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빌라길○
- 페이스에 빌라 짓고 거벽을 꿈꾸다
|
◇ 인수봉의 대표적인 페이스길 빌라길의 첫마디 크랙의 고빗사위를 꺾고 있는 오호근 씨. |
‘학문을 하면 나날이 늘어갈 것이고 도를 행하면 나날이 줄어들 것이다.’ 노자의 구절인데 ‘무문관’에 쓴 한형조의 주석에 의하면 뜻이 그렇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 행복하지 못한 인간에게 ‘선’은 끊임없이 비울 것을 요구한다.그리하여 송곳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때 비로소 대자유가 열린다고 했다. 더 어려운 곳을 오르기 위해 줄이고 절제하는 산꾼들에게 어울리는 비유라 생각된다. 문학을 하는 모 작가는 방송인터뷰에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가수가 되어 게릴라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자기의 글을 읽어준 수많은 독자들은 아쉽게도 만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여서 팬들의 환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가수야말로 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가 누렸던 인기는 거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문학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랫동안 바위를 했어도 실력은 제자리요, 풋내기 때 가졌던 패기와 열정도 없건만 아직 산에 오를 수 있고 산 친구를 만나는 일은 그나마 지속되는 삶의 위안이다. 그러나 때론 그것도 집착과 소유의 산물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지난 세월에 안주하지 않아야 새롭게 태어날 터인데….
- ‘가문의 영광’ 마운틴빌라
한창 바위에 빠져들던 1970년대 중반 ‘빌라’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참 궁금했었다.
오두막처럼 안온한 빌라에 둥지 튼 그들의 강한 결속력이 부러웠던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강남의 호화 빌라와 혼동되어 이름에서 오는 신비감은 사라졌다 해도 빌라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회원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전제다. 인수봉의 고난도 바윗길을 낸 것도 그렇고 설악산의 울산바위 리지를 개척한 것만 봐도 ‘마운틴빌라’는 만만한 클럽이 아니다.졸업 후에도 대학 산악부에 들지 않고 오로지 마운틴빌라에 순정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가지는 자존심의 바탕이다. 이들에게서 아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힘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런 ‘가문의 영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우이동에서 밤중에 만나 함께 오른 최대성 씨와 이동혁 씨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30대 중반이다. 등반대장인 오호근 씨 역시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선 막내나 다름없다.이들 가운데 점잖게 배낭을 메고 선 두 사람은 오늘의 최고참 선배 강준수 씨와 이상경 씨. 이상경 씨는 장경덕 씨와 함께 빌라 길을 개척했던 장본인이다.세대를 뛰어넘은 두 선배가 참석한 인수 야영장. 이동혁 씨가 밤새 요리해내는 샤브샤브에 소주판을 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 늦잠은 피할 수 없는 수순. 먼저 일어나 회원들을 깨워야 하는 사람은 등반대장 오호근 씨다. 그러나 모두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라는 걸 잘 아는 그는 후배 재혁 씨와 함께 먼저 빌라길 아래로 오른다.
뜨거운 햇살이 예상되는 아침, 호근 씨가 선등으로 40m 좌향 크랙을 치고 나간다. 벙어리 크랙에 캠 3호와 2호를 설치하고 첫 마디가 끝나자 뒤늦게 출발한 회원들이 도착했다.둘째 마디를 최재혁이 지그재그로 선등해 나간 후 그 뒤로 또 하나의 팀이 붙고 보니 결국 오늘은 빌라길의 주인들이 전세를 내고 만다. “야! 빌라길 생긴 이래 최대의 인파다. 9명이나 되네.”“용식이 처음 해 보는 거지?”“예.”“못했냐? 그 나이 먹도록?”“생각할 겨를이 없어! 그냥 막 와야 돼. 생각하면 더 힘들어.”“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그냥 올라갑니다.”생각을 하거나 안 하거나 빌라길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신발이 좋아져서 실력이 아닌 ‘신력’으로 오른다고 하는 요즘도 예외는 아니다.
