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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마5:13-16, 벧전 2:11-12)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 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 겨지지 못할 것이요(14),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 어하라(11),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 방하는 자들로 하여 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I. 들어가면서 예장 통합(총회장 박위근 목사)의 제96회기 총회주제를 “그리스도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라고 정하였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교회가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 할을 감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주제이다. 그리고 마땅히 우리 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각성케하는 주제이고,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 회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이다. 그런데 좀 진지한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귀 기 울여 들어보면 참으로 가관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현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부 교회 의 부정한 모습들, 일부 목회자들의 추태들, 교회 당회원들 간의 화목치 못한 모습으로 인한 교회의 갈등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문제들 등, 수많은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세상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교회를 향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점차 높여 나 가게 하는 것을 목격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현실 속에서 총회 주제를 통하여 우리를 점검하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신 앙생활에 임하여야 할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우리 내면을 반성하며 새롭게 추스르는 것은 참 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 총회 주제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조명하여 보고, 역사적 으로 교회가 부패하여 갈 때에 어떤 일을 당하였는지 연구하여 보자. 그리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어떠한 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하여도 살피어 보자. II. 본문 이해하기1) 1. 소금 (1)“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 'A는 B이다'라는 은유법적 문장이다. 즉 '제자는 소금이다'라고 표현하여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즉 성도는 소금 같은 존재이며 또 그런 존 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기법의 문장인 것이다. 소금의 일반적 기능으로는 첫째로, 음식물을 맛나게 하는 조미료의 역할이 있다. 음식물에 간을 내어 맛깔나게 하는 것은 소금이다. 소금이 없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 통, 눈물, 한숨 등이 가득차고 활력 없는 이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기쁨, 소망,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문화,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예 수 그리스도를 넣어주어 맛깔 나는 사회를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소금은 음식물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방부제 역할이 있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지 금까지 소금을 방부제로 사용하여 왔다. 부패할 음식물 등의 내용물들에 소금으로 채워주면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다. 소금은 저장고에만 있을 때에 그 의미가 없다. 소금은 음식물 속에 뿌려져서 스며들어가야 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능은 부패하기 쉽고, 썩기 쉬 운 이 세상에 소금과 같이 뿌려져서 썩기 쉬운 것을 썩지 않게 하여야 한다. 우리의 구체 적 상황과 삶의 터에 뿌려져서 세상을 싱싱하게 만들어야 한다. 셋째로, 소금은 소독제 역할을 한다. 다음의 성경을 보자.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 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 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 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왕하 2:21-22). 이는 소금이 해독과 소독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가득찬 죄악들, 부정적인 마음들, 파괴 적인 요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 해독하고 정결하게 만들어야 한다. 넷째로, 소금은 언약의 표시의 기능이 있다. 고대 종교 세계에서 소금이란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다음의 성경을 보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여기에서 소금언약이란 언약을 맺을 때 식사와 더불어 음식물에 소금을 친데서 유래된 것으로 소금은 부패하지 않고 변하지 않기에 영원불변의 언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소금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 영원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언약의 사람들로 온전히 살아야 한다. 