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밑씻개
정태호
사무실이 서초구 양재천변이라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양재천내 둔치에 조성된 자전거도로를 겸한 워킹도로를 자주 걷게 된다. 사실은 사무실 주변 식당의 음식이 인공조미료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영 입맛에 맞지 않아서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교총회관 지하식당을 이용하게 된다. 왕복 걸어서 30~40분은 어쩔 수 없이 매일 걷게 되는 효과를 거두게 되므로 건강에도 상당히 유익한 편이기에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 외에도 고마운 것이 양재천의 둔치 내에 자생적으로 돋아나 자라서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을 보는 재미가 너무도 쏠쏠하여서 더 좋은 것이다. 몇 년 전까지는 구청에서 예산을 들여 인공으로 양재천변 둑에 화단을 조성하여 우선에 보기는 꽤나 좋았었다. 그렇지만 자연의 야성미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는데 어찌 어찌 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예산이 없어졌는지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그 바람에 이제는 예전에 인부들이 열심히 가꾸던 그 화초들은 어느새 야생에서 저절로 자라는 외래종 식물이나 국산 토종 식물들에게 치여서 거의 고사되어 사라진 상태다. 그러기에 필자에겐 자연의 그 상태가 오히려 더 낭만적이고 맛깔스럽게 다가와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얼마 전 8월의 따가운 햇살을 무릅쓰고 양재천변 워킹도로를 걸어서 식사하러 가고 있었다. 매일 보던 잡초 더미에서 조그맣고 예쁜 꽃들이 앙증스럽게 올망졸망 달린 모습을 보니 참 예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딱히 꽃 이름을 모르니 참으로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며 야생화를 보는 중에 사진이 예전에 필자가 보았던 그 꽃인지라 이름을 보았더니 너무 재미가 있다.
소위 ‘며느리밑씻개‘라는 꽃이란다. 밑씻개라면 언뜻 요즘의 여성용 ’패드‘쯤으로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란다. 요즘의 화장실용 휴지를 밑씻개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옛날엔 화장실 볼일을 보고 뒤처리를 오늘날처럼 휴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벼를 탈곡하고 남은 볏짚으로 그 뒤처리를 하는데 사용했다. 그 후 조금 형편이 나아진 집에서는 공책이나 헌 책 등을 찢어서 사용하고, 좀 더 형편이 괜찮으면 신문지를 잘라서 사용하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꽃 이름이 며느리밑씻개인가? 여기엔 서로 다른 설이 존재한다. 우선 하나는 원래 일본이름을 한국말로 고쳐 부르니 ‘의붓자식밑씻개’였는데 조금 해학적으로 ‘며느리밑씻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밑씻개라는 순우리말의 운치를 일본이름이라는 말로 감칠맛을 죽이는 바람에 영 미덥지가 않아서 마음에 안 든다.
그러면 다른 설은? 다른 설은 예전에 화장실 시설이 열악하던 시절엔 들판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뒤가 마려우면 그냥 근방의 으슥한 곳에서 해결하고 밑씻개는 근처의 풀을 뜯어서 사용했다. 그런데 아무 풀이나 함부로 뜯어 썼다가는 아주 고약한 풀독이 오르는 통에 함부로 아무 풀이나 밑씻개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풀독의 무서움은 필자가 주말농장의 잡초를 맨손으로 뜯다가 풀독이 올라서 엄청나게 고생한 경험이 있기에 잘 안다. 그러므로 풀을 밑씻개로 사용하려면 대체로 인생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이 안전한 풀들을 뜯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며느리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시어머니가 며느리 골탕 먹이려고 독은 없지만 줄기에 가시가 있어서 그걸로 밑씻개를 하면 골탕을 엄청 먹을 수 있기에 그 풀을 뜯어주는 통에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하는 설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재미는 있는 얘기이므로 필자는 후자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러면 왜 골탕을 먹이면서도 다른 풀도 아니고 꼭 이 며느리밑씻개 풀을 사용토록 했을까? 줄기에 가시가 있는 풀은 이 풀 외에도 많은데 말이다. 만약 그 풀이 몸에 해로웠다면 아무리 며느리가 미워도 며느리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시어머니가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며느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번은 당해도 계속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딱 한번 당했다고 해서 또 그런 연유로 인해서 그것이 풀이름으로 까지 정해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한 의문이 들어서 조금 더 자료를 찾아보니 며느리밑씻개 풀이 결국은 약초의 반열에 오르는 풀이며 어린 순은 식용으로서 데쳐서 양념하여 나물로도 먹는단다. 특히 약용으로는 멍든 피를 풀어주며 해독작용을 하기도 하여 멍이 들어 통증이 있는 경우에 많이 쓰이고, 타박상이나 습진, 온몸이 가려운 피부병과 진물이 흐르고 허는 태독(胎毒) 등에 잘 사용되며 더욱이 치질이나 뱀과 벌레에 물린 상처의 치료에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치질’이다. 이 풀이 치질에 효험이 있으니 비록 가시가 있어서 밑씻개로 사용하면 고통이 따른다고는 하지만도 치질 치료에는 도움이 되었으니까 밑씻개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특히 그 옛날 아녀자들이 비록 치질이란 고통스런 병이 있었지만 어디 드러내 놓고 치질이 있다고 누구에게 얘기나 제대로 할 수가 있었는가! 하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분명 하소연을 했을 것이고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따로 처방을 할 수는 없어도 그냥 볼일 본 후에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은근슬쩍 처방하는 방법으로 처리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선조들의 처신이 참 멋도 있고 낭만이 철철 넘치는 기가 막힌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좀 의아한 것은 오늘날에 와서야 그 ‘며느리밑씻개’라는 말의 어감이 좀 그렇다고 하여 그 풀꽃의 이름을 ‘사광이아재비’풀 꽃이라고 바꿔 부르자고 하는 모양이다. 필자의 생각엔 도무지 이해도 안 가고 동의도 할 수 없는 경우다. 사전을 찾아봐도, 몇 사람에게 물어봐도 ‘사광이‘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아재비‘라는 말은 본래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그래 ’낮춰‘부르는 말은 아무 상관이 없고 정식 ’명사’이지만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닦는데 쓰이는 말이라고 해서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인가? 실로 너무도 억지스런 논리이며 위선적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위에서 필자가 유추한 바대로 그 풀꽃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 이름이 너무도 낭만적이고도 해학적이며 인간미가 좔좔 흐르고 있지 않는가! 왜 이런 좋은 이름을 두고 이상하게 이름을 바꾸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첫댓글 처음 제가 <수지문학회> 모임에 참석했던 날이었습니다. 그 때 귀담아 들은 기억이 나네요.
몇 개월이 지난 후 다시 보니 또 다른 새 맛이 납니다. 잘 감상하고 돌아갑니다.
아무쪼록 건안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