경사도 70°가 넘는 페이스에서 오는 고도감도 만만치 않다. 둘째 마디에서 셋째 마디로 가는 길. 볼트가 빠진 자리보다 위에 새로이 설치한 간격 때문에 신발 끈 단단히 매고도 까치발을 뛰지 않을 수 없다. 완전한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것은 물론 볼트를 이용해 오르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견우병 씨와 인공암장에서 만나 소속을 넘어 친밀해진 후배 김동윤 씨는 보성고 출신의 현역 UDT대원이다.건장한 몸을 자랑하지만 아무래도 어제 마신 술이 과했는지 그는 둘째 마디를 넘어서질 못한다. 결국 동윤 씨는 손가락에 이상이 생겨 하강을 한다. 호근 씨와 재혁 씨가 셋째 마디를 여유 있게 넘어가도 등반의 속도는 느려진다. 모두들 묵묵히 자기가 맡은 구간을 해치우느라 여념이 없다.
넷째 마디의 볼트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가 멀어져 자유등반으로 오르기가 부담스러워진 곳이다. 선등으로 오르는 재혁씨가 발을 떼지 못한다.‘아! 옛날 선배들은 여길 어떻게 올라갔지?’ 뒤늦게 합류해 오르는 견우병 씨가 날렵한 모습으로 오르긴 하지만 빌라 회원들은 더 어려워진 이 현상에 대해서 별 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
◇ 둘째 마디를 선등해 나가는 최재혁 씨의 등반을 오호근 씨가 확보하고 있다. |
- 3년 공백 후 1974년 가을에 완성
빌라길은 거벽 등반에 대비한 겔렌데로 꿈꾸어왔던 페이스였다. 그 벽을 늘 쳐다보며 살아온 빌라인들은 남면의 시원하고도 장쾌한 벽에 선을 그을 수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이들은 어느 날 중앙부 밑에서 위로 뻗은 크랙과 한 개의 침니 그리고 그 위 세 개의 밴드가 합쳐지는 곳에 양호한 스탠스와 홀드를 발견한다.그리고 이것들을 잘 연결시키면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완벽한 페이스 등반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당시의 주역이던 장경덕 씨와 이상경 씨는 빌라길 개척과 관련해 TJ 부르스란 이름을 거론했다. 빌라 회원들은 미국 공군 파일럿 구조대였던 부르스를 만난 것이 작업에 시동을 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71년 5월 빌라팀은 도봉산 선인봉의 전면에 매달려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어둠이 늦도록 바위에 매달려 있었던 그들은 미공군 파일럿 구조대의 상사인 TJ 부르스와 함께 등반에 나섰던 두 명의 일행이었다. 이들은 파일럿 구조를 위해 암벽등반과 스쿠버 다이빙 등 모험성 있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빌라회원들은 등반이 너무 늦어지면 조난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허리길 쪽으로 올라가서 그들을 도와서 함께 하강해 내려왔다. 도움을 받은 부르스는 그때부터 빌라와 형제 같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 그리고 빌라회원들은 그를 통해서 11mm 로프 300피트와 취나드 하켄, SMC볼트 50개 점핑 세트와 윌리안스 벨트, MSR 헬멧 등의 구하기 힘든 외제 장비를 손쉽게 구입한다. 혁신적인 장비를 갖게 된 빌라 회원들이 드디어 개척에 시동을 걸었음은 물론이다. 그해 9월, 장경덕·이상경·허경열·이건성·윤지현·김용하 등은 등반에 박차를 가해 11월에 셋째 마디가 끝나는 밴드 부분까지 1차 개척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장비는 300피트, 165피트, 135피트 로프가 각 1동, SMC 점핑 세트 2조와 다수의 드릴 SMC볼트 16개, 체인형 1개, 시몽 4개. 시몽 하켄 1개, 미군용 1개, 톱 앵글 1개, 모래내 앵글 2개, 에추리(줄사다리) 6개, 카라비너 30개, 클립 핑거Cliff Finger 2개, 어센더 3개, 해머 2자루와 약간의 슬링이었다.
