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長孫)
김 태 곤
“할아버지, 풀이 나도 배추요 하네.”
세 살배기 손자 녀석이, 텃밭에서 잡초를 뽑으시는 조부님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재잘거렸다는 어린 시절 나의 얘기다. 이 얘기는 한동안 조부님 입에서 마르지를 않았고, 집안 장손이 영특하다는 소문은 온 동네 자자하였단다.
사랑방 아랫목에 앉으신 조부님 무릎은 항상 내 차지였고, 집안 식솔들의 먹고 싶은 음식도 나를 통하여 해결하고는 했단다. 식사 때면 아버지와 마주하신 조부님 옆자리에서, 장조림과 계란찜이 올려진 사각 자개상(床)에서 겸상을 하였고, 다른 가족들은 따로 둥그런 나무상(床)에 빙 둘러 앉아 여느 반찬으로 식사를 하였다.
조부님은 틈만 나시면 사랑방 문갑 속, 대나무 석작에 안치해둔 한지(漢紙)로 엮은 족보를 펼쳐서는,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한 나에게 “너는 김수로왕 칠십 이대 손(孫)이며, 본(本)은 김해(金海)이고 파(波)는 삼현파(三賢派)이며, 너의 학열은 여기다.”하고 줄을 짚으시며 어려운 한문을 읽어 주셨다. 조부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동생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고, 틈만 나면“너는 집안을 지켜갈 장손이니라.”고 하셨다.
원래 경북 칠곡군 인동(隣洞) 산골이 고향인 조부님은, 농사짓는 일이 싫어서 단신으로 상경(上京)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측량학원을 수료하고 측량기사로, 우리나라 전국을 다니면서 토지 구획정리를 하셨다고 한다. 전남 광주에서 머무실 때 해방이 되었고, 산세 좋은 순천(順天)에 터를 잡으셔서, 우리집은 동네에서‘경상도집’으로 통하였다.
환갑을 넘기신 후로는, 동네에서 이름난 지관(地官)을 데리고 조계산(曹溪山) 끝자락으로 둘러싸인 시내 주변의 야산을 둘러보시며, 산소 자리를 찾아 다니셨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날, 조부님은 나를 데리고 산에 올라 “산봉우리를 기점으로 세 개의 줄기가 뻗어 내려오는데 양 옆의 능선 봉(峰)은 높고, 가운데 줄기는 낮게 내려오다가 휘는 곳이 산의 맥이 잡히는 곳이다. 그 맥의 위치에 서서 앞을 내려다보면, 먼 곳에 냇물이 흐르는데, 내천(內川)의 시작과 끝이 좌우측의 봉우리로 가리어서 보이지 않는 자리가,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 내유수(內流水) 명당이니라.”고 점지한 자리를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추수 후에는, 볏짚 몇 단을 그 자리에 묻으시고, 이듬해 봄에 파보니, 볏단에서 힘찬 정기(精氣)가 모락모락 피어 오름을 확인하시고는, 자리에 조부님과 조모님의 산소를 쓰라고 아버님께 일러 주셨다. 그리고 작고하시기 삼년 전에는, 이 자리의 효험은 십년이니 십년 뒤에는 화장하여, 고향 칠곡 왜관 선산으로 이장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조부님은 내가 대학을 두 번이나 낙방하던 해 봄에 돌아 가셨고, 삼수생이었던 나는 이듬해 진학하였다. 그리고는 십년 뒤에 아버지는 조부님 유언에 따라, 유골을 화장하여 하얀 사기 항아리에 담아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종중(宗中) 선산의 정해주셨던 자리로 이장하였다. 나는 아직도 조부님이 작고하시고 꽃상여를 따라가던 날, 상여에서 분리된 시신을 하관(下棺)할 때, 조부님 머리맡에 나침판을 놓고, 기점을 찾아 산봉우리와 내유수(內流水)의 중간을 일직선으로 맞추어 안치하던, 지관(地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집사람은 몸매가 가냘프고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 인상이 풍긴다. 부모님은 서울에 사시는 고모님께 맞선자리를 부탁하셨고, 동석했던 고모님은 집안 장손의 아내 감으로는 외모가 약하고, 인상도 차갑지 않느냐는 우려를 하셨다. 그러나 아내의 사주를 들고 찾아간 강화도 선운도사(仙雲道士)는, 나와는 천생배필(天生配匹) 찰떡궁합이며, 장래 집안을 지켜갈 장부(長婦)감으로써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풀어 주었다.
