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나는 민족사를 연상하는 세대도 이제는 많지 않다.지금은 젊은 남녀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 지리산...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 피로 얼룩졌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50여년전에 겪었던 일들로 이제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 할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며 죽어갔다. 어떠한 어휘로도 설명될수 없는 비참 속에서.....
여기에 씌여진 글들은 두레 문화사에서 출판한 [남부군]에서 발췌한 글들입니다.
빨치산 소대장 소리 없는 함성이 일어났다.30인분은 물론 인원을 속이기 위한 수작이다. 두 대원을 보내놓고 나는 심한 불안감에 싸였다. 어떤 돌발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요행이 그 자리에서는 노출되지 않는다 해도 부락민중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 청웅의 군경부대에 신고하는 날이면 끝장이다.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중에 무슨 일로 은밀 행동 중 마을에 대원을 보내 밥을 시켜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에누리 없는 총살감이었다. 나는 야무지지 못한 내 천성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애당초 내가 제대로 된 빨치산 지휘자라면 부하들이 언감생심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겐 어딘가 허술한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그렇다면 나는 빨치산으로서 분명 실격자다. 실격자라면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여기서 내게 변명하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 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제2차대전 후의 사회불안은 패전국인 일본에 사회당 정부를 탄생시켰고, 전승국인 영국에서조차 노동당 정권을 만들어냈다. 폐허 위에 서서 사람들은 생활이 고통과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어떤 구원을 바랐고,그 희망을 좌파 정권에 걸어본 시대가 있었다. 한국의 전후도 가혹했고 부조리도 엄청났다. 지금 돌이켜 보면 믿기 지 않는 얘기지만 북은 사과고,남은 수박이라는 비유까지 있었다.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은 겉만 빨갈 뿐 속은 새하얗고, 반대로 미군정하의 남한은 겉과는 달리 속은 빨갛다는 뜻이다. 남이고 북이고 많은 민중들은 현실불만에 충만해 있었고 자기를 지배하는 정권을 긍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남한의 많은 시민들이 좌경했고 ‘남조선노동당’ 이라는 좌파정당은 그들의 희망이었다. 서울역에 내려 선 무작정 상경객들 중 많은 사람은 남대문 옆 일화빌딩에 걸려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남조선노동당’의 간판을 쳐다보며 어떤 광명 같은 것을 느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하고도 모순된 얘기는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폐쇄적인 공산주의사회를 회구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좌익 동조자는 공산당이 무엇인지 정확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토지개혁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해도 실상 그게 큰 이슈는 못됐다. 좌익정당이 불법화되기 이전에는 북한의 출판물도 서울거리에서 구독할 수 있었다. 번역물도,국내 작가의 저서도 나왔지만 그냥 호기심 이상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당시 농촌실정을 잘 몰랐지만 토지개혁법이 곧 시행된다는 소문이 항상 떠돌았을 뿐 아니라 농촌의 인심이 대대로 이웃간에 살며 알고 지내온 남의 전답을 거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겨서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좌파의 구호가 크게 먹히지도 않았던 것으로 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같은 것은 물론 있었겠고 ‘악질 지주’라 할만한 예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당시 남한에 그렇게 엄청난 좌경세력을 만들어 낸 쟁점이 됐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공산’이라는 용어를 글자 그대로 ‘똑 같이 나눠 갖는 세상’으로 오인하고 은근히 동경하던 빈농의 도시빈민이 차라리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감정이 풍부한 청년들 중에는 어딘지 고리타분하면서 무능력하고 탐욕적으로 보이는 보수세력에 비해 진보세력의 일견 신선하고 조직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처음으로 보는 좌파의 순 한글 간판, 귀에 설은 용어, 도장 대신 사인을 상용하는 일, 남녀간의 예사로운 악수 같은 것도 당시는 무척 신선한 인상을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현저한 동인(動因)은 농지문제에서 그랬듯이 이론이나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었고 ‘한’이었다고 생각한다. 빈곤에 대한 ‘한’ 그 때문에 받아야 했던 괄시,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반발,특히 일부 우익 청년단체와 우익계 사회단체의 초 법적인 횡포에 대한 분노가 반사적으로 좌익 동정자를 만들었고 그에 대한 탄압이 다시 좌익 동조자로 에스컬레이터 시키는 예는 결코 드물지 않았다. 어떤 지방에서는 경찰서가 셋이 있다고 했다. 본래의 경찰서와, S청년단과 심지어 소방서에서까지 함부로 호출장을 보내고 불응하면 몽둥이 찜질이 다반사였다. 그런 경찰서가 서 댓씩이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반 이승만 노선은 곧 빨갱이라는 등식이 공공연히 횡행했으며 때리는 쪽이 ‘애국자’였다. 한 대 맞고 나온 젊은이는 좌로 기울었고 두 번 당한 청년은 진짜 빨갱이가 됐다. 한편 주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통일문제에 대한 시각차이도 분명히 큰 동인이 되었다. 근로인민당 당수인 여운형이 저격되어 쓰러질 때 남긴 말이 “공위는 어떻게…”라는 것이었다고 알려졌었다.당시는 공위(미소 공동위원회)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많은 시민들이 미소간의 합의 없이는 남북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성사를 고대하고 있었다. 