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들은 '충정로 도끼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뽑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손도끼 사진과 함께. 서울시경국장이 "반드시 색출하겠다" "엄벌하겠다"는 말을 써가며 강력한 수사 의지를 내비쳤다. 순찰 중인 경찰관에게 흉기를 던졌으니 묵과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이정재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감찰부장이었다.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이 앉힌 자리였다. 이정재가 경기도 이천에서 국회의원이 되려고 돈을 뿌려가며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를 탐낸 이기붕이 지역구를 빼앗는 대신 감투를 씌워준 것이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 끝에 이화룡.신 상사.김 대위 등 네 명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들이 '살인지령'을 내렸거나 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리 없었다. 갖은 수를 써도 입을 열지 않자 검찰은 회유책을 썼다. 도끼사건 현장을 지휘했던 김 대위의 아버지는 경찰 간부 출신이었다. 검사는 그를 찾아갔다. "당신 아들에게 이화룡이 시켰다는 말만 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형을 면해 주겠소." 결국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간 김 대위가 실토하는 바람에 네 사람은 기소되고 말았다.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변호사 30여명이 이화룡의 무료변론을 자청한 것이다.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유당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했다. 4.19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팽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통부 차관을 지낸 문모씨는 이화룡이 대동청년단 등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증언해주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화룡과 신 상사는 폭력교사 혐의로 각각 3년6월과 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김 대위는 약속대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세상사는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은 사회를 정화한다며 깡패.건달을 일소하겠다고 공언했다. 각지에서 끌려온 깡패들은 덕수궁 마당에 모여 공수부대원으로부터 호된 기합을 받으며 '갱생훈련'을 했다. 건달의 수뇌 격인 이정재와 임화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무소에서 나온 이화룡도 덕수궁 마당으로 끌려갔으나 '정치깡패'가 아니었던 데다 당시 군대엔 월남한 사람이 많아 이북 출신인 그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충정로 도끼사건 당시 지프에 탔던 나는 한동안 정보를 누설한 배신자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늘이 나를 도왔다. 그때 만약 정보가 새나가지 않아 계획대로 실행됐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모골이 송연해진다. 곧바로 4.19가 나고 5.16을 거치면서 타의와 강제에 의해서나마 손을 털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천운(天運)인지 모른다.
이화룡.이정재로 대표되던 건달 1세대의 퇴장과 함께 나의 명동 시절도 막을 내렸다. 20년대 미국 마피아였던 알 카포네를 다룬 영화 '알 카포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런 자막이 뜬다. '알 카포네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알 카포네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사회에 어두운 구석이 있는 한 이를 먹고 사는 사람들도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리라. 안타깝게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반세기 전의 건달은 오늘날 '조폭'으로 새로 태어났다.
54. 눈물의 결혼식
평소 명동 건달 시절을 얘기할 때 나는 우스개로 '명동 대학원'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느 여배우는 "옛날 명동에 무슨 대학원이 있었어요?"라고 진지하게 물어 좌중에 폭소가 터진 적도 있다. 사실 그 세계도 나름대로 하나의 사회여서 '인생 공부'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을 터득하고, 사람을 보는 눈을 갖게 된 것 같다. 뒷날 건설업과 영화 일 등을 할 때도 명동 시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명동 시절을 돌아볼 때 잊을 수 없는 일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 가정을 꾸린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 명동성당 앞은 그 때도 지금처럼 가파른 고갯길이었다. 아래 쪽에서 고갯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수평선에서 서서히 배가 떠오르듯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비치는가 싶더니 곧 이어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두른 얼굴이 나타난다. 베이지색 코트의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찌른 채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 '그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나를 발견했는지 발걸음이 빨라지고 덩달아 내 심장의 박동도 숨가쁘게 뛴다.