우리집은 일 년에 설날과 추석 명절 차례까지 제사가 다섯 번이다. 아내는 뵙지도 못했던 조부모님, 작고하신 아버님의 제사를 꼬박꼬박 음력으로 지낸다. 어머님이 주관하시던 제사를 우리집으로 모셔 왔을 때는, 동생들 부부도 제수 장만에 참여 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나와 내 아들과 둘이서 모실 때가 많다. 제수를 준비하는 아내의 정성도 지극하다. 제물 준비로 들리는 식품점에서, 어쩌다 내가 저렴한 중국산 고사리를 집어 들면, 조상님 섬기는 장손의 자세 운운하며 핀잔이 대단하다.
그래서 우리집 제사상(床)은 고풍스런 병풍휘장에, 물푸레나무로 다듬은 남원제기에 올린 제물이,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利市), 어동육서(魚東肉西) 순서로 차려진다. 내가 배열한 상차림이 완료되면, 아내는 반드시 제사상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 매김을 한다. 동생들 가족이 참여하는 날에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준비한 도시락에 골고루 제물을 나누어 들려 보낸다.
아버님께서 임종하시기 전날, 집안의 자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아버님은 당신의 장손인 내 아들을 끌어다 무릎에 앉히시고, 내 아내의 손을 잡으시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집안을 지키라는 종부(宗婦)에 대한 최후의 당부가 아니셨을가 싶다. 조상을 지극히 섬기는 정성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남다른 교육을 더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 제 길들을 반듯하게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장손집의 장부(長婦)는 조상님이 점지하여 주시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내가 찾았던 도사의 사주풀이가 맞는 걸가. 젊은 날 꿈꾸었던 전공도 접고, 나에게 시집와서 묵묵히 집안을 지켜가는 아내에게 늘 고맙기만 하다.
나는 일 년에 두 번씩 아내와 같이 왜관 선산에 내려간다. 요즈음은 도로 사정이 좋아서 서울에서 출발하여 세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한식(寒食)에는 겨우내 산소의 손상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추석(秋夕) 전에는 벌초를 하러 간다. 선산의 일반적인 관리는 종가(宗家)집 육촌 당숙이 하고 있지만, 조부모님, 아버님 산소를 직접 확인하여야만 조상님께 소임을 다한 것 같아서 일 년 동안 마음이 편안하다. 장지(葬地) 문화가 국가 시책에 따라 변하여 가고는 있지만, 친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층층이 겹쳐있는 혼잡한 납골당을 보고 있노라면, 조상에 대한 정성이 왠지 부족한 것 같이 느껴짐은‘아직도 내 정서는 시대 변화에 따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조부님의 증손(曾孫)인 내 아들이 혼인하던 해의 추석 명절에는,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선산에 가서 조상님께 인사를 드렸다. 새 가족이 된 며눌아이에게 가장 윗 단의 고조부님 봉분(封墳)부터 시작하여 증조부님, 합장한 조부모님, 화강암으로 단장된 아버님, 그리고 지금은 비어있는 어머님 자리까지를 설명하고, 이끼서린 망부석 옆에 세워있는, 조선(朝鮮)말에 당상관(堂上官) 벼슬을 하셨다는, 고조부님의 시비(詩碑)를 읽어주는 내 가슴은 뿌듯하기만 했다.
재 작년에는 음력 오월에 윤달이 들었었다. 옛부터 윤달이 들어 있는 해에 장례 물품을 준비하면, 망자(亡者)의 영혼은 내세(來世)에 좋은 곳으로 가게 되고, 후손들이 무탈(無脫)하다는 유래가 있다. 당숙의 권유로 부모님 옆자리를 삼단으로 축조하여 넓혀서, 내 자리에 잔디를 심었다. 집안을 지키라는 조부님의 뜻을 새기기 위함이며, 마땅히 조부님 곁에 묻히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런 가풍으로 일 년 내내 분주하게 지내지만 나는 한번도 번거롭다거나 소홀한 적이 없다. 지난달, 나에게도 장손이 태어났다. 나도 내 장손이, 나와 같이 가문(家門)을 지켜가는 재목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 사상이 시대의 변화에는 멀어져가는 관습(慣習)이라고들 하겠지만, 나에게는 조부님의 뜻을 기려야 하는 사명의식이 더 큼을 어찌하겠는가.
