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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짓기지도회의 발자취
한국글짓기지도회는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아 빛내자는 목표 아래 교육자, 문학가, 국문학자들이 모여서 결성한 사회교육문화단체이다. 1961년 창립 당시에는 (임시회장 장원덕) 한국글짓기지도회라는 이름이었으나 1965년에 창립 회원인 김동리, 박목월, 이준구, 이원수, 이희승, 임인수, 장원덕, 최태호, 한인현, 홍문구 등이 모여 본회 이름을 한국글짓기지도회로 개칭하고 이원수를 회장, 장원덕을 총무로 선임하면서 국어교육의 심화 발전을 위한 목적 사업으로 독서와 글짓기교육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1968년 당시 권오병 문교부장관에게 중학교입시시험의 망국적인 폐해를 지적하면서 사고력, 창의력 신장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글짓기교육의 강화를 건의하기도 했고, 우리나라 어문정책이 바로 서지 못한 점을 걱정하고 관계기관과 다각도로 협의하여 각계에 건의 호소함으로서 현재의 국립국어연구원 신설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 논리력과 표현력의 신장을 위해서는 입학시험의 글짓기를 반영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한 때는 중학 입시에 글짓기문제 출제와 대학입시에 논술을 추가하기도 한 것은 본회의 이러한 노력의 영향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한국글짓기지도회는 국어는 민족정신의 자양분으로 배달정신의 고양과 전통문화의 전승 및 언어문화의 창달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독서와 글짓기로 국어교육을 강화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글짓기교육의 강화로 사고력, 표현력의 신장, 일기쓰기의 일반화로 생활교육과 인성의 순화, 독서교육의 확산으로 폭넓은 교양과 학습력의 배양을 목표로 전국글짓기작품 현상모집, 글짓기교육 실천기공모, 전국글짓기교사 연수회 개최, 문교부 승인 초등국어 재교육강습 주관, 글짓기지도회보 발행과 필독서의 연구개발 등의 일들을 해왔다. 그 결과로 전국글짓기지도교사 세미나 22회, 전국글짓기작품 현상모집 42회, 글짓기장학상 및 글짓기지도상 시상 34회, 서울 초등교사 1급 자격강습 240시간 650명. 어머니 교육문화교실 개설 10회 외에 국어교육의 중요성, 국어순화 운동의 전개, 글짓기 논문현상공모 등을 해왔다.
근년에 와서는 사회의 평화는 행복한 가정에서 비롯된다고 믿어 전국 사랑의 가족신문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우수한 가족신문 공모전과 전시회도 갖고 있는데, 2003년에도 5월초부터 6월말까지 가족신문공모전 입상작품을 서초동 서울교육대지하철역사와 고양시 화정역 지하철역사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한국글짓기지도회는 초대 이원수(아동문학가), 2대 임인수(아동문학가), 3대 한인현(은석초 교장, 동시인), 4대 박경종(아동문학가), 5대 이희승(한글학자, 문학박사), 6대 김종상(유석초 교장, 아동문학가), 7대 윤영일(서울영신초 교장, 아동문학가), 8대 김완기(서울신남성초 교장, 아동문학가), 9대 강만희(서울서초초 교장), 10대 손관식(대광초 교감, 아동문학가), 11대 김호재(남성초 교장, 아동문학가), 12대 장원덕(창립위원), 13대 김용한(서울신서초 교장), 14대 최홍근(서울월정초 교장), 15대 조용휘(서울우신초 교장), 16대 박상재(서울당중초 교장, 문학박사) 회장으로 이어오며 어린이 창의력 신장과 국어 사랑 정신을 기르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앞에 거론한 회장단 외에도 강석호, 강선옥, 김동극, 김일환, 김장호, 노원호, 박경용, 박성배, 서재균, 손광세, 신현득, 엄기원, 유종슬, 윤부현, 이병희, 이석현, 이순길, 이영호, 이오덕, 장원덕, 전하찬, 정용원, 정재도, 차원재, 최영재, 홍순태 등 국문학자, 아동문학가, 사회교육자, 현직교사와 장학사들이 하나로 뭉쳐 사재를 들여가며 외국어와 채팅언어의 남용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국어 살리기에 신명을 다해 왔다.
1. 본회의 모태
본회는 1961년 ‘한국어린이글짓기지도회’란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창립위원은 장원덕 씨와 백남일씨 등 두 사람이었는데, 백씨가 이듬해 6월에 스스로 사임함으로써 실질적인 창립 멤버는 장씨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어린이글짓기지도회’란 이름을 갖고 있을 이 때만 해도, 본회는 아직 한 단체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그 업적에 있어서도 이렇다 할 만한 자취를 남기지 못했었다. 일인체제로서 임원을 비롯한 단체구성 멤버도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의 성격을 규정한 정관조차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한 문화단체로서의 이념이나 강행을 채택하지 못한 채, 다만 이어서 본격적 탄생을 맞게 된 본회의 모태구실을 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63년 10월, 본회는 ‘한국글짓기 지도회’로 그 명칭을 바꾸고, 창립당시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1가 23번지에서 종로 2가 계영빌딩 306호실로 사무실을 옮겼다. 이때부터 1965년 6월까지 2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한 차례의 ‘글짓기교실’을 가진 외에, 제 1회 어린이 글짓기 대회 입상문집(‘우리 모두 손잡고’)을 내는 등, 부진한대로나마 몇 가지 행사를 치렀었다.
