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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옥윤(吉屋潤 요시아 준 / 본명 최치정(崔致楨) 1927~1995)
출생 : 평안북도 영변군 - 7남매중 둘째아들 (바로 밑으로 남동생 둘이 어릴때 사망하여 막내남동생과 나이차이 많음)
학력 : 1939~ 평북 영변보통학교 - 평양시 종로소학교 졸업
1944~평양시 평양고등보통학교 (5년제) 졸업
1949~서울대학교치과대학 제3회 졸업(1944~ 경성치과전문학교전문부 입학-1946년 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흡수)
(전공과목을 제쳐놓고 악단생활에 몰두하다보니 치과대학 학점이수를 못해 1년 늦게 졸업함)
1971~ 미국 뉴욕의 Manhattan School of Music 에 입학하여 재즈 수학.
1981~경희대학교치의과대학원 석사(논문:관악기연주자의 치열과 교합상태에 관한 연구)
음악경력
1946~ 서울치대 재학중 치대 선배인 김영순(트럼펫-후에 베니김쇼 단장)과 함께 미군 클럽에서 연주활동
(후에 박춘석,노명석등과 Hot Pop을 결성하여 미군클럽에서 활동)
1950~ 재즈를 배우러 일본으로 밀항, 클럽에서 활동하며 테너색소폰으로 재즈 수학-일본 재즈맨이자 영화음악의 거장인
오자와 히데꼬(小澤秀夫)를 사사. 이 시절 일본식 예명을 吉屋潤(요시아 준)으로 스승이 지어줌.
1955~ 일본에서 "Crew Cuts Band" (Combo)로 전국연주경연대회 우승, 이후 NHK-TV, TBS -TV등에 자주 출연.
※ 악단이름 Crue Cuts는 당시 유행하던 짧게 깎는 헤어스타일(국내 명칭 스포츠갈이)의 미국 명칭인데 당시
단원들의 헤어스타일도 이 스타일로 통일되었고 악단이름도 이것으로 지었다고 함.
1960~ 길옥윤과 도쿄스윙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 공연
1962~ 국내에서 첫 작곡 발표(현 미 의 "내 사랑아")
1966~ 귀국하여 길옥윤밴드로 연주 활동 - 연주자로서는 국내 처음인 리사이틀을 시민회관에서 보난자빅밴드와 협연
1966~ 인기가수 패티김과 결혼 / 1972 이혼
1970~ 재즈 중흥운동의 일환으로 하모니클럽(재즈빅밴드 구성)을 만들어 각 방송 순회연주
1974~ 동경세계가요제에 출전(패티김-사랑은 영원히) 입상
1981~ 태양음반주식회사 설립(박춘석과 공동으로)
1981~ KBS-2 라디오 "재즈이야기" 해설과 선곡작업.
1983~ 서울예전 대중음악과 주임교수 (학과장 김희조교수의 국악과 내에 처음으로 대중음악 관련학과를 신설함)
※ 실용음악과 라는 용어는 그 후에 정성조교수 시절 만들어짐.
1984~ 한국음악저작권협회 12대 회장
1984~ 미국 LA올림픽 문화행사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아리랑을 재즈버전으로 즉흥연주 -현지 언론에서 극찬
1988~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 작곡 참여
1989~ 서초동에 재즈클럽 "창고" 운영 및 연주
1992~ 일본 아카사카(赤阪)에서 클럽 운영 및 연주
1995~ 폐암에서 척추로 전이되어 별세
1995~ 사후에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추서
작품: 4월이 가면, 서울의 찬가,사랑이란 두글자,사랑은영원히, 이별(이상 패티김)
제3한강교, 당신만을 사랑해,감수광,(이상 혜은이) 외 수많은 히트곡 작곡.
# 평양고등보통학교(현재의 중고교통합)시절 밴드부에 가입, 기타,피아노,클라리넷,트럼펫 등을 접하게 되었고
누나 한분이 국내최초의 물리치료사이면서 피아노를 잘 쳤기에 학창시절 자연스레 음악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본인은 음악대학을 가고 싶어 했지만 조부(한의사)와 부친(공의=公醫)이 의사이시다 보니 아들도 의사로 대성하도록
강권하여 할수없이 서울로 와서 경성치과전문학교(1946 서울대학교치과대학으로 통합)에 입학하게 된다.