(2008년 1월)
첫댓글 선생님, 지금처럼 예절이 땅에 묻혔다고 하는 시대에, 이런 가풍을 가진 집안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전통이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특히 종부로서의 열할을 다하시는 부인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모르긴 해도 선생님의 장손도 반듯하게 자랄것으로 생각됩니다. 문장이나 끝맺음도 손색이 없습니다. 단지 문장을 시작할 때 한자 들여쓰기를 하지 않으셨네요. 아마도 붙여넣기 과정에서 그리 된것 같은데, '수정'에서 들여 넣으시면 됩니다. 이사 떡 굉장히 맛있습니다. 건필하십시요.
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지존님의 닉네임이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아이들 성도 어머니의 재혼에 따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제도하에서는 진부한 글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여성이면서 앞의 제도를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는 터라, 한 가문을 이어가려는 지존님의 책임과 의무감이 절절이 배어 있는 글은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글을 읽어 내려오다가 '우리 집 사람은 서울 태생이다. ~~풀어 주었다'라는 문단이 글의 전체적 흐름을 거슬리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저 만의 느낌임을...) 집들이 떡, 저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사!!! ^*^
잘 보셨네요. 그 부분은 좀 걸리고 없어도 괜찮은 문단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아래 아래 문단에 나오는 "시집와서 묵묵히 집안을 지켜가는 아내" 에 대한 보충으로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문가의 시선은 똑 같군요. 안방 마님께서 그자리를 코멘트하셨는데 생각하다가 고집스럽게 그냥 놔 두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그럴 것같지 않아보이는 집사람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다보니... 만약 미소님께서 바꾸신다면 어떻게 표현하였으면 하시는지요. 감히 부탁드립니다.
제 생각엔 , 지존님께서 그 문단을 살리고 싶으시면 그 문단의 바로 아래 문단(~~제물을 나누어 들려보낸다) 다음으로 옮기시고, 문단의 끝에 < 그 분이 풀어 준 아내의 사주가 맞은 걸까.> 또는 <그 사주가 맞았던 걸까.>라는 의미의 문장을 추가하면 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약간 유머스런 의미도 가미될 것 같고요.(***어머나, 제가 뭘 안다고?? 나도 햇병아리 주제에...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훨씬 부드럽군요. 그런데 이미 다 들켜버린 것을 지금 고쳐도 돼나요? Rule을 몰라서요.
지존님, 계속 고치셔도 됩니다. 발표전에 여기 올리는 것은 의견수렴 과정입니다. 볼때마다 고칠 부분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때마다 글자 한자라도 계속 고치셔야 좋은 글이 됩니다. 저는 18매짜리 13매로도 고쳤지요. [임 그림자] ㅎㅎㅎ.
예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초고를 완성시키는 기간이 일주일도 넘습니다. 문단과 문장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하면서 밤 새다시피 하지요. 지존님께선 수필 강의도 안 들으셨는데 이 수준이시면 ....!! 대단하십니다.(*저는 칭찬에 매우 인색한 여인네입니다)'아이쿠 큰일났네. 부지런히 글 공부해야지'ㅎㅎㅎ
두분의 선생님, 얘기 듣고 고쳤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無에서의 시작이니 계속 지적 바랍니다. 별도 월싸금을 드려야할 것 같군요. 꾸뻑꾸뻑꾸뻑(3번)
집들이 떡 잘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존'의 한자를 다시 고쳐쓰야할 것 같은 느낌은 저 뿐만 아닌것 같네요. 해가 갈수록 변해가는 풍습을 고집하는 대찬 분들이 있어서 가풍을 지키는 모습이 좋아보입니다. 조부님의 뜻이 증손자에 이어지는 집안의 엄정한 군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집 군기(?) 형편없습니다. 도대체 왔다가 않왔다가 하니 밥을 도대체 몇인분을 준비 해야하느냐고 맨날 집사람이 나만 구박합니다. 아직도 틀을 잡을 곳이 많으니 계속 잡아 주세요. 하루 아침에 되겠어요.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우리가 자랄때만 해도 당연히 그러려니했습니다.명절이나 제사때가 되면 어머니를 도와 시장도 같이 가고.방앗간에 줄도 서서 기다리고,콩나물 다리 따기,제사상에 까는 흰갱지 사오기//막내라 힘드는일 보다 잘잘한 작은 심부름을 많이 했던 기억입니다. 덕분에 잊고 있었던 옛 기억들이 세삼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우리만의 소중한 미풍양속이라고 해야 하나요?선생님의 장손도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조상님을 잘 모실겁니다.집들이 떡 맛나게 먹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시대의 변화를 같이하지 못하는 고집이 아닌가 합니다. 요즈음 동생들이 하는 얘기인데 그때 형이 할아버지하고 먹는 장조림이 우리는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하더군요. 저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일인데. 천사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풀이 나도 배추네요>라고 지존님게서 어린 시절 말씀하신 그 말은 너무도 상큼하여 오래도록 저도 써먹을 것 같습니다. 총명하신 그 장손의 장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특히 우리 미풍양속의 터줏대감격인 안동지역이 고향이신 지존님의 할아버님과 또 그 아랫대로 연결되는 이야기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세월이 변했지만 그 굵은 줄기만은 면면이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혼이 서려있기에 말입니다.