2. 본회의 탄생
1965년 7월 12일, 본회는 비로소 한 단체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하고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임원진이 구성되고, 정관이 채택 되었으며, 이에 따라 회의 성격도 한결 두드러지게 되었다.
초대 회장에는 아동문학가 이원수씨가 선임되고, 부회장에는 아동문학가인 임인수씨와 이준구씨가, 총무에 장원덕씨가 각각 취임했으며, 지도위원제가 새로 생겨 곽종원・김동리・박목월・최태호・홍문구・이희복 씨 등 저명한 문인・학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그 면목을 일신했다. 뿐만 아니라, 정관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글짓기 지도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새로운 연구로써 이 땅의 글짓기 교육의 향상과 전인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창립취지가 비로소 명문화 되었다. 그리고, 그 사업계획을 <글짓기 교육에 대한 이론의 연구>, <글짓기 교육에 관한 강습회 및 세미나 개최>, <글짓기 지도의 실천>, <외국 어린이 및 글짓기 단체와의 작품 연구물 교류>, <어린이글짓기 대회>, <글짓기교육에 관한 도서 간행 및 회보 발간> 등 세부적으로 종목별로 밝힘으로써 회의 방향과 그 성격을 명백하게 했다. 그 근거는 대개 다음의 세 가지 각도에서 검토될 수 있다.
첫째는, 본회가 종전(창립 당시부터 단독 체제가 유지되어 온 때까지)처럼 어린이를 상대로 한 글짓기 행사만을 위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을 뚜렷이 못 박은 것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함은 물론이지만, 아울러 글짓기 교사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의도가 그것이다. <이론의 연구>와 교사를 대상으로 한 <강습회와 세미나 개최>는 그러한 의도를 나타낸 항목이다.
다음은, 그 대상을 국내 어린이에 한정시키지 않은 점이다. 글짓기를 통해 국외 어린이와의 교류를 꾀함으로써 그 대상의 폭을 한껏 넓힌 것이다. 글짓기의 이론을 연구함에 있어, 외국의 현실과 비교의 기준 위에서 성립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주어진 것으로서, 이는 <외국 어린이 및 글짓기 단체와의 작품·연구물 교류>에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다.
셋째는 그 행사 종목의 다양함이다. 위에 든 행사 외에도 <글짓기 지도의 실천>, <글짓기 교육에 관한 도서 간행> 등 글짓기 교육에 관련된 대부분의 행사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는 창립 취지에 따른 본회의 성격이 되는 동시에, 다른 어린이 문화단체와 확고히 구별되는 개성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신문화운동기 이후, 이 땅에는 숱한 어린이 문화단체가 있어왔다. 그러나 일찍이 단 한 번도 전문적인 글짓기 단체가 존립한 적은 없어왔다. 어린이 문화단체가 벌이는 각종 행사에 글짓기는 다만 더부살이를 해 왔을 따름인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아동문학과 글짓기의 개념이 혼동된 상태에서 글짓기는 그 독자성마저 상실한 채 아동문학에 예속된 듯한 인상을 주어 왔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때에 글짓기 단체가 한개 어린이 문화단체로서 그 독자성을 부르짖고 탄생한 것은, 어느 모로나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이 문화단체의 한 분야로 예속되어 온 상태에서 글짓기가 분가를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글짓기 교육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뒤집고 그 중요성을 십분 과시한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글짓기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하나의 선구적 자각이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본회가 떳떳한 체재를 갖추고 그 성격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된 1965년은 글짓기 운동이 몇몇 특정한 어린이 문화단체에 예속되어 이끌어져 나가고 있다는 종래의 관념에서 탈피, 글짓기를 독립된 장르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땅의 어린이 문화운동사와 글짓기 교육사에 획기적인 바람을 불러 온 것이다.
3. 본격적인 발전
그렇듯이 면모를 새로 갖춘 뒤, 본회는 이원수 회장의 주관 아래, 세 차례의 글짓기 대회와 한 차례의 전국 글짓기지도교사 세미나를 치렀다. 1965년 5월 5일부터 22일까지 18일에 걸쳐 실시된 제2회 국제 어린이 글짓기대회와 같은 해 11월 10일부터 한 달에 걸쳐 실시된 전국 사제 글짓기 대회가 그것이다. 제2회 국제 어린이 글짓기 대회는 각 지방(시, 도) 별로 실시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서울대회는 덕수궁에서 치렀으며 전국의 참가 인원은 2,000여 명, 158명의 입상자를 내었다.
또한 사제 글짓기대회는 교사와 어린이의 글짓기 실력을 아울러 향상시키기 위해 베풀어진 행사로서, 전국에 걸쳐 학교별로 실시되었다. 이색적인 행사로 갈채를 받은 이 행사에는 어린이 천여 명, 교사 150명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본회의 제3회 글짓기대회가 되는 것이다.