미소 양국의 합의에 맡겨지는 민족의 운명, 그나마 그 공동위가 깨졌을 때 닥쳐올 앞으로의 민족의 운명, 그건 바로 영구분단 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미소 공동위를 저해하는 세력은 분단을 촉구하는 세력이라는 등식이 어떤 층의 청년들 머리 속에 박혀 있었다. 다시 말해서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은 현실 변혁을 바라지 않는,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모당의 친일 모리배 군상, 그리고 그 세력을 타고 앉은 이승만 일파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그대로 좌익이 돼버렸다. 그러니까 그 저해세력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하고 물리치는 수단은 폭력일 수도 있다는 급진 과격론자도 나왔던 것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이런저런 동인으로 해서 6.25전 남한 천지에 그 많은 좌익 동조자를 만들어낸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남한의 극우 세력이었고, 그 좌익을 박살낸 것은 우익이 아니라 급진좌파의 모험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컨대 전쟁 전 좌익심파의 거의 대부분은 진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고 정확히 말해서 현실불만에 찬 반 정권 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솔직히 말해서 20대 젊은 나이의 나도 그 반권로선에 경도돼 있었고 그것을 정의라고 믿으며 온갖 정열을 거기에 아낌없이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빨치산 대열에 동참하게 된 이상 나는 훌륭한 혁명 투사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빨치산으로서도 분명 낙제생이며 실격자였다. 따지고 보면 감상에 젖은 소(小) 인텔리라는 것이 정확히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대 가슴에 평화만이 박 민자와 나는 대용 담요조각을 꺼내 덮고 푹신한 가랑잎 위에 나란히 누워 벌써 별이 보이기 시작한 하늘을 쳐다봤다. 내일 병단을 찾아가기로 작정한 후부터 뭔가 서글픈 생각이 솟구쳤다. “민자 동무.이렇게 호젓하게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집 생각나지?” “하지만 전 생각날 집이 없는 걸요.” ”집이 없다니?” “어릴 때 엄마 아빠를 여의었거든요. 작년까지 XX병원 기숙사에 있었는데 단 하나 있는 오빠가 운암댐 공사장 일을 보네 돼서 오빠를 따라와 거기 의무실 일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국군이 후퇴할 때 오빠가 보도연맹(사변 전 좌익 전향자나 혐의자의 선도를 표방하고 만들어졌던 정책기관)원이라 해서 끌려가더니 소식이 없어요. 집단 처단됐단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천상천하에 두 남매뿐이었는데…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군요. 하는 수 없이 대전으로 돌아가 봤더니 그게 인민군 야전병원이 돼 있어서 그대로 간호병이 됐지요. 여름 후퇴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열을 이탈하고 운암으로 돌아가 봤더니 모두 빈집뿐이더군요. 오도가도 못하고 혼자서 며칠 산속을 헤매다가 송동무네 부대를 만난 거죠. 그러니까 전 생각날 집이 없어요.” “그야말로 집 없는 천사로구나.” “오늘은 여기서 자니까 이 가랑잎 위가 제 집이죠 뭐.저 가엽지 않아요? 태동무.” 그녀가 ‘군관동무’나 ‘소대장 동무’ 대신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내가 ‘간호병 동무’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얘기가 한참 오갔다. “태 동문 참 곰상스런 분이세요.” “내가? 왜.” “언젠가 지동에서 양말 빠는 거 제가 보고 있었지요? 그때 요리조리 뒤집어가며 빠는 폼이 하도 꼼꼼해서 우스워 혼났어요.” “아하 그랬던가. 노총각 신세에 빨래가 이력이 나서…” “인재 빨래는 절 줘요. 제가 빨아드리고 싶어요.” 그것은 매우 우회적인 감정의 고백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가 내 양말을 빨아줄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바로 아래 지능선에서 기관포의 사격이 시작됐다. 양철통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탄도가 붉은 포물선을 그리며 미륵정이 능선 위에 가서 닿았다. 회문봉 진지에 있던 도사령부의 자랑거리인 기관포가 동원된 것이다.(중략) 우리는 퍼붓는 함박눈 tr을 말없이 안시내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민자는 길이 좀 험하지만 장군봉 쪽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강가 길은 강 건너에 적정이 있으니까 좀 위험할 것 같은데…” “그래도 강가 길로 갈래요. 무부까진 태동무하고 같이 갈 수 있으니까.” 무부리는 물구리를 마주보는 강 이편 마을이다. 우리는 미륵정이 아래 구림천 협곡을 다시 말없이 걸어 내려갔다. 바로 머리 위 벼랑에는 국군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눈발이 심해서 내려봐도 올려봐도 보이지 않았다. 일중이를 지나면 무부(두무)는 바로 지척이었다. 일중리에서 우리는 큰길가의 어느 빈집에 들어갔다. 눈도 심했지만 마지막 치료도 할 겸 잠깐 쉬어가기로 한 것이다. 민자는 붕대를 끄르고 며칠 새에 거의 아물어든 상처를 정성껏 매만져 주었다. “만일 또 덧나기 시작하면 상처를 그땐 누가 봐드리지…” “그땐 허동무도 있고 또 덧날 일도 없을 테지만 그 보다는 민자한테 빨래를 부탁할 기회는 결국 없군.” 나는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참으며 농담조로 웃어 보였다. 치료를 마친 박 민자는 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얼마를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누이며 한숨을 쉬었다. 눈언저리가 얼룩져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린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전선에 나온 후 얼마나 여러 번 듣던 물음인가. “민자는 어딜 가도 남의 귀염을 받을 거야. 그러니까 어딜 가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전쟁이 끝나도 말이지. 부디 몸조심해야 돼. 우리가 어느 날인가 다시 만나자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민자가 말을 이었다. “저 태동무한테 뭔가 드리고 싶은데…이 조각 담요 드릴까요? 그대신 태동무도 저한테 뭐 하나 줘요.” “담요는 민자도 추울 텐데 그만두고…내가 민자에게 줄 뭐가 있을까?” “물건이 아니래두요. 뭐 하나 적어줘요. 기념으로 갖고 있게.” 나는 배낭에서 종이 쪽지를 찾아내서 마침 머리에 떠오른 바이런의 시, 어느 마지막 구절을 적었다.
