재에 의해 파괴된 서울은 효종(1649-1659)에서 영조(1724-1776)까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전란의 상처를 씻어낼 수 있었다.
조선 중기의 서울은 고난의 시기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0년 가까이 계속된 전란으로 궁궐, 시전상가, 민가가 파괴되어 버렸으나 재건을 하려고 하여도 서울뿐만이 아닌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단시일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전란 후 약 100년에 걸쳐 점전적인 복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복구가 활발해져 전란 이전보다도 번성한 시가의 모습으로 수도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서울
전란중 서울의 인구는 격감하였다가 전란 이후 급증하였다. 전란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결국 성저십리의 면(성 밖 십리이내 지역에 둔 행정구역, 성저십리의 면에서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경작, 주택건설, 묘지, 벌목이 금지되어 있었다)들은 주거지화 되었고, 이에 따라 면을 폐지하고 5부관할구역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와 시가지의 확장이 상업발달의 기반이 되었고, 상업의 발달은 서울 주변에 위성도시를 형성시켜 서울의 도시구조를 변화시켰다.
용산, 서강, 마포, 서빙고(옥수동)는 한강의 수운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가 몰려드는 곳이었고, 노원(의정부시 호원동), 송파, 과천은 육로로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로서 교통상의 요충지에 위성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위성도시들은 인구규모에 있어서도 지방의 대도시들에 버금갈 정도였다.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개항기 도시구조에 가장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은 외국 거류민의 집거였다. 용산 일대와 이태원 일대가 일본군의 주둔지로 개발되고 한강로가 건설되자 용산은 서울의 새로운 남북축으로 부상하였다.
개항기 이후 경제권을 쥐게 되었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이남, 즉 남촌에 집거하게 되면서 남촌지역은 일인들에 의하여 개발되어 새로운 상업, 경제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종로지역은 정치, 행정의 중심이 되고, 중구지역은 경제, 상업의 중심이 되며, 용산지역은 군사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서울의 도시공간구조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전차노선의 건설이었다. 전차노선이 동서남북축을 이루면서 건설되어, 조선시대의 보행중심의 도시구조는 전차라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본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일병탄후 전차노선의 건설은 더욱 촉진되어, 1912년 을지로 노선의 개통으로 총연장 39㎞에 달하는 교통망이 확립되어 이전의 보행중심에서 전차 노선망 중심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일본은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서울의 도시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시구개정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이후 1926년에는 제1차 경성도시계획안이 수립되었으며, 1차 도시계획 이후에도, 1928년과 1930년에 제2차, 3차 경성도시계획안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실시계획과 재정계획이 뒤따르지 못하여 결국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시가지계획령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도시개발의 주축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1937부터 1944년까지 영등포, 돈암, 대현지구등 19개 지구의 서울 외곽지역이 개발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말기로 치닫던 1937년에는 방공법 조선시행령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 공습에 대한 방비책으로 오늘날의 퇴계로, 율곡로, 원효료 등은 소개공지대계획노선이었던 것과 같이 도시계획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재복구와 수도로서의 면모 확립
해방이후부터 제1공화국이 붕괴된 1960년까지의 15년은 우리 역사상 격변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서울은 주권국가의 수도로서의 위치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즉,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고, 그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되어 서울특별자유시가 되고, 3년뒤인 1949년 8월 15일에는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당시의 서울은 해외동포의 귀국, 월남한 난민과 이주민들의 서울 집중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증가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49년 도시행정구역확장이 이루어졌으며, 이후 6.25동란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도시파괴를 가져왔다. 휴전이후 서울은 전후 복구사업으로 활발히 재건되었는데, 부산 임시수도시절 도시계획위원회에 의해 새도시계획(1952. 3. 25 고시)이 수립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크게 적용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은 광복 이후 1960년까지가 혼란과 전란으로 인한 파괴에 시달린 시기였다면 60년대와 70년대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서울이 현대도시로 부상해 나아간 시기라 볼 수 있다. 현대도시건설의 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는 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71)의 추진으로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게 된 때였다.
특히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이 기간동안 급속히 심화되어 1963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도시계획구역이 확장되어 서울이 강남과 동북부로 확장되는 계기를 맞았다.