4. 글짓기 교사 세미나
1966년 8월 5일부터 6일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강당에서 제1회 전국글짓기지도교사 세미나가 열렸다. 이 행사는 글짓기 교육에 조예가 깊은 인사들의 강의와 일선 교사들의 연구·실천 결과의 발표로 이루어졌는데, 전국에서 150명의 교사가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강의는 <동시 지도>(박두진), <산문지도>(이희복), <아동문학 특강>(이원수) 등의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연구발표는 <일기 지도>(홍순태·은석국교), <동시 지도 연구 발표>(김종상·경북 상주 상영국교), <독서 지도>(서재균·전주 풍남국교), <산문 지도>(조중귀·대전 중앙국교) 등이었다. 연구 발표가 있은 다음, 그때마다 토론회를 갖고 문제점을 토론한 것이 특색이며, 마지막 시간의 종합토론에서 전반적인 글짓기 교육의 당면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전개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1966년 8월 30일, 이원수 회장이 사임하고 지도위원회도 그 존속의 의의가 희박하게 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5. 해체와 재조직
이어 9월 10일, 부회장으로 있던 임인수 씨가 회장에 취임하고, 1인 공석의 부회장에 아동문학가이며 현직 교사인 김동극 씨가 발탁되었다. 임인수 회장의 취임기간 중에는 제2회 전국글짓기지도교사 세미나가 열렸고, 제4회 글짓기대회를 치렀으며, 제1회 간행물전시회를 가했다.
1967년 8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에 걸쳐 서울 종암초등학교 강당에서 가진 제2회 세미나에는 전국 150여 명의 교사가 참가, <글짓기 교육의 중요성>을 주제로 진지한 의견 교환과 토론을 벌였다. 강사에는 이원수, 이종기, 김동극, 차능균 씨가, 연구 발표자로는 김종상(상주 상영교), 조중귀(대전 중앙교), 서재균(전주 풍남교), 홍순태(서울 은석교), 장종태(경기 소사북교) 씨 등이었다.
이 세미나에서는 또한 전국글짓기 지도교사의 주장으로 형식을 갖춘 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글짓기 과정이 전인교육에 있어 어느 과목보다도 종합적인 역할에 이바지하는바 크다고 봄으로써 앞으로 글짓기 과정이 보다 뚜렷하게 실천되기를 교육당국에 요청한다.
① 교육과정에 있어 글짓기 시간을 공정히 배정할 것
② 중학교 입시에 글짓기 출제를 단계적으로 실천하여 품성 교육과 언어 표현의 실효를 기할 것.
ㄱ. 종합과목의 성적이 동점일 때, 연령과 환경을 참작하지 말고, 글짓기를 하나의 과목으로 인정하여 참작할 것.
ㄴ. 중학교 입시에 어느 학교에서나 예능과에 글짓기도 특기로 포함시킬 것.
③ 교육대학에 아동문학 강의시간을 배정할 것, 등……>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명서의 내용은 그 당시의 사회상이나 교육 풍토를 고려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중학교 입시경향에 따른 주입교육의 폐단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요, 단순한 저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올바른 판단이며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입식 교육에 따른 어린이들의 창의력 폐쇄와 정서표현의 말살을 우려하고, 구제책으로 글짓기 교육을 올바로 진작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제4회 국제어린이글짓기대회는 1967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 시·도별로 개최되었는데, 국내에서 2,500여 명의 어린이가 참가한 외에, 국외에서 자유중국·일본·미국에서 80여 명의 어린이가 작품을 보내와 활기를 띠었다. 이 대회에서는 최우수상 15점, 특선 80점, 입선 200점을 내는 등, 상도 푸짐하여 글짓기 대회로서는 명실공히 알찬 수확을 올린 최초의 큰 실적이 된다.
6. 임원 개선과 간행물 전시회
이 무렵, 임원진에도 일부 개편이 있었으니, 두 사람의 부회장 중 이준구씨가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 아동문학가요 <가톨릭 소년> 주간인 이석현씨가 취임한 일이다. 이 때(1967, 4월)부터 이석현・김동극 두 부회장의 컴비가 굳혀져 오늘에 이른다.
제1회 간행물 전시회는 1966년 12월 29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열렸다. 글짓기 교육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학교의 간행물 발간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이 전시회에는 학교 신문과 문집, 글짓기 도서, 그리고 어린이와 교사의 시화 작품이 다수 출품 되었는데, 학교는 물론, 매스콤의 열띤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학교마다 지니고 있는 개성을 살려서, 좀더 움직임이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으면>하는 것이 이 행사를 주관한 임인수 회장의 희망이었다. (한국일보・1967. 1.15 기사).
<중학 입시 출제 방법이 객관식 문제로 바뀐 뒤 우리나라 어린이의 구문력과 표현력 및 관찰력이 저하되었다고 보는 임인수씨는 작문지도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학교신문 제작 붐은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반가운 현상이라 내다본다>고(상게지・동년 동월 동일)언론계가 취재 보도하리만큼 좋은 반응을 나타냈음에도, 이 행사는 여태껏 그 1회로써 중단된 상태에 있다.