그대는 나와 운명을 달리하는 까닭에 아직 내 마음은 불타 오르나 다만 그대 가슴엔 평화만이 있으라 -눈 내리는 날, 섬진강가에서 민자를 보내며…태가.
“자, 인제 가지.” 그러나 나는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한 민자의 검은 머리를 가슴에 안고 한참동안 화석이 되어 있었다. 쪽빛 강물 위에 퍼붓는 함박눈은 더욱 아름다웠다. 강줄기를 따라 아득히 눈 속으로 사라져 들어간 신작로 길을 십 여분 걸어 우리는 무부에 닿았다. 강 건너 내가 가야 할 물구리 마을을 향해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여기서 후방병원이 있는 히여터까지는 아직도 강길 따라 이십 리의 무인지경을 가야 했다. 나는 민자의 칼빈총을 점검해 봤다. 놀이쇠를 당기니 노랗고 예쁘장한 탄환이 머리를 추켜들었다. 이상이 없었다. “됐어. 자 조심하면서 가야 해. 갈 담 쪽으론 적정이 있으니까 앞을 잘 보구. 여차하면 대항을 하지 말고 회문봉 쪽으로 뛰는 거야.” “네” “그럼 안녕, 건강히.” “안녕,몸조리 잘 하세요.허동무한테 약 달래서 자주 바르고요.” 민자는 자꾸만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칼빈총을 맨 그녀의 가냘픈 그림자가 눈발 속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강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남한 빨치산 약사 여러 기록 중 빨치산에 관한 것만큼 애매하고 각양각색인 것도 없다. 상당히 권위 있다는 문헌을 훑어봐도 전후가 모순되고 의심스러운 대목을 여러 곳 지적할 수 있는 형편이다. 빨치산의 내막에 관해 문서화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고, 포로의 심문기록도 매우 부분적이며 사실오인이 많고,사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최고 간부급은 거의가 죽고 없어 증언할 도리가 없으며 당시의 군경측 기록조차 신빙도가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의 좌익게릴라의 효시는 당시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1946년의 소위 10월 사건에서 비롯된다. 46년 9월24일 대구 철도노조가 반미군정(反美軍政) 파업을 시작하자 10월 1~2일에 전평(좌익계 전국 노동자평의회,대한노총과 대립하던 단체) 지도하에 대구시 일원에서 대대적인 지원 데모가 벌어지고, 진압하는 군정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시위측에 100여명, 경찰측에 3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주로 우익청년단원을 임시 임용한 3천여의 무장경찰이 투입돼 소요는 이틀 만에 일단 진압됐으나 그 여파는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역에 번져갔다. 군정 경찰은 시위 가담 시민 3,782명을 체포하고 그 중 322명이 군정 재판에서 사형 이하의 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된 좌익 동조자들이 태백,소백 주변 야산에 숨어들어 이른바 ‘야산대(野山隊)’ 활동을 시작했다.그러나 당초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연고선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며 은신하는 정도의 매우 초보적이고 비조직적인 형태였다. 이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밤중에 제사참례를 하러 집에 다녀가기도 하고 선거 때는 유세장에서 야유도 하고 다녔다 하니 ‘빨치산 투쟁’치고는 매우 낭만적인 편이었으나 가끔은 사회 불만분자들과 결탁해서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산만하고 비조직적인 유격투쟁(?)이 조직적으로 투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48년의 소위 ‘2.7투쟁’ 이후부터였다. 2.7투쟁도 대구의 10월 사건이나 마찬가지로 소요 자체는 우발적인 충돌 사건에서 시작됐다. 당시 남로당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노동법과 사회보장제 실시 등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48년 2월7일을 기해 단행할 것을 지령했다. 이 소위 ‘2.7투쟁’은 전국적으로 수십 건의 충돌사건을 유발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밀양 사건이었다. 당일 경남 밀양읍의 조선모직 종업원 130명(그 중 여자 공원이 90명)이 파업을 시작하면서 가두로 진출하려는 것을 우익 청년단원들이 출동해서 저지하려 하자 쌍방간에 일대 투석전이 벌어졌고 뒤 미쳐 경찰이 출동해서 공원측을 모조리 체포한 데서 사건이 확산돼 버렸다. 이날부터 동월 13일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일대의 각 면의 부락민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서와 우익청년단 사무실을 습격했고, 그로 인해 경찰관과 우익 인사 10여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부락민측도 28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급거 증원된 군정 경찰에 의해 부락민 1만8천 4백78명이 체포되고 그 중 2천2백9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이 ‘2.7투쟁’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은 상당수의 3남지방 청년들이 입산 도주해서 야산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남로당이 일본군에서 군사경험을 가진 청년당원을 조직적으로 야산대에 투입하여 유격활동을 지도하게 하는 동시에 경상,전라 각도를 각 2~3개의 야산대 블록으로 나눠 블록마다 지구사령부를 두는 등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남로당은 ‘인공수립’이라는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폭력적인 정치활동을 위주로 하고 있었고 야산대의 무장 자체도 보잘것없는 형편이어서 야산대는 그 정치활동의 보장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야산대가 조직적인 무장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본격적인 무력투쟁의 단계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다를 격한 제주도에서는 이런 당 중앙의 지향과는 달리 동년 4월 3일의 소위’4.3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부 자체가 입산하여 전술적인 유격투쟁 단계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제주도의 게릴라투쟁은 물거품처럼 끝났지만 그 여파는 실로 막대한 영향을 육지의 유격투쟁에 미치게 하였다. 