신실하고, 신뢰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분리되어서는 않된다. 다섯째로, 소금은 자기희생의 상징을 지니고 있다. 소금은 음식물 등에 뿌려지면서 소리 없이 녹기 시작한다. 녹아져서 스며들어야 맛도 내고, 해독도 할 수 있다. 녹아져서 음식물 에 골고루 번져야 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 속에서 소리없이 스며들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뜻을 골고루 전할 수 있어야 한다. (2)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하) 고대 팔레스틴에서 사용하였던 소금의 대부분은 암염(巖鹽)이었다. 즉 바위 소금이었다. 그런데 이 암염은 상당량이 흙이나 불순물에 섞여 있어서 생활에서 이를 사용하려면 암염을 정제하여 진짜 소금 외의 나머지 불순물은 모두 버리게 되는데 “맛을 잃은 소금”이란 바로 버려지는 찌꺼기를 가리킨다. 이렇게 쓰레기로서 버려지는 소금의 특징은 첫째, 짠맛이 없 다. 그도 그럴 것이 진정한 짠맛을 가진 소금은 이미 정제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버려지 는 소금은 토양을 망치는 성분을 갖고 있어서 경작지에 버려지지 않았다. 밭에 버리면 밭을 망가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래서 찌꺼기 소금은 길에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 고가며 쓰레기 소금을 발에 밟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복음의 능력과 도덕적 성질을 상실
하고, 타락한다면 그들은 가증스러워져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들의 발에 밟히듯 멸시와 조롱거리가 된다는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2. 빛 (1)너희는 세상의 빛(14)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 또한 제자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의 말씀이다. 소 금이 '죄의 부패성'과 대조되어 제시된 것이라면 빛은 '암흑과 무지로 인한 죄'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 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히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의 빛'으로 비유한 적이 있는데(요 8 : 12), 예수께서 본질적으로 '빛'이 었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세상에서 그 빛의 '반사체'로서의 빛의 역 할을 해야만 한다. 또한 이 빛은 어두운 밤에 항로를 밝히는 등대와 같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진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 곧 복음을 나타내 보여주며 옳고 그름의 모범을 실생활을 통하여 보여 주어야만 한다. (2)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14하) 고대의 팔레스틴에서의 마을과 동네는 대부분 산 위나 산비탈에 있었는데 대부분 흰 석회 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 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 지지 않았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하였으며 동 네는 쉽게 노출되었다. 결과적으로 여기 산위의 "동네"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로서의 교회를 가리키는 비유인 것이다. (사2:2;갈4:26;히12:22) 교회는 산 위의 동네와 같기에 사람들이 쳐다보게 된다. 교회에는 작은 과실이 있어도 사람마다 그것을 보 고 비방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빛을 흐리지 않도록 힘써야 된다. (3) 등불(15) '말'은 가정용 계량 기구를 말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룻'이라고 번역하였다(눅8:16). 그 러므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이 없다'(공동번역)고 번 역하였는데 이것은 '등불을 감추기 위해서 켠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음을 뜻하고 있다. '등경'은 촛불이나 등불을 얹어놓는 '대'(臺)를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팔레스틴 지방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한 방에서 거처하고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모든 집안 식구들이 한방에 모이게 될 때 방안의 불빛은 모두를 다 비취게됨을 설명함으로써 복 음을 받아들인 성도의 생활이 모범이 됨을 보여 준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등과 등경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이 자신의 신분과 복음을 공개적 으로 증거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제자가 밖으로 드 러나는 일상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야 한다(16 절).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이는 궁극적으로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착한 행실'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 한다.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다(고후4:6; 벧젠2:12).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 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하고 있다. III. 