7. 한인현 회장 취임과 이사회 구성
1967년 8월, 본회는 한차례 비운을 맞는다. 임인수 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한 것이다. 그 후임 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를 8월에 개최, 평교사 시절부터 글짓기지도 교육의 이론 및 실제에 이름이 높던 은석초등학교 교장 한인현씨가 만장일치로 피선되었다. 사무실을 한회장이 재직하고 있는 은석초등학교(방송실)로 옮겨 사무적인 능률을 꾀하는 동시에 10월로 접어들어서는 이사회를 구성하게 되었으니, 본회는 이 때부터 민주적인 방식과 절차에 의해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글짓기교육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온 교사들로 구성된 초대이사에는 홍순태(은석교)・손관식(대광교)・이순길(대광교)・김영식(용두교)・이두환(독립문교)・이영호(휘경교)・김호재(이태원교)・김한배(동산교)등 제씨였다. 곧 이어 이사를 보강, 이듬해 2월에 시인 박경용씨와 현직교사인 유일선(유석교)・윤부현(경희교)・김일환(서빙고국교)씨 등을 맞아들였고, 그해 10월에 김종상(유석교)씨를 맞아들였다.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듯이, 한인현씨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부터 본회는 완전히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한회장의 재임 기간 중에는 그 인적 자원을 토대로 퍽으나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일년 반 남짓한 세월에 걸쳐 세차례의 세미나와 두차례의 글짓기대회, 세차례의 글짓기교실, 두차례에 걸친 글짓기 논문 및 실천기 모집 등 유례없는 호라발한 움직인과 그에 따른 실적을 착실히 쌓아 올렸다.
제 3회 전국글짓기 지도교사 세미나는 1968년 1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은석국민학교에서 71명의 교사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제4회 세미나는 가튼 해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역시 은석국민학교에서 86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 두 차례의 세미나에서는 <글짓기 교육의 당면 과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는데, 아동문학가 어효선씨의 강의와 동시인이며 글짓기 교사로 일가를 이룬 신현득씨의 연구 발표가 주목을 끌었다.
8. 다양한 행사에 사회의 관심 커
제5회 세미나는 1969년 1월 17일과 18일의 이틀에 걸쳐 은석국민학교에서 열렸다. 75명의 교사가 참가한 이 행사에는 〈교과서에 실린 문예작품의 지도 방법〉이 그 주제였는데, 시인 박경용씨의 〈교과서에 실린 동시 평가〉가 관심이 적이 되었다. 그 밖에도 글짓기 지도에 대한 문제점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졌는데, 이을한 씨(건대교수)의 〈미국 어린이들의 글짓기 지도〉, 김동욱씨(연대교수)의 〈작문 교육의 새 방향〉, 이병호씨(문교부 편수관)의 〈쓰기 지도〉, 김성배씨(동국대교수)의 〈국어교욱의 어제와 오늘〉등 여러 논제가 발표되었으며, 현직 교사들의 연구 발표에는 김완기씨(독서지도와 글짓기)・ 이순길씨(저학년의 글짓기 지도) ・윤부현씨(아동시 지도)가 참여했다.
제5회 어린이글짓기대회는 동아일보사와 제휴, 공동주최 형식으로 가졌다. 그 규모도 서울대회에 중점을 두어, 1968년 4월 27일(토요일) 오후 2시에 종묘(종로 5가)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일의 현장대회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2500여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 대회에서는 최우수 15점, 특선 50점, 입선 200점의 수상자를 내었다.
제6회 글짓기대회는 5회가 끝난 지 한 달 만인 1968년에 5월 24일, 전국적인 규모로 시・도별 단위로 지정된 장소에서 실시되었는데, 연 인원 1800명이 참가, 270명의 입상자를 내었다.
한때 중단되었던 ‘글짓기 교실’ 이 부활, 어린이에게 직접 모범적인 글짓기를 할 목적으로 갖게 된 이 행사의 4회는 68년 1월 8일부터 9일까지, 5회는 같은 해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6회는 이듬해 1월 8일부터 15일까지, 모두 은석국민학교에서 은석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가졌다. 참가 어린이는 4회에 65명, 5회에 96명, 6회에 120명으로, 점차로 참가인원을 늘리어 갔다.
교사들의 생생한 실천 기록과 논문을 통해 글짓기 지도기술의 향상과 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갖게 된 ‘글짓기 논문 및 실천기 모집’은 그 1회를 1967년 12월에, 2회를 그 이듬해 12월에 각각 가졌다. 1회 때는 45편이 응모, 경기 발안교의 최곡영씨가 특선을 차지하고, 홍판식씨(경북 경산교)와 엄기원씨(강원 명주 사천교)가 각기 입선에 올랐다. 2회 때는 67편이 응모하여, 충남 강경 중학교의 김영수씨가 최우수상을 차지하고, 우수상은 윤정남씨(전남 광주 중앙교)가 차지했으며, 김종상씨(서울 유석교)와 조영희씨(전북 고창 메산교)가 각각 입선했다.
한편, 신문과 문집의 발간을 장려하고 어린이의 자율적인 학습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갖게 된 전국 초등학교 간행물 콘테스트는 1968년부터 1969년 2월까지 발간된 학교 간행물을 대상으로 했는데, 총 62점이 응모, 최고상은 경북 경산국교의〈꽃재〉(프린트)와 경희국교의〈경희 동산〉(옵셋) 및 부산 남성국교의〈초록별〉 (인쇄)이 각각 차지했으며, 신문부에는 경기 화성 발안국교의〈발안 어린이〉 (프린트), 서울 답십리국교의〈답십리 어린이〉, 그리고 대구 경북사대부국의〈새 학교〉(인쇄)가 각각 차지했다. 그밖에 특선에는 강원 춘성교, 서울 안산교, 서울 상명교, 경북 영일 신광교, 서울 매동교, 경기 파주 문산교, 경북 경산 하양교가 차지했다.