그해 겨울은 왜 그리도 춥던지. 돈이 없어 단벌 양복으로 사시사철을 버틸 때였다. 일본말로 '우라가에'라고, 양복이 닳으면 다시 뒤집어서 입기도 했다. 주머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 창피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창피함이야 추위에 비하면 못 참을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말없이 손을 이끌더니 작은 양복점으로 데려갔다. 코트를 하나 골라 입혀주는데, 그 마음씨에 내 마음은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친구 소개로 만난 그녀는 불쑥불쑥 명동을 찾아왔고, 우리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데이트를 했다. 집도 절도 없던 나는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처가에 두 가지를 속였다. 그녀보다 한 살 위였지만 세 살 많다고 했고, 이북에서 내려와 부모.친척도 없는 고아라고 했다. 실제 나이대로 스물넷이라고 하면 신랑이 너무 어리다고 할 것 같았다. 친인척이 있다고 하면 친어머니가 아닌 '큰어머니'를 소개해야 할 처지였다. 집안 내력을 밝히기가 부끄러웠다.
'그런 놈팡이한테 시집가려 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며 얼마나 지청구를 당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내색하지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윽고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장소는 종로에 있는 유명한 식당인 크라운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고아라고 했던 게 걸렸다. 식을 며칠 앞두고 '큰어머니'를 찾아갔다. 형들에게도 연락이 닿아 장인.장모와 상견례를 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열렸다. 내가 일하던 명동 플로리다 나이트클럽에서 밴드가 와 노래 반주를 해줬다. 내 차례가 돼 18번인 '꿈에 본 내 고향'을 신청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이 대목에서 목이 메었다. '우는 몸'이라는 다음 가사로 넘어가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신부 측 하객이 술렁거리고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신랑이 무슨 사연이 있는 게야, 사귀던 여자가 있었나.'
그렇게 철모르고 시작한 신혼 생활은 나를 더욱 악바리로 만들었다. 연년생으로 딸.아들이 태어났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창 밖으로 빼쭉이 내다보던 어린 것들의 모습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요놈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할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다.
55. 첫 해외 나들이
나의 첫 해외 나들이는 1968년 3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서태평양 건설업자대회 참가였다. 한국.일본.인도네시아 등 13개국의 주요 건설업자가 모이는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건설협회장이자 삼부토건 대표인 조정구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삼환기업 최종환 회장 등이 참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건설공제조합장이 옵서버로 동행했다.
매출 규모로 보면 사실 나는 그 자리에 낄 형편이 아니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61년 5.16 이후 '명동시절'을 청산한 나는 아는 선배를 통해 건설군납업자 친목회에 들어가 입찰 담합을 주도하는 일을 했다. 이를 계기로 건설업에 눈을 떠 64년 태흥상공을 인수한 뒤 주한미군에서 발주하는 사업을 따내 회사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아직 소기업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큰 대회에 나가게 된 건 친목회 일을 하면서 꽤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주최 측은 참가 업체의 정보를 담은 수첩을 나눠줬다. 나는 그 수첩에 실린 일본 쪽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표이사가 일본건설협회장을 맡고 있는 '마에다구미'라는 회사는 전년도 수주액이 700억원이나 되는 일본 건설업체 랭킹 7위였다. 당시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총 화폐 규모가 400억원이라고 알고 있던 나는 그 엄청난 차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웬만한 일본 건설사 한 곳보다도 돈벌이를 못하는 나라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호텔 로비를 서성대는데 젊은 일본인이 눈에 띄었다. 이름표를 보니 마침 마에다구미 직원이었다. 나는 영어엔 '벙어리'였지만 일제 때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공부한 터라 간단한 일본어는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 전 경주에 갔었다. 왜 그 석굴암이라고 있지. 거기 가다가 죽는 줄 알았다. 너희 나라에서 만든 차 있지 않나. 그 차가 비탈길을 오르다 차축이 부러져 도중에 내려서 한참 걸어가야 했거든." 뭐 그리 한심한 나라가 있느냐는 투였다. 당시 시발택시라고, 일본에서 들여온 부품으로 조립한 최초의 국산차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기가 죽어있는데 일개 직원에게서까지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왜 그러냐"며 갸우뚱거리는 그를 호텔 수영장 근처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사람 눈길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뭣이 어째, 한국 차가 어떻다고. 한국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것 밖에 없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웅크린 채 입가의 피를 훔치는 그를 남겨두고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내 이름표를 분명히 봤을 테고, 주최 측에 항의라도 하면 톡톡히 나라 망신을 시킬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회장단이 묵고 있던 방을 두드렸다. "어서 와, 미스터 리." 겨우 서른두 살인 데다 얼굴까지 앳돼 보여 그들은 나를 '이 사장' 대신 그렇게 불렀다.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한병기 조합장이 "뭐 어때, 잘 때렸어. 젊은 사람끼리 그럴 수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라며 어깨를 두드렸고, 다른 이들도 "괜찮다"며 두둔해 주었다. 그렇게 방을 나섰지만 도저히 꺼림칙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일정이 며칠 더 남았건만 나는 곧장 귀국하기로 마음먹고 호텔 지하에 있는 여행사를 찾아갔다.