그 당시 서울치대에는 전공과는 다르게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즐겨하는 학생들이 많았었고 틈만나면 음악서클에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 다행(?)하게도 치대 1년 선배이며 음악서클 악단장인 金榮淳(베니김-트럼펫-서울치대 제1회
졸업생)의 권유로 미군클럽에서 (당시는 1945년부터 3년간 美軍政시대여서 미군 1개사단이 남한에 주둔) 아르바이트
겸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재즈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때 클라리넷주자였지만 재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악기인 테너색소폰에 관심을 갖게 된다. 미군 클럽에서 만난 재즈맨 미군을 통해서.....
이즈음 치대학생중에는 피아니스트가 없어서 수소문해서 찾은 인물이 경기중학교 재학생 박춘석이었다. 길옥윤은
전공인 치과학업에는 마음이 없고 음악활동에만 전념하다 보니 100개의 치아를 뽑아야하는 임상실습의 학점 부족으로
1년 늦은 1949년에 졸업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재즈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데 마땅히 가르쳐 줄 스승이 국내에는 없는지라 고심하던 중,
임근식(재즈피아니스트-kbs교향악단 초대지휘자 임원식의 형)이 소개장을 써 주어서 그것만 믿고 청운의 뜻을 품고
1950년대 초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다. (이 시절에는 일본과 국교가 단절되어서 정상적인 한일간의 교통편은 없었다)
당시에는 그의 친형이 일본에서 유학후 일본에 있는 미8군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형의 도움으로 일본에 무사히
도착하여 임근식이 소개해 준 ,당시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이며 재즈맨인 오자와 히데꼬(小澤秀夫)를 사사하여 재즈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한편 요시노밴드의 단원으로서 활동, 일본의 대중음악과 재즈를 아울러 학습하게 된다.
※ 이 시절 미국에서는 지금은 재즈스쿨로 유명한 버클리음대도 학원 규모로 시작한지 5년 정도 밖에 안되었기에 재즈
이론이 체계화되는 과정이었겠지만 미국 내에서 활동하던 일본재즈맨들이 본국과 교류하면서 미국의 재즈를 빨리
받아들인 일본 재즈의 수준은 한국보다 이론적으로나 실연적으로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앞서 있었다.
워낙 재능이 뛰어난 그인지라 3년후인 1953년 부터는 자신의 악단 "Crue Cuts Band" 를 조직하여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전국연주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게 되면서 출연하기 힘든 NHK와 TBS등의 TV채널에 출연하게 되며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게 된다.
일본 음악계에서도 상위그룹에서 활동하면서 귀국의 기회를 찾아 보았지만 힘들었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밀항자였기
때문이리라.
1960년에는 도쿄스윙오케스트라를 이끌고 10년만에 귀국하여 공연을 했지만 이때에는 재일교포 입장으로 한국에
정착할 수는 없었다. 1962년에는 부친상을 당해 일시 귀국했었고 이때에 미8군쇼 대행기관인 화양(한국흥행주식회사)의
휴게실에서 연주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재즈즉흥연주에 관한 워크숍을 가져 호평을 받았다.
당시 그의 연주는 국내의 그것보다 굉장히 앞선 것이어서 연주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연주계의 현실은 재즈에 대해 어떠한 이론적인 배경도 없이 각자 뛰어난 감각으로 레코드를 듣고 흉내를
내며 또 어렵게 어렵게 구한 일본에서 만든 재즈이론서적을 보며 스스로 개척해 나가던 시절이어서 일본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그의 즉흥연주와 연습과정이 부럽기만 했던 것이 당시 연주자들의 입장이었다.