현대적 도시의 건설과 국제도시로의 부상
7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도시로의 과도한 집중이 점점 큰 문제로 대두되어 도시계획이 대도시권 성장억제측면에서 접근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지금까지의 서울위주의 도시건설로 인해 야기된 수도권 인구의 과밀화를 억제하고 전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는 서울이 명실상부한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업무 및 상업기능이 집중되는 도심을 재개발사업을 통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고층의 오피스빌딩들이 이 시기를 시작으로 집중 건설되었으며, 60년대에 시작된 강남개발도 본격화되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으며, 청량리, 미아리, 영등포, 천호, 영동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었고, 부천, 의정부, 성남, 안양, 반월(현재의 안산), 광명 등이 서울의 위성도시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도심의 현대화와 부도심의 형성 그리고 외곽의 위성도시의 건설로 서울의 시가지는 청계천과 종로를 경계로 북촌과 남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형성되고 그 주위로 많은 위성도시들을 거느린 거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서울의 1980년대는 1981년 9월의 올림픽 유치 결정과 11월의 아시안게임 유치 결정으로 도시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8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은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정비와 건설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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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구조
도시구조의 변화
조선왕조 초기에 형성된 서울의 도시구조는 조성 중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기이후 인구가 차츰 늘어나고 상업이 번성해가면서 후기에는 도성 외곽지역에 점적인 형태로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서울이 시가지가 남쪽으로 확산되어 조선시대의 동서축의 도시구조가 남북축의 도시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 4대문안 도성내에 한정되었던 시가지가 확대되어 용산, 영등포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시가지가 한강이남까지 확산되어 나가고, 기존의 도심외에도 영등포·영동·잠실 등의 부도심이 형성되는 동시에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형성되는 거대도시 서울로 탈바꿈되었고, 또 수도권이 하나로 묶이는 광역도시화의 길을 열게 되었다.
도심 간선 가로망의 변천
서울의 도성내, 즉 4대문안 지역의 가로망은 조선초기에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후 600년 중에서 조선시대 500년 동안은 큰 변화가 없었으나 서울이 현대도시로 탈바꿈하면서 조선시대의 가로망위에 새로운 가로가 건설되었고 기존의 가로폭이 확장되는 등 체계상으로 큰 변화를 겪어왔다.
한성부시대의 가로망 구조는 동대문(흥인문)과 경희궁을 잇는 종로가 중심이 된 동서축 위주의 가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성부 시대 전기에는 용산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남북축이 형성되었고, 후기에는 현재의 율곡로, 충무로, 대학로가 조성되어 현대와 유사한 체계가 형성되었다. 서울특별시 시대에는 퇴계로가 건설되었으며, 율곡로가 동대문과 연결되고 사직터널이 건설되어 도성내의 1차 순환가로 구조가 형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가로망의 형성은 한성부 시대가 순수한 보행중심의 체계로 형성된 것이었으며, 경성부 시대에서는 간선을 전차에 그 이외는 보행에 의존하던 체계였음에 비하여, 서울특별시 시대에서는 가로체계가 자동차 교통위주로 바뀌고 동시에 지하철망이 형성되어 대량·대중교통수단체계로 변화하였다.
시가지 형태의 구성
서울 도시형태의 기본단위는 조선시대의 'ㄱ', 'ㄷ', 'ㅁ'자형의 한옥 도시주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주택이 모여 동네를 이룰 때는 대단히 밀집된 집합형태를 나타냈는데, 몇 집이 모여 이웃을 이루고 이웃들이 모여 보다 큰 이웃을 형성하며 이것이 다시 모여 동네를 구성하는 것과 같이 위계적인 구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도시조직의 원형은 오랜 시간과 전쟁의 피해 그리고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거의 다 사라지고 일부지역에서만 크게 변모된 상태로 그 자취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ㄱ', 'ㄷ', 'ㅁ'자형의 한옥들은 2층 양옥과 아파트, 연립주택으로 바뀌었고, 육조거리인 세종로 양측에 들어서 있던 관아들도 정부종합청사로 바뀌었으며, 종로 양측의 시전행랑도 그 자취만 남긴 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중층, 고층의 빌딩들이 들어섰다. 한편 신시가지인 강남은 구시가지인 강북과 전혀 다른 완전한 새로운 도시조직으로서 나타났다. 서구에서 도입된 근대적인 도시계획의 이념하에 고층의 아파트와 업무빌딩, 대가구, 넓은 도로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도시조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도시조직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선택된 이상, 그 속에는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전통요소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건 보이지 않는 형태로건간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도시계획 변천사
한양 도시계획의 원리
1394년 한양은 천도와 함께 한성부로 개칭되고, 왕도로서의 도시계획이 착수되었다. 한양의 도시계획은 왕궁을 중심으로 종묘가 왼쪽에 사직이 오른쪽에 있는 배치개념을 따랐으며, 격자형 가로와 4대문을 계획적으로 건설하였다.