즉, 제주도사태가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유발하고 이것이 남한 빨치산의 일대 전기를 몰고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수 14연대의 반란사건(반란이 여수,순천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여순사건’ 혹은’14연대 반란사건’, 북에서는 ‘여순병란’이라는 왕조시대 같은 부정적 이미지의 호칭을 쓴다)은 사병 중심의 돌발적인 거사였기 때문에 치밀한 작전계획이 결여돼 있어서 단 5일만에 박멸돼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이 반란사건은 남로당이나 평양당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돌발사태였으며 남로당이 그동안 애써 심어놓은 군부 내의 세포조직을 깡그리 노출시켜 숙군작업으로 뿌리를 뽑히고 마는 결정적 손해를 가져왔다. 반대로 국군으로서는 내부의 이질분자를 완전 색출 제거하고 커다란 위기에서 군을 재건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만일 이 반란사건이 없었던들 6.25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평양당국은 처음부터 이 사건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으며 후일 남로당 숙청 때는 박헌영 등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군부 내의 세포를 노출 시키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라고 뒤집어 씌우기도 했다. 경위야 어찌 됐건 남로당으로서는 이처럼 뿔뿔이 지리산 산악지대로 도피해 들어간 반란군의 잔여세력을 시급히 수습해서 유격대로 전력화 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남로당 간부부장이며 모스크바 유학차 월북중 반 김일성파로 지목되어 다시 서울로 피신해왔던 이현상이 자진해서 지리산에 들어갔다. 그가 이 반란군 잔여 세력을 기간으로 부근의 야산대와, 반란에 동조하다가 도피중인 민간인을 규합해서 조직한 것이 세칭 ‘지리산 유격대’이며 49년 8월부터는 그 공식명칭이 지리산지구 인민유격대 ‘제2병단’이 되어 남한 지역에서 ‘인민유격대’라는 이름 아래 체제를 정비하고 본격적인 유격투쟁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독한 공화국의 영웅 이현상 51년 8월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94호 결정서’를 통해 남한지역의 유격대와 지하당 간부를 양성하는 1,000명 규모의 간부 훈련소를 설치할 것을 밝혓다. 이 결정에 따라 노동당 연락부는 51년 10월 초순 황해도 서흫군 윤리면 오동리 골짜기에 ‘금강정치학원’이라는 것을 만들엇다. 남한 침투와 유격훈련에 적합한 장소로 전선이 가깝고 산골자기가 깊은 이곳을 택한 것이다. 훈련기간은 피교육자의 경력과 지식수준을 참작해서 1개월,3개월,6개월의 3개 반으로 편성했고, 1기 입원생은 약 900명이었는데 장차 4,000명을 목표로 규모를 확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금강학원은 52년 3월 해체되고 학생들은 천마군 탑동리에 신설된 중앙당학교 제 1 분교에 재 수용됐다. 52년 3월5일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에 취해진 조치였다. 이 중앙당 분교에서의 학습은 중앙당에서 파견한 지도원이 남로계 학생들의 ‘사상경향’을 재검토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더 정확히 말해서 박헌영,이승엽 일파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을 검토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동시에 어떤 증거를 들춰내자는 것이었다. 이 중앙당 분교에는 금강학원의 간부들과 1급학생(중앙 간부),2급학생(도당급 간부),3급학생(군당급 간부)들까지 모조리 수용돼 있었으니 말하자면 월북한 남로계 및 남한 출신들이 거의 모두 집결돼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휴전이 체결되고 이승엽 일파에 대한 군사재판이 끝난 53년 8월 중순까지 그곳에 격리 수용된 채 있었다. 간부들의 도주와 학생대의 반발을 막기 위함이었음은 물론이다. 8월 이후 이들은 재 심사를 거쳐 대부분은 노동직장이나 사무직장으로 보내고 일부는 대학으로 진학시켰으며 약 50여명은 대남공작 요원과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송도(개성) 정치경제대학에 입교시켰다. 대체로 전쟁기간중 박헌영과 이승엽이 한 역할은 대남공작, 즉 남한의 유격대와 지하당을 총괄하는 일이었다. 이승엽은 이를 위해 중앙당 연락부를 거점으로 여러 루트를 통해 남한 출신 청년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를 대대적으로 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병력들은 김일성보다는 박헌영,이승엽에 충성하고 그의 명령에 움직이는 남로당계 군가력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승엽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에 와서는 이 역시 영구미제의 수수께끼이지만 그것이 김일성을 위한 무력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당시 이승엽은 서울에서의 후퇴를 질서있게 조직했다해서 김일성으로부터 ‘발군의 조직 공훈자’로 격찬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늘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결코 어수룩하지 않았다. 전선이 가열하던 51년 중반가지는 표면화된 아무 일도 없었지만 51년 6월 미소간에 휴전협정 개시의 합의를 보고 9월에 들어서 휴전 성립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남한 빨치산의 군사적 효용가치는 크게 저하되고 남로당계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준비되었다. 