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지정(학)
축구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스포츠로서, 2억 명이 실제 축구를 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월드컵은 올림픽을 제외하고선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잔치다.
브라질에서는 기업주나 공장장이나 모두 그 소속 일꾼들이 국가대표팀의 경기 상황을 보는 것을 허용하며, 일꾼들은 경기가 끝나고서도 일자리에 즉각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겼으면 승리를 축하하고, 졌으면 그 우울한 회포를 푼다.
많은 멕시코 축구팬들은 월드컵 기간에 집이나 술집, 호텔에서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함으로 해서 국가 산업에 적잖은 손실을 가져오기도 한다.
축구는 비록 오락과 격정을 상징하지만 각 나라 축구협회는 물론, 그 최고기구인 피파(국제축구연맹)에 있어선 거대한 이권이 걸린 스포츠이고, 세계 정치, 사회, 문화에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축구가 일종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즉 국가 정체성(아이덴디티)을 증가시키는 메커니즘이라는 것, 사회를 통제시키는, 나아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사회변혁을 막는 작용이 있다는 것, 기득권층에 있어선 대중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피파를 구성하는 각 주체의 숫자는 많은 국제 조직의 구성국가 숫자 보다 많은데, 이는 축구가, 또다른 정치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잉글란드와 스코틀랜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같이 참가했고, 팔레스타인과 웨일즈 역시 피파에 가입했다. 나중에는 쿠르드족도 축구대표팀을 꾸려서 피파에 가입 신청할 지도 모른다.
축구 민족주의 열기가 전쟁을 불러일으킨 사례도 있다. 1969년에 있었던 축구 경기 때문에, 당시 긴장 상태였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무장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축구는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이다. 경기 스타일, 리듬, 동작 등에서부터 한 나라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하고, 심지어 수세에 몰렸을 때 그 민족의 성격이 표출되기도 한다. 작은 나라인 코스타리카는 19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 그 투지력으로 8강에 진입하였다. 형편없는 축구 약체였던 볼리비아는 1994년 월드컵에 참가하기도 했고, 축구 강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축구경기를 통해 그 나라의 경쟁심, 기율, 적응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90년 이태리 정부는 알바니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막고서 그들을 한 축구장에다 억류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유럽연합의 구성원이 그 구성원과 비구성원을 차별한 것이다. 넘어져버렸던 ‘철의 장막’이, 합법적 신분이 없는 이슬람교 이민자들을 막아서는 ‘유럽의 성채’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는 국립 축구장이 내전 기간에, 심지어 내전 발발 전에도 정치적 경쟁자를 암살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하여 전국의 관중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이 암살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칠레 독재자였던 피노체트는 부하를 시켜 축구장에서 가수 빅토르 하라를 살해하는등 칠레 국립 경기장들은 피노체트 정권이 정치범을 죽이던 곳으로 쓰였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동안, 멕시코는 콜롬비아 정부가 월드컵 유치 계획을 포기하자, 대신 나서서 1986년에 월드컵 경기를 개최하였다. 비록 경제 위기가 발생하여 빚이 산더미같이 늘어났고, 또 1985년에 대지진이 발생했지만 예정대로 치러진 멕시코 월드컵은, 생활수준 하락으로 인한 불평불만을 해소시켰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이 집권할 때 치러진 1978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전에서 6대0이라는 스코어로 페루를 이긴 다음, 이러한 전승의 기세로 브라질을 탈락시키고, 네델란드와 결승에서 맞붙어 이겼다. 아르헨티나의 이 승리는 군부정권이 그 합법성을 포장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1934년에 이미 이태리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태리 축구협회 회장이었던 바카로 장군은 무솔리니의 명령을 받았다. “장군, 이태리가 반드시 월드컵을 차지해야겠소”
그 전에 바카로는 이미 “경기의 목적은 파시스트운동이 가치롭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오.” 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결국 이태리가 2대1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이김으로써, 무솔리니 정권은 그 합법성을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축구의 이러한 사회적 작용에 대한 관점 외에, 이 스포츠 경기가 일찍이 폭력의 촉진제 역할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훌리건들은 축구 경기에서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라, 폭력을 통해서 주인공으로 바뀐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부들이 유달리 축구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축구란 게 암세포가 전이되는 현상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에쿠아도르의 전 대통령 압달라 부카람이 하야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국가대표팀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1996년 만델라는, 남아공이 아프리카컵 대회에서 튀니스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자, 국립경기장에서 경축대회를 열었다. 남아공은 다민족 국가이다.
