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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시종회 발기모임 | 광시종회 (은사리 마을회관) |
Ⅱ. 뿌리 편
◉ 조상
우리 족보를 상고하건데 본시 근원의 뿌리는 설화에 나오듯 신라를 세운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로부터 내려온다. 울산박씨대동보(蔚山朴氏大同譜) 1. 2권의 三. 고려시대(高麗時代) 편을 보면 신라의 시조왕(始祖王) 휘(諱)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917년 신라54대 경명왕 시대에 나뉘어져, 흥려현 이었으나 이후 흥려부로 고치고 노풍굴(盧風屈), 아화(阿火), 동진, 공수, 네현을 합쳐서 오늘날의 울산도호부로 크게 확장하고 태조 왕건은 우리 시조 윤웅을 흥려백(興麗伯)으로 봉하고 또한 농소, 유포, 두면과 곽암(미역바위) 열두 바위를 사패지로 주었으며, 시호도 장무(莊武)라고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본관을 울산(蔚山)으로 정한 이유는 우선 중시조이신 윤웅(允雄)시조께서 신라가 망하고 궁예는 철원지방에서 왕으로 등극하려할 무렵이었으며, 신라의 국운이 다하여 국령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함에 지방각처의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는 고갈되었다.
이에 군웅이 반란 점거하여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이면 잃어버리는 상태였을 때 이를 윤웅(允雄)께서 나서서 평정하였으며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였다. 이때 신숭겸, 배현경 등 28명의 장수와 함께 합력하여 궁예를 쳐서 없애고 고려왕조를 세웠다.
태조 왕건은 그 공훈으로 윤웅(朴允雄)을 대장군에 임명하였고 고려개국공신으로 흥려백(興麗伯) 박윤웅(朴允雄) 이름으로 등록하였으며 벽상공신(壁上功臣)이라 하였다.
고려태조(왕건)30년(930)에 고려에 항부(降附)하여 고려건국을 도와 고려의 흥례부(興禮府)를 탄생시켰으며, 영역에 관해서는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자세히 알 수 있으며, 이때 ‘신학성장군(神鶴城將軍)’ 박윤웅(朴允雄)은 울산의 ‘주성황신(州城隍神)’으로 승화되었다고 한다.
울산박씨대동보의 처사흥려박공기형묘갈명(處士興麗朴公璣衡墓碣銘)편에는 시명산(時鳴山) 밑 간좌(艮坐)는 처사흥려박공의 묘이며, 공(公)의 휘(諱)는 기형(璣衡)이요, 자(字)는 원오(元五)니 흥려(興麗)는 그 본관(本貫)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 흥려(興麗)는 지금에 ‘울산(蔚山)’이며, 본관(本貫)이 울산(蔚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朴氏가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고려 때의 장무공(莊武公) 휘(諱) 윤웅(允雄)이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흥려백(興麗伯)에 봉하여 후세에 자손들이 본관을 삼았으며, 조선조에도 대대로 이름을 날려 울주(蔚州)의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개국공신이신 장무공은 지금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용당에 단소(壇所), 서원을 모시고 경상북도 유림들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중흥시조 장무공의 16세손이신 한주공(韓州公),한림공(翰林公), 두분도 같이 장무공 단소앞에 모시였으니 그까닭은 장무공으로부터 16세손까지 15대가 높은 관직에 있으셨기 때문이며, 16세손이신 사촌형님 한주공은 충청감사에, 한림공은 한림학사에 남평감무로서, 고려조가 망하자 “충신이라면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하여 오류동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충신은 두 나라를 섬기는 법이 아니라고 갓을 벗어 남문에 걸어놓고 두문동72현과 눈물 뿌려 작별하고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피로 물들여진 선죽교를 찾으시고 목은 이색(李穡),야은 길재(吉再),와 더불어 ‘경상북도 선산군’ 금오산 채미정에 가셔서 은둔하여 사시다 죽어가자고 시(詩) 지어서 작별하시고 또 노래로 앞날 을 읊었으니 그 시(詩)와 노래는 다음과 같다.