이러한 도시계획의 원형은 주례고공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공기에 의하면 정방형의 도시에 격자형의 가로망을 가진 도시로서 좌묘우사, 전조후시적 도시형태를 도시계획적 원형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양적 도시계획의 원형이 가장 대표적으로 적용된 도시가 중국의 낙양과 장안이며, 우리나라의 경주, 한양과 일본의 나라, 경도의 도시계획에 영향을 준 것은 장안 방식 도시계획이었다.
또 풍수지리설도 한양의 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양적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와 주산, 안산, 조산, 좌청룡, 우백호라는 지형적 조건을 최대한 살리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근대적 도시계획의 도입
서울에서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계획이 수립된 것은 1930년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안은 성안이 되었어도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됨으로서 경성부는 새로운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
1936년에 수립된 경성시가지계획이 그것이며, 이 계획이 우리나라 근대 도시계획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 계획에서는 1959년을 목표로 하여 당시의 경성부 전역 35.1㎢와 주변지역을 포함한 총 108.8㎢를 계획구역으로 설정하였으며, 계획인구를 70만으로 설정하였다.
또 용도지역으로서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그리고 유보지역인 미지정지역을 지정하였으며, 도로의 계획도 오늘날과 같이 대로·중로·소로 등 도로폭 위주로 계획하였다.
전재복구와 도시계획수립
8.15광복 이후 극도로 혼란했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도시계획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한 채 또다시 비극적인 6.25동란을 맞았다.
그 당시 도시계획은 6.25동란으로 인해 폐허화된 시가지의 복구를 위한 전재복구사업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의 손에 의해 수립된 최초의 계획은 피난시절에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1951년에 수립한 전재복구를 위한 서울도시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34년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 내용은 6.25동란으로 파괴된 지구에 대한 토지구획 정리사업과 도로확장계획, 용도지역계획 등이었으며, 1952년 3월 25일에 결정·고시되었다.
이때 계획된 서울도시계획은 우리나라 전문가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수도 도시계획의 효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도시기본계획의 수립
1960년대부터는 국가차원에서 경제개발계획이 수립·시행되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가 국가성장의 중추역할을 하였으며, 대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집중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서 서울의 도시계획은 도시기본계획, 즉 마스터플랜의 수립이 시작된다.
도시기본계획의 수립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도시의 발전방향과 미래상을 제사하고자 한 것이었다.
1963년에 와서 서울인구는 300만을 넘어서게 되었고 도시계획구역도 713.24㎢로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서울의 성장을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인구 500만이 거주하는 현대적 도시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1966년「서울도시기본계획」이 수립 발표되었다. 이는 1985년을 목표년도로 하는 종합적 장기계획으로 이전의 지역지구제와 가로망 중심의 물적 계획에 비해 형식면에서 사회경제부문을 포함한 종합계획의 성격을 지녔으며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계획이었다.
1966년 기본계획은 5년이 채 못되어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85년 목표인구 500만이 1970년 7월에 이미 넘어서게 되고 아울러 수도권 인구집중억제의 강화로 인한 제반여건의 변화를 부분적으로 보완하는 수정계획이 1972년에 수립되었다.
1972년에는 비록 도시기본계획으로 명명되지는 못했으나 물리적 계획과 사회 경제적 계획까지를 포괄하는「시정종합계획」이 수립·공포되었다. 이 계획에서는 1972년의 도시기본계획 수정안이 많이 반영되었으며, 목표년도인 1981년의 계획인구를 750만으로 설정하였다.
1978년에는 2000년을 향한 제2차「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처 공포도 되기 전에 목표인구설정상의 비현실성과 상위계획인 수도권정비계획의 변경으로 인해 백지화가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서울 도시개발 장기구상 및 중기계획」이란 이름으로 수정작업이 이루어졌다.