중세교회로부터 배우는 교훈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과연 우리들의 교회는 어떠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자신있게 응답 할 수도 있고, 자신이 없는 부끄러운 부분도 있 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중세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발 견하여 보자. 중세로 접어들면서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는 입장이라면, 이제 교회는 사회의 중심이 되었 다. 누가 보아도 온 세상은 하나님의 교회로 가득찼고,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적어도 명목 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래서 워커(Walker)같은 교회사가는 중세의 특징을 ‘교회의 대 중성(Popularity)’이라고 언급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엄청난 부흥 이면 속에서 교회는 서서히 부패하여 갔다. 이종성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의 부패에 대하여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는데 강력한 지배권을 가 지게 된 교회가 독재와 독선과 부패에 빠지게 되었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시민들을 심판하 는 자리에 앉게 되어 독재와 독선에 빠지게 되었고, 수도승들은 수도원의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여러 가지 타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3) 이러한 지적은 오늘 우리에 게 많은 교훈을 주게 된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우리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중세 교회의 부 패된 모습을 좀 더 이야기하여 보자. 중세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이야기 할 때에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은 바로 교황제도와 더불어 나타난 일들이다. 중세 교회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교황제도이다. 그러나 H.M.Gwatkin은 이러한 교황제도 하에서 교황의 권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왕국은 더욱 더 세속적인 수단으로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세속적인 왕국이 되어갔다고 비판하고 있 다. 교회는 도덕적, 재정적, 정치적 추문들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성결하게 자신을 지키는 사 제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제들은 정부를 거느리게 되어 스캔들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 다.4) 교황제와 관련하여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황제도 하에 그 권한이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은 이노센트(Innocent) III세 때였다. 당시 교황들은 영적으로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최고의 권세를 지니게 되었으며, 세상의 권력에서 도 최고의 힘을 지니게 되어 영적, 세속적인 면 양쪽 모두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 었다. 특히 교황은 과오가 없는 무오한 자로서의 여겨지고 권위를 지니게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고 판단하나 세상의 그 어떤 이도 그를 비판할 수 없었는데 제왕과 제후들은 교황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입맞추며 신하로서의 복종을 서약까지 하였다.5)
그러나 이영헌에 의하면 이노센트 III세 이 후에는 교황권은 서서히 쇠약의 길을 걷게 되 었으며 영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무력함과 타락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 보 니파티우스(Bonifatius)VIII는 1296년에 세상의 군주들이 교회 재산에 과세하는 것을 금지하 도록하는 “성직과 평신도”(Clericis Laicos)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효력을 보지 못하였고, 1302년에는 교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를 선포하여 “교회는 하나이며 한 목자가 먹 여야 하며 그의 손에는 영적 칼과 현세적 칼이 있으며 영적 칼은 신부가 쥐고 있고 현세적 칼은 성직으로부터 위임받아 군왕들과 병사들이 교회를 위하여 잡아야 하며 속권은 교권에 복종해야 하며 교황은 하나님 외에 판단할 자 없으며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이라 주장했으나 프랑크 왕 필립(Philip)II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방명되었으 나 분사하고 말았다. 이 후에 교황은 필립II에게 굴하여 교서 ‘unam sanctam’을 수정하였으 며 동시에 교황청을 아비뇽(Avignon, 1309-1377)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성직자들은 말할 수 없이 타락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어린 양떼를 부지런히 먹 어여 함에도 불구하고 교구는 돌아보지도 않고 탐욕과 치부만 일삼게 되면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은 도덕적으로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1377년 교황청은 다시 로마에 돌 아오기는 했지만 교황선출 과정에서 분열되어 일부는 다시 아비툥으로 돌아가 1328에서 1415년까지 분열 상태로 있으면서6) 헌금과 부과금을 이중으로 강요하여 교회와 교인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었고, 어느 쪽 교황이 진정한 교황이고, 어느 쪽이 구원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교인들에게 주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권은 영적, 도덕적, 정치적 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으며 마침내 르네쌍스 와 종교개혁을 초래하고 말았다.7) 둘째로, 이러한 중세 교황청의 쇠락과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들이 있었는데 교회의 부에 대한 축적이었다. H.M.Gwatkin은 당시 교회는 끊임없이 재산을 획득하면서 대다수의 국가 에서는 교회가 국부(國富)의 과반을 확보했고, 그 결과 수사들은 지주가 되어갔다고 지적하 고 있다.8) 스웨덴에서는 교회가 전체 토지의 3분의2정도 차지했고, 영국에서는 부의 축적이 영구양도법(1279년)에 의해 억제되었는데도 교회가 전체 토지의 1/3 ~ 2/5를 차지했다. 