◉ 시(詩) 로는
鵑啼蜀國三春血 견제촉국삼춘혈
두견새 울어 피를 머금고
鶴近遠陽萬里心 학근원양만리심 이라
돌아가는 학의 길 만리 같구나
註1 :
촉(蜀)나라 망제(望帝)가 죽어 그 혼이 두견새가 되어 피를 머금고 울더니 이 몸 학(鶴)이 되어 물따라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울산의 별호를 고려때 학성(鶴城)이라 하였고 그의집이 또한 학성에 있었으며 촉혼(蜀魂)을 두견새라 하니 자기를 들오가는 학(鶴)으로 비유한 것이다.
◉ 노래 가사는
登彼霍岩兮 등피곽암혜
고향에 돌아가
和採薇矣 화채미의 로다
고사리를 따서 곡조 부르리
心如淳雲兮 심여순운혜
마음은 뜬구름
無是非矣 무시비의 라고
옭고 그름을 무엇 하리
라고 노래하시였다.
註2 :
시(詩)의 내용 중 곽암이라 함은 선대 장무공 윤웅이 고려 건국의 공훈으로 식읍지(食邑地)로 받은 일부이다.
한주공 할아버님께서는 울산본향으로 가시고, 한림공 할아버님은 은거오류(隱居五柳)하여 교의도주(郊義陶朱)라 하여 중국 충절신 도주공을 본뜨고자 하시여 이름자 유(悠)를 유(愈)로 고치시고 살으셨다.
註 : 도주공(陶朱公)이란?
중국민속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범려이다. 범려는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에게 패하자 구천과 함께 오나라에 가서 3년동안 부차의 똥 시중을 들었다. 구천은 부차가 병이 났을 때 그의 대변을 손가락으로 찍어먹어 보기까지 하면서 부차의 의심으로부터 벗어났다.
범려는 나중에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어 나라를 무너지게 한 후에 구천을 춘추 오패 중에 최후의 패자로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그후 월왕 구천이 자만에 빠져 자신을 무시하자 구천의 곁을 떠나 작은배에 몸을 싣고 강호를 떠돌다가 제나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제나라 임금이 사람됨을 알고 범려가 사는 곳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범려는 이미 어디론가 숨은 뒤였다.
“선생은 어디 계신가?”
시중드는 아이가 고개 흔들며
“약초 케러 가시면 기약이 없으시죠.”
라고 말하니 임금은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 구나.”
제나라 임금이 돌아간 후에야 망태 메고 내려오는 노인이 있었으니 형형한 눈빛, 수염이 다섯자인 그가 법려였다. 범려는 후에 종자돈만 가기고 도(陶) 라는 곳에 가서 장사를 하여 거액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그의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렀다.
또한 도주공은 19년 동안 세 번이나 천금을 모았는데 그중 두번의 것은 가난한 친구와 먼 친척에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서 떠나 다시 산으로 들어가 복사꽃 피는 무릉산에 은거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고 하며, 후세 사람들은 큰부자들에 대해 이야기 할때 모두 도주공(陶朱公)이라한다.
주(註) : 두문동(두문불출)
고사성어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은 문을 닫아걸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고려에서 관직을 지냈던 72명의 고려 충신지사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72명의 현명한 충신들이 조선을 위해서 일을 해주었으면 했던 이성계는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꼼짝않자 두문동에 불을 지른다. 그러면 나올 줄 알았으나 그들은 모두 불에 타서 죽는 것으로 고려에 대한 충의와 절개를 지킵니다. 그런 고사성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입니다.