51년 11월, 부수상이며 제2인자인 소련파의 거물 허가이(許哥怡)가 의문의 자살을 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자살이 김일성으로부터 남로당계를 두둔한다해서 심한 문책을 받은 때문이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유포되었다. 52년 12월 15일의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남로당계에 대한 공격이 거의 노골적으로 표면화됐다. 53년 7월27일 휴전이 이루어지자 그 사흘 뒤인 7월 30일 발군의 조직 공훈자 이승엽 일파는 체포되었다. 다시 사흘 뒤인 8월3일에는 초연도 가시지 않은 속에서 군사법정이 열려 이승엽을 비롯해서 그의 심복들 10여명이 사형대로 보내지게 된다. 이승엽의 꿈은 글자 그대로 무산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추후의 일이고 이승엽의 남진 명령을 받은 제 4지대 남부군은 50년 겨울 현재 일체의 정보에서 차단된 가운데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소백산맥을 가고 있었다. 이현상은 이때 만 50세의 중년이었다. 대한제국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던 1905년 그는 충남 금산군 외부리의 명문인 전주이씨 진사 이면배의 4남으로 태어났다. 고창고보를 거쳐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한 그는 그곳을 중퇴하고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게 되는데 고보시절에 이미 국권은 군국주의 일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1925년에는 박헌영의 밑에서 김상룡등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면서 공청(共靑)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지 8년 후의 일이다. 1928년 조공당이 일본 경찰의 발본색원적 탄압으로 붕괴되고 그 명맥마저 소멸되자 박헌영을 중심으로 이관술,권오직 등과 함께 ‘경성 코뮤니스트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2차대전 말기 일제 경찰의 발악적 탄압이 시작되어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전향이 속출하자 출옥 중이던 그는 한때 덕유산을 은신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그는 지상으로 나와 조공당 재건에 참여했으며 그것이 남로당으로 개편된 후엔 간부부장이라는 요직에 뛰어 올랐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비합법화되자 동료당원들의 뒤를 이어 월북 도피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정권의 요직에 참여한 동료들을 외면하고는 48년 11월 겨울이 휘몰아쳐 오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5년후 그 지리산에서 파란 많던 생애를 마친다. 북한정권은 53년 2월5일 이현상에게 ‘공화국 영웅’ 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히틀러가 롬멜 장군에게 ‘국장’의 영전을 내린 고사를 연상케 하는 서훈이었다. 남한 빨치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현상….그는 그가 남긴 수다한 전설과는 달리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가 대표한 남한 빨치산의 운명처럼 지구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이루지 못할 아집 속에 죽어갔고 그 주검조차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원래가 과묵했던 그가 더구나 그 때의 환경속에서 어떤 반권적 언동을 내색한 적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방랑객처럼 산맥을 표류하다 전남유격대의 총탄에 쓰러진 남해연단장 이청송처럼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외로운 방랑자였다는 것이며 그것을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객관적 사실들이 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맴버의 한사람이었던 이현상에게는 해방과 더불어 재건된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로당을 정통으로 믿고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있었다. 당시에도 서울은 모든 정치세력의 중심지였다. 45년 8월, 박헌영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때(당시는 합법) 3.8 이북은 정치적 공백지대였다. 평양의 현준혁, 원산의 이주하등 몇몇이 그 지방의 공산주의자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박헌영의 동지이거나 그의 영향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밖에는 소련군 진주에 편승한 출세주의자 내지 시리(詩利) 영합파들이었다. 이들 당시의 소장 공산주의자들은 거의 모두가 중농이상 지주계급의 자제들이었고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최고 학부를 나온 인텔리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기본성분(노동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원칙대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론적인 공산주의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리적인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었으며 기본 출신인 교조주의자들 눈에는 감상적인 휴머니스트이며 사회개량주의자로 비쳤을 것이다. 