그후 서울의 도시계획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1981년부터 83년 사이에 수립된 이른바 구단위 개발계획이 그것이다. 구는 도시계획에 관한 입안권이나 결정권도 없었지만 구로 하여금 개발계획을 수립토록 하여 구의 개발을 위한 기본계획적 성격을 부여하도록 하였다.
1980년대에는 지난 70년대의 개발억제적 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올림픽 개최도시로서 개발촉진적 시책이 추진되었고, 지하철 3, 4호선의 개통, 자가용 승용차 보유율의 증대 등으로 인해 서울의 공간구조는 대변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에 서울시는 1984년「서울도시기본계획안」을 다시 성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의 개최 등 도시여건의 변화를 수용하고 도시기본계획의 법정화 절차를 밟기 위한 계획수립에 착수하였다. 1990년에 확정된「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은 지금까지 수립되어온 계획중 실질적 의미를 갖는 최초의 법정계획이다.

이후 1994년, 2011년 목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수정 보완을 착수하여 1995. 7 초안이 완성되었으나 95. 7. 1 민선자치시대를 맞이하여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보완하라는 요구에 의거 사회복지 공원녹지 등 사회분야를 대폭 보완하여 97. 1. 20 건설교통부 승인을 거쳐 두 번째 법정계획인 2011년 목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97. 4. 18 공고하게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21세기 새천년 서울의 위상과 미래상을 재정립하고 신 국토계획, 수도권계획 등 상위계획과 개발제한구역 조정, 인구변화추세 등을 반영한 2020년 목표 도시기본계획 재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강공원특화사업
플로팅아일랜드
접근로개선사업
자연성회복
자전거기반시설개선
서해비단뱃길조성
한강변건축경관개선
교량 유래
서울은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다음 1394년 11월 26일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오늘에 이르는 600여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한국 민족사의 중심역할을 하는 수도 서울로서 남쪽 지방과의 육상교통은 반드시 한강을 거쳐 갈 수 밖에 없었으니 한강의 교량은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변천하게 되었다. 국왕은 선왕의 능에도 참배하고 온천에 가거나 나들이를 하기 위하여 1년에 몇번씩은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같이 국왕 행렬이 도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큰 배 70여척을 가로로 이어 서로 묶은 뒤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 5, 6필의 기마가 옆으로 서서 자유로이 건널 수 있도록 오늘날의 부잔교와 같은 교량을 세우곤 했다.(도면 1-1 참조) 오늘의 한강대교 자리에 놓여졌던 이 다리는 백성의 배를 일정기간 징발하여 사용했는데 놓는데 한달, 푸는데 한달이 걸리는 등 강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 후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의 확장과 더불어 교통량이 증가되고 한강을 도강하는 보다 많은 물동량의 수송이 요구되었다. 토목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한강에 최초로 건설된 교량은 경인철도부설공사와 병행한 용산과 노량진간을 연결하는 한강철도교로 1897년 착공하여 1900년에 준공되었다. 이 교량을 시점으로 지금은 26개의 교량이 한강상에 가설되었거나 가설 중에 있다.(표 1-1 참조) 수도 서울의 발전과 인구집중으로 한강상에 많은 교량들이 설치되었으며 토목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시대에 부흥하는 여러형식의 교량이 세워져 시민의 교통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형식의 교량건설은 하천경관 향상등에 크게 기여하는 반면 기술 및 시공상의 문제 등으로 최근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되고 당산철교 철거가 확정되었으며광진교는 철거 후 새로운 교량을 설치하고 있는 등 유지관리에 따른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어 교량 건설과 함께 유지관리 문제도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강다리(준공 연도순)