그 후 길옥윤은 이봉조라는 걸출한 테너색소폰 연주를 보고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매력있게 처리하는 멜로디를 들으니 국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고 국내파라고 과소평가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또한 이정식의 테너색소폰 즉흥연주를 들으며 대단한 수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공연을 할때면 언제 어디서나 공연 전에 악기를 꺼내서 항상 스케일 연습과 톤연습을 하고 난 후에야 무대에
오르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은 후배들에게도 크나큰 귀감이 되는 습관이었고 기초를 定石으로 배운
사람들만이 가능한 습관인 것이다.
그는 이때에 이봉조와 열애중이던 가수 현 미에게 자신이 작곡한 "내 사랑아"를 발표케 함으로서 국내 가요계에
작곡가로 데뷔하게 된다. 이것이 1962년의 일이다.
같은해 얼마 후 이봉조와 현미는 번역가요 "밤안개" 의 빅히트로 일약 최고 스타가 되는 행운을 맞게 된다.
그는 국내에 정착하고 싶어 하던 차에 국내에서는 제3공화국이 탄생했고 김종필이 정치인으로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일본을 왕래할 때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런 인연으로 귀국의 길이 열리고 1966년 국내에 정착하게 된다.
김종필은 1966년 12월 워커힐호텔에서의 길옥윤 패티김 결혼식 날 주례를 맡아 주기도 했다.
1966년 봄에는 국내에서 연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길옥윤 리사이틀"을 개최하여 많은 연주인들의 자긍심을
올려주기도 했다. 보난자빅밴드(리더: 앨토색스 안희주)의 반주로 진행되었으며 이날 공연중에 연애중이던 패티김의
축하편지 내용과 "4월이 가면"의 노래가 테이프로 소개되기도 했다. (카페지기가 직접 관람)
그해 겨울 패티김과 결혼 후에는 작곡가와 인기가수와의 커플 히트곡이 계속 이어졌다.
이 시절에는 미8군에서도 "패티김쇼" 를 만들어 장교클럽에서의 활동을 함께 했고 KBS-TV에 "패티김 쇼" 고정 프로로 항상
함께 출연했다. 길옥윤은 이때에 자신은 혼자서도 스타 대우를 받는 인물인데 패티김 쇼를 하면 자신은 단순히 반주자에
불과하다는 섭섭함이 깔려있었다고 한다.
1970년을 전후해서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을 비롯 고급 나이트클럽에서, 당시 20대의 젊고 유능한 정성조(테너색소폰과 플룻)
신관웅(피아노)등 후에 국내 재즈계를 이끌어 갈 후배들과 함께 재즈를 연주하며 국내의 재즈 발전에 텃밭을 가꾸어 놓는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길옥윤은 작곡가로서 패티김과 함께 한 세월이 그의 첫번째 전성기였고 1972년 이혼 후인 1974년에 동경세계가요제에도
함께 출전하여 동상을 차지한다. 그 이후 작곡가로서 침체상태가 계속되다가 1976년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꺼야" 를
시작으로 길옥윤 혜은이 컴비의 힛트곡이 롱런하게 되며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1년 박춘석과 태양음반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었고 그 당시까지만해도 대부분의 대중음악연주인이 넘나들지 못했던
대학교수의 지위(서울예전에 대중음악과 첫 시도)도 개척을 했고 KBS라디오 재즈프로그램의 고정 해설자 역할도 하는 등
대중음악연주인들의 활동무대를 넓히며 자긍심을 갖게 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겠다.
88올림픽 준비단계에서 올림픽주제곡을 한국인이 만들어야 한다고 이봉조,김강섭 등을 비롯한 유명 작곡가들과 함께
강력히 주장하는 등 우리 대중음악인들의 위상을 높이는데에도 노력을 기울였었다.
1992년 길옥윤은 마셜공화국 국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과거 국내에서 가수 매니저를 하다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지 용 이라는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일찌기 마셜공화국과
교역을 하며 그 나라 대통령과 친분을 쌓게된다. 1986년에 독립된 인구 약 6만명의 섬나라 신생국가에서 國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지 용 씨는 길옥윤에 맡기도록 중재, 길옥윤은 마셜을 왕래하며 3/4 박자의 "마셜이여 영원하라" 라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먀셜공화국 국가를 작곡하게 되었다.