9. 한인현 회장의 순직과 제4대 박경종 회장 취임
이렇듯 일취월장, 괄목하게 성장해 가던 본회는 1969년 2월, 또 한 번의 좌초에 부딪히게 된다. 2월 14일, 본회 전남지부(광주)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인현 회장이 강의 도중에 졸도, 전남대 부속병원에서 순직한 것이다. 오랜 시련이 끝나고, 이제야 이 땅의 글짓기운동이 순탄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본회의 관계자며 외부 의식자들이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게 된 때에, 한 회장의 갑작스런 서거는 본회의 전망에 짙은 암영을 드리웠었다.
황망한 중에, 그해(1969년) 4월, 긴급 이사회를 소집, 후임 회장을 물색한 결과, 아동문학가 박경종씨를 추대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박회장이 취임하자, 사무실을 제공하여 부인 정혜옥 여사가 경영하는 명륜동 유치원으로 옮겼다. 제6회 세미나와 제7회 세미나, 그리고 제3회 글짓기 논문 및 실천기 모집이 이 시기에 있었다.
제6회 세미나는 1969년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에 걸쳐 경기도 부평군 영종도 소재 운서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글짓기지도의 효율적 방안〉을 주제로 한 이 세미나에는 전국에서 53명의 교사가 참가했는데, 주제 발표자로 이석현・김성배・김동극씨가 나섰으며 최곡영(경기 화성 발안교)・이광훈(인천 창영교)・이희완(광주 교대부국)・이희복(서울 우석중・고 교장)씨가 연구 발표를 했다.
제7회 세미나는 1970년 1월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은석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전국에서 66명의 교사가 참가한 이 세미나는 이희승 박사의 〈국어 교육의 중요성〉, 이병호씨(문교부 편수관)의 〈새 교과서의 편수 취지 및 지도 방향〉, 조유로씨(아동문학가)의 〈재미있는 산문 지도〉, 김상옥씨(시조시인)의 〈나의 동시조 해설 및 지도 방향〉, 신현득씨(동시인)의 〈아동시 지도〉, 윤극영씨(동요작곡가)의 〈노래의 이야기〉, 이석현씨(아동문학가)의〈외국 동시 감상〉, 박영요씨(시인)의 〈새 국어 교과서의 동화 평가)등의 강의로 이루어졌다.
제3회 글짓기 논문 및 실천기는 1969년 12월에 모집, 이듬해 2월에 발표되었는데, 최우수상에는 신현득씨(대구국교)의〈글짓기 교육의 폭을 넓히기 위한 연구〉가 당선되고, 우수상에는 윤정남씨(광주 중앙교 교사)의〈작문 SKILL을 통한 글짓기 지도 방안〉이 뽑혔으며, 그 밖에 홍판식(경북 경산 부림교), 옥미조(경남 통영 광도교), 양을수(경북 문경 동로교), 김영수(충남 논산 강경중학교)등 제씨가 입선을 차지했다.
10. 간사제 채택 운영
이 무렵에는 본회를 보다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모색이 거듭되었다. 1969넌 8월 18일 정기 이사회에서는 마침내 간사제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간사장을 포함한 7인 이내의 간사로 구성된 간사제를 두어, 각 부서를 맡은 간사들로 하여금 책임 있는 활동을 하게하고, 회장단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박력 있게 일을 추진하기 위한 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이로써 회장단의 책임이 강화됨과 아울러 회장단을 돕기 위한 실질적인 일꾼이 선발될 것이며, 간사장은 종래의 총무(사무국장)의 직책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는 집행부(사무국)를 다수 체계로 바꿈으로써 소수의 전횡을 막자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서, 본회가 그 운영상 진일보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사회는 단지 최고 의결기관으로 존속시키고, 간사장 책임 아래의 간사진에게 집행부의 구실을 떠맡기자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또는 행사를 치를 때마다 임시로 소집되어야 했던 이사회가 그 번거로움의 횟수를 줄이고도 사무에 전혀 차질을 불러오지 않을 수 있게끔 발판이 이룩된 것이다.
초대 간사장에는 김종상씨가 발탁되고, 간사에는 박경용(기획)・장원덕(섭외)・강석호(출판-교육평론지 주간・동년 6월에 이사로 선임) ․김호재(교육) ․ 이두환(행사) ․ 엄기원(홍보, 서울추계국 교사, 아동문학가, 동년 6월에 이사로 선임) 등 제씨가 선출되었다.
11. 5대 회장에 이희승 박사 추대
이와 같이 합리적 ․ 능률적 체재를 갖춘 본회는 1970년 4월, 박경종씨가 회장에서 물러나고, 곧 이어 그 후임으로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가 취임함으로써 본래의 순수한 모습을 한결 돋보이게 활기찬 걸음을 다시 내딛게 되었다. 이 때를 계기로 변화가 잦던 임원진도 제 위치를 확고히 굳히었으니, 참고삼아 그 명단을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회장 - 이희승
부회장 - 이석현 ․ 김동극
이사 - 김종상(간사장) ․ 박경용(기획간사) ․ 장원덕(섭외간사) ․ 강석호(출판간사) ․ 김호재(교육간사) ․ 이두환(행사간사) ․ 엄기원(홍보간사) ․ 홍순태(감사) ․ 이순길(감사) ․ 윤부현 ․ 손관식 ․ 김일환 ․ 김영식 ․ 이영호 ․ 유일선 ․ 김한배(이상 무순).