그 러나 이 막대한 부는 아주 불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소수의 특혜받는 겸직자들은 어떤 경우 에는 한 사람이 교회의 고위직분을 열 개정도는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직책에 허술하게 임하거나 값싼 고용인을 두어 그럭저럭 해치우는 한편 자기 시간은 교황이나 왕의 시중을 드는 일로, 또는 수익이 좋은 새로운 직분을 얻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일로 보냈다. 그럼에 도 불고하고 아주 많은 사제들이 가난했는데, 비록 그들이 가난하여서 기부금을 받았다할지 라도 수사들에 의해 착복되는 것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9) 셋째로, 수도원에 대한 문제였다. H.M.Gwatkin은 중세후기의 수도원들도 일부는 부유했 고 일부는 아주 가난했으며 많은 수도원들이 빚에 시달렸다고 한다. 대다수의 수도원이 교 황청의 가혹한 세금 징수로 빈궁해졌다. 다시 말하면 수도원들 사이에 빈부 격차가 심각하 게 나타나게 된 것이어서 서로 간에 반목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빈부 격차 의 과정 속에서 수도원들은 그 효용을 점차 상실하고 있었다. 학문은 수도원보다 대학에서 더 좋은 질의 것을 제공하여 주었다. 부자 수도원의 수사들은 이미 노동을 하지 않고 지주 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각한 죄악은 대수도원장 이상의 사람들의 것이었는데, 지주급 이상의 수사와 대수도원장은 점차 세속화 되어 사악한 생활, 횡령, 살인, 폭행등을 종종 저질렀다고 한다.10) 넷째로, 탁발 수도사들의 죄악도 심각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초창기는 훌륭했지만 한 세 기도 지나지 않아 이야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들은 수도회의 재산을 교황에게 투자함으로 단체적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교황 요안네스 22세는 예수와 12사도 또한 재산을 소유하였다고 하면서 탁발수도승들의 재산 축적에 대한 이론적 터전을 마련해 주어 서 검은 거래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11) 다섯째로, 중세 후기에는 싸움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주교들과 참사회들은 서로 논쟁과 법정투쟁을 수년씩 계속 벌였다고 한다. 재속신부들과 수도 성직자들은 항상 반목했고 탁발 수도사들은 그 양측 모두에게 골칫거리였다. 가장 역겨운 싸움은 부자의 죽음의 자리를 둘 러싼 싸움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제의(祭衣)가 진짜 천국 입장권이라고 주장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기네의 제의를 입히려고 다투었다고 한다.12) 이렇듯 중세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되어져 갔 고 권력투쟁, 부의 축적, 각종 죄악에 물든 생활, 검은 거래, 이권에 얽힌 싸움으로 인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민심으로부터 멀어져 손가락질을 당 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IV.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길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하며 우리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평가는 과연 어떠할까? 혹 중세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 까? 만약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소금과 빛으로 다가가지 못해 그들의 마음 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저자 본인이 하기 보다는 독자 들의 의견에 맡겨 보도록 한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들이 가야할 긍정적 비젼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최근 동아일보에서는 다른 신문과 달리 매주 한 교회를 선정하여 칭찬하고 이 시대의 교 회들이 걸어가야 할 모델로 제시하여 주고 있다. 2011년 7월 22일부터 “다시 빛과 소금으 로”라는 제목으로 일주일에 한 교회씩 모범적 교회를 선정하여 기사화하였다. 이는 그 교회 의 착한 행실을 소개함으로 이 기사를 읽는 모든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소금과 빛”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우리 교단 교회의 주제와 일맥상 통하는 제목이기에 신문에 게재된 몇 교회의 특징을 이 자리에 소개하도록 한다.13) 첫 번째 교회는 전주에 있는 A14)교회이다. 이 교회의 특징으로는 비움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요로운 사회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비우는 모습인 깡통교회를 보며 교회의 모습이란 이웃을 위하여 나누되 자신의 것을 챙기는 데에는 인색한 모습이 깡통이요 자신의 비움이라 고 이야기하고 있다.15) 즉 교회는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된 교회는 청주 J교회이다. 이 교회의 특징은 ‘사랑의 나눔 마켓’을 운영함이다. 165m²(약 50평) 남짓한 공간에 쌀과 라면, 통조림, 세제, 화장지 등 60여 종의 생활 필수품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매년 1억 원어치의 ‘사랑나눔 상품권’을 발행한 뒤 매달 신자들에게 1인당 5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지급한다. 