지 용 씨는 그 후에도 2000년대 초부터 한국에서 악단 지도자를 선정. 마셜공화국에 입국시켜 거주케 하면서 마셜공화국
국립윈드오케스트라를 창설 지도케 하는 등 수년간 악대를 운영하던 마셜 공화국에서 거주하기도 하는 친마셜 인사이다.
길옥윤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오가며 자신의 사업에 몰두했었으나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게되고 1989년 서초동에
"창고"라는 이름의 재즈클럽을 운영하며 재즈피아니스트 신관웅과 함께 연주하며 시름을 달래다가 또 영업이 부실, 장소를
옮겨 "온실" 이라는 재즈클럽을 운영했었으나 또 실패를 거듭하게 되며 건강도 나빠지고 빚쟁이의 등쌀에 국내에 있을 수가
없다보니 1992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하게 된다. 연주와 작곡만 하며 지냈다면 건강도 유지되고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그였지만, 음악과 연관된 사업이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싶어 사업에 손을 댄것이 화근이었다. 유명 배우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그동안 모은 재산과 투자금을 모아 제작 및 감독에 나섰다가 쫄딱 망하는 것과 같은 케이스였다.
일본에 가서도 동경 시내 아카사카(赤阪)의 "한일관" "윤클럽" 등에서 운영 및 연주를 겸하여 생활하면서 건강은 더욱 더
나빠졌고 클럽운영도 힘들어지고 - 한국과 일본에서 일류음악인으로 알려진 그가 동경의 작은 클럽에서 소일한다는것이
너무나 그의 격에 안 맞는 초라한 모습이었고 - 당장 한국에 가고 싶지만 빚에 쪼들리는 그의 입장에서 갈 수도 없고....
음악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에 문화선진국의 대중음악 스타일을 실제로 보여 줌으로서 당시 새롭고
발전적인 연주의 형태를 보급 발전시킨 공이 크다고 하겠다. 당시 국내에서 최고로 이름을 날린 이봉조와는 색소폰과
작곡 두가지에서 강력한 라이벌로 서로 경쟁적으로 노력한 것이 결국 국내 대중음악의 연주와 가요 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색소폰의 경우, 길옥윤을 노블한 음색이라고 한다면 이봉조는 섹시한 음색의 소유자로서 대중들에게 현재까지도 사랑
받고 있고 특히 후배 연주자들이 닮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연주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두분의 공통점은 대중음악계에 처음 발을 디딜때 당시의 최고 연주자에게서 지도를 받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주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길옥윤은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귀국한 후 대중음악 분야에서 서구풍의 멋진 노래를 많이 만들었고
또한 격조높고 품위있게 처신하면서 대중음악인의 위치를 격상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수많은 히트곡과 수준 높은 연주활동으로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그었던 그가 안타깝게도.....
암으로 투병중 자신이 패티김과 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지막 염원을 이남기 SBS예능국장(전 KBS쇼PD, 후에 SBS
보도본부장, SBS미디어홀딩스 사장,청와대홍보수석 역임)이 나서서 주선함으로서 1994년6월18일 SBS-TV의 특집
생방송으로 "길옥윤 이별콘서트"를 갖게 된다. 이날 그는 휠체어를 객석 맨앞 테이블에 앉아서 헤어진 前부인
패티김의 정성어린 히트곡열창 모습을 보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않는 여유와 고마워하는 모습에서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995년 3월21에 영면하여 연예협회장으로 우리곁을 떠났다.
사후인 1995년10월25일에는 서울시에서 그가 남긴 "서울의 찬가" 작곡의 업적을 기려 세종회관옆 세종로공원에
노래비를 세웠다.
제막식에는 황문평건립추진위원장을 비롯 패티김과 미망인 전연란과 딸, 막내동생 최치갑, 김재순 전국회의장
(소학교친구) 김강섭 KBS관현악단 명예단장, 김의재 서울시부시장, 김우석 서울시문화관광국장, 신영균 예총회장,
이상우 예총 부회장, 작가 한운사, 석현 연예협회이사장, 노래비 제작 조각가 황현수 등이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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