엄밀한 의미에서의 본격적 출발은 이때, 곧 이 박사의 회장 취임의 시기와 그 때를 함께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박사를 ‘정신적 지주’로 하고, 무슨 일이든지 계획만 세우면 착실히, 그리고 신속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힘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12. 성숙기로 발돋움한 70년대
이희승 박사의 회장 취임을 계기로 그동안 부진했던 행사는 다시 박차를 얻게 되고, 행사 위주를 지양하고 자체 연구를 통한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자성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는 오랫동안 반성 없이 무궤도하게 이끌어져 왔었던 본회가 비로소 어떤 궤도를 찾기 위한 진통의 몸부림을 보여준 것으로서, 참여했던 동지들이 구체적인 사명의식을 갖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짧지 않은 연륜의 가시밭길을 헤쳐나오다가 그제야 한가닥 탄탄한 오솔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본회의 1960년대가 형성 ․ 혼란기였다면, 1970년대를 안정 ․ 성숙기로 이끌어 올릴 수 있는 기틀을 바로 70년대의 문턱에서 마련한 것이라 할만하다.
이희승 박사가 회장으로 취임한 1970년 4월 이래, 본회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는 각종 행사와 회합은 거의 모두 이 시기에 치러졌다. 그리고 그 실적들은 현재로서는 가장 알차고 빛나는 것이 된다.
1973년 8월 말 현재, 여섯 차례의 세미나와 세 차례의 글짓기대회, 두 차례의 글짓기 교실, 네 차례의 독서운동, 세 차례의 자격강습, 세 차례의 글짓기 장학상 수여 등 큼직한 행사말도 20여회나 가졌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실을 이룩하기 위한 발돋움이었다. 두 차례의 연구발표회를 가졌음과 글짓기의 이론을 어린이 신문 잡지에 연재하거나 본회 간부를 포함한 회원들의 교육 잡지 또는 도서출판에 의한 연구의 발표 실적 등이 그것이다. 이는 본회가 행사만을 위주로 삼지 않고, 먼저 스스로의 실력부터 길러야 한다는 자각에서 얻어진 수확으로, 본회의 앞날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글짓기지도교사 세미나는 그 원칙이 변경되어, 일 년에 두 번씩(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 갖기로 하되, 가급적 한번은 지방에서 개최하기로 결정, 8회 세미나를 우선 대구에서 가졌다.
13. 지방 순회 세미나의 성황
1970년 8월 17일 18일 이틀간에 걸쳐 대구 계성초등학교 강당에서 가진 제8회 세미나에는 코레라 주의보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314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교사가 참가, ‘글짓기 부흥회’라는 인상을 짙게 했다. <국민교육헌장 전신의 구현을 위한 글짓기 지도의 이론 탐구와 기술 연마>를 주제로 개최된 이 세미나에는 이희승(국어와 외래어) ․ 이원수(동화지도의 방향) ․ 이석현(외국의 글짓기 교육의 경향) ․ 김동극(글짓기 지도의 새로운 방향) ․ 이재철(글짓기지도의 사적 고찰) ․ 박경용(동시지도의 방향) ․ 박목월(동시의 세계) ․ 김성도(동화의 세계) ․ 김판영(국민교육헌장 정신구현과 글짓기 교육 ․ 경북교육감) 등 제씨가 강사로 나섰으며, 김녹촌(동시지도의 실제) ․ 정휘창(학교신문 편집의 실제) ․ 김종상(글짓기지도 연구 사례) ․ 윤운강(동시 ․ 동화 작품 분석) ․ 윤부현(산문 지도의 실제) ․ 이석우(속독지도의 효과적 방법)씨 등 일선교사들의 연구발표가 있었다. 특히, 협의회 시간의 주제를 중심으로 벌인 토론은 어떤 결과에 도달한 해결점을 얻지는 못했지만, 진지한 의견들이 발표되어 그 어느 때보다 유익한 모임이 되었다.
제9회 세미나는 1971년 1월 18일~19일에 걸쳐 서울효제초등학교 강당에서 베풀어졌다. <생활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장려>를 주제로 한 이 모임에서는 정한모(상상적 사고와 생활문) ․ 박경용(생활문의 평가 및 생활문에 비친 아동상) ․ 문덕수(논리적 사고와 생활문) ․ 이재철(생활문의 사적 고찰) ․ 김종상(글짓기를 통한 생활지도의 사례) 등 제씨가 주제 발표자로 나섰으며, 이희승 박사가 <국어에 대하여>를, 이병호씨가 <교육과정론>을 강의하고 이영호 ․ 김영수 ․ 김완기 ․ 김일환씨 등이 연구발표를 했다. 이 세미나에는 전국에서 260여 명의 교사가 참가했다.