아쿠아님, 이사떡 드시고 코멘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례와 제사는 조상님을 기리는 뜻도 있겠지만 오랫만에 집안이 모여서 부모님 사후에도 화목하게 지내라는 좋은 뜻도 있지 않은가 합니다. 그래야 오랫만에 보는 조카들 이름도 잊어먹지 않고 소식도 듣고 그러다 보면 더 가까와지는데. 시대가 점점 그렇지를 않아지니 안타갑지요. 아이들에게 더불어사는 교육을 할 수 있는 좋은 관습인데. 점점 멀어지고 있군요. 감사합니다.
장손을 얻으심을 축하드립니다. 할아버지 무릎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신 지존님이 이제 손자를 무릎에 앉히실 때가 온것이네요.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저는 마냥 부럽습니다. 지존님의 역학에 대한 뿌리는 그 할아버님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군요. 어렸을적 집안의 가풍이 새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글고, 다들 떡얘기를 해서 나만 빼고 다들 나눠 먹었나 오해하고 살짝 삐졌다가, 한줄 메모장보고 풀렸습니다.ㅋㅋㅋ ...품위와 고풍이 담긴 시루떡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제사 모실때 지방을 놓지 않고 조부님 영정을 놓고 지냅니다. 그 영정 아래 아버님께서 당시의 년세를 적어 놓으셨는데 지금 제 나이가 더 많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울 보면 그 사진보다 훨씬 젊으니, 이 작가님, 지금같이 신년해를 보시려고 잠도 설치시고 '하늘공원'에 올라서 해돋이도 보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千壽를 누리실 겁니다.
세 살배기 손자가 조부 되셨으니 먼저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옛정서를 보는 듯해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별님, 얼마 전에 '가입인사'하신 걸 보았는데 그때 인사 못드렸군요. 글로나마 인사드립니다. 뵈어서 반갑고 코멘트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읽기에 딱 좋은 글입니다. 저도 종갓집에서 태어나 일 년에 13번씩 제사를 치르는 엄마를 보고 자랐습니다. 엄마 혼자 고생하시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름다운 가풍, 자자손손 이어가길 바랍니다. 좋은 글 읽고 마음까지 풍성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maya님 모습이 항상 반듯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일년에 다섯번도 바쁜데 13번이나. 저희 딸은 크면서 엄마하는 일하는 것 보고 죽어도 장남한테는 시집 안간다고 하더니 장손한테, 그것도 외아들 대구 안동 권씨 가문으로 들어갔습니다. 팔자는 어떻게 할 수 없나봐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존님, 안동 권씨 가문요? 우리 쪽도 대단합니다. 저는 지금도 사람들과 눈 딱 맞추고 대화 못합니다. 여자는 눈 똑바로 뜨고 사람보면 못쓰는 것이라해서 지금까지 그리삽니다. 그래서 사람 기억을 더 못합니다. 에고, ㅎㅎㅎ
아, 그러고 보니 권선생님이 안동 權氏 었군요. 아니 글세 요 사위 녀석이 딸 하는 일을 도울줄을 모르는 거예요. 집사람이 씽크대에 가지 않는 다고 야단입니다. 요즈음은 시어머니 시집사리가 아니고 장모 시집사리가 더 독하다네요.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경륜있으신 선생님의 쓴소리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생각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