같은 해, 영국에서 개최한 '유러피언 컵' 기간에, 프랑스 극우정당인 ‘프랑스국민전선’의 당수 장-마리 르펜은, 많은 프랑스 국가 대표들이 원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진짜 프랑스 사람들’ 처럼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즈’를 부를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만약, 여러 미디어와 AC밀란 같은 축구 구단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인맥이 그리 넓지 않았다면, 베를루스코니는 아마 이태리 총리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1996년 나이지리아 축구대표팀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이 나라의 군사정권은 공휴일을 따로 지정하였고, 자메이카 국가대표팀이 프랑스 월드컵에 진출하자, 이 나라 총리 패터슨 역시 공휴일을 하나 만들었다. 정치가들이 스포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실리를 취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1974년 브라질 사람 아벨란제가 맡기 전까지 피파는 줄곧 유럽 사람들이 그 회장을 차지했다. 첫번째 회장은 프랑스 사람, 그 다음은 영국사람, 세번째는 프랑스 사람(1918년부터 1954년까지)이 맡았고, 네번째는 벨기에 사람, 다섯번째는 영국 사람, 여섯번째도 영국사람(1961년부터 1974년까지)이었다.
그런데, 축구를 세계화시킨 주역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아벨란제가 1998년에 물러나고, 다시 유럽 사람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즉 스위스 사람 블레터가 피파에서의 유럽 사람의 패권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블레터는 아벨란제의 심복인지라, “사람은 떠났지만 그 마시던 차는 아직 식지 않은 꼴이다”.
1994년 월드컵은 축구 인기가 별로 없던 미국에서 열렸지만 거대 다국적기업들은 월드컵에 협찬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거라고 여겼고, 한 세기가 바뀔 즈음의 올림픽은 아테네에서 열려야 했지만 코카콜라를 가진 미국의 애틀랜타가 그 개최권을 따내었다.
아젤란제가 비판 받은 이유는, 그가 축구를 다국적기업의 영리 행로와 맞물리게 하면서도, 선수들의 노예계약 같은 ‘인간적인’ 문제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처럼 월드컵 역시 겉으로는 유럽이 우세를 차지해 온 스포츠 행사이다. 피파 역시 그렇다.
피파는 1904년 파리에서 창립되었는데, 그 때 참가국들이 모두 유럽 국가들이었으며, 이제 세월이 흘러, 현재 208개 가맹 단체를 거느린 조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유럽국가의 우세는 여전하다. 피파 산하에 있는 유럽 각국의 축협은 53개로서 가장 많다. 지금까지 열 여덟 번의 월드컵대회가 열렸는데, 열 차례나 유럽에서 열렸다. 그 밖에, 한 차례는 아시아에서, 일곱 차례는 미국을 비롯한 미주에서 열렸다. 그 동안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는 완전히 월드컵 개최문제에서 소외되었다. 이번 19회 대회가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열리기 전까지는.
첫번째 월드컵은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첫번째로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 중계를 했던 월드컵은 1958년에 열린 스웨덴 월드컵이다. 이 때로부터 피파와 월드컵이 텔레비전 미디어 중계권을 매개로 삼아 전략적 관계에 들어섰다.
피파의 마크에는 “축구의 이익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축구로 인하여, 피파가 월드컵을 만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피파 고위 인사들은, 줄곧 조직의 재정은 건전할 뿐더러, 월드컵은 입장료, 중계료, 공식후원사, 특허권료만으로 충분한 수익을 얻는다고 말해왔다. 또 수익은 모두 참가팀에게 환원되고, 피파는 그 관리비용과 미래 4년의 주요활동자금만 비축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도대체 피파가 더욱 관심갖는 것은 축구경기인가, 아니면 게임 수익인가 하는 점이다. 단지 중계료 하나만으로도 이 조직에 거액의 수익을 가져올 수 있기에 그렇다. 피파는 도대체 ‘관리 자금’이 얼마나 필요할까? 아마 피파 안에서도 그 랭킹 담당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피파는 매달 남자축구 국가대표팀의 랭킹 20위를 발표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평가 방법은 베일에 싸여 있다. 약체라 해도 다국적기업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국가라면 랭킹에 오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게임의 룰이다. 지금 각 민족이나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있음에도, 축구와 다국적기업의 이익이 이렇게 밀접하게 결부된 적이 예전에 없었다. 세계화와 상호의존이 점점 심화되는 상황에서, 어떤 정부는 지금, 다시 정체성을 확립할 메커니즘을 국가’대표팀을 활용하여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마추어 축구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영원히 사라질 듯 하다. 미래의 상황 역시 그럴 것이다.
다국적기업이 명령하고, 국가와 정부가 받들어 모시고, 피파는 그들 사이의 중개인이 될 것이다.
마리아 크리스띠나 로사스(멕시코 월간지 <세계화> 2010년 5월호)
맹강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