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중순부터
무등산 원효사지구 원주민 철거지역을 중심으로 까마귀가 울고 다닌다.
그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까마귀가 돌아온 것이다.
( 물론 확률은 거의 없지만. 내가 산에 가지 않을 때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
까악, 까악 울어대는 소리는 무등산에서 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들어 본지가 무척 오래된 것 같다.
그렇기에 까마귀가 돌아온 것이 무척 반갑다.
까마귀의 사진을 찍어서 글과 함께 올리려 하였으나
모델로 삼자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지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아 찍기가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찍기는 하였으나 사진 솜씨의 부족으로 올릴만한 사진은 못되어
그냥 까마귀가 무등산에 나타난 이야기와
까마귀에 얽이 이야기만 적어 보겠습니다.
까마귀는 검은 색과 더불어 웬지 음침하고 불길한 새로 여긴다.
옛 시조에도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 라는 시조가 있듯이
까마귀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새였다.
그리고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죽음과 연상시켜
아침에 울면 어린아이가 죽고, 오후에 울면 노인이 죽고,
처마에서 울면 하인이 죽고, 지붕 위 용마루에서 울면 높은 사람이 죽을 징조,
밤중에 울면 역적이나 살인이 날 징조.....
우는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이 죽거나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이것은 아마 제주도에서 전하는 설화 <차사본풀이>에서 유래된 듯하다.
"옛날에 저승사자 강림은 까마귀에게 인간의 수명이 적힌 적패지를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호랑이에게 전달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지상으로 가던 까마귀는 죽어있는 말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정신없이 말고기를 뜯어 먹는 사이에 강한 바람이 불어 적패지는 날아가 버린다.
적패지를 잃어버린 까마귀는
하늘에 사는 신은 인간 세상의 일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마을에 내려와 생각나는 데로 사람들의 수명을 떠들어 댔다.
이때부터 죽는 순서가 엉망이 되어
졸지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까마귀의 건망증을 원망하기도 했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을 빗대어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 그러나 실제로 까마귀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다.
단단한 열매를 도로에 떨어뜨려 지나는 차량이 깨도록 한다거나,
옛적 중햑교 영어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병에 들어 있는 물도 돌을 집어 넣어 마실 수 있다. )
그러나 까마귀가 처음부터 재수없는 새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알타이문화권에서는 새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하는 전령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도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인간세상을 다스리던 호랑이에게 전달하는 신령스러운 새였다.
( 호랑이는 하늘의 뜻을 직접 전달받지 못하고
반드시 까마귀나 까치를 통하여 전달받았다.
우리나라 민화에서는 호랑이 그림 위에는 대체로 까치가 그려져 있다. )
제사를 지낸 후 잿밥과 나물 등을 대문 앞이나 울타리 곁에 놓아두는 관습은
까마귀가 이것을 물어다 저승의 조상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삼국유사> 기이편에 보면
까마귀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는 소지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로부터 신라에 생긴 풍습으로는 매년 정월 첫 해(돼지)일, 자(쥐)일, 오(까마귀)일에는
삼가 근신하며,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또 15일은 까마귀가 꺼린 날로 삼고,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의 세시풍습을 월별로 기록해놓은
<동국세시기>에도 전한다.
정월 보름날 풍습을 보면
'약밥'의 풍습을 이야기하면서
"동경잡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0년 15일에 왕이 천연정에 갔더니 그때
까마귀가 날아와서 화변이 있을 것을 왕에게 경고한바 있었기 때문에
신라 풍속은 정월 보름날을 까마귀의 제사날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은혜를 보답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또 같은책 <동국세시기>
'이 달의 기타 행사' 중 '조심하는 날'에
위와 같은 이유로
백성들이 해일, 자일, 오일을 조심하는 날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까마귀가 명예를 회복하는 듯하다.
옛 시조에
"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하는 시조에서도 까마귀는 명예 회복을 하는 듯하다.
또한 ,
다른 시조에서는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타 하였던고
반포보은이 그 아니 아름답던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까마귀도 늙으면 먹이를 구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까마귀는 그러한 늙은 어미를 위해 먹이를 물어다 준다.
그래서 유교를 숭상하여 효를 중시하던 시대에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까마귀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효조(孝鳥) 평가하였다.
따라서
반포지교 또는 반포지효라는 말이 생겨났다.
반포지교를 이야기하는 시조는 위의 예 이외에도 다수 있다.
까마귀는 또한 선행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까치와 함께 다리를 놓아주는 착한 새이다.
그러한 까치도 최근에 큰 곤혹을 치렀으니
몸에 좋다고 하면 돈도 명예도 체면도 다버리는
몬씨 일가들이
'검은 것이 몸에 좋다.'는 철저한 신념하에
입 안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까마귀를 멸종시킬 뻔 하였다.
한 마리에 무려 30만원까지 거래되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까마귀를 만든 것은
몬씨 일가들의 몸이 좋아지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라고 만든 것이다.
다행히 몬씨 일가의 만행을 이겨내고
살아남아서
다시 볼 수 있다니 천만다행입니다.
무등산에서 까마귀를 본 것이 너무 기쁘다보니
두서없이, 장황하게
늘어 놓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좋은 구경 하셨습니다요~ 작은 무등산 호랑이라고 그 누가 그러시던데...역시 무등산에 대한 소식도 최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