56. 검은 돈
1968년 서태평양 건설업자 대회에서 일본 회사 직원을 구타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일정을 앞당겨 귀국하기로 했다. 그런데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큰 고생을 했다.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도 "가장 빠른 비행기로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량 손짓 발짓을 한 끝에 겨우 그날 떠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홍콩에 오니 서울 가는 대한항공은 목요일 한 차례밖에 없다고 했다. 나흘이나 남았지만 할 수 없었다. 영어가 안 되니 KAL 외에는 탈 엄두도 못 냈다. 구룡사이드에 있는 27층짜리 프레지던트호텔에 묵으며 출발 일을 기다렸다. 벙어리나 다름없는 신세로 호텔 방에 박혀 있자니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하루는 죽고 싶은 마음네 호텔 옥상에 올라가기도 했다(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어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무서워서 그냥 내려왔다).
'이번 기회에 기필코 영어를 마스터하고 말리라.' 서울행 비행기에서 나는 굳게 결심했다. 오자마자 미군 간호장교를 소개받아 개인교습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딱 하루 수업을 받고는 끝이었다. 건설업의 특성상, 그리고 내 성격상 현장을 일일이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지방 곳곳에 다니다 보니 짬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일한 덕에 내가 맡은 공사는 한결같이 '만족(Satisfaction)'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회사 신뢰도가 올라가 점점 더 큰 규모의 공사를 땄다. 70년대 초 '수출의 날'에는 성장세가 두드러진 기업에 주는 특별상을 받았다. 건설업체 경영 첫해인 64년 매출액이 3700달러에 불과했는데 6, 7년 만에 수십만달러로 급증했다. 매년 거의 두 배씩 성장한 셈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염증이 쌓였다. 당시는 경제가 권력의 시녀(侍女)였다. 권력의 줄을 잡지 않으면 어떤 사업도 할 수 없었다. 그 대가로 일정액을 상납해야 했다. 처음엔 공화당 재경위원장이 채널이었다가 나중에는 중앙정보부가 도맡았다. 주한미군 건설군납업의 경우 아예 정보부에 군납과가 있어 여기서 커미션을 챙겼다. 술대접을 하거나 봉투를 찔러주면서 비위도 맞춰야 했다. 정보부 직원 부인들을 챙기는 것도 중요해 인사동에서 옛 그림이나 골동품을 사 집으로 배달하기도 했다.
한번은 정보부 유력 인사의 부인이 집으로 불렀다. 평소 자주 인사한 터라 나를 동생처럼 여겼다. "이 사장, 부탁이 있어. 남편이 술집 여성과 딴살림을 차렸다는데 좀 알아봐 줘." 집을 나서는데 '야, 이건 도저히 못 해먹을 짓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인의 청을 들어주면 사업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의 후환도 두려웠지만 우선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이후 그가 정보부를 떠날 때까지 1년 가까이 공사를 거의 따지 못했다. 부인에게 밉보였으니 당연했다.