이 정도의 장비면 몇 개의 카라비너와 로프 한두 동으로 길을 만들었던 60년대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빌라길은 거의가 등반을 하면서 볼트를 박았기 때문에 볼트 사이의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 몇 개의 볼트는 키가 190㎝가 넘는 장신이었던 허경열 씨를 이용해서 박았으므로 키가 작은 사람들은 아직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1차 개척이 끝난 후 3년간의 공백이 있었으나 1974년 가을에 이상경 씨와 장경덕 씨가 상단부 100여m의 루트를 마무리 지어 드디어 완전한 빌라길이 만들어졌다. 이때 마지막 마무리 등반 때는 알핀로제스 길을 열었던 곽효균(미국 거주) 씨도 확보를 봐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인수봉의 빌라길이 22∼24회 졸업생들이 의기투합해 꽃 피운 결과지만 서울고 산악회의 흐름은 195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 이후 학업의 분위기조차 잡혀 있지 않았던 시절 고교 2학년생이던 김창국·이기주(작고)·유양선·조근길·명형식·박영준 등의 8회생들이 주축이 되어 산악회는 창설을 보았다.
창립 이후 첫 산행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잇는 2박 3일 간의 종주등반으로 장식했다.여세를 몰아 이듬해 여름인 1956년에는 한국산악회의 독도탐사대에 김창국 회원과 함께 3명의 회원이 참가했고 1958년 여름엔 3학년생이던 감관·김덕치·주명덕·한수환·한수웅 등이 천불동계곡을 거쳐 대청봉에 올랐고, 서정완·이영세·명노철 등이 한라산 등반을 마치며 산악반의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기 시작했다. 그 후 10여 년간의 활동을 거쳐 1965년 4월 20일에 김석원 씨를 필두로 한 17회 졸업생들이 드디어 마운틴빌라를 탄생시켰고, 이성환·김태호·이기주·성주천·이상경·윤형규 회장으로 이어지는 빌라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 토왕성폭과는 개운치 않은 인연
“빌라길 개척의 동기?” “인수봉 남면에 다이렉트 코스를 생각하던 중 장비와 멤버가 좋았고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시건방 떨자면 자부심이 들었지.”“그렇게 산에 미쳐 살았는데 대학엔 들어 갔나요?”“아! 그럼 모두들 갔지.”“정말이요?”정말로 이들은 그렇게 산에 다니고도 모두들 대학에 들어갔다. 이런 사실은 공부도 못하고 산에도 열심히 안 다니는 산꾼의 자격지심을 여지없이 자극한다. 빌라회원들과 긴밀하게 지냈던 경기고등학교 산악반인 라테르네는 졸업 후 대학산악부에 입회를 했지만 서울고는 그냥 OB를 고집했다.그 같은 뭉침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서울고 출신의 선배들이 하켄클럽에 입회를 많이 했으나 빌라가 만들어진 이후엔 다시 밖으로의 문을 열 필요가 없었다. 그렇듯 빠진 게 없는 듯 탄탄한 빌라에도 완성을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토왕성빙폭 등반이다. 이상하게도 토왕성은 빌라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
사실 토왕성을 등반하려고 엄두를 낸 것은 일찍이 미국에 간 김석원 씨였다. 그가 떠난 이후 1978년 1월엔 장경덕 대장을 필두로 등반에 나선 최영규와 김기환 대원이 초등 때 12일이나 걸린 등반을 나흘로 줄이며 놀라운 속도로 올랐었다. 그것은 초등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놀라운 기록임에 틀림없는 등반이었다. 최영규 씨가 상단 등반을 깨끗이 해치우고 토왕성빙폭 제3등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확보줄을 걸기 전에 눈에 찍은 해머가 빠져버려 어이없는 추락을 하고 만다. 이 추락으로 최영규 씨는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으나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이런 대형 사고 이후에도 빌라의 토왕성폭 도전은 그치지 않았다. 1979년 2월에는 김성택 회원과 송원기 씨가 토왕성폭 우벽 상단을 거의 올라 볼트를 박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김성택 씨가 목숨을 잃으면서 빌라와 토왕성폭은 그렇게 개운치 않은 인연으로 남고 말았다.
