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망명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들렀다가 중국안둥을 거쳐 칭다오에 도착했다.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라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1년간 머무르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다.
언론 활동
1914년에는 윤세봉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서간도 일대의 고구려 고적을 답사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임시정부 참여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며 그를 반대하였고, 8월에 시작한 6회 의정원회의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이어서 그는 《신대한》이라는 주간신문을 창하여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 노선의 전투성의 미흡,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 등이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정면 반박하였고, 조선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부음과 함께 조선인 살상과 경제침탈을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신채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신대한》이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가서 제2회 보합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결혼하였다. 박자혜와는 3년간 함께 생활하였는데 1922년에 생활고 때문에 아들 신수범과 함께 귀국시켜야만 했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고 김정묵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2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무역회사인 동제사(同濟社)에도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후원하였다.
임정 탈퇴와 무장독립 운동 가담
5월 10일 이회영, 박용만과 함께 10여 개 무장항쟁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열고, 만주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전쟁을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할 '통일사령부'를 임시정부정 군무부 산하에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이승만과 격렬히 싸우고 법정투쟁까지 벌인 하와이 대표단의 박용만은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이 실질적인 독립운동 대표들인 무장항쟁단체 앞에서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던 박용만에 의하여 폭로되자 대표단 전원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게 되어, 이승만이 사퇴하지 않은 상해 임시정부 자체를 만장일치로 불신임하였다. 임시정부 당국에게 군사통일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및 의정원을 불신임하고 무효를 선언하고 이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결정했다.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는 신채호를 주간으로 하여 《대동》(大同)이란 주간지를 발행했다.
안창호와 김규식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안을 받아들였으며,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안이 4월에 가결되었는데,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고 가족을 떠나보낸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주동자로서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반일활동 금지에 따라 활동이 중지되었고,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과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불인정하자 공산주의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1924년 3월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서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25년까지 6개월간 유마경, 능엄경을 연구하였고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