참 : 원래는 73명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고려의 충신들의 절개를 후대에 남길 수 없게 될까봐 젊은 학자를 억지로 내보내 조선에 출사하게 한다. 그 사람이 바로 훗날의 황희 정승이다. 그러니까 두문불출의 어원은 바로 고려에서 벼슬했던 선비들이 개성 송학산 두문동 골짜기에 들어가 불출하였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기필코 조사하여 벼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아니하셨고 자손에게도 삼대불사(三代不仕)하라고 유언하시었으므로 그 절의를 본받아 조선 세종때 손자 되시는 자번(自蕃)은 ‘세마(洗馬)’ 벼슬(석전(釋奠)의 예(禮)에 태자(太子)를 보좌하여 맡아 보는 일)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유은공(柳隱公)께서는 세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으니 그 절의야 말로 놀라운 일이어서 조선역사 조야집에 쓰되 -
“박남평의 청풍고절로 높은 절개는 맑은 바람과 같다”고 기록하여 칭 송하였으며, ‘안동김씨청음김상헌문집’에도 “박남평청풍고절은 민도금 칭지”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자손이야 어찌 이를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자손대대로 숙원사업이던 사적비를 유은한림울산박공유사적비(柳隱翰林蔚山朴公愈史蹟碑)라고 현 예산군 광시면 광시리 선영하에 세우고 오류서사라고 모사(慕舍)의 신축을 보았다고 울산박씨 대흥파보 서문에 되어있다.
울산박공파세계도(蔚山朴公派世系圖)에는 그러한 이유로 우리의 뿌리는 윤웅 할아버지를 본관으로 하여 1世로 족보가 만들어졌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이어지는 뿌리를 찾아보면 이렇다.
◉ 울산(蔚山)박가의 뿌리인
1세로 장무공 흥려백(興麗伯) 윤웅(允雄),
2세 상장군(上將軍) 식(息),
3세 국상(國相) 원일(元逸),
4세 상장군(上將軍) 광시(匡是),
5세 평장사(平章事) 경목(慶穆),
6세 평장사(平章事) 형립(亨立),
7세 이부상서(이부尙書) 우(祐),
8세 조의랑(朝儀郞) 중길(重吉),
9세 의랑합문지후 연(演),
10세 추밀원부사 종로(宗老),
11세 봉상시정(奉尙寺正) 래(萊),
12세 이부상서 겸 대호군(大護軍) 임기(林基),
13세 문하시중(門下侍中) 주년(周年),
14세 문하지중(門下侍中) 용(溶),
15세 봉상시정(奉常寺正) 길우(吉佑),
16세 한원 남평감무 고려 수절신 삼대불사유훈 한림공 유(愈),
17세 정랑 근(根), 18세 세마불사 자번(自蕃),
19세 원창(元昌),
20세 한(垾),
21세 영무(英珷),
22세 윤(潤), ---감찰공파 사헌부감찰(監察公派 司憲府監察)
23세 지남(智男),
24세 심(燖),
25세 상준(尙俊),
26세 조(㟘),
27세 성눌(聖訥),
28세 현(鋧),
29세 경한(庚漢),
30세 영(𣕺),
31세 규로(奎魯),
32세 민(𤨨),
33세 성진(成鎭),
34세 승재(承宰),
35세 경수(庚秀),
36세 시형(時亨),
이렇게 내려온다.
따라서 나는 본관은 ‘울산’이며 고려 ‘벽상공신’ ‘좌명공신’ ‘장무공’ 윤웅공 할아버님에 35세손이며, 중시조인 한림공(翰林公)이신 유은공의 20세손으로 19대 자손이 되는 것이다.
울산 박씨 시조 장무공(壯武公) 박윤웅(朴允雄)이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곽암(미역바위)
| 판지마을 바닷가에 세워진 곽암(藿巖)의 유래와 소유권을 새겨 놓은 비석 |
名行錄(명행록)
魯(노)항부터 土(토)항까지
❍鎭→承❍→❍秀→熙❍→❍周→鍾❍→❍淳→來❍→❍勳→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