이 상품권들은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신자와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아 가족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사회안전망에 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달된다. 마켓은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며 매주 화∼목요일 열린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교회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교회의 주변이나 소외된 계층과 소통을 한 다는 점이다.16) 세 번째 교회는 서울에 있는 J교회이다 으뜸다리라는 의미로 신자들 사이에선 ‘다리교회’ 로 불린다. 1900년에 개척돼 지난해 110년을 맞은 유서 깊은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국사회에 전파해왔다. 특히 선교와 사회봉사를 통해 싱글맘과 다문화가정을 우리 사회에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소외된 계층을 사회에 잘 연결하도록 하는 특징을 지닌 교회이다.17)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소외 계층을 다리 놓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네 번째 교회는 광양에 있는 D교회이다. 기자의 말에 의하면 이 교회는 종합복지센터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아로마센터, 아가페센터, 아름다운 가게, 아로마요양원, 아쿠아 카페, 엄 마랑 아기 학교, 어린이집, 소극장, 교육원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교회의 큰 울타리도 없다. 그래서 이 교회는 아쿠아(물) 아로마(향기) 아가페(사랑)을 교회의 상징으로 하면서 사 회복지형의 교회 형태를 이 사회에 제시하여 주고 있다고 한다.18) 교회는 지역 사회 사람들 에게 영적으로 만족게 하며,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여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교회는 고양에 있는 E교회이다. 이 교회는 1981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의 료선교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기독교인 의사 28명이 ‘의료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을 실천하자’는 취지로 교회를 세우고 방글라데시로 의료선교 봉사단을 파송했다가 지금까 지 계속되고 있다. 1997년 경기 고양시로 옮겨와 매월 셋째 주 일요일에 내과, 치과, 정형외 과, 통증외과, 정신과, 피부과와 한방 등 다양한 분야의 진료를 무료로 실시하고 있다. 하루 평균 150명의 사람이 진료를 받고 약도 타 간다. 주민들은 의선교회의 의료봉사팀을 ‘종합 병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선교회라는 의미는 의료선교의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 다. 의(義)롭고 선(善)한 교회로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다.’19) 교회는 그 시대에서 의로움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여섯째 교회는 대전 S교회이다. 이 교회는 1991년 10월 대전 어느 동네 비닐하우스에서 어른 11명이 모여 교회 설립 예배를 올렸다. 이 교회는 노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교회 의 목표였다. 다시 말하면 효자교회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교회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 지만 2002년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송천실버대학을 개설했다. 그리고 현재 교회의 관 심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실버대학에조차 나오지 못하는 노인계층으로 확 대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마다 80여 가구에 도시락 서비스와 목욕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한 새롭게 건축되는 선교센타도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고 한다.20) 일곱 번째 교회는 대구 B교회이다. 이 교회는 이러한 오랜 역사와 함께 체계적인 사회봉 사 시스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활동과 다양한 문화강좌로 지역 주 민과 소외계층, 타 종교인들에게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호스피스 봉사팀 외에도 장애인 목욕, 지체장애인 소풍, 소년소녀가장 홀몸노인 저소득층 도시락 배달, 노숙인 식사 봉사 등 다양한 일을 맡은 봉사팀이 꾸려져 있다. 모두 10년 가깝게 유지되고 있다 고 한다.21) 여덟 번째는 서울 은평동에 있는 E교회이다. 4000여 명이 출석하는 이 교회는 지역사회와 의 결합과 장애인, 노인, 청소년 사역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장애인들을 위한 적절한 교육 과 활동이 어렵고, 이들을 돌보는 가족 역시 힘겨워했지만, 교회는 꾸준히 장애인 프로그램 을 늘려왔다. 매주 토요일 장애인 1인당 한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교사 역할을 하며 놀이와 야외학습을 진행하고 있는데, 초기 3명이던 장애인 참석자는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서로 어울리고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22) 교회 는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아홉 번째는 당진에 있는 D교회이다. 이 교회는 ‘바르게 살라’는 충고보다는 ‘네 아픔을 이해한다’는 위로를 우선으로 하며, 신자들이 찾아오는 교회, 젊은 교회로 자리 잡아가고 있 다. 그리고 급격한 사회 변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 지역의 청소년을 위한 교육과 선 교에 주력한다. 보육센타, 무료학원등을 개설하여 아이들에겐 천국과 같은 교회라고 한다. 