어쨌거나 오늘 전세 낸 빌라길에 붙은 회원들은 선택된 산꾼임을 자부해도 야단칠 사람은 없다. 후배들의 등반을 지켜보느라 빌라 캠프장에는 윤형규 회장을 비롯한 선배들이 줄곧 고개를 들고 지켜서 있다. 톱으로 등반하지 않으면 차라리 스포츠를 하는 게 낫기 때문에 바위를 잘 안 하게 된다던 개척자 이상경 씨도 후배들과 줄을 묶지 않았다. 고밀도의 긴장을 즐기기엔 어제의 과음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마지막 부분의 혹점을 밟고 두 개의 볼트를 지나 삼각볼트로 가는 것도 생략한 채 세밀하게 길에 얽매이지 않고 또 다시 좌측으로 길을 건너뛴다. 마지막 다섯째 마디 크랙을 끝내고 물 고랑 같은 길을 통해 정상으로 오르니 사방에서 산꾼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긴장을 풀고 멋대로 누워 건너편을 바라다본다. 오늘도 우리는 걸어서 백운대에 오른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대자유를 누린다.
|
◇ 인수봉 빌라길 개념도 |
- 등반길잡이
빌라길은 마운틴빌라 회원들이 1971년에서 1974년 사이에 만든 인수봉 남면의 대표적 페이스 길이다. 개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장경덕·이건성·이상경·김용하·윤지현·허경열 등이다. 빌라길은 위에서 하강하며 볼트를 박지 않고 거의 등반을 하면서 볼트를 박고 선을 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볼트의 간격이 아슬아슬한 부분이 많다. 난이도는 자유등반으로 오를 경우 둘째 마디 상단부의 슬랩이 5.12a로 매겨졌고, 넷째 마디로 연결하는 부분도 5.11c로 매겨진 고난도의 루트다. 전체의 길이는 165m에 여섯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 첫째 마디 40m 크랙으로 되어 있고 완경사이며 형태가 양호하다. 바위면에는 디딜 수 있는 스탠스들이 있으며 반 레이백으로 오를 수 있다. 중간 호수의 프렌드 몇 개가 필요하고, 마디의 끝에는 쌍 볼트가 두 군데 있는데 위쪽에 있는 볼트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둘째 마디 28m 빌라길에서 가장 재미있으며 까다로운 구간으로 약 80°의 페이스에 미세한 홀드의 연속이다. 이 구간은 자유등반으로 5.12a의 고난도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볼트 부분이 고빗사위이며 마지막 볼트를 빼고 바로 오른쪽 확보지점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 셋째 마디 17m 셋째 마디는 약간 우측으로 밴드를 따라 오르게 되며 계단을 밟는 듯한 느낌이 나는 길이다.이곳의 오른쪽으로는 거룡길과 동양길이 이어진다. 경사는 비교적 가파르나 홀드가 좋고 중간에 5개의 볼트가 설치되어 있다.
- 넷째 마디 20m 슬랩으로 되어 있으며 자유등반으로는 5.11c로 매겨질 만큼 까다로운 편이다.
볼트를 따라 약 10m쯤 오른 후 가로 놓여진 밴드를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5m쯤 이동한 다음 검은 혹점으로 간다. 그 혹점에 왼쪽 발을 올려 딛고 일어서면 그 위로 두 개의 볼트가 있다. 이곳을 지나 평평한 완경사의 쌍 볼트에서 확보를 한다.
- 다섯째 마디 40m 이곳은 양쪽으로 미세한 크랙이 있으나 보통 왼쪽의 크랙으로 오른다. 크랙으로 들어서기 전에 볼트 두 개가 있으며 손가락이 겨우 들어가는 언더 크랙으로 이어진다.
작은 호수의 프렌드가 필요하며 바위면에는 부분적으로 디딜 곳이 있다. 올라갈수록 경사는 완만해지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밸런스를 요구한다.
- 여섯째 마디 20m 좌향 크랙을 레이백하며 오르다가 1m 정도 되는 직각의 바위턱을 넘어간다. 이후에는 물이 흘러 고랑이 생긴 곳을 따라 10여m쯤 오르면 넓은 정상이 나오며 이곳의 쌍볼트에서 확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