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터뷰:
하늘로 돌아간 영원한 청조(靑鳥), 박경원
우리 조선사람으로서 비행기를 처음 본지도 이제 겨우 이십년 남짓이 지났나 봅니다. 그 커다란 쇳덩어리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모습에 얼마나 많이 놀라야 했습니까. 한편으로 앞서 달려나가기만 하는 서구 과학문물의 발전에 부러움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던 그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 조선사람에게도 자랑거리가 생겼습니다. 대담한 용기와 뛰어난 능력으로 비행사 자격증을 얻어 하늘을 나는 조선인 조인(鳥人)이 그들입니다. 1922년 안창남씨가 조선인 최초로 조선 하늘을 멋들어지게 날았을 때의 그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또다시 최초의 감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2등비행사 박경원씨가 여자로서는 최초로 고국방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사일은 바로 내일!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0분! 조선 항공역사에 찬란한 한 페-지가 덧붙여지는 날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앞둔 박경원씨는 어떤 모습일까. 그 긴장과 흥분을 함께 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우리는 오늘 박경원씨를 살짝 방문했습니다. 우리가 동경 자취집을 찾았을 때 반가이 문을 열어준 박경원씨는 의외로 여유로운 모습이었지만, 흥분만은 감추지 못한 듯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기자: 축하합니다. 드디어 고국방문을 실현하시는군요.
경원: 드디어! 그 말만큼 새삼스러운 말이 없군요. 10년 전 조선 땅에서 안창남씨의 비행을 보고 비행사의 꿈을 처음 키운 이후 고국비행은 언제나 저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기자: 고국비행이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라도 있을까요?
경원: 하하하. 새끼 박경원이를 많이 만들고 싶어서랄까요? 내가 안창남 새끼인 듯 말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가장 빠르거든요.
기자: 하하하 자신만만한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꿈을 이룬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랄까요?
경원: 서양의 어떤 영웅은 「임퍼시블」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빼버리라고 말했다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열심히 살다보니 “하려고 들면 안되는 것이 드물다!”는 말까지는 자신 있게 할 수 있겠습디다.
기자: 드물다고요? 뼈가 있는 말인 듯한데, 박경원씨도 안되는 것이 있습니까?
경원: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동양에서는 여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2등비행사밖에는 할 수 없다라든가 하는. 그 이상은 자격증을 주지 않으니까요. 마음은 1등비행사, 아니 특등비행사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이상 도전할 수 없다니, 딱한 노릇이지요.
기자: 2등비행사도 훌륭하기만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고생이 많았지요? 특별히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경원: 내일 고국 하늘을 날 것을 생각하니 여태까지 한 고생이 달기만 합니다. 비행기술을 배우는 내내 학자금이 없는 것이 제일 고통이었지요.
기자: 본댁이 넉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화한 대구 부잣집이라면서요?
경원: 하하 내가 일본까지 와서 신기술을 배우고 있으니 다들 그렇게 추측하더군요. 뭐 어렵다고는 할 수 없지요. 여학교 고등과까지 나오고 또 일본유학도 다녀올 수 있도록 협조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참 청혼이 몰려들 때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 비행사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집안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요. 그 뒤로는 혼자 했습니다. 간호기술 배운 것을 양식 삼아 순회간호부도 하고 자동차 학교 나오고는 자동차 운전수도 하면서 고학을 했습니다.
기자: 자동차 운전수도 했다고요?
경원: 하하 이 양반, 그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오셔야지. 비행학교를 가려면 자동차 면허증이 있어야 해요. 다 같은 운전 아닙니까. 땅위에서 하느냐 하늘에서 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길을 잘 찾아가야하거든요. 요리조리.
기자: 그렇군요.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하하.
경원: 하지만 비행기 공부라는 게 돈이 무척 들어서요. 늘 돈이 고민이었습니다. 특히 1925년도에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비행사 자격증을 딸 때가 제일 기억에 생생하지요. 비행기 1시간을 타보자면 15원의 손료(損料)를 내야 하는데 날마다 벌어서 먹기도 바쁜 와중에 꿈도 꿀 수 없었지요. 면허증을 얻기까지 타 보려면 적어도 2천원은 들어야겠는데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어요?
기자: 그 때라면 저도 기억합니다. 사연이 알려지자 온 조선사람들이 안타까워했잖아요.
경원: 나는 개인으로서는 박경원이지만 비행사로서는 우리 조선사람 전체입니다. 당시 학비 조달차 조선에 갔을 때 어찌나 많은 격려가 있었던지요!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려 혼났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행히 독지가 한 분이 나서서 학비도 마련되었습니다. 내가 내일 건강하게 조선 하늘에 나타나는 것이 그 분들께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어요.
기자: 사연이 절절합니다, 그려. 더욱이 여자의 몸으로 이루어낸 쾌거이니 한층 뿌듯하지요?
경원: 여자가 비행기 공부를 한다고 그리 장할 것이야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주위에 여자 동무가 별로 없으니 아쉬울 뿐이지요. 일본에서는 아직 비행기에 뜻을 두는 여자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여자로는 나 한사람임으로 때로는 남다른 곤란을 겪었습니다.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들의 호의로 그 학교 조교수로 잠깐 있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난 좋아하는 일본학생들이 하도 놀리고 못살게 굴어서 할 수 없이 남복을 하고 다닌 일까지 있었지요. 그나마 역시 그들의 성화로 그만두었습니다.
기자: 경성 출신 이정희 씨도 가마다 비행학교를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경원: 정희는 둘도 없는 내 동무랍니다. 나보다 1년 늦게 내 길을 따라왔지요. 이 자취방도 함께 쓰면서 서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오. 그이가 사정으로 비행기를 포기하고 말았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아까울 뿐이지요.