어쨌든 박헌영은 남북을 통한 하나의 공산주의 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아직 이들에겐 분단의 실감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제하의 공산주의 운동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였으니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을 ‘침략자’로 간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양국군 모두를 ‘해방군’으로 보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동무여 저기가 달뜨기다 철마산에서 일전하여 백운산 남쪽 황석산에 옮겨 앉은 남부군은 얼마 후 다시 남계천을 건너 거창,함양,산청 3군 접경인 덕살산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다시 지산맥을 따라 철마보록의 연봉을 거쳐 8월 10일경 합천군 황매산에 이르렀다. 한 달 가량의 이 행군에서 나는 총 한 자루의 말단 전사로 기쁘고 쓰린 갖가지 경험을 다 했다. 더위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수통 같은 사치스러운 장비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찌는 듯한 불볕 속을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악을 오르내린다는 것도 고역이 아닐 수 없지만 그 보다는 소금자루처럼 된 의복을 걸친 채 모기가 앵앵거리는 풀섶 밭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은 더욱 고역이었다. 배낭과 신발은 젖었거나 말랐거나 노상 몸에 붙이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살갗은 땀띠 정도가 아니라 숫제 썩는 냄새를 풍겼다. 그러면서도 며칠 씩 비가 내리면 산 속의 밤은 턱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나무들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자고 새면 온몸이 허옇게 부풀어 오르곤 했다. 수면부족도 견딜 수 없는 고통중의 하나였다. 졸음만큼은 의지의 힘으로도 막아내기 어려웠다. 덕갈산에서 혼자 보초를 서면서 토벌대가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린 일도 있었다. 정찰대로 보이는 5~6명의 무장경찰대가 바로 산밑에 나타나 쉬고 있었다. 대단한 적세도 아니기에 행동방향이 분명해지면 보고해야지 생각하면서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한참 만에 담배를 끄며 일어서더니 어슬렁어슬렁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깜박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직선거리 약 3백 미터쯤 돼 보였다. 잠시후 잠을 깼는데 요행히 경찰대는 딴 곳으로 가고 보이지 않았다. 식사는 극단적으로 불규칙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마을에서 밥을 지어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돼지를 잡아 그 철기에 흔한 애호박, 풋고추 등을 듬뿍 넣어 매운탕을 끓여서 먹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소대 별로 둘러앉아 “여름철 돼지는 잘해야 본전이라지?” 어쩌구 하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야말로 푸짐한 영양보충을 했다. 그 지방 산간부락에서는 돼지우리 위가 뒷간으로 되어 있어 돼지가 인분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도록 해놓고 있어 가뜩이나 돼지고기를 안 먹던 나는 처음에는 몹시 비위에 거슬렸으나 얼마 후에는 비계덩이까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돼버렸다. 남부군은 이동 도중 전투가 시작되면 짊어진 짐들을 모두 병자나 당번 대원에게 맡겨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는 것이 상례였다. 남하도중 가장 격렬하고 또 성공적인 전투였던 8월10일경의 가회지서 습격전 때 나는 마침 배탈 때문에 그 짐 맡는 소임을 담당하게 되어 항공기까지 출동한 그 격렬한 전투를 나무 그늘에 앉아 서부영화 보듯 구경했다.전투가 끝난 후 내려가보니 백 명은 됨직한 전투경찰들이 포로가 되어 늘어서 있었다. 내가 목격한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포로였는데 예에 따라 ‘서약’을 시킨 후 모두 방면한 것으로 안다. 경찰측의 대비가 상당했던 만큼 무기,식량,피복 등의 노획도 많았다. 가회전투에는 전북 720부대, 충남 인 부대와 붉은별 부대, 315부대와 산청,함양 군당 유격대등이 합세하고 남부군 3개 부대가 주력이 되어 습격부대 총세가 7백을 넘었었다. 이 7백명이 남녀 상하 구별없이 60밀리 포탄 2개씩을 나눠졌는데도 포탄더미는 줄지 않아 폭파해 버리고 가는 판국이었다. 이밖에 수류탄 5~6개씩,쌀 두세 말씩을 나눠졌고 엠원총탄도 휴대할 수 있는데까지 휴대했는데 총 수량이 30만발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전리품으로 남부군을 비롯해서 전북,경남,충청 3도 유격대의 전력이 크게 신장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작전에는 국군 제1비행단의 엄호 출격까지 있어 빨치산 연합부대는 잔여 물자를 불태워버리고 황급히 황매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입석은 산청읍이 그리 멀지않은 야지 마을이었는데 워낙 대병력으로 부푼 연합부대는 그곳에서 유유히 며칠을 묵으며 영양과 휴식을 취하고 8.15날에는 기념식을 가졌다. 8월16일. 연합부대는 마을 뒷산을 넘어 다시 서쪽으로 길을 떴다. 이날 오후 시퍼런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앞서 가던 문춘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덮힌 거산이 바로 강 건너 저편에 있었다. 달뜨기는 그 옛날 여순사건의 패잔병들이 처음으로 들어섰던 지리산의 초입이었다. 남부군은 기나 긴 여로를 마치고 종착지인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제2병단 이래 3년여의 그 멀고 험난했던 길을 이제 다시 그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1천 4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런 연봉을 응시하며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 이래의 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 주려느냐.