결정적으로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이중계약'을 당했을 때였다. 내게 주기로 한 공사를 커미션을 더 많이 낸 업체에 넘긴 것이다. 화가 불같이 난 나는 정보부 감찰실을 찾아가 따졌다. 그러나 냉랭한 답변만 돌아왔다. "총선에서 정보부가 당선시켜야 할 의원이 35명이고, 거기에 드는 돈이 80억원이다. 한 푼이라도 더 내는 쪽에 공사를 줄 수밖에 없다." 나는 "언론사에 다 폭로하겠다. 두고 보자"며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때가 어느 때인가. 그랬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나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우연히 극장을 인수한 나는 미련 없이 건설업을 떠났다.
57. 2차 세무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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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편제" 제작.출연진. 왼쪽부터 정일성 촬영감독, 배우 김명곤씨, 임권택 감독, 필자, 배우 오정해씨. |
사주(四柱)를 보는 이들은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10년 단위로 예견한다고 들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이 그랬던 것 같다. 1964년 태흥상공을 인수해 건설 군납업을 시작했고, 74년 의정부의 극장을 인수하면서 영화 배급업으로 돌아섰고, 84년 태흥영화사를 차려 영화제작업에 손댔다. 이어 10년에서 1년이 모자라는 93년 '서편제'를 통해 제작자로서 절정을 맛보았다.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10년을 주기로 길(吉)하고 복(福)된 일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딱 10년 간격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두 차례나 겪은 적이 있다. 바로 세무사찰이다.
86년 외제차를 타고다닌다는 괘씸죄에 걸려 12억원을 추징당한 이야기는 연재를 시작할 때 털어놓았었다. 그런데 96년 11월 탈세 혐의로 또 구속된 것이다. 이 때도 권력의 괘씸죄에 걸린 듯 했으나, 그런 소리 아무리 해봐야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니 그냥 넘어가자. 세금을 뒤로 빼돌리는 범법행위를 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 부분도 좀 억울한 구석이 있다. 우리는 정치자금이나 세금 문제만 걸리면 "관행이었다, 관행이다" 며 정말이지 관행적으로 변명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런데 내가 그런 경우를 당해보니 이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많은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은 더욱 그럴 것 같았다.
당시엔 지방에서 개봉되는 영화는 영화사가 지역 배급업자로부터 일정 금액을 받고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게 보통이었다. 관객이 많든 적든 영화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하지만 관행적으로 지방에서 생긴 매출을 영화사의 수입으로 잡았다. 당연히 지방업자들은 영화를 구매한 값보다 관람료 수입이 훨씬 적었다고 보고했다. 1억원에 판권을 넘겼다면 6000만~7000만원의 수입에 해당하는 관객이 들었다고 보고하는 식이었다. '서편제'도 서울에서만 100만명이 넘었으니 지방 관객을 다 합치면 적어도 300만~400만명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지방에서 올라온 숫자는 이를 훨씬 밑돌았다. 결국 차액은 모두 태흥영화사에서 탈세한 걸로 돼 버렸다.
서울지검 특수부로 불려가 조사받은 나는 탈세액이 4억원이 넘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바로 구속됐다. TV.신문이 일제히 주요 뉴스로 다루는 바람에 졸지에 파렴치범이 됐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나는 '이제 영화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제작 일이 재미있고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을 만들며 나름대로 자부심도 느껴왔다. 그런데도 탈세범으로 갇힌 몸이 되고 '뒤가 구린 놈'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보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영화사를 접자!'. 그렇게 작심하고 닷새가량 지났을 때였다. 면회 온 직원이 바깥 동정을 전하면서 "청주대 영화과의 김수남 교수 등이 탄원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를 선처해 달라고 검찰에 진정한다는 것이다. 뜻밖이었다. 그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어 번 인사한 게 전부였다. 이튿날 배우와 스태프들이 탄원서를 만들어 서명을 받는데 이미 수백명을 넘어섰다고 했다. '야, 이거 내가 헛살진 않은 건가'라며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더 깜짝 놀랄 소식이 들렸다. 전.현직 영화담당 기자 36명이 탄원서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이고 담당 검사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례 없는 일이었다.
