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신교 신자로서 어린 시절 사고를 치던 문제아였다. 그러나 14살 중학교 3학년 시절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길 잃은 탕자인 저를 주님이 찾아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계기 때문에, 마약을 하던) 세상 친구들은 “넌 더 이상 어울리려고 하지 않잖아 ”라면서 모두 내 곁을 떠났다. 그래서 전 새 친구를 사귀었고, 성경도 그중 하나였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가 고등학년 1학년이었다. 저는 성경을 2년 반에서 3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경을 통독했고, 그 뒤 또 한 번 통독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완독했을 때, 저는 주님뿐만이 아니라, 그분 말씀과도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에 진학해서 신학과 철학 경제학을 배웠다. 경제학 공부는 실용적 학문을 공부하기를 바라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기에, 그리스어 신약 속성과정에 등록하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학기 과제로 요한묵시록 22장 전부를 번역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묵시록은 신약성경 중 가장 난해한 그리스어로 되어있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하였고 보스턴으로 이사하였다. 보스턴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 3년간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과정을 마쳤다. 신학대학원 장로교회 목사의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저는 14살 중학교 3년 시절에 주님을 만난 이후 성경에 관한 관심을 커졌으나 가톨릭은 안 좋게 보았다.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칼빈주의자로 모두 반가톨릭적 가르침을 주었다. 그 이유는 가톨릭의 성모님에 대한 공경을 우상숭배로 여겼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부활보다 희생 제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인간일 뿐인 교황이 지닌 행사하는 지나친 권위적 면모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신학교 때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톨릭 친구들에게 전교했고, 가톨릭의 모든 미신적 교리를 꿰뚫게 하여 그들을 마침내 나처럼 만드는 것이 사랑과 우정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는 신학적 마지막 연도에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서를 발견하였고, 구약과 신약과의 사이에 연관성을 보기 시작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나고 이루어진다”라고 하였다. 이미 알고 있는 말이었지만 저는 그것이 얼마나 깊고 풍부하고 철저한 진리인지 깨달았다. 그래서 그 후 몇 년간, 교부들의 글을 읽고 성경을 다시 읽으면서, 초기 교회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통찰하였고 인정했다. 이러한 깨달음 결과 저는) 그래서 2년이 채 안 되었고, 신자들을 두 배로 성장시킨 개신교회의 목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었지만 대단히 흥미롭고 큰 체험이었다. 한편으로는 제가 목회하던 교회를 기만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는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초기 교회를 알려고 시도하면서, 어쩌면 제가, 5~10년 후에 동방정교회에나 가톨릭교회 신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일은 결국 2년 6개월 만에 일어났다.
저는 아르케 가톨릭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박사과정에서 2세기 ‘고대 성찬 예식’에 관한 세미나 수업을 듣게 되었고,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대 성찬 예식’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대학 내 지하 성당 미사 참석하였다. 저의 저서 ‘어린양의 만찬’에서처럼 저술한 것처럼 저는 개신교 관찰자이자, 일종의 신학원론자인 것처럼 성경과 공책을 들고 관찰한 내용을 정리하며 뒷자리에 앉았다. 미사가 시작되고 5~10분 정도 지났을 때, 저는 고대 성찬예식과 현대의 미사가 어떻게 그렇게 일치할 수 하는지 깜짝 놀랐다. 미사의 한 요소만이 아니라 모든 전례들이 순교자 유스티노가 2세기에 묘사한 그 예배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그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톨릭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기도문을 듣고는, 가톨릭에 대한 모든 의혹이, 제 머리와 마음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제가 성작에 담긴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축성할 때는 넋이 나간 사람이 되었고, 주님의 보배로운 성혈에 대한 성스러운 갈증도 불타오르고 있는 저 자신도 발견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왜 그리 전율했는지 몰랐었다. 신자들은 세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응답했다.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들어 높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고 말하는 순간 저는 깨달았다.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려고 제대로 나아갈 때 제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떨어졌다.
저는 요한묵시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그리스어 속성과정에서 요한묵시록을 번역할 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거의 포기했었다. 왜냐하면 ‘적 그리스도와’와 ‘재림’이란 문구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모든 상징들이 무시무시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날 요한묵시록을 펼쳤을 때,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번역하면서 알고 있었던 것은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을 호칭할 때,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 알파요 오메가” 불렸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전체에서 예수님은 그 어떤 호칭보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28번이나 불리고 있다. 저는 그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았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아멘·축복·알렐루야’ 같은 요한묵시록의 표현들을 미사에서 보았다. 저는 방금 미사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기도·노래·그 희생제물이, 요한묵시록의 저자 요한이 천사들, 성인들, 그리고 순교자들의 천상 전례로 묘사한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미사가 끝나고 모두들 떠났지만 저는, 한 시간이 넘도록 여전히 뒷자리에 앉아 너무나 놀라 흥분된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다음 2주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석하며, 성경 특히 요한묵시록을 더 깊이 탐독했다. 그리도 나서 비로소 14살 중학교 3학년 시절, 저를 구해주신 그 주님이, 초기 교회 교부들을 통해 저의 박사과정에서 드러내셨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피, 영과 신성함이 현존하는 성경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랬다면 멀리서 보지 못했을 성체와 신학에서 전문적인 성경뿐 아니라 신학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었다. 그래서 저는 속도를 내서 곧바로 나아가기로 했다. 4~5년을 기다리는 대신에 4-5개월 만에 천주교에 입교하고야 말았다.
지금부터 삼십육 년 전 1980년 후반 부활 성야에 저는, 본향인 가톨릭교회에 들어오는 멋진 전례에 참여했고, 보다 새롭게 성경을 체험하고 있다. 그때부터 가족을 돌보느라 바빴다. 아내와 결혼한 지 사십삼 년 년째이고 사이에 6남매인 아들 다섯과 딸 하나 두었다. 돌이켜보면 삼십육 년 전 저는 가톨릭 신학과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알았다. 삼십육 년이 지난 지금은, 가톨릭 신학이 얼마나 심오하게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가톨릭 신앙은 성경적이기에 참되고 힘이 있다. 진정 신앙은 제게 예수 그리스도에 충실하며,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라고 말씀하셨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개인의 소유물도 아니고 교황님의 소유물로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해있고 우리도 그분께 속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로부터 이어오고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충만한 믿음이 무엇인지 재발견하는 여정에 있다.
오늘 평화방송 유투브 스콧한의 강의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럴수가...이렇게 깊고 넓게 성경과 가톨릭의 미사전례를 이해하다니.
미처 놓치고 있던 부분, 부끄럽고 감사하게 배우면서 공유하고 싶어 녹취하고 입력해보았습니다.
평화방송 강의를 직접 들어보시길 강추드립니다.
"성경과 가톨릭"이란 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여본 것입니다.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4S4ukd7eNZQ&t=675s