자유... 어머니 1952년 3월 19일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나는 일어서면서 한기를 느꼈다. 그렇지,한데서 자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었구나. 옷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안개 때문에 더 추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벽으로 둘러진 마른 대가지를 몇 개 꺾어 불을 피웠다. 잘 마른 댓가지는 쪼개서 때면 연기가 나지 않는다. 신작로 길을 무장한 전경대원 셋이 곡점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자못 태평스럽게 무슨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전경대를 발견했을 때 나는 조건반사처럼 총대를 잡아들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까닭 없이 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 총에는 8발이 장전돼 있고 주머니에는 또 8발짜리 한 케이스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제식대로 앉은 자세를 취하며 댓가지 사이로 총을 겨냥했지만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꼭 두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증오심이 북받치거나 내가 살기 위해서 부득이할 경우이다. 하나 내게는 아무런 증오심도 우러나오질 않았다. 나는 총구를 떨구고 멀어져 가는 세 인간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다봤다. 모든 것이 희극 같았다. 나는 총을 눕혀놓고 갖가지 상념들을 정리해봤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미신이 있다.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이다. 역사상 승리자는 자기를 불의라고 기록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승리자는 언제나 정의로울 뿐이다. 그러니까 힘은 정의의 기준이다. 이제 만신창이가 된 패잔 집단이 정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병사이던 나는 다께우찌 데로요라는 여류작가로부터 참으로 우연히 붓으로 쓴 엽서를 받아 본 일이 있다. 그녀의 사상에 많은 공명을 느껴 오던 작가였다. 그러나 엽서는 나에게 허전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등불 의로운 죽음을 위한 하나의 징표 의로운 죽음을 만난다면 어찌 등불의 꺼짐을 두려워하랴.
의롭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때 수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의로움을 믿고 죽어갔다. 아돌프 히틀러도 의를 부르짖었고, 노르망디의 상륙군 병사들도 그랬다. 절대의 의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 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살육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무수한 살육을 보았다. 인간이 얼마나 잔악하고 추악한 동물인가를 보아왔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몇 만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인간이 짐승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몇 년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가공할 사실을 보아왔다. 인류가 몇천 년 걸려 쌓아온 문명이라는 허울이, 사람이 수십 년 걸려 쌓아온 교양이니 양식이니 하는 허울이 마치 심해어가 바다의 압력을 벗어나는 순간 눈과 피부가 터져 버리듯 그렇게 허무하게 벗겨질 수 있다는 것을 싫도록 보아왔다. 그러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교만에서 그들은 깨어날 줄을 모른다. 추위가 가셔지자 나는 허기를 느꼈다. 고운동 트를 출발한 지 벌써 닷새가 되었는데 그동안 한끼를 먹었을 뿐이다. 나는 잘 말린, 그러나 걸레조각 같은 발싸개를 다시 둘러치고 코를 짼 고무신 위에 전선줄 감발을 했다. 덜미를 덮은 머리털 속을 이가 근질거렸다. 불을 쬔 까닭이다.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이를 한 웅큼 훑어내서 타다 남은 불 위에 뿌렸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노린내가 풍겨왔다. 내 살과 피가 타는 냄새다. 나는 동상을 입은 발가락이 유난히 쑤시는 것을 의식하면서 총을 잡고 일어섰다. 거림골 언저리는 푸른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백설을 인 지리산 연봉은 잿빛 하늘에 어슴프레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눈익은 내외공 마을이 저만큼 있었다. 아침을 짓는 연기가 뿌옇게 개울바닥을 흐르고 있었다. 인간이 사는 집과 인간의 삶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통증이 심해진 발을 질질 끌며 산기슭을 내려섰다. -인간이 사는 세계로 가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더라도 저항을 말자. 개 패듯 나를 팰지도 모른다. 다소곳이 앉아서 맞아주자. 경찰대가 달려오거든 손을 들자. 사살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운명이다. 몇 억 광년을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건 정말 보잘 것 없는 일이 아닌가.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논두렁 길로 내려서며 나는 다시 한번 지리연봉을 바라보았다. 산모퉁이 신작로가에 양철집 창고가 외따로 서 있었다. 그 창고와 외공마을을 흐르는 시냇물과의 가운데쯤 이르렀을 때, 창고 속에서 시퍼런 제복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곳이 전투경찰 205연대 3대대 본부였던 것이다. “손들엇!” “총을 버려라!” 고개를 들어보니 내 둘레에는 카키색 제복으로 메워져 있고 총끝이 부채살처럼 겨누어져 있었다. 나는 손때 묻은 엠원을 논바닥에 내동댕이 치면서 천천히 두 손을 쳐들었다. 내가 맞아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고 살아 온 것은 오직 내 손에 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은 그러니까 나의 모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저주스러운 총과 함께 나의 신앙도 끝나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수갑이 채워지고 그 위에 상반신이 전선줄로 송장처럼 묶여졌다. 다음에는 구둣발이 옆구리에 와 닿으며 나는 논바닥에 퍽 하고 쓰러졌다. “고개를 들어, 이 새끼!” 실눈을 떠보니 며칠전 거림골에서 분산된 교도대의 전사 하나가 거기 서 있었다. “잘 봐. 알겠나? 4지대 놈인가?” “네. 이 새끼 사령부 참모입니다. 아주 악질입니다.” 그 전사가 증오심에 불타는 것처럼 외쳤다. 