58. 2차 세무사찰
탈세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갇힌 지 아흐레째 되던 1996년 11월 25일. 부장검사가 자기 방으로 불렀다. '이미 기소됐는데 아직도 조사할 게 남았나?' 궁금해 하며 문을 들어서는데 "사장님!" 하고 울먹이는 소리가 터지더니 여럿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안성기.강수연.김갑수.김수철.김영철.오정해.정경순.황신혜 등 '내 식구' 같은 배우 여덟명이 와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내 눈시울도 금세 벌개졌다. 이들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이태원 사장을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를 갖고 서울지검을 찾았던 것이다. 사흘 만에 430명이나 탄원서에 서명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와 영화 작업을 했던 주연 배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조연급 배우, 촬영.조명 등의 스태프, 심지어 연극배우.방송작가까지 동참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더욱 놀란 것은 전.현직 영화기자 36명이 서명한 진정서가 접수됐을 때였다. 이번에는 담당 검사도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하는 눈치였다. 기자가 출입처의 취재원을 감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취재원과 무슨 은밀한 거래나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탄원서를 냈을 뿐 아니라 어떤 기자는 조사를 받고 있는 검사실로 찾아와 격려해주기도 했다.
나는 한국영화가 이만큼이나 성장한 데는 언론의 공이 아주 크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다닌다. 기자는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다. 이들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한 흥행 변수다. 80년대 말 이후 우리 언론은 맹목적일 정도로 한국영화에 호의적이었고,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유능한 인력이 대거 충무로에 들어온 게 성장의 튼튼한 토대가 된 건 사실이지만 언론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한국영화의 팽창 속도는 훨씬 더뎠을 것이다.
아무튼 검사실에는 진정서가 쌓여갔다. 영화학회.영화평론가협회.전국영화과교수협의회 등에서도 진정서를 내주었고, 심지어 한 탈북자단체에서도 내주었다. 어렵게 남한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탈북 청년들에게 언젠가 작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낭트영화제에 영화 '축제'를 출품해 프랑스에 가 있었던 임권택 감독은 팩스로 탄원서를 보내왔다. '이태원 사장이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제 자신이 사막에 홀로 내버려진 것 같았습니다'라고 쓴 문구는 지금도 기억할 만큼 내 마음을 울렸다. 게다가 '축제'가 청룡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아 또 한번 나를 감동시켰다. 나를 대신해 시상대에 오른 둘째 아들이 "구속돼 계신 아버님이 가장 기뻐하실 겁니다"라고 소감을 밝히는 부분에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도와준 덕분인지 한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보석 심사 재판에서 전봉진 부장판사가 "피고는 영화계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라고 할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들어갈 땐 파렴치범이었다가 나올 때는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인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영화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깨끗이 접었다. 좋은 영화, 관객의 사랑을 받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나를 도와준 이들이 '그때 잘 도와줬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다짐으로 또 10년을 흘러왔다.
59. 노는 계집 창
1996년 세무사찰 때 나는 22억원을 추징당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해당하는 탈세범의 경우 추징액을 납부해야만 석방 조건이 된다. 하지만 현금 22억원을 당장 조달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겠지만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때 평소 거래하던 신한은행의 임금택 지점장이 생각났다. 나를 볼 때마다 "좋은 영화 만드세요.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지탄을 받는 탈세범 신세가 된 나에게 그때 한 말을 지킬 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밑질 것 없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이튿날 바로 30억원을 신용으로 빌려주었다. 그만한 금액이면 본점 결재 사항이라 대출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상부에 얘기를 잘 한 모양이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참 인복(人福)이 많았다. 이에 대해 늘 감사해 한다.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위기 때마다 따뜻한 도움을 준 분들이 있어 이나마 부끄럽지 않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산 피란시절 주리고 헐벗었을 때 국제시장 한켠에 좌판을 열 수 있게 허락해준 이름 모를 아저씨와 함경도 아주머니, 의정부 등지를 방물장수로 떠돌 때 어여삐 여겨 한 푼이라도 더 얹어주려고 했던 상인들…. 이름과 거처를 알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 엎드려 절하고 싶도록 고맙고 정겨운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보면 '어떻게 좀 힘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솟아난다.