제10회 세미나는 <글짓기 교육의 어제와 오늘>이란 주제로, 1971년 8월 19일~20일, 서울충무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120여 명의 교사가 참가한 이 모임에는 어효선(어린이 작품의 표현은 어떻게 달라졌나?) ․ 신현득(시대에 마른 어린이 작품의 경향) ․ 이재철(글짓기 교육의 발자취를 더듬어) ․ 엄기원(오늘의 어린이 글짓기에 대한 학교와 가정의 인식) ․ 박경용(글짓기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은?) 등 제씨가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이 모임이 끝난 뒤에는 본회 창립 10주년 기념 야유회를 아이동에서 가졌다.
제11회 세미나는 1972년 1월 17일~18일에 전주 완산국민학교에서 전북대회로 열었다. 263명의 교사가 참가하여 ‘글짓기 부흥’을 부르짖은 이 세미나에서는 <글짓기 작품의 올바른 지도 및 평가>를 주제로 이원수(글짓기 교사의 사명) ․ 이석현(동시와 동화의 작법) ․ 이병호(개편 교과과정에서의 글짓기) ․ 박경용(동시조의 특색과 지도) ․ 윤부현(글짓기 동기 유발 방안) ․ 김종상(글짓기 작품의 평가) ․ 이순길(지도의 실제) 등이 강사로 등단했으며, 최근옥 ․ 장종태씨의 글짓기지도 실천기가 발표되었다. 협의회에서는 교사들의 글짓기에 대한 여러 문제점의 질의에 대해 박경용씨가 답변에 나섰다.
제12회 세미나는 역시 지방대회로 청주에서 가져졌다. 1972년 8월 17일~19일, 사흘 동안 청주 교육회관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는 170여 명의 교사가 참가했다. <새 국민상을 창조하기 위한 글짓기 교육>을 주제로 한 이 모임에는 이희승(국어가 걸어온 길) ․ 이석현(동화시 교육) ․ 이병호(새 교육과정에 대하여) ․ 박경용(어린이 시조 지도) ․ 이명권(쓰기와 읽기지도) ․ 임창순(글짓기지도교사의 자세)씨 등이 강의했으며, 본회 이사진에서 손관식 ․ 엄기원 ․ 김영식 씨가, 충북지부회원 중에서 임복근 ․ 김태하씨 등이 각각 연구발표를 했다.
제13회 세니마는 1973년 8월 16일~18일에 걸쳐 부산에서 열렸다. 어느 때와는 달리 중학교 교사까지 그 대상으로 포함하여 가져진 이 세미나에는 270여 명의 교사(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가 반반씩) 모였는데, <국어의 수난사> (이희승) ∙ <심리학을 기저로 한 글짓기 교육> (조유로) ∙ <시조 지도의 실제> (박경용) ∙ <국어과 교재 연구> (박붕배) ∙ <소년 잡지의 어제・오늘・내일> (이석현) ∙ <국어교육의 이론과 실제> (김성배) ∙ <학교신문 제작의 실제> (이영호) ∙ <국어교육에 있어서의 문학교육> (이병호) 등 광범한 연제가 다루어졌다. 부산의 영선국민학교 강당에서 베풀어진 이 세미나에서는 국민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를 분반하여 글짓기 실제에 관한 교사들의 연구발표를 곁들였는데, 국민학교반에서는 <국어과 학습지도> (장준표∙부산교대부국), <산문지도> (이창규∙마산 월영국교), <실용문지도> (주성호∙부산구포국교), <벽신문 제작> (손관식∙서울 대광국교), <작문극> (신태용∙부산 장산국교), <독서지도> (정진채∙부산 사하국교) 등이 발표되었으며, 중학교반은 박붕배씨와 이병호씨의 국어과 교육에 대한 특강이 있었다.
한편 경남∙부산대회의 이 세미나에 따른 또다른 수확으로는 본회 경남∙부산지부의 결성을 보게 된 일이다. 지부 회장에는 저명한 아동문학가 이주홍씨가 선임되었으며, 장준표∙ 정진채 씨 등을 중심으로 실무진도 착실히 짜여졌다. 때를 같이한 전북지부(지부장 임복근)에서 개최한 전북도내 국어교사 세미나에는 김종상 엄기원 두 이사가 강사로 참가했었다.
14. 국내 최대의 글짓기 잔치
제7회 글짓기대회는 1971년 5월 29일부터 6월 21일까지에 걸쳐 실시했는데 전국에서 247개 학교의 38,016명의 어린이가 참가하여 글짓기사상 초유의 엄청난 참가자를 내는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등 푸짐한 상을 걸어 실시한 이 대회에서는, 금상 45점, 은상 350점, 동상 3500점을 내어 상의 규모로서도 일찌기 전례가 없는 실적을 올렸다. 단체 금상에는 서울 청운국민학교가 차지하고, 지도상에는 조진태∙ 최익림∙ 김재우∙홍순태∙ 김월한∙ 최춘해 ∙김상연∙ 김희세∙ 임복근 씨 등 10명의 교사가 차지했다.
제8회 글짓기대회는 1972년 7월에 실시되었는데, 전국에서 23,044명의 어린이가 참가, 금상 151점, 은상 336점, 동상 825점의 입상자를 내었다. 지도상에는 임홍규∙ 김재우∙ 홍순태∙ 김순헌∙ 박수경∙ 이우일∙ 최춘해∙ 이유미∙ 김봉선씨 등이 차지했다.