뒤이어 머리에, 어깨에 사정없이 개머리판이 내리 때렸다. 누군가가 무선전화로 보고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시간은 05시 50분, 89.0~99.0 지점, 소속 4지대. 그밖에는 심문 후 다시 보고하겠습니다만 꽤 악질인 것 같습니다.” 아프지는 않았다. 얼룩진 눈 위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나는 머리 속으로 조용히 불러봤다. “아아 자유, 그리고 어머니…” 몽매에도 그리던 그것들은 아직도 아득한 곳에 있었다.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李愚兌)연보(年譜) 저자 이태는 1922년 11월 25일 충북 제천군 백운면 박달재 아래의 평동마을에서(당시는 중원군) 아버지 이석영(李錫永,1967년 작고)씨와 어머니 김진수(金振秀,1976년 작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살때 아버지가 ‘상록수의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꿈을 안고 과수원이 있던 원서 마을로 이사했다. 원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우태는 청주중학교에 진학한다. 중학교때 그는 처음으로 금강산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바로 그가 남한 사람들의 마지막 금강산 세대였다. 일제 말엽 장난이 심해 꾸지람을 많이 들었던 소년은 청주고등학교에 들어가 교내 백일장에 작품을 투고하면서 문학의 길을 꿈꾼다. 청주고(12회)를 졸업하고 그는 일제의 의용군으로 끌려가 일본에서 수치스러운 1년을 보내고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직후엔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속에서 갈등을 겪었다. 국학대학(우석대학의 전신,후에 고려대로 흡수) 국문과에 입학, 3년제 과정을 2년만에 졸업하고 이어 1년재였던 ‘조선신문학원’을 졸업했다. 1948년 그는 이화여고 강당에서 4백명의 응시자 중 3명을 뽑는 서울신문 기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사장이던 서울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8개월간 일하다가 편집부국장 전홍진을 따라 함께 ‘합동통신’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선 줄곧 사회부 기자로 일하다가 6.25를 맞는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이튿날인 6월29일, 평양의 조선통신사가 파견원을 보내와 당시 서울에 있던 3개 통신사(합동,고려,공립) 전직원을 합동통신사에 모아 놓았다. 이틀 후 그는 조선통신사 기자로 흡수되어 여자 위용군 위생대를 종군하게 된다. 심한 공습속에서 3일만에 대전에 내려간 이우태 기자는 본사 명령을 받고 전주로 내려가 통신업무를 맡게 된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계기가 됐다. 당시 인민군은 통신사를 무엇보다도 먼저 점령지에 설치했다. 그때가 1950년 초가을 이었다. 9월20일 군산 앞 바다 오식도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전주지사 기자들은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무명골짜기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됐다. 이때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그해 추석이 수기 남부군의 시작이다.
그후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당시 남한 빨치산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죽음의 낮과 밤사이를 오가는 17개월을 보내게 되며 1952년 3월 19일 05시 50분 분대에서 낙오된 후 닷새를 굶은 끝에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되어 인간이 사는 세계로 내려오게 된다.
체포 직후 토벌대의 연대본부를 따라 단성면 지서 유치장서 잠시 수감되고 이곳에서 당시 토벌대 경찰사령관 이었던 중학교 동기 이성우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남원수용소로 이송 수감된 후 6개월여를 지낸 뒤 중학교 동창이었던 이성우 사령관 덕분에 남원 경찰서에서 도민증을 받는다.
수소문 끝에 서울 용두동에 살고 있는 부모와 만날 수 있었으나 서울에 올라온지 한달 만에 이번에는 국군에서 징집영장이 나와 입대했으나 한달 만에 몸이 쇠약하여 군의관에 의해 귀향조치된다.
1953년 초 약혼을 하고 그해 5월 10일 조인제(趙仁濟)와 결혼했다. 결혼 후 얼마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이 터질때마다 끌려가 조사받고 고문을 당하는 등 자기 그림자조차 두려워하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해 1955년과 57년 사이에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응모 ‘김목수의 하루’ 라는 단편이 최종 결선에 올라 용기를 얻었으나 이듬해 투고한 작품은 선후평도 나오지 않아서 창작의 꿈을 포기한다.
1957년 3대 국회의원이었던 정해영씨의 세계일주 여행기를 조선일보에 대필 해 주면서 정해영씨와 인연을 맺고 그의 스피치 라이터가 된다. 그후 1960년 7월 야당인 신민당이 창당되면서 당수였던 윤보선씨와 만나게 된다. 창당 작업과 함께 윤보선씨의 글을 써 주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씨의 선거활동을 도맡다시피 한 인연으로 63년 12월 전국구 후보 29명중 서열 16번으로 공천을 받았으나 14번까지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뒤 윤보선,정해영씨가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하다가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6대 국회의원이 되게 된다.
1975년 5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8개월을 한남동 소재 순천향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는 내가 입을 다물면 그들(지리산 빨치산)은 영영 잊혀진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남부군을 쓰기 시작, 1800매 분량의 원고를 1년여만에 탈고한다. 그러나 자료조사,사실확인 등의 이유와 엄혹한 출판규제를 통과해낼 자신이 없어 발표하지 못하다가 1988년 7월 마침내 [남부군]이 간행되어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유고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의 저자의 말을 쓰지도 못하고 1997년 3월 6일 오후 7시 10분 급환으로 별세했다. 유족으론 미망인 조인제 여사와 2남 1녀가 있으며 저서로는 1959년 [한글공문편람]을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남부군] [이 현상] [여순병란] [천왕봉] 수필집 [기다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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