탈세로 한 달간 구치소에 있는 동안 유명 스타가 음주 운전으로 걸렸다는 기사가 잇따라 실렸다. 농구 선수 허재와 탤런트 신은경이었다. 특히 드라마 '종합병원'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신은경은 그 사건으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공인의 잘못된 자세' 운운하며 그를 공격했다. 당시 드라마와 광고 출연으로 1년에 15억원을 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할 상황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는 출소하자마자 그를 식당으로 불러내 "낙담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배역을 준다거나 하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잘 나가던 젊은 배우가 졸지에 상처를 입는 게 가슴 아파서 다독거려주려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도 찾아갔다. 신은경이 재판받는 모습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와 방송사 카메라가 대거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신은경의 모습도 '예쁘지 않게' 찍히겠다고 판단한 나는 기자들에게 제안했다. "우리 포토라인을 정합시다. 신은경이 오면 여기 이 위치에 세웁시다. 사진 찍을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 질서정연하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재판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무렵 임권택 감독이 윤락가로 흘러든 여인의 사연을 다룬 '노는계집 창'을 만들겠다고 했다. 추측컨대 임 감독은 내가 세무사찰을 받은 데다 현금 20억원도 없어 쩔쩔매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평소 내가 돈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으니 형편을 몰랐다가 의외로 태흥영화사가 돈에 쪼들리는 데 놀랐던 게 아닌가 싶다. TV에서 '퇴출'당해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경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로 나는 임 감독의 예상대로 추징당한 세금 만큼의 돈을 벌었고 신은경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60. 취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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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취화선"의 제작.출연진이 인천공항에서 귀국 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안성기.최민식씨,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필자. | 2002년 5월 세계 최고 권위의 프랑스 칸영화제. 폐막식장으로 가는 승용차에서 내 가슴은 크게 떨렸다. 2년 전 '춘향뎐'으로 한국영화 사상 처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을 때의 감격과는 또 달랐다. 그 때는 출품 자체 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한국영화계의 경사였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와 한편으론 서운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으로 다시 칸을 찾은 그 해는 달랐다. 폐막식을 몇 시간 앞두고 주최 측에서 "시상대에 오를 준비를 하라"고 연락해 왔다. 적어도 한 부문에서 수상한다는 뜻이었다.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취재를 했다. 그 결과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물론 시상식 때까지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시상대에서 임 감독과 함께 트로피를 번쩍 치켜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20년간 그려오던 꿈이 실현될 순간이었다.
비중이 작은 부문부터 차례 차례 시상됐다. 세번째 상에 해당하는 감독상 순서였다. 미국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이름이 불려졌다. '이제 심사위원 대상 차례만 지나면 우리가 시상대에 오르는구나'. 옷깃을 여미며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 때였다. 스피커에서 "퀀택 림"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임 감독이 감독상을 공동 수상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상을 두 개나 줄 모양인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자본으로 만든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최고상을 받았다. 허탈했다. 뭔가에 홀린 느낌이었다. 시상식 직전 상이 뒤바뀐 게 분명했다.
그러나 확증이 없으니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일로 주최 측에 항의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운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을 찾았다. 사실 칸에서 수상했다면 상의 크기에 관계없이 그해 나온 작품 중 최고로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내 영화 인생의 제1막은 끝이 났다.