기자: 여자비행사로서의 유명세는 박경원씨가 독보적인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지요.
경원: 하하 하늘을 찌르면 안되죠, 귀한 하늘인데. 비행경기에서 몇 번 입상하니까 공연히 일본신문에서 너무 떠들었어요. 동경서는 조선여자로 박가라 하면 모두 비행기 공부하는 사람인 줄 안다니까요, 하하하. 일본사람들은 비행기를 동경하면서도 무서워합니다. 날아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떨어져 죽는 두려운 물건으로 생각하는 남자도 많아요. 여자로서 어쩌구, 여자가 저쩌구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칭찬인 줄 알면서도 뭔가 불편하더이다. 기어히 비행가로서 성공하여 남자에게 지지 않는 활동을 하겠다고 결심했지요.
기자: 몇 번 입상이라니 무척 겸손하십니다. 항상 선두를 앞다퉈 오지 않았습니까. 비행학교를 마칠 때에는 수석 졸업생의 영광을 차지하셨다지요? 박경원씨의 수석이 발표되자 남학생들이 졸업장을 북북 찢는 소리가 요란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경원: 소문이란 부풀기 마련이지요, 하하. 내가 워낙 콧대 세게 나오니 나를 함부로 무시하는 동기는 없었습니다. 가끔 ‘조센징’ 운운하면서 은근히 깔보는 녀석들은 있었지요. 그러면 경성에 수학여행왔을 때 그 녀석들에게 고춧가루 든 냉면을 실컷 먹여 울게 만듭니다. ‘조센징’ 맛 좀 보라구요.
기자: 씩씩한 외모와는 달리 여성스러운 면도 많다지요? 요리가 취미람서요?
경원: 하하 이 양반 정말 뭘 모르시네. 여자들이 요리를 취미로 하던가요?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아무튼 내가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혼자 있을 때 요리법을 궁리하면 즐겁답니다. 맵고 짠 우리 고향 음식을 동무들이 먹기 좋게 만들어 주면 어찌나들 좋아하던지. 정희에게 증명하라면 알려주겠지요.
기자: 벌써 서른 셋 아니십니까. 장안의 멋쟁이로 자자한테 구혼하는 이들도 여지껏 많겠지요?
경원: 내가 결혼할 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궁금하신 거군요. 그것을 자꾸만 물어보면 나는 자꾸만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나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까. 세상사람들은 여자 나이 서른 셋이면 남자 환갑 지낸 것과 다름없이 보겠지오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이를 먹기까지 그 동안의 긴 세월을 눈꼽만치도 헛되임없이 정성껏 우리의 일에 바쳤으므로 조금의 뉘우침 비슷한 마음도 없답니다. 앞으로도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마음과 기운을 다하야 창공과 싸울 생각뿐이지요. 여자 나이 서른셋, 사람들은 이것을 별다른 의미에서 안타까워하겠지마는 우리는 안타까움보다 굳세임 뿐입니다. 종래와 같은 관념으로 우리의 나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기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내일 처음 고국비행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조선방문을 시작으로 만주를, 아시아를, 그리고 전 세계를 방문해야지요.
경원: 그렇고말고요, 물론 그래야지요. 나는 이제 기저귀를 겨우 벗어난 셈이로군요. 얼른 무럭무럭 자라야겠습니다. 하하.
기자: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듭니까. 혹시 두려운 마음은 없습니까.
경원: 아, 그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경계도 없고 신분고하도 없는 창공을 날고 있노라면 내가 하느님 사촌쯤은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안창남씨도 결국 비행기 사고로 숨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또한 비행기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받은 생명을 하늘에 돌려준다는 사실, 무척 멋지지 않습니까? 하하하. 2등비행사 면허증도 얻었겠다… 내일 꿈에 그리던 고국방문까지 마치고 나면 난 더는 여한이 없을 듯 합니다. 그 다음은 덤으로 받은 인생이라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살아갈 뿐이지요.
기자: 꿈을 이루어가는 박경원씨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박경원씨의 도전에서 용기를 얻고 꿈을 키워가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 주세요. 내일 순조로운 비행을 하시길 바랍니다. 내일 여의도에서 다시 만납시다.
경원: 고맙습니다, 내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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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알림】급하게 덧붙입니다. 이 인터뷰는 오늘 박경원씨의 비행 성공 소식과 함께 실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전 10시 30분에 하네다(羽田) 비행장을 출발한 박경원씨는 한시간도 못되어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방으로 수색한 결과 6시간이 지나서야 일본 시즈오카켄(靜岡縣) 산 중턱에 추락되어 있는 박씨의 애기(愛機) 청연(靑燕)과 박씨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1933년 8월 7일 오전 11시 25분 3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원인은 짙은 안개가 끼어 항공로를 분간하지 못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박경원씨는 경성을 방문하고 기념행사를 한 뒤 곧바로 만주국으로 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박씨를 환영하기 위해 여의도에 몰려들었던 인파는 충격을 받은 채로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까운 조인(鳥人) 한 명이 또다시 사라진 것을 애석해하며 그녀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싣습니다. 이 인터뷰가 박경원씨의 꿈과 노력을 누군가의 가슴에 씨앗으로 뿌리는 결과를 낳기를 바랍니다. 박경원, 그녀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을 청조(靑鳥), 희망의 파랑새입니다.
박정애(
byoli99@freechal.com)
박경원의 일대기를 다룬 청연(靑燕)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소탈하고 씩씩한 이미지의 장진영이 박경원 역을 맡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박경원이 제대로 몸을 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삼각관계, 여성들간의 시기질투 따위가 영화의 주요한 내용이라고 하니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우리는 어째서 박경원의 삶에 감동받는 것일까.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떠들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