이름 |
규모(m) |
상부구조형식 (본교만) |
준공연도 |
공사비 (백만원) |
시공사 |
비고 |
폭 |
연장 |
한강철교 |
10.0 |
1,112 |
Steel Plate Girder |
1900. 7. |
- |
- |
최초의 한강다리 |
한강대교 |
18.4 |
841 |
Tied Arch Steel Plate Girder |
- 1917. 10. (인도교)
- 1930.(구교-게르버교)
- 1937.10.(구교-아치교)
- 1982. 2. (신교)
|
1,132 |
현대건설 |
최초의 한강 인도교 |
광진교 |
20 |
1,055 |
SBG SPG Truss교 |
1936.10. 2003.11. 4. |
82,575 |
삼환기업 |
전면철거재건설 |
양화대교 |
18.0 |
1,108 |
Steel Plate Girder |
1965. 1.25.(구교) |
512 |
현대건설 |
성능개선완료('02.8.14) |
16.2 |
1,053 |
Steel Plate Girder |
1982. 2.25.(신교) |
14,900 |
삼부토건 |
한남대교 |
25.7 |
919 |
Steel Plate Girder |
2005.11.30 |
140,793 |
현대건설 외 4개사 |
성능개선완료('05.11.30) |
25.5 |
919 |
Steel Box Girder |
마포대교 |
22.75 |
1,389 |
Steel Plate Girder |
2000. 7. 3 |
21,987 |
현대건설 외 4개사 |
성능개선완료 (2005.12.19) |
22.75 |
1,389 |
Steel Box Girder |
2005.12.19 |
잠실대교 |
35.0 |
1,280 |
Steel Plate Girder |
1972. 7. 1. |
2,013 |
현대건설 |
성능개선 (2004. 2.20) |
영동대교 |
25 |
1,040 |
Steel Plate Girder |
1973.11. 8 |
2,065 |
대림산업 |
- |
천호대교 |
25.6 |
1,150 |
Steel Box Girder, PSC Beam Girder |
1976. 7. 5. |
3,840 |
동아건설 |
강동개발 촉진 |
잠수교 |
18.0 |
795 |
RC Slab Steel Box Girder |
1976. 7.15. |
2,240 |
한국건업 |
홍수시 잠수 |
행주대교 |
10.0 |
1,400 |
PSC Beam Girder, PSC Box Girder, 사장교 Steel Box Girder |
1978. 7.22. |
2,750 |
한국건업 |
구교(폐쇄) |
14.5 |
1,460 |
1995. 5.19. |
16,800 |
벽산건설 |
신교(하류) |
2000.12.27 |
65,640 |
벽산건설 |
신교(상류) |
성수대교 |
28 |
1,160 |
Steel Plate Girder |
1997. 8.14.(복구) |
70,800 |
현대건설 |
재건설화장(4차→6차) |
Steel Plate Girder |
2004.12.28(확장) |
127,173 |
현대건설 |
잠실철교 |
8.8 |
1,235 |
Steel Box Girder, Steel Plate Girder |
1979.10.30. |
3,072 |
동아건설 |
지하철 2호선과 도로교겸용교 |
성산대교 |
27 |
1,410 |
Gerber Truss Steel Plate Girder |
1980. 6.30. |
25,790 |
현대건설 |
- |
원효대교 |
20.0 |
1,470 |
PSC Box Girder |
1981.10.27. |
24,500 |
동아건설 |
민자 건설 |
반포대교 |
25.0 |
1,490 |
Steel Box Girder |
1982. 6.25. |
21,500 |
한국건업 |
잠수교와 복층교 |
당산철교 |
10.0 |
1,360 |
K-Truss |
1983.12.31. |
11,000 |
남광토건 |
철거 |
강합성교 |
1999.11.22. |
100,000 |
현대중공업,진흥기업 |
재건설 |
동작대교 |
28.6 |
1,245 |
Steel Box Girder, Steel Plate Girder |
1984.12.29. |
55,370 |
(주)대우 |
지하철 4호선 통과 |
동호대교 |
20.4 |
1,220 |
Steel Box Girder |
1984.12.31 |
23,700 |
남광토건 |
지하철 3호선 통과 |
올림픽대교 |
30 |
1,470 |
PSC Box Girder |
1990. 6.27. |
68,725 |
유원건설 |
콘크리트 사장교 |
서강대교 |
29.0 |
1,320 |
PSC Box Girder Nielsen Arch |
1999. 8.14. |
86,996 |
현대건설 |
닐슨 아치교 |
청담대교 (도로교) |
27.0 |
1,211 |
Steel Box Girder |
2001. 1.27. |
64,967 |
동부건설 |
복층교·지하철 7호선 |
가양대교 |
28 |
1,700 |
Steel Box Girder, Preflex Beam Girder |
2002. 5.31. |
165,146 |
현대건설 외 2개 |
국내 최장 경간(180m) |
출처 : 도시기반시설본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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