그 결과 15년이 지난 요즘에는 이 산속 시골 교회 예배에는 당진뿐 아니라 서울과 천안 등 에서 4000여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신자의 평균나이는 37세! 그리고 이 교회가 처음인 초 신자의 비율이 78%에 이른다. 교회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았지만 저절로 사람들이 찾아 오는 교회로 자리 잡은 것이다.23) 교회는 그 지역 사람들을 위로하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 다. 이상 언급한 교회 속에는 우리 통합측 교단 교회도 있고, 우리 교단이 아닌 교회도 다수 포함되어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소금과 빛으로 우리의 모습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 중요하 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 자세로 선행행실을 하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V. 소금과 빛의 삶을 위한 교육원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하여 WCC가 제안하고 있는 해석학을 수용하고자 한다. 특별히 WCC 해석학을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2013년 우리나라 부산에서 WCC 10차 총회가 개최 되며, 지금 한국 교회는 이를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있기에 WCC의 정신이 깃들여 있는 해석학을 소금과 빛의 교육적 원리로 채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WCC는 2001년에 『Interpreting Together』라는 책을 편찬하여 내어놓았는데 바로 이 책에 WCC가 지향하는 해석학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구체적으로는 section 6에서 이 해석학에 대한 세부적 설명이 깃들여 있는데 아래와 같다: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의 통합적 일치를 명백히 함을 추구하는 그러한 해석은 응집의 해석학(hermeneutics of coherence)라고 불리어 왔다. ... 이는 해석자가 해석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해석학적 과제의 비판적 실험적 부분은 의심의 해 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이라고 또한 불리어 왔다. 계속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책임적 에큐메니칼 해석학은 진리를 위해 봉사하되 의심(suspicion)에 의 해 경종을 울리고, 또 항상 응집(coherence)을 목표로 한다.24) 한마디로, 이 문건에는 2종류의 중요한 해석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응집 (coherence)의 해석학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본문에 구심성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 한다. 우리 장로교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 칭의와 구원의 확신을 기반 으로 하여, 우리와 다른 이들과 일치감을 갖게 하며, 전통이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게 하는 원리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면 하나님의 커다란 역사로 말미암아 엄청난 부흥을 맞이하여 교회 마다 교우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교회가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 어 하나 됨의 의식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으며 지나친 경쟁의식과 개인주의적 행동으로 인하여 비록 교회가 그리스도의 착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간에 수용하고,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며,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 됨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선한 행실을 취 함으로 인하여 소금과 빛으로 나타나기를 위해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이끌어 줄 수 있어 야 할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로는, 의심(suspicion)의 해석학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잘못되고 왜 곡된 해석들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의심의 해석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여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을 냉철히 반 성하고, 스스로를 비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도와주어야 할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 들을 제대로 도와주고 있는지? 우리가 우리끼리만 먹고 마시는데 시간과 물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교와 전도의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소란함과 소음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은 잘하는데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정죄하는데 너무 급히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그 외에 이러한 질문의 종류들에 대하여 성실 하게 응답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의 해석학과 응집의 해석학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써클(circle)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의심-응집-의심-응집’의 순환론적 해석학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