제9회 글짓기대회는 1973년 4월 25일부터 5월 31일까지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21,500명의 어린이가 참가 차지했다. 금상 380점, 은상 800점, 동상 1,200점을 내었다. 단체상 최우수상에는 경기국교∙ 대전국교∙ 가양국교∙ 성동국교∙ 중대부국∙ 은석국교 등 6개 학교가 차지했으며, 지도상에는 이운룡∙ 김규화∙ 고춘섭∙ 이정홍∙ 이영호∙ 박승기(이상 중학부), 김순혁∙ 김재우∙ 김종상∙ 김영수∙ 김영자∙ 김영희 ∙김완기∙ 김완유∙ 김호재∙ 김월한∙ 노선영∙ 박수경∙ 박용근∙ 신종대∙ 서수웅∙ 윤태성∙ 오영환∙ 이두환∙ 이순경∙ 이신경∙ 이우일∙ 이창규∙ 이청환∙ 임복근∙ 임홍규∙ 장식환∙ 전세준∙ 전분남∙ 정규범∙ 최진연∙ 최창련∙ 함사훈)이상 초등학교부)씨 등이 차지했다.
이 9회 글짓기대회의 특징은 종전의 국민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것을, 중학생에로까지 그 폭을 넓힌 점이다.
제7회 글짓기교실은 1970년 8월 5일~8일에 경기∙대광∙경희의 3개 학교에서 가져졌는데 전부 280명의 어린이가 참가했으며, 제8회 글짓기교실은 1971년 1월 31일~18일에 경기∙ 경희의 두 학교에서 베풀어졌는데 총 329명의 어린이가 참가했다.
본회가 벌인 독서운동으로는 1970년 12월~1월까지 어린이와 어머니 및 교사의 책읽기 운동을 편 것을 필두로, 독서감상문 모집(71년 2월), 독서연구발표회(71년 3월 21일, 추계국교에서)를 가지는 한편 독서 앙케이트를 분석하는 등 만만찮은 업적을 남겼다.
연구발표회로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70년 6월 12일, 유석국민학교에서 가진 <어머니와 교사의 일기 연구 발표회> (참가자 120명)와 1973년 4월 28일 <바른말 지도 협의회> (65명 참가)를 경기국교에서 가진 일이다.
15. 한인현 글짓기 장학상 및 지도상 주관
고 한인현 전임 회장의 글짓기교육에 대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한인현 글짓기 장학상 및 지도상>은 한인현장학회의 위촉에 따라 본회가 그 수상자를 심사해서 수상해 왔는데, 제1회(1971년) 지도상에는 이오덕씨(경북 안동군 임동 대곡분교)가, 장학상에는 김경조(경북 영주 중부교 6년)와 이유미(논산 황산교 2년) 어린이가 각각 수상했다. 제2회(1972년) 지도상에는 서병렬씨(전북 김제 건봉교)가, 장학상에는 김세원(서울 화계교 5년)과 김난(제주 서귀포중앙교 3년) 어린이가 각각 차지했으며, 제3회(1973년)는 지도상에 엄기원씨(서울 추계교)가, 장학상에는 김영락(춘천 효제교 4년)과 김순복(경기 다문교 2년) 어린이가 각각 수상했다.
이 밖에도 소년조선일보문예상 심사를 1971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본회가 심사를 맡았으며, <글짓기 공부>란 제목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글짓기의 실제를 소년 조선일보에 150여회 연재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년’ 잡지에 글짓기 지도를 본회가 맡아오고 있으며, 새소년 잡지에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어린이 글짓기 작품, 심사를 맡았었다.
본회가 발간한 주요 도서로는 어린이 작품 문집 <우리 모두 손잡고> <세계를 한바퀴> <파란 마음> <글동무> <글짓기교실> 등이 있다.
임원도 이희승 회장 취임 이후 몇차례 개편되었는데, 1971년 간사진이 일부 바뀌어 간사장에 박경용씨가 취임함으로써 김종상 팀의 바톤을 받아 박경용 팀 (기획:김종상, 홍보:김영식, 교육:이영호, 섭외:장원덕, 행사:이두환, 출판:강석호)이 일을 맡아 하다가, 다시 1972년에 이순길 팀(기획 및 재정:엄기원, 교육:이영호, 출판및홍보:김영식, 행사:장원덕, 섭외:이두환, 감사:윤부현 김호재)이 사무를 전담해 오고 있다.
한편, 이사진의 보강이 꾸준히 대두되어 오다가, 1972년 4월에 김재우(경기국교), 김월한(풍인국교), 조희준(서울 세곡교), 김완유(한양국교) 씨 등을 맞아 인적자원을 사실상 완벽하게 확보했으며, 다시 1973년에 차원재(서울 교대부국), 전하찬(서울 계성교) 씨 등을 더 맞아들여 그 실을 높였다.
본회의 드높은 이념과 그동안 쌓아올린 실적에 대해서는 이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각종 문화 단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민주적인 체재를 갖추어 있는 본회가 앞으로도 계속 사무적인 면에서의 합리화와 능률화를 기할 때, 글짓기운동 및 교육의 선구단체로서 그 사명을 다하게 될 것임을 믿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