이제 연재를 접는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중앙일보에 감사한다. 내 칠십 인생은 볼품없는 것이었다. 만인 앞에 드러낼 만한 위인이 전혀 못된다. 그럼에도 연재 제의를 받아들인 건 영화 제작자로서 지내온 경험을 관객과 영화 관계자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칸영화제의 영광도, '서편제' '장군의 아들'의 관객 기록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와 상관없는 개인사를 너무 드러낸 게 아닌가 후회도 든다. 철없던 시절 망나니처럼 굴었던 일들을 알몸 드러내듯 다 까발려 부끄럽기도 하다. '모범적이지도 않은 저런 사람의 글을 왜 싣느냐'며 고개를 내저은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맨손으로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작은 격려가 되기를 바랐다. 실제로 몇몇 분은 전화로, 편지로 나를 감동시켰다.
'다시 태어난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간혹 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만든 36편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교사 역할을 했는 지도 모른다. 과연 어떤 교사였을까. 기억하기도 싫은 악질 선생이었을까, 그런대로 괜찮은 선생이었을까. 두려울 뿐이다. 영화계 후배에게는 열정을 잃지 말라고, 관객에게는 한국영화를 더욱 사랑해 달라고 감히 부탁드린다. 오늘날 한국영화는 미우나 고우나 우리 선배들이 흘린 피땀으로 만들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내 영화 인생의 제2막은 1막보다 훨씬 짧겠지만 더 강력한 것이 되길 바란다. |
서울 한남동 고개에 있는 태흥영화사는 회사 간판부터 남다르다. 덩치 큰 어른만큼 큼지막한 간판에 '태흥영화' 네 글자가 크게 적혀있다. 태흥영화사 이태원(69) 대표는 이 간판처럼 시원시원했다. 지난해 12월 13일 시작해 10일 끝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113화,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도 그렇게 썼다는 평을 들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썼어요.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대목에선 조심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후련합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옛날 일이 착잡하게 떠오르는 데 누구에게 얘기할 수도 없고, 지금까지 혼자만 담고 있었거든요."
지난 20여년 충무로를 지켜온 그답게 사무실 풍경도 이채로웠다. 2002년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임권택 감독의 상장이 한복판에 보이고, 여기저기 수많은 상패.트로피가 눈에 띈다. 그가 3년 전 받은 '은관문화훈장'도 걸려 있다. 손님맞이용 의자는 극장 좌석 그대로다. 사옥 2층에는 임 감독의 작업실이 있고, 지하에는 최근작 '하류인생'에서 사용했던 옷이 보관돼 있다.
"연재하는 동안 전화.편지가 끊일 날이 없었어요. '충무로에 앉아있는 것 같다' '아예 영화로 만들지 그래''그렇게 고생했는지 몰랐는데' 등 반응도 다양했고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중앙일보 부수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했었거든요(웃음)."
연재 중 에피소드도 많았다. 그가 한때 존경해 아들 이름까지 '철승'이라고 지었던 정치인 이철승씨를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쳤고, 1986년 세무사찰 무마용으로 3억원을 건네려다가 망신만 샀던 국세청 공무원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사랑해주셔서 고맙다"고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부산 피란시절 부두에서 짐을 나르고, 의정부 등에서 방물장사로 떠돌고, 끼니를 해결하려고 축구부에 들어갔던 것 등은 지금껏 아내.자식들에게도 숨겨왔던 얘기에요. 그래서 연재하는 동안 가족이 가장 마음에 걸렸어요. 아내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다행이다 싶네요."
이 대표는 서울관객 100만명을 처음 돌파한 '서편제', 콧대 높은 칸영화제를 정복한 '취화선' 등 그간 총 36편의 영화를 만들며 충무로의 역사를 새로 써왔다. '영원한 현역'을 자처하는 그가 지금 기다리는 것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 내용을 물어봐도 "감독 소관"이라며 입을 닫았다.
"20년간 고대했던 칸은 이제 털어버렸어요. 그래도 버리지 못한 게 있어요. 나도 관객 1000만명짜리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남은 욕심입니다. 한류, 한류 하는데 일본에서 먹힐 것도 내놓고 싶고-."
연재 60회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기에 부족하지 않았을까. "좀 아쉬울 때 끊는 게 좋아요. 이것도 하나의 흥행이